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을 바라보는 소만리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내 남편 어디 있어? 모진은 지금 어디 있냐구?”얼굴이 타들어가는 소만리를 보며 고승겸은 시큰둥하게 웃으며 말했다.“나와 기모진 사이에는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어. 이대로는 안 되지. 자신의 딸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지, 안 그래?”비열한 고승겸의 말에 소만리는 손을 번쩍 들어 고승겸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고승겸, 얼른 말해. 내 남편 지금 어디 있냐구!”고승겸은 소만리의 추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소만리의 손을 뿌리치며 능글스레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기모진은 호흡도 있고 심장도 뛰고 있어. 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야.”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라고?소만리는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것 같았고 기모진이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고승겸, 이 악랄한 인간!”소만리의 눈은 경멸하는 빛으로 터져 버릴 듯했다.“당신 같은 사람이 산비아의 군주가 되겠다는 망상을 하다니, 당신의 정체를 모두에게 폭로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소만리의 말에 고승겸의 얼굴에 맴돌던 비열한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자신이 계획했던 원대한 꿈은 소만리와 남연풍의 연합으로 무참히 망가져 버렸다.그는 지금 다시 그때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끓어올랐다.분노에 휩싸인 고승겸은 소만리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소만리, 나더러 당신 뺨이라도 때려 달라는 말이야? 제발 날 자극하지 마!”소만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미리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설마 내가 순진하게 당신이 날 봐 줄 거라고 생각하는 줄 알아?”“소만리...”“그 손 놔요!”강자풍이 기세 좋게 앞으로 나와 소만리의 손목을 잡고 있던 고승겸의 손을 밀쳤다.강자풍은 앞으로 나와서 소만리를 자신의 뒤로 오게 하고는 고승겸에게 맞섰다.“고승겸, 남자라면 여자는 괴롭히지 마세요!”
소만리와 강자풍은 무장한 사람들이 강자풍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덩치가 크고 특수 장비를 착용한 남자들이 고승겸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고승겸은 그 사람들을 알고 있는 듯 크게 놀라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웃기까지 했다.“여기까지 찾아오다니.”그가 경멸하듯 눈을 들어 저항하려고 할 때 무장한 사람들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이 여길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여기 있다고 내가 알려준 거야.”말소리가 끝나자 고승겸의 눈에 남연풍의 모습이 들어왔다.남연풍은 휠체어를 탄 채 고승겸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하지만 남연풍은 소만리와 강자풍의 모습도 보았다. 그들이 여기에 온 것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의외였다.남연풍은 소만리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그리고 남연풍은 사실 강자풍이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기여온이 F국에서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연풍을 보며 고승겸의 눈에는 자조하듯 허탈한 빛이 가득 밀려왔다.“정말 당신이 저 사람들한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했어?”고승겸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고 남연풍은 그런 고승겸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고 침착하고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하지. 내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저 사람들이 어떻게 산비아에서 여기까지 추적해 올 수 있었겠어?”남연풍의 대답에 고승겸은 소리 내어 웃다가 눈을 감았다.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고승겸은 어둠을 가득 실은 사냥개의 눈빛으로 무섭게 남연풍을 노려보았다.“당신은 내가 정말 싫은 모양이군. 내가 죽길 바라는 거지?”고승겸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연풍을 향해 물었다.남연풍은 오랫동안 자신이 사랑해온 남자의 얼굴을 냉랭하게 바라보다가 끝내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지금 되돌아와도 늦지 않아.”“되돌아와?”고승겸이 허망한 듯 가볍게 웃으며 남연풍의 말을 반복했다.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점점 더 광기 어린 얼굴로
”내 말이 맞지? 당신 나랑 함께 죽고 싶은 거잖아.”남연풍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찬바람이 살랑살랑 불러오자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그래, 나도 이미 지쳤어. 당신이 죽고 싶으면 날 데리고 가.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사택이 다 너무 보고 싶어...”남연풍의 말에 고승겸의 눈빛이 흐려졌다.그의 목젖이 울렁거렸다. 목이 메인 듯 그가 울먹였다.“좋아.”그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그럼 우리 함께 지옥에 가자.”그는 절망적인 말을 하며 남연풍의 목을 천천히 졸랐다.남연풍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고승겸의 손이 점점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승겸, 남연풍을 놔줘!”소만리는 고승겸을 막으려고 했지만 강자풍이 그녀를 붙잡았다.“위험해! 가지 마! 저 사람은 미쳤어.”“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펑!”소만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다.뒤이어 검붉은 피가 그녀의 눈앞을 뒤덮었다. 고승겸이 총에 맞은 것이었다.남연풍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남연풍은 무장 경찰들이 실제로 그를 향해 총을 쏠 줄은 몰랐다.비록 고승겸이 많은 죄를 저질렀지만 그는 여전히 산비아 왕실 사람이었다.그를 잡으러 왔더라도 그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그런데 그들은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승겸은 남연풍의 목을 조르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그가 그녀의 목을 조르긴 했지만 실제로 남연풍을 목 졸라 죽일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남연풍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고승겸의 다리에 그대로 총알이 박혔다.남연풍은 눈시울을 붉히며 외쳤다.“승겸!”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승겸의 이름을 부르며 무장 경찰들을 막았다.“쏘지 마세요! 쏘지 말라구요!”두 눈이 붉어진 그녀가 소리쳤다.“승겸이가 누군지 다들 잊었어요?
