몇 번을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소만리는 주저하지 않고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그러나 호정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소만리는 조심스럽게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호정.”그녀가 불렀지만 여전히 호정은 아무런 반응 없이 잠들어 있었다.소만리는 더 이상 깨울 생각을 하지 않고 막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호정이 그녀의 손을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언니, 가지 마.”소만리가 몸을 돌리는 순간 호정이 그녀를 불렀다.“언니.”호정은 천천히 눈을 뜨며 소만리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언니, 나 계속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소만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기다렸다고?”“어.”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언니, 나 꿈꿨어. 언니 남편 때문에 언니가 날 쫓아내는 꿈. 언니, 혹시 언니 남편 때문에 날 쫓아내는 건 아니지?”소만리는 흥미로운 듯 그녀를 향해 웃었다.“뭐, 앞일은 나도 장담할 수 없지...”“언니?”소만리의 말에 호정의 표정이 갑자시 확 변했다.호정의 얼굴빛은 갑자기 어두워졌고 진심으로 화가 난 그녀의 얼굴은 소만리로 하여금 호정이 정말로 자신을 친언니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감쪽같았다.“자, 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배 많이 고프지? 지금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밥이나 먹자.”소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안하게 말했다.“하인에게 갈아입을 옷 두 벌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우선 갈아입고 나와. 나 밖에서 기다릴게.”“그럴 필요 없어.”호정이 거절했다.“나 그냥 이렇게 입을래. 그 옷도 아마 그 남자 돈으로 샀을 거 아니야. 난 그 남자 싫어. 언니 남편이라는 그 남자.”호정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무심하게 이불을 들추어낸 채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고 나왔다.호정의 성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뚝불뚝 고약한 성질이 치고 나왔다.
위청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정은 버럭 화를 내며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지금 뭐라구요? 나더러 여기서 하인으로 일하란 말이에요?”“그렇지 않으면? 뭐?”위청재는 일부러 거만한 말투로 되물었다.“널 여기 손님방에 묵게 한 건 그나마 소만리의 체면을 봐서 허락해 준 거였어. 아니 그런데 넌 정말 여기서 공짜로 먹고 살 생각이었어? 너 손발 있잖아?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호정은 뭐라고 반박할지 몰라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그러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소만리에게 보냈다.“언니...”“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여기 머물고 싶으면 순순히 지시에 따라.”기모진의 단호하고 차가운 말이 호정의 말을 끊었다.그의 눈에서는 감히 맞설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우리 집에서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인간은 살 수 없어. 나도 내 아내도 매일 열심히 일하는데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어. 세상에 그런 특권을 가진 사람은 없어.”“...”기모진이 조곤조곤 따지듯 훈계를 하자 호정의 눈빛이 굳어졌고 그녀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지금은 호정은 그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어서 잠자코 일어나 밥 한 그릇을 떠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입에 밥을 떠 넣었다.호정이 지금 얼마나 불만스러운지, 끓어오르는 화를 어쩔 수 없이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을 식탁에 앉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얼마 후 기모진과 소만리는 식사를 마치고 다정한 모습으로 다이닝을 나갔다.위청재는 몇 숟갈 뜨지도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고 다이닝을 떠나기 전에 호정을 힐끔 보며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다 먹고 나서 식탁 깨끗이 치우고 부엌도 정리해야 하는 거 잊지 마, 알아들었어?”호정은 젓가락을 꽉 쥐고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반찬을 마구 집어먹었다.“너한테 지금 말하고 있잖아. 안 들려? 소만리가 널 여기 머물게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널 이곳에서 쫓아냈을 거야.”위청재는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호정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향기를 뿜으며 감미롭게 대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잠시 후 기모진은 아침 식사를 가지고 나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유롭고 편안한 아침 식사를 즐겼다.“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 편안하군.”기모진은 커피를 홀짝이며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호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힘들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얼른 물러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사실 나도 그 여자를 자꾸 상대하려니 너무 힘들어.”소만리는 웃으며 막내아들을 무릎에 안고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기란군은 이 모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꼈다.“엄마, 나도 안아줘. 엄마 나 안아준 지 너무 오래됐어.”기란군은 큰 눈을 깜빡이며 억울한 듯 어리광을 부렸다.소만리는 기란군이 막내아들처럼 어렸을 때는 잘 돌보지도 무한한 애정을 쏟지도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 막내아들처럼 그때 기란군을 안아줄 수 있었더라면 그녀의 마음도 정말 기뻤을 것이다.“기란군, 조금만 더 기다려. 동생이 배불리 먹으면 기란군 안아줄게. 기란군이 싫다고 할 때까지 안아줄게, 알았지?”“응! 엄마 나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기란군은 천진난만하게 미소 지었다. 두 눈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넘쳤다.그런데 기모진은 기란군의 말을 듣고 마음이 좀 찜찜했다.“콜록콜록.”