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은 언짢은 얼굴로 기모진을 노려보았다.모든 것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많이 늦었다는 걸 고승겸도 모르지 않았다.그러나 그런 고승겸을 지켜보던 남연풍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승겸이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걷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 남연풍이었다.여기서 멈추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다.눈앞에서 고승겸이 끌려가는 것을 본 남연풍은 있는 힘껏 휠체어를 밀어 그에게 다가갔다.무장 경찰에게 제압당한 고승겸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였으나 달리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결국 원망에 휩싸인 그의 시선은 남연풍에게 떨어졌다.그러나 남연풍의 눈을 본 순간 고승겸은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갔다.“따라오지 마.”뒤따라오는 남연풍을 보는 고승겸의 눈에 애틋함이 가득했다.“저리 가. 오지 말라구. 나 같은 건 이제 잊어.”고승겸의 눈 속에 안타까움과 회한의 감정이 솟구쳤다.“남연풍, 우리 이번 생에서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 부디 잘 살아.”말을 마친 고승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경찰차에 몸을 실었다.남연풍이 고승겸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자 소만리가 옆에서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다.“남연풍, 진정해요.”남연풍은 감정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나 말리지 말아요! 나도 저 사람이랑 같이 갈래요! 그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도 죄가 있는 거예요!”남연풍은 고승겸에게 달려가려고 안간힘을 썼다.소만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때 강자풍이 성큼성큼 걸어와 남연풍의 앞을 가로막았다.“남연풍, 당신은 고승겸과 같이 갈 수 없어요! 당신이 진정 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온이가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구요!”강자풍은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소리를 높였다.그는 남연풍이 이렇게 가버리거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할까 봐 걱정되었다.그렇게 되면 기여온의 몸에 난 붉은 반점은 영영 치료할 길이 요원해지
남연풍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를 쳐다보며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사실 하마터면 우리 익사할 뻔했어요.”소만리는 긴 한숨을 쉬며 당시를 회상했다.수조의 물은 파도처럼 밀려왔고 소만리의 허리쯤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 그녀는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모진, 아직 힘이 좀 남아 있어? 남아 있다면 내가 말하는 대로 한번 해 보면 안 될까? 우선 내가 당신 어깨에 올라타면 수조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기모진도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소만리, 나 할 수 있어.”그는 망설임 없이 말하고는 소만리 앞에 천천히 몸을 숙였다.소만리가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자 순간 기모진의 몸이 물속으로 쑥 가라앉았다.기모진은 이미 이틀 동안이나 수조 속에 갇혀 있어서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던 것이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봐 적잖이 걱정되었다.역시나 그녀의 무게가 느껴지자 기모진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 순간 움찔거렸다.그녀는 숨을 멈춘 채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모진, 지금 다리에 힘이 많이 빠졌어?”기모진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소만리,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난 버틸 수 있어.”소만리는 기모진이 기필코 참아내리라는 걸 알지만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모진...”“소만리, 어서 올라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빨리! 계속 생각하다가는 우리 둘 다 여기서 죽을 거야.”그녀는 기모진의 등에 엎드린 후 몸을 위로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기모진은 있는 힘을 다해 버텼고 마침내 소만리는 기모진의 어깨에 올라탔다.순간 기모진의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그는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으며 천천히 걸어서 소만리를 수조 가장자리로 데리고 나왔다.소만리는 얼른 손을 뻗어 수조의 가장자리를 잡았다.기모진은 아이를 생각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고 마지막 힘을 짜내
소만리는 말을 끝내자마자 의자를 물속으로 던졌고 기모진은 힘겹게 일어선 후 의자를 잡고 수조 가장자리로 가서 의자 위로 올라갔다.소만리는 손을 내밀어 기모진의 손을 꽉 쥐었다.“모진!”“소만리, 다리에 힘이 빠졌어. 당신이 먼저 나가서 사람을 부르는 게 낫겠어.”“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 근처에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내가 너무 멀리 나가 버리면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 난 이곳을 떠날 수 없어. 내 시야에서 당신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말했다.“모진, 내가 당신을 끌어올려 볼게. 난 꼭 할 수 있어!”“소만리.”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행동하는 소만리를 보면서 기모진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절대 쓰러질 수 없었다.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두 발은 점점 힘이 빠졌다.자신이 너무 세게 소만리의 손을 잡으면 그녀가 끌려 내려올까 봐 기모진은 결국 그녀의 손을 놓기로 결심했다.소만리도 그의 이런 마음속 갈등을 눈치채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뻗어 기모진의 손목을 꽉 잡았다.“기모진, 난 절대 당신 손 놓지 않을 거야, 들었어 못 들었어! 나 꼭 당신 끌어올릴 거라구!”소만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에는 기모진의 어깨에 넘실대며 차오르는 물이 마치 악마의 손아귀 같았다.그녀의 마음이 타는 듯한 괴로움으로 가득했다.시간이 점점 더 흐르면 소만리도 결국 힘이 빠져서 기모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 순간 지하실 철문이 갑자기 열렸다.소만리가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그 사람은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어 그녀를 도와 힘껏 기모진을 끌어올렸다.바로 강자풍이었다.소만리가 이쯤까지 말하고 있을 때 강자풍은 부엌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는 소만리가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짐짓 우쭐대는 모습을 보였다.“누나한테 전화를 했더니 계속 신호가 안 잡혔어. 그런데 누나가 나한테 전화했
