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아니에요?”예선이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소군연은 그제야 영내문을 보았다.“응. 맞아.”예선은 살짝 웃으며 옆을 바라보고 있는 영내문을 바라보았다.“내문.”소군연이 영내문을 불렀지만 영내문은 못 들은 것 같았다.소군연이 다시 부르자 영내문은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군연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군연 오빠.”그녀는 웃으며 소군연에게 다가왔다.“영내문 씨,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예선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영내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예선에게 말했다.“예선 언니, 안녕하세요. 지난번 할아버지 생신 때 본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그렇지만 군연 오빠한테서 종종 언니 얘기 들었어요.”“그래요?”예선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소군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영내문은 훈훈한 두 커플의 모습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내문, 배고파? 우리 적당한 레스토랑으로 가서 우선 앉아서 얘기해.”소군연이 제안했지만 사실 이건 영화를 볼 때 예선이 조언한 것이었다.소군연은 군말 없이 예선의 조언을 따랐다.영내문은 배가 몹시 고픈 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음, 배고파요. 하루 종일 바빠서 빵 한 개밖에 못 먹었거든요!”“그럼 얼른 어디 들어가자. 좋아하는 게 뭐야?”소군연이 물었다.“오빠가 좋아하는 걸로 정하면 돼요.”영내문은 소군연의 환심을 사려는 듯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그럼 일식 먹으러 가자.”소군연은 말을 하면서 예선을 바라보았다.예선은 웃으며 소군연의 눈을 마주 보았다.“일식 좋아요. 군연 오빠, 내가 일식 좋아하는 거 기억하는구나.”영내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 일식 좋아했었구나.”소군연의 말에 영내문은 달빛보다 더 환한 미소로 응대했다.그러자 소군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예선도 일식 좋아하는데.”영내문의 환한 미소가 일순 사그라들었고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예선을 쳐다보았다.소군연은 예선의 손을 잡고 먼
영내문의 손이 소군연의 손을 잡으려 하자 예선은 급히 일어나 영내문을 부축했다.“영내문 씨, 군연이 지금 구급차를 부르고 있으니 조금만 참아요.”“...”영내문은 소군연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예선이 불쑥 끼어들 줄은 몰랐다.영내문은 곁에서 자신을 위로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소군연을 보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그러나 영내문은 배가 아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짜증과 불만을 억누르며 참고 있는 것이었다.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다.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내문은 구급차에 실려갔다.사실 예선은 이미 몇 가지 의심스러운 단서를 눈치챘지만 소군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따로 동행한 가족이 없어서 소군연이 영내문의 보호자로 접수를 하고 수속을 밟았다.그런 후 소군연과 예선은 응급실 밖에서 기다렸다.둘 사이에는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결국 소군연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예선, 질투 같은 건 하지 마. 이건 그냥 돌발 상황일 뿐이야. 내가 이미 영내문의 부모님한테 알렸으니 곧 도착하실 거야. 그러면 우린 그냥 돌아가면 돼.”예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군연, 나 그런 생각 안 해요. 친한 사람이 아픈 데 옆에서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방금 영내문이 아파하고 있을 때 곁에 당신을 제외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었어요? 다 이해해요.”“영내문이 날 의지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도움을 청하게 된 거야. 영내문이 당신한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잖아.”소군연은 예선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설명했다.“예선, 영내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나 바로 영내문의 제안을 거절할 거야.”예선은 영내문의 제안에 뭔가 꼼수가 있는 것 같아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특히 그 제안을 영내문이 먼저 생각해 냈다는 것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분은...”“내 여자친구예요.”“...”영내문의 모친은 멍한 표정으로 예선을 바라보다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했다.“당신이 바로 군연 할아버지를 병원에 드러눕게 한 장본인이군.”이 말에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싸하게 굳어졌다.예선은 깜짝 놀랐다.소군연의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것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아주머니,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입원한 건 내 여자친구와 아무 상관 없어요.”소군연은 싸늘한 얼굴로 영내문의 모친을 향해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영내문의 모친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웃으며 말했다.“흥! 어떻게 이 여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거야? 네 할아버지는 네가 이 여자와 헤어지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쓰러진 거잖아? 그리고 지금까지도 할아버지의 상태는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잖아.”영내문의 모친은 이번에는 태세를 바꿔 아주 다정한 모습으로 소군연을 타일렀다.“군연아, 난 네가 자라는 걸 다 보고 살아온 사람이야. 이번에는 네가 정말 현명하지 못했어.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이 여자가 네가 가진 돈을 보고 매달리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어. 끌어안고 매달리고 있는 모습에 어디 진심이 보이니? 이런 저급한 여자를 위해서 네가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영내문의 모친은 눈을 부릅뜬 채 사람을 앞에 두고 아주 신랄하게 그리고 사정없이 예선을 비난했다.“예선이라고 했지? 내가 충고 하나 하겠는데 일찌감치 군연한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 널 기다릴 테니까. 가족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은 결코 행복하지 않아!”영내문의 모친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예선을 향해 한바탕 퍼부었다.소군연은 줄곧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군연, 화내지 마. 난 괜찮아. 난 저런 쓸데없는 사람들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아.”예선은 소군연을 잡아당기며 영내문의 모친에게 미소를