그는 일부러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손을 뻗어 기란군을 무릎에 안아 올렸다.“엄마는 지금 기란군을 안아줄 시간이 없어. 아빠가 널 안아줄게.”“아빠한테는 엄마한테서 나는 향기가 안 나.”아빠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기란군은 동생처럼 엄마의 품에 착 달라붙고 싶었을 뿐이다.“우리 기란군은 왜 이렇게 말을 잘 해? 보아하니 앞으로 많은 여자아이들이 기란군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릴 것 같은데.”“난 다른 여자는 싫어. 여자라면 엄마랑 여동생만 좋아.”기란군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결연하게 말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위로해 보았지만 예선은 여전히 괴로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예선은 소만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눈가는 어느새 찬바람에 뻑뻑해졌다.“소만리, 두 사람이 끝까지 함께 하는 데에는 서로의 감정이 변함없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라.”“그럴 리가?”소만리는 예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감정이 없는 결혼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야. 너는 소군연 선배한테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선배도 너한테 변함없이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잖아. 소군연 선배가 얼마나 너한테 다정하게 대하는데. 난 소군연 선배가 널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믿어.”예선은 이 말을 듣고 안타까운 듯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나도 소군연 선배가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걸 믿어. 단지 그의 아내가 난 아니란 거지.”“...”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표정이 일순간 변했다.소만리는 고개를 홱 돌려 예선을 바라보았다.“도대체, 너랑 소군연 선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 사람, 내문이라는 여자와 결혼하기로 했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래.”“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소만리는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예선은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소만리, 난 네가 정말 부러워. 비록 기모진이 한때 나쁜 여자한테 눈이 멀어 널 무시하고 상처를 줬지만 결국 함께하게 되었잖아.”예선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나도 차라리 소군연 선배한테 심하게 상처받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하면 결국 마지막에 선배와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될수만 있다면 난 얼마든지 참아내겠어.”“예선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소만리는 손수건을 꺼내 예선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내었다.“예선아, 내가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너랑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어. 도대체 너랑 소군연 선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갑자
”소군연 선배가 날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정말이지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예선도 소군연 선배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선이 말을 마치자 하필 그때 소군연에게서 전화가 왔다.하지만 예선은 그의 전화인 줄 알면서도 받지 않았다.“예선아, 어서 받아.”“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예선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아픔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예선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소만리는 예선 대신 얼른 전화를 받았다.“예선!”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소군연의 목소리가 들렸다.보아하니 예선은 아마도 오랫동안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 같았다.소만리는 바로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소군연 선배, 저예요.”그러자 소군연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소만리?”“네, 저예요. 지금 예선이랑 같이 있었어요. 예선이는 지금 화장실에 갔구요.”소만리는 핑계를 대며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예선을 힐끔 바라보았다.예선도 사실은 그의 전화를 받고 싶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소군연 선배, 방금 예선이 보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게 엉망이에요. 기분이 많이 좋지 않은가 봐요.”소만리는 소군연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다.“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셨어. 의사는 할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남은 시간이 많이 없을 수도 있다고 했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인 내가 가정을 꾸리는 걸 보고 싶다고 하셨지.”“그럼 좋은 날을 택해 예선이랑 빨리 약혼하면 할아버지께도 위안이 될 거예요.”소만리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그러나 소군연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할아버지는 항상 나와 영내문이 결혼하길 원하셨어. 영내문의 부모님은 예전에 우리 집안과 이웃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난 자주 그녀를 봤지만 고등학교 들어간 후부터는 많이 못 봤어.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그녀를 아주 예뻐하셨지.”“가족이 영내문과 결혼하길 원한다는 뜻인가요? 그럼