소만리의 대답을 들은 강자풍은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어떻게 이럴 수가?기모진과 소만리가 반대하지 않는다니!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강자풍을 보고 옆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남연풍이 입을 열었다.“사실 외부인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었어요. 강 선생이 여온이에게 얼마나 지극 정성을 쏟는지 말이에요. 여온이는 당신이 너무도 잘 보살피고 있으니 부모로서 당신들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아요.”남연풍의 말에 강자풍은 겸연쩍고 쑥스러운지 씩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그럼 계속들 얘기하세요. 난 먼저 방으로 올라가 볼게요. 어서 가서 가능한 한 빨리 해독제를 개발해야죠. 그래야 여온이의 몸에 난 붉은 반점도 빨리 없어지죠.”남연풍이 말을 마친 후 휠체어를 돌렸다.소만리는 기모진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곧바로 남연풍을 따라갔다.“내가 방에 데려다줄게요.”남연풍은 거절하려다가 소만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남연풍은 곧장 책상으로 다가갔다.소만리는 남연풍이 며칠 동안 연구한 데이터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미안해요.”남연풍은 느닷없이 사과했다.“고승겸이 여온이에게 이런 수법을 쓸 줄은 정말 몰랐어요.”“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요. 그건 고승겸이 한 짓이지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소만리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어떻게 나와 무관할 수 있어요? 그 시약은 내가 개발한 거예요. 기모진의 몸에 있는 독소도 당신 몸에 있던 독소도 그 모든 것들은 다 내가 개발한 거예요.”남연풍이 죄책감을 느끼는 듯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우리 부모님, 내 동생, 그들은 자신의 재능으로 사람들을 구했는데 난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이나 했어요. 그랬는데 그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난 이렇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어요...”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책했고
”당시 IBCI의 행정 최고 지휘관이었던 경연이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흑강당이 검은 돈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며 이득을 챙기고 있었죠. 그 사실을 고승겸도 알고 있었고 나중에는 그도 그 일에 관여하게 된 거예요.”“경연은 사실 매우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승겸도 그와 기꺼이 협력하며 잘 지내왔는데 어느 순간 경연은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죠. 그 이유는 당신 때문이었어요.”남연풍은 고개를 들어 소만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소만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나 때문에요?”“그래요. 경연은 정말로 당신을 사랑했으니까요.”남연풍은 감탄하는 눈빛을 띠며 설명했다.“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성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 가기 어렵죠. 말하고 보니 경연과 난 정말 닮았네요. 결국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지도 모르고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자멸하고 말았죠.”남연풍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경연의 죽음은 당신과 아무 상관없어요. 고승겸은 경연의 존재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경연을 처리하려고 했던 거예요.”남연풍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난 소만리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그 점을 강조해 줘서 고마워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경연이 죽은 것은 당신과 정말 무관한 일이거든요.”“소만리.”남연풍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 앞에서 기모진의 말소리가 들렸다.소만리와 남연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다.소만리는 얼른 방문으로 다가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방금 남연풍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며 소만리는 기모진에게도 얼른 모든 것을 알려주려고 했다.“모진, 경연이와 고승겸이...”“방금 문 앞에서 다 들었어.”기모진이 털어놓았다.“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을 찾으러 왔다가 그만 듣고 말았어.”기모진은 갑자기 크나큰 도리를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다들 훌륭한 사람들인데 어쩌다 비뚤어진 생각을 하게 되어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
