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예전에 그는 그녀를 이렇게 다정하게 불렀었다.그녀가 작별 인사도 없이 그를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그녀가 떠나기 전에 고승겸은 정말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했다.“연풍, 걱정하지 마. 당신이 어떻게 되든 내가 평생 돌봐 줄 거니까.”고승겸이 다정한 목소리로 약속했다.남연풍은 자신이 지금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고 눈물샘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눈물을 쏟아내었다.남연풍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고승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깜짝 놀란 눈으로 말했다.“연풍, 당신 깨어난 거야? 깨어났어?”남연풍은 더 이상 자는 척할 수도 없어서 붉어진 눈을 천천히 떴다.그녀는 담담한 시선으로 고승겸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당신의 보살핌은 필요 없어.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산비아로 돌아가지도 않을 거야. 난 죽어도 경도에서 죽을 거야. 내 고향, 내 부모님과 동생이 묻힌 곳에 같이 묻힐 거야.”남연풍은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고승겸의 손에서 빼냈다.“난 다시는 당신 보고 싶지 않아. 당신을 보면 내 동생과 무고하게 죽은 그 여자가 생각나.”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그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고승겸은 그렇게 단호하게 저항하는 남연풍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마음속의 불쾌함이나 짜증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남사택과 초요는 안나가 저지른 화재로 죽었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상관없다고?”남연풍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와서 아예 관계를 끊으려는 거구나.”“관계를 끊으려는 게 아니야. 그건 사실이야.”“그럼 그게 사실이라고 쳐. 그래도 난 당신에 대한 미움이 너무 많아.”“...”“고승겸, 나와 당신은 마치 교차선 같아.”남연풍은 눈물이 얼룩져 흐릿해진 시선으로 말했다.“현격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린 함께 했고, 가장 친밀했던 순간 우린 헤어졌지. 이게 당신과 나의
소만리와 기모진이 집을 막 나서려는데 갑자기 기모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기 너머의 젊은 여인은 자신이 어느 병원 간호사라고 했다.간호사가 하는 말을 듣고 기모진과 소만리는 의논을 했고 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남연풍은 침대에 누워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꽂은 채 1분 1초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마침 병실 문이 열렸고 남연풍은 기대했던 소만리와 기모진이 온 줄 알았지만 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고승겸이었다.고승겸은 남연풍의 얼굴에 가득한 기대가 갑자기 실망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포착했다.“누굴 기다리고 있어?”고승겸은 의아한 듯 물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남연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승겸이 한 말은 무시한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그런 남연풍을 보며 고승겸은 침대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따가 나랑 같이 산비아로 갈 거야.”남연풍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당신이랑 산비아로 가지 않을 거야.”“돌아가면 안나와의 결혼은 파기할 거야. 그러면 당신은 명실상부한 내 아내가 되는 거야.”고승겸의 말에 남연풍은 꿈쩍도 하지 않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당당한 자작 공자가 하반신이 마비가 된 여자를 아내로 삼겠다고? 당신 집안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당신 마음도 조금 있으면 변할 거야.”“내 마음?”“그렇지 않을 것 같아? 당신의 목표는 산비아 왕실의 계승권인데, 나 같은 폐인이 당신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당신이 그 악마 같은 여자랑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야.”이 말을 듣고 고승겸의 얼굴에는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이미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안나가 남사택과 초요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이미 벌어진 비극은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고승겸, 분명히 말해 두겠어. 당신과 나 사이의 지긋지긋한 인연은 여기서 끝이야. 내 뱃속의 아이도 없어졌어. 이는 하늘도 우리가 함께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
그녀는 소만리와 기모진을 자신의 가족이라 칭하며 간호사에게 부탁했고 그들이 그녀를 데리러 오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혼자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되고 말았다.그녀가 그들 부부를 그렇게 악독하게 괴롭혔는데 어떻게 그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겠는가?남연풍이 하염없이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소만리와 기모진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다가오는 부부를 보며 남연풍의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정말 올 줄은 몰랐어요.”남연풍의 눈에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무슨 부탁을 하려고 우릴 부른 거예요?”소만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승겸은 한 시간 후에 나를 데리고 경도를 떠나 산비아로 갈 거예요.”소만리는 간절함에 가득한 남연풍의 눈을 바라보았다.“나에겐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가족이 없어요. 친구도 없어요. 당신들이 날 친구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남사택과 초요를 봐서 날 한 번만 도와줘요.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알아요. 그렇지만 한 번만 부탁할게요.”간절함이 가득 묻어나는 남연풍의 말을 들으며 소만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우리가 도와줄게요. 하지만 그건 남사택이나 초요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에요.”남연풍은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다가 차츰 소만리의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남연풍의 눈가가 먹먹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받는 느낌은 처음이었다.“고마워요.”남연풍은 흐느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지체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얼른 절차를 밟아 남연풍을 데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남연풍은 몸이 여러 군데 부러졌고 하반신은 마비가 되어서 들것에 누워야 했다.그들이 병실을 나가려는 순간 고승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당신, 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군.”고승겸은 오만하게 눈을 치켜뜨며 소만리와 기모진을 쏘아보았다.“그들이 당신을 데려갈 것 같아?”