남연풍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고승겸을 목놓아 외치다가 휠체어에서 넘어지며 고승겸의 몸에 가까이 엎드렸다.이를 본 소만리는 남연풍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남연풍, 당신부터 우선 일어나서 앉아요.”“아니에요. 나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남연풍이 고승겸의 팔을 꼭 껴안았다.“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예요. 남연풍, 우선 당신 몸부터 생각해요.”소만리가 위로했다.하지만 여전히 고승겸에게서 손을 떼지 못하는 남연풍은 울면서 고개를 가로저었고 의식이 없는 고승겸을 바라보기만 했다.“소만리, 당신은 나와 달라요. 당신은 그가 죽었다고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을 수 있지만 난 아니에요. 난 이 사람이 너무 걱정돼요.”“나도 걱정돼요!”소만리는 강조하듯 목소리를 높였다.남연풍은 소만리의 말에 어리둥절했고 의아한 표정으로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소만리는 표정이 굳어진 채 입을 열었다.“고승겸이 어디로 모진을 데려갔는지 모르잖아요. 모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해요.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고승겸이 생명에 지장이 없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구요.”그 말을 들으니 남연풍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 같았다.총을 든 무장 경찰들이 고승겸에게 다가왔고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승겸을 차에 태웠다.소만리는 강자풍과 함께 남연풍을 휠체어에 앉혔다.남연풍도 고승겸과 함께 차에 타고 싶었지만 무장 경찰들은 그녀를 허락하지 않았다.남연풍은 자신이 산비아 경찰에게 고승겸을 잡으라고 신고한 것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었는지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아니야. 잘못되지 않았어.만약 그녀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고승겸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반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 이번 생은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된다.적어도 지금 그에게는 변화의 기회가 있는 것이다.소만리는 흑강당 옛 건물 안에서 기모진을 찾지 못했다.그녀는 강자풍과 함께 남연풍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남연풍은 고승겸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틈
강자풍은 마음속에 품었던 모든 의혹을 한꺼번에 털어놓았다.남연풍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당신이 의심하는 그대로예요. 맞아요. 난 예전에 고승겸과 한편이었어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했었죠. 자존심도 없는 바보였어요.”남연풍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남연풍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표현하자 강자풍은 놀라면서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남연풍은 소만리를 도와 기여온을 구해 주었었다.강자풍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음, 저, 전 그저 여온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그냥 한 말이에요.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사실 고승겸과 달리 당신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거 잘 알아요.”강자풍은 남연풍이 확실히 고승겸과는 다른 결의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만약 남연풍이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여온이는 고승겸의 손아귀에서 구출되지 못했을 것이다.강자풍의 말을 듣고 남연풍은 담담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그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남연풍, 이 시약은 당신이 개발했으니 해독제도 조제할 수 있겠죠? 그렇죠?”소만리는 기여온의 팔에 얼룩덜룩하게 난 반점들을 보자 마음이 타들어갔다.남연풍은 그 종이를 티 테이블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고승겸은 당신을 속이지 않았어요. 이 제조법은 사실이고 지금 당장 해독제가 없는 것도 사실이에요. 내가 해독제를 제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레시피에 필요한 재료들을 다 구할 수 있을지 그게 의문이에요.”“걱정하지 마세요. 이반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강자풍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남연풍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초조한 표정으로 변했다.“고승겸을 걱정하고 있는 거죠?”소만리는 남연풍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단번에 짐작했다.“네, 그 사람이 걱정돼요.”남연풍은 이렇게 대답하는 자신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그가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
전방 멀지 않은 곳에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 소만리는 잠시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가 가까이 달려가 보니 기모진의 핸드폰과 결혼반지가 핸드폰 불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소만리는 결혼반지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분명 기모진이 이곳에 온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소만리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기모진에 대한 고승겸의 원한이 사무치게 깊다는 것을 생각하자 소만리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모진.”소만리는 손에 든 핸드폰과 결혼반지를 움켜쥐고 그의 이름을 살며시 불렀다.“안 돼. 소만리, 정신 차려. 진정해야 해.”소만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달래며 스스로 냉정해지려고 애썼다.그녀는 핸드폰에 있는 붉은 점을 보면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강자풍이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와 그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승겸이 건물에서 나왔으니 기모진은 아직 여기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설마 기모진이 아직 여기 있단 말이야?”