소만리와 기모진은 강자풍을 따라 기여온의 방으로 들어갔고 두 부부는 강자풍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여온이가 왜 깼어? 잠이 안 와?”강자풍은 다정하게 물으며 기여온을 달랬다.기모진과 소만리는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았다.강자풍은 책꽂이 한쪽에서 동화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그럼 우리 여온이 눈 감아 봐. 오빠가 이야기 들려줄게.”강자풍의 말에 기여온은 순순히 작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강자풍은 침대 옆에 살짝 앉더니 부드럽고 진득하게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이 광경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들은 더 이상 엿보는 것을 그만두고 뒤돌아서서 그들의 방으로 돌아왔다.소만리는 피곤해서 침대에 누웠다.연일 계속해서 일어난 일들로 소만리는 너무 피곤했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이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게 된 것이다.고승겸과의 질긴 인연은 결국 일단락되었다. 이제 그녀가 가장 걱정되는 일은 기여온의 건강이다.이 아이는 세상에 나온 지 겨우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나이에 감당해서는 안 될 온갖 상처와 고통을 겪었다.기모진은 지금 소만리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눈치를 채고 그녀의 옆에 살며시 다가와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모진의 몸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맡으며 소만리는 비로소 안심하고 눈을 감았고 그의 따뜻한 품에 빠져들었다.“소만리, 우리 여온이 꼭 건강해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살아날 사람은 꼭 살아나게 돼 있어.”이렇게 말은 했지만 기모진도 자신이 왜 이런 위로의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기모진의 마음속에 자신의 딸이 건강하게 낫길 바라는 염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소만리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기모진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그 많은 고비를 넘겼으니 우리 여온이 이번에도 잘 견뎌낼 거야.”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죠?”강자풍은 빙빙 돌리지 않고 물었다.기모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래층에 내려가서 얘기해.”그는 먼저 돌아섰고 강자풍도 그의 뒤를 따랐다.밤은 이미 깊었다.강자풍은 하인에게 홍차와 간식을 부탁했고 그와 기모진 단둘만이 거실에 덩그러니 앉았다.강자풍은 기모진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음을 알고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기모진은 계속 차만 홀짝이며 입을 열 의사가 도무지 없는 사람 같았다.강자풍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당신은 여온이를 여기에 남겨두고 싶지 않은 거죠?”기모진은 여유로운 자태로 홍차를 마시다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자풍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여온이를 잘 돌보지 못하겠단 뜻이야?”기모진이 강자풍에게 되물었다. 강자풍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아, 아니에요.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잘 알잖아요.”“그럼 무슨 뜻이야?”“난...”강자풍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멍해졌다.“강자풍, 궁금한 게 있어. 고승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그가 먼저 날 찾아왔어요.”강자풍은 이제 와서 숨길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승겸은 흑강당의 일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어요. 우리 형과 누나의 죽음도 알고 있었고요. 고승겸은 나와 당신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내가 당신들에게 원한을 품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일어난 일은 당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예요.”강자풍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기모진처럼 똑똑한 사람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처음에는 나도 완전히 고승겸한테 속았어요. 사실 우리 형은 항상 나에게는 잘 대해 주었거든요. 비록 밖으로는 악랄한 짓을 하긴 했지만 나한테는 항상 세심한 배려를 보여 주었죠. 형은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좋은 형이었어요.”강자풍은 지난 일을 회상하는 것조차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고 소파에
강자풍은 갑자기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지 기모진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결심과 입장을 밝혔다.기모진은 강자풍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었지만 강자풍이 자신과 소만리의 과거 일을 예로 들 줄은 몰랐다.그때를 돌이켜보면 강자풍의 말대로 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 한 번 가졌던 인연을 오랜 세월 동안 잊지 않았다.하지만.기모진은 생각에 잠긴 듯 강자풍을 바라보았다.“그래서 난 이제 마음 편히 여온이를 잘 돌볼 거예요. 여온이가 날 싫다고 하지 않는 이상 항상 곁에 있을 거구요.”강자풍은 확고한 눈빛으로 결연하게 말했다.“기모진, 여온이가 밝고 건강하게 바라는 건 나나 당신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선을 지키며 살 것이고 여온이를 힘들게 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강자풍의 말을 듣고 기모진은 미소를 지었다.“여온이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여온이의 감정은 지금 아주 직관적인 거지. 네가 여온이한테 잘 해주면 여온이도 그걸 느낄 것이고 나와 소만리도 느낄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여온이를 네 곁에 안심하고 두려는 거야.”“정말요?”강자풍은 마음이 너무나 들떴지만 차분하게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썼다.“그래.”기모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소만리와 난 집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려고 해. 여기 모든 상황이 이제 좋아졌으니 우리도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강자풍은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고 뿌듯했다.그의 얼굴은 감격스러운 듯 얼굴이 상기되었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며칠 후 남연풍은 마침내 해독제를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기여온은 해독제를 맞은 후 피부에 난 붉은 반점도 점차 사라졌다.이틀 동안 기여온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다른 합병증이 없음을 확인한 소만리와 기모진은 다음날 안심하고 공항으로 향했다.강자풍은 기여온의 손을 잡고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소만리는 아쉬워하며 기여온 앞에 웅크리고 앉아 아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