소만리와 기모진이 남연풍을 데리고 가려는데 갑자기 여지경이 들어와 문을 막아섰다.소만리는 여지경이 그렇게 억지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다가가 말했다.“여사님, 여사님은 사리에 밝은 분이시잖아요? 남연풍의 선택을 존중해 주세요. 남연풍은 산비아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여지경은 소만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소만리, 걱정하지 마. 난 당신들을 막으러 온 게 아니야. 난 단지 미스 남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미스 남.남연풍은 들것에 실려 누워서 여지경이 자신을 향해 부르는 호칭을 들으며 잠시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였다.여지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미스 남'이라는 말은 그들의 관계에서 철저히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단어였다.남연풍은 여전히 정신이 멍해져 있다가 여지경이 묻는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미스 남, 정말 우리와 함께 산비아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어? 승겸이를 다시는 안 볼 거 확실해? 이제 우리 고 씨 집안사람들과는 상관없다는 거지?”여지경의 말투는 온화하게 들렸지만 남연풍은 이 질문이 세상 무겁게 느껴졌다.그녀는 자신을 계속 보고 있는 고승겸의 시선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뜨겁고 깊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그러나 남연풍은 고승겸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 여지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네.”“그래. 알았어.”여지경은 흔쾌히 대답하며 고승겸을 돌아보았다.“승겸아, 엄마 말대로 해. 이제부터 미스 남 방해하지 마.”고승겸은 여지경의 말을 듣고 표정이 확 바뀌었다.그가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고승겸이 잠자코 있자 여지경은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말했다.“승겸아, 엄마가 하는 말 들었어? 더 이상 미스 남에게 폐를 끼쳐선 안 돼. 미스 남 말이 맞아. 우리에겐 그녀가 어디로 갈지 결정할 권리가 없어. 넌 그녀한테 남편도 애인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 것이라면 결국 너한테 돌아올 거야. 네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강요해도 소용없어.”여지경의 말에 고승겸의 눈을 가득 채웠던 소유욕이 한순간 잿빛으로 변했다.“그녀를 보내 줘. 우리도 돌아가야 해.”고승겸은 여지경이 하는 말을 들으며 남연풍이 떠나가는 쪽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에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남연풍의 뜻에 따라 소만리와 기모진은 남사택이 살던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그곳은 사실 그녀의 부모님이 오래전에 남긴 집이었다.집에 들어서자 남연풍은 원래 자기가 쓰던 방으로 옮겨졌다.예전에 이 집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었고 분위기도 그렇게 시끌벅적하지 않았다.그러나 예전과 비교해 보니 지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남연풍의 몸이 스스로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어서 소만리는 누군가 그녀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남연풍은 소만리의 호의를 거절했다.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원하지 않았고 단지 여기서 자생자멸하며 이 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남연풍의 어두운 마음을 간파한 소만리는 한마디 충고했다.“남사택은 당신이 이러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초요도 마찬가지예요. 더 이상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행동은 하지 않길 바랄 거라구요. 이건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을 슬프게 할 뿐이에요.”남연풍은 눈시울을 붉히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 세상에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이제 없어요.”그녀는 소만리의 눈을 마주 보았다.“해독제 받았죠? 상자 안에 용법을 써 놓았으니까 기모진의 몸속에 있는 독소는 곧 완전히 제거될 거예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속죄인 셈이죠.”“날 도와줘서 고마워요. 이제 나 좀 혼자 있고 싶어요.”남연풍은 소만리와 기모진이 지금 떠나주기를 에둘러 말했다.소만리는 남연풍을 혼자 두는 것이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기모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소만리, 우리 이제 돌아가자. 요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잖아. 혼자 있고 싶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지
고승겸은 베개를 살포시 들어보았다. 작은 노트였다.겉표지에 쓰인 글씨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남연풍의 것임을 한눈에 알게 해 주었다.고승겸이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남연풍의 일기장이었다.내용은 AXT69의 해독제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매일의 실험 데이터를 기록한 것이었다.역시 그녀는 해독제를 만드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녀는 작은 데이터 하나하나도 모두 꼼꼼히 기록해서 다음 데이터가 더 완벽해지도록 노력했다.고승겸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천천히 훑어보다가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인 해독제가 완성되는 날의 기록까지 왔다.고승겸은 실험 데이터를 기록해 놓은 곳 말미에 남연풍이 쓴 코멘트를 보았다.이를 본 고승겸의 두 눈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일기장을 쥔 손가락이 떨림과 동시에 눈에서는 시커먼 증오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그는 갑자기 일기장을 덮었고 온몸이 사나운 기운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남연풍의 침실에서 나왔다.