영내문의 목소리가 갑자기 응급실 입구에서 들려왔다.소군연과 예선은 동시에 눈을 들었다.영내문의 표정은 다소 불편해 보였지만 그녀의 안색은 매우 좋아 보였다.방금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영내문은 눈을 반짝이며 소군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엄마에게 눈길을 돌렸다.“엄마, 여긴 웬일이냐니까?”“아주머니께 전화해서 알려드렸어.”소군연이 해명했다.예선은 소군연 옆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영내문 씨, 방금 레스토랑에서 너무 힘들어 보여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부모님께 알린 거예요.”“그랬구나, 군연 오빠.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아니야. 괜찮다니 다행이야.”소군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고 더 할 말이 없어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그럼 몸조리 잘 해. 난 예선이랑 먼저 갈게.”“네, 그러세요.”영내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영내문의 모친이 이 상황을 보고 어찌 그냥 넘어가겠는가.“아니, 내문아. 어떻게 그냥...”“엄마, 나 빨리 집에 좀 데려다줘.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영내문은 예선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자신의 모친을 붙잡았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내문의 모친은 줄곧 차에서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내문아, 너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이렇게 좋은 기회에 왜 더 아픈 척하지 않았어? 좀 더 아픈 척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군연이 착한 남자잖아. 네가 아프다고 하면 모른 척하지는 못했을 거야. 왜 남자 마음을 잡을 줄을 몰라, 어유!”“엄마, 짜증 나. 이제 그만 좀 해.”영내문은 급기야 짜증스럽게 말했다.조금 전 소군연이 예선에게 자상하게 대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영내문의 마음이 더욱더 언짢아졌다.“조만간 군연 오빠를 꼭 내 남자로 만들 거야.”“흥.”영내문의 모친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무슨 천하무적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예선이라는 그 여자 한 명조차 어떻게 못하는 주제에.”영내문은 자신의 엄
소군연은 예선이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사실 나 내문이에 대해서 잘 몰라. 내가 알고 싶은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이야.”소군연은 눈을 반짝이며 진중하게 예선의 시선을 에워쌌다.예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소군연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아끼고 마음에 깊이 담아 둔 줄은 몰랐다.저녁 식사 후 소군연은 예선과 함께 주위를 조금 돌아다니다가 예선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그녀가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소군연은 현관문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그의 두 눈에는 어딘가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내 전화 무시하지 말고 꼭 받아. 아무리 어려운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더라도 난 당신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날 믿어.”그는 약속하며 갑자기 예선의 이마에 키스했다.“예선. 남이 하는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않도록 말이야. 알았지?”한동안 예선은 소군연에게 상처 주려고 일부러 그를 차갑게 대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당신 모습을 보고 내가 잘못했다는 걸 충분히 깨달았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제멋대로 굴지 않을게요. 우리 둘 사이에 생긴 감정은 우리 두 사람의 일이니 혼자 끙끙대면서 감당하려 하지 않을게요. 어려움이 있으면 같이 해결해요, 우리.”예선의 말에 소군연은 지금까지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모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입가에 환한 미소를 걸친 소군연이 돌아선 후에도 예선은 계속 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예선은 문을 닫았다.그녀는 피곤이 몰려온 듯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가 소만리라는 것을 확인한 예선은 재빨리 전화에 응했다.“소만리,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소만리는 예선의 활기찬 말투를 듣고 이미 소군연과 예선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경직
소만리가 예선에게 물은 지 몇 초가 지나도록 전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없자 그녀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예선아, 누가 찾아온 거야? 왜 말이 없어, 예선아...”“소만리, 나 괜찮아.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차분해진 예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회사 동료가 왔어. 갑자기 업무 상 급한 볼 일이 있어서 나한테 물어보려고 왔네.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소만리. 우선 먼저 끊을게.”예선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소만리는 갑자기 기모진의 품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소만리, 왜? 어디 가게?”기모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예선이 집에 누가 찾아왔나 봐. 그런데 좀 이상해. 예선이 목소리가 좀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소만리가 머릿속에 품은 의혹을 털어놓으며 외투를 들었다.“나 한 번 가 봐야겠어.”“소만리, 잠깐만 거기 서!”기모진은 급히 떠나려던 소만리를 조급하게 불러 세웠다.