소만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소군연 선배가 말했잖아. 방법이 있다고. 미래의 남편을 믿어 봐. 자, 가자.”“...”미래의 남편이란 말에 예선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사실 소군연이 자신의 평생 반려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소만리는 예선과 함께 국제 쇼핑몰을 둘러보았고 거의 10분 정도 후에 소만리는 소군연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소만리는 즉시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고 예선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쇼핑몰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군연은 우연을 가장한 약속된 만남을 충실히 이행하며 소만리와 예선의 눈앞에 나타났다.하지만 그의 연기는 누가 봐도 발연기 대상감이었다.소군연의 눈에는 예선만 보이는지 그녀를 보자마자 얼른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꽉 쥐었다.“예선, 왜 그렇게 내 전화를 안 받아? 정말 다시는 날 보지 않고 살 생각이었어?”소군연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얼굴이 많이 힘들어 보였다.“예선, 날 믿어. 난 절대 당신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감정 또한 포기하지 않을 거야.”사실 소군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예선의 마음은 떨림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줄곧 이 남자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나 애써 눈물을 훔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선을 흘기더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믿어? 뭘 어떻게 믿으란 말이에요? 이미 할아버지한테 영내문이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아요? 이미 날짜까지 정해졌는데 어떻게 선배 말을 믿으란 거예요?”“나와 영내문은 절대 예선이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예선, 날 믿어 줘.”소군연은 예선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그의 부드러운 눈동자는 시종일관 예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예선도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애써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소만리는 예선이 지금 마음속
”예선, 우리 가족의 태도가 널 불편하게 한다는 거 알고 있어. 네가 날 위해 계속 참고 있다는 것도 알아. 나도 이 관계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내가 반드시 잘 처리할게. 나 절대 당신 배반하지 않아.”소군연이 결연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예선은 소군연에게 퍼붓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소군연의 태도에서 진정성을 느끼자 목구멍에 가시가 돋친 것처럼 차마 내뱉지 못했다.“예선아, 너도 사실은 소군연 선배와 헤어지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랬으면 방금 날 끌어안고 그렇게 울지도 않았을 것이고.”“...나, 나 운 거 아니야.”예선은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소군연은 이 말을 듣고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느껴졌다.“미안해, 예선. 정말 널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선배, 할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할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뭐예요? 그리고 선배를 향한 예선의 마음을 어떻게 저버리지 않을 건지, 무슨 방법이 있는 거예요?”소만리는 핵심을 파고들었다.소군연도 얼버무리지 않고 예선에게 설명하려고 입을 떼는데 마침 소만리의 핸드폰이 울렸다.기모진에게서 온 전화였다.전화를 받자마자 거침없이 들리는 기모진의 음성과 함께 뒤에서 막내아들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기모진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여보, 소만리. 막내가 계속 울면서 엄마를 찾아. 아직도 예선이랑 같이 쇼핑 중이야?”“소만리, 넌 어서 들어가 봐. 안 그러면 아기 목 다 쉬겠다. 어서 가 봐.”예선도 전화기 너머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소만리는 얼른 가방을 들고 돌아서려다가 멈칫하며 두 사람에게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그래, 나 먼저 갈게. 소군연 선배랑 잘 얘기해 봐, 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하는 얘기 무시하지 말고. 선배가 널 정말 걱정하는 거 같아. 나랑 기모진도 다 이런 길을 걸었어. 너랑 소군연 선배의 마음만 굳건하다면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될 거야.”소만리는 말을 마치고
예선이 자신의 말을 오해하는 듯하자 소군연은 황급히 설명을 이어갔다.“예선,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넌 내 유일한 선택이야.”소군연은 진심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사실 예선도 소군연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소군연이 이렇게 진지하게 설명하며 약속하는 것을 보고 예선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알았어요. 그냥 농담이에요. 선배의 인품을 모르지 않아요. 아무리 많은 여자가 선배한테 달라붙어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요.”“예선, 그런 농담은 하지 마.”소군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그리고, 이제 날 군연이라고 불러.”소군연의 진지한 눈빛에 예선도 덩달아 진지해졌다.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았다.“그럼 군연, 방금 한 말은 무슨 뜻이에요?”“예선, 먼저 침착하게 내 말을 끝까지 다 듣겠다고 약속해.”소군연은 간절한 눈빛으로 예선을 바라보았다.예선은 왠지 소군연의 양다리 작전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소군연을 바라보며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군연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사실 이 방법은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영내문이 나한테 귀띔해 준 거야.”“영내문이요?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는데요?”“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자신을 예뻐해 주셨고 그런 할아버지가 얼마 못 사신다고 하니까 뜻을 받아들여 우선 약혼하는 척하며 할아버지를 안심시켜 주자고 했어. 그리고 너와의 관계에 간섭하지 않겠다고도 했어.”소군연의 말을 들으면서 예선은 점차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예선, 만약 이렇게 하는 걸 네가 원치 않으면 영내문의 제안을 거절할게.”“거절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만약 당신이 영내문과의 약혼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할아버지는 분명 매우 화가 나실 거예요.”예선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힘없이 웃었다.그녀는 다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마구 집어먹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