그때 마침 여지경은 고승겸을 찾아 위층으로 올라왔는데 고승겸이 노기 어린 얼굴로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승겸아, 너 왜 그래? 우리 산비아로 가야 돼.”“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고승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여지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남연풍 만나러 가려는 거야? 잠시 연풍이를 혼자 좀 내버려둬. 방해하지 말고.”“저 분별없는 사람 아니에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아요.”고승겸은 여지경이 끼어들 틈도 없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내려갔다.“승겸아, 승겸아!”여지경은 말리고 싶었지만 고승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남연풍은 혼자 침대에 누워 깊은 잠을 잤고 일어났을 때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그녀는 소만리가 떠나기 전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간 것이 떠올랐다.그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음식과 물이 있었다.그러나 순간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남연풍은 힘겹게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손톱깎이를 손에 쥐었다.사택아, 엄마 아빠, 초요,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한 내 아기. 내가 속죄하러 갈 테니 기다려 줘.남연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손톱깎이를 자신의 손목에 대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죽음을 결심했다.그런데 그녀가 손톱깎이를 손목에 그으려 했을 때 마침 침실 문이 확 열렸다.남연풍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눈물로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에 차갑고 어두운 표정을 한 고승겸의 모습이 들어왔다.성큼성큼 다가오는 고승겸을 바라보며 남연풍은 손에 쥔 손톱깎이를 움켜쥐었고 눈에는 초조함과 반발심이 드리워졌다.“고승겸, 왜 넌 자꾸 날 방해하고 못살게 구는 거야?”남연풍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예전에는 그녀가 그토록 많이 사랑하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짜증만 나는지 그녀도 모를 일이었다.고승겸은 냉랭한 얼굴로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그는 모든 것을 경멸하는 왕처럼 높은 곳에서 남연풍을 힐끔 내려다보았다.“남연풍, 당신은 정말 날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군.”고승겸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손을 들어 남연풍의 일기장을 그녀의 곁에 세차게 내동댕이쳤다.남연풍은 고승겸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자신의 일기장을 보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이게 뭔지 기억나지?”고승겸이 얇은 입술을 가볍게 들썩이며 물었다.그는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애써 분노를 참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남연풍을 노려보았다.남연풍은 당연히 자신의 일기장을 알아보았다.얼마 전 AXT69 해독제를 개발할 때 데이터를 기록해 두고 코멘트도 써 두던 것이었다.하지만 갑자기 남연풍의 눈이 번쩍였다.그녀는 해독제를 완성한 날 맨 마지막에 감회를 적어둔 것이 생각났다.고승겸은 남연풍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보자 마음속의 분노는 더욱더 치밀어 올랐다.“남연풍, 너 정말 잘났어!”고승겸은 비꼬며 말했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분
고승겸이 눈을 가늘게 뜨자 음산한 기운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왔다.남연풍은 마음이 초조해지긴 했지만 이미 죽음도 두렵지 않은 몸이 되었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고승겸, 내가 선택한 길은 내가 감당할 테니까 더 이상 내 삶에 간섭하지 말아 줘.”“당신이 내 아이를 죽였는데 이제 와서 당신 삶에 간섭하지 말라고? 남연풍, 당신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똑똑히 보여줄게.”고승겸은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그녀의 턱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고승겸, 뭘 하려는 거야? 뭘 하고 싶은 거냐구? 난 당신과 함께 산비아로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날 강제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남연풍은 강하게 저항했다.고승겸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곧 알게 될 거야. 내가 뭘 하고 싶은지.”“...”남연풍은 입술을 들썩여 보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다만 그녀는 고승겸의 눈 속에서 진한 증오의 불꽃이 타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증오?그녀가 그를 속인 것에 대한 강한 배신감에 증오가 불타오른 것인가?아니면 처음부터 아이를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그녀에 대한 원망 때문인가?...저녁 무렵, 소만리는 혼자 차를 몰고 남사택이 살던 집으로 갔다.남연풍은 혼자 있고 싶다고 했지만 낮시간을 보내는 동안 돌봐줄 사람이 없어 남연풍이 적잖이 힘들었을 거라고 소만리는 생각했다.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고 게다가 유산한지 얼마되지 않은 환자가 어떻게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을까.소만리는 현관 비밀번호를 기억해 두었기 때문에 쉽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런데 들어가고 보니 소만리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남연풍의 방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방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소만리가 가까이 가 보니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남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