소만리는 발걸음을 뚝 멈췄고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불러 세운 남자를 쳐다보았다.“모진?”“나도 같이 가.”기모진이 갑자기 온화한 어조로 바꾸어 말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이 무슨 생각으로 따라나서는지 알 것 같았다.두 부부는 막내아들을 위청재에게 맡기고 함께 집을 나섰다.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를 조심스레 운전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소만리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방금 자신이 그렇게 조급하게 나섰을 때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그녀가 어찌 잊었겠는가.그리고 이 남자는 그녀 혼자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는가.십여 분 후 기모진과 소만리는 예선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소만리는 예선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걱정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아마도 그녀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소만리도 자신이 걱정하는 것이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랐다.그녀와 기모진은 얼
”이 아가씨가 네가 가장 믿고 의지한다는 절친 소만리야? 반가워, 난 예선이 엄마야. 전에 만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가 없었네.”“저도요.”소만리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고 예선에게 다가와 예선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주웠다.“예선아, 아무 일 없는 것 같으니까 나랑 모진은 우선 그냥 돌아갈게. 엄마랑 얘기 많이 나눠.”“소만리, 잠깐만!”돌아서려던 소만리를 예선이 갑자기 불렀다.소만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되돌아섰다.“예선아, 무슨 일 있어?”“저기, 엄마도 지금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기 씨 그룹에서 운영하는 그 호텔에 묵고 있어. 가는 길이니까 혹시 네가 괜찮다면 좀 모셔다 줄래?” 예선이 이렇게 말하자 소만리는 예선의 엄마가 갑자기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분명 예선의 엄마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러나 예선은 자신의 엄마가 계속 여기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기색이었다.소만리는 예선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매듭짓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다만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선이 이렇게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깊은 앙금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소만리에게도 미지수였다.하지만 소만리는 예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도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예선의 엄마는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예선을 불쾌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예선의 엄마는 소만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그럼, 소만리, 기 선생님, 신세 좀 질게요.”“신세는요, 가는 길인데요.”소만리가 웃으며 돌아섰다.“그럼 예선아, 일찍 자. 나중에 우린 다시 연락하자.”“그래.”예선은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얼른 대답했다.자신의 집에서 얼른 자신의 엄마를 내보내고 싶은 듯이 말이다.예선의 엄마도 예선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슴속에 허탈한 심정이 가득 들어찼지만
예선의 엄마는 당시 혈기왕성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후회했다.사업을 위해, 자신의 이상을 위해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그냥 방치했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예선의 엄마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소만리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기모진은 액셀을 밟고 집으로 향했다.기모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방금 그분 정말 예선이 엄마 맞아?”“음, 당신 지금 예선이가 엄마랑 좀 안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지?”기모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난 우리 세 보배들이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것만 알아.”“이제야 듣기 좋은 말을 하는군. 당신 예전에는 기란군이랑 나랑 닮았다고 생각 안 했잖아.”소만리가 장난스럽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토라지는 듯하자 즉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소만리,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을게.”“바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누가 뭐래?”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치며 말했다.“다 지난 일을 왜 꺼내고 그래?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예선과 소군연 선배야.”“소군연 선배한테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책임감 있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건 부인하지 않아.”소만리는 소군연의 인간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아무리 본분을 지키고 신념을 밀고 나가고 싶어도 때때로 그걸 방해하려는 사람들을 피할 수는 없어.”“방해하려는 사람들이 누군데?”기모진이 궁금해서 물었다.“영내문.”“영내문? 부동산 재벌 영일도가 애지중지하는 딸 영내문 말이야?”“맞아. 예선이한테 들었는데 영내문 집안이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하기 때문에 소군연 선배의 집안에서 모두 영내문을 굉장히 좋아한대. 경도에서 소군연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영내문밖에 없다고 생각한대.”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소만리는 비록 장본인은 아니지만 예선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러다가 갑자기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집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