여기까지 생각한 소만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어두컴컴한 건물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한 채 이곳저곳 뒤졌다.하지만 그녀가 건물 전체를 다 찾아보아도 여전히 기모진에 대한 조그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소만리는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으로 강자풍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집으로 돌아온 소만리를 보고 강자풍은 고승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렸다.그러나 강자풍은 그의 의식이 아직 흐릿하다는 말도 덧붙였다.이 말은 고승겸이 소만리에게 기모진에 대한 어떤 유용한 정보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기모진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녀의 마음이 막막해졌다.시간은 1분 1초가 흘렀지만 소만리는 제대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마음은 허공에 매달린 풍선처럼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녀는 괴로운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잠 못 드는 밤 소만리가 몸을 뒤척이다가 옆
”그때 그가 내 삶에 들어와 한줄기 빛처럼 나의 암울한 미래를 비춰 주었죠. 그 후로 난 나 자신을 되찾고 스스로 자신감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어요.”남연풍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달빛 속에 흩어졌다.그녀의 눈빛은 점차 빛을 잃어갔다.“하지만 내 자신감은 결국 그에게 빼앗기고 말았죠...”남연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만리는 남연풍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당신의 이런 심정 충분히 이해해요.”남연풍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소만리의 작은 얼굴엔 엷은 미소가 흘렀다.“예전에 나도 당신처럼 그랬어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자존심도 없이 그 사람만을 사랑했지만 그런 맹목적인 사랑은 결국 자신을 불구덩이 속으로 몰고 가는 불나방과 같은 사랑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죠.”“아쉽게도 난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남연풍은 회한이 가득 담긴 눈을 들어 소만리를 바라보았다.“당신도 그때 기모진을 맹목적으로 사랑했지만 당신은 나와 달랐을 거예요. 만약 기모진이 잘못된 길을 갔다면 당신은 반드시 그를 막았을 거예요. 하지만 난 고승겸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악행을 곁에서 도왔고 결국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 거죠.”“그에게도 아직 돌아올 기회가 있어요.”소만리가 눈썹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남연풍, 제발 날 한 번만 더 도와줘요.”“내가 고승겸에게 기모진의 행방에 대해 물어주길 바라는 거죠?”소만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모진이 지금 어딘가에 갇혀 있을 텐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너무 걱정이에요.”남연풍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입을 열었다.“고승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 마음속에 어떤 꿍꿍이를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가 이렇게 생을 마감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나한테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한번 해 볼게요.”남연풍은 소만리에게 약속했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들은 고승겸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고승겸은
무장 경찰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눈앞에는 텅 빈 병상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당황한 기색을 띠며 열려 있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창틀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고승겸은 5층 높이인 이곳에서 뛰어내린 것이다!무장 경찰은 얼굴이 잿빛이 되어 상급자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소만리는 남연풍과 눈을 마주치고는 얼른 병실 앞을 떠나 1층으로 내려와 보았다.화단에는 누군가가 밟은 흔적이 역력했다.고승겸이 실제로 5층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그는 팔과 다리에 총상을 두 발이나 당했는데 누군가의 감시하에 이런 일을 감행했다는 것에 소만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승겸이 체력이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일을 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남연풍은 탄식을 내뱉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고승겸은 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걸까요?”이제 소만리는 인간 고승겸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했고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가 선택한 모든 길이 다 막혀 버렸어요. 아마도 고승겸이 할 수 있는 건 이 길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는 지금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잖아요.”소만리의 말을 듣고 남연풍의 눈빛은 절망으로 뒤덮였다.남연풍은 눈을 감았다. 이제 더 이상 고승겸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사실 이런 기대는 이미 그녀의 마음에서 사라졌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는데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포기하고만 것이다.소만리는 바로 강자풍에게 전화를 걸어 고승겸의 행방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고승겸을 찾아야 기모진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승겸은 마치 병원에서 증발한 것처럼 CCTV 화면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소만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승겸이 마법이라도 부렸단 말인가?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분명 그는 다른 방법으로 감시를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