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야, 속지 마. 요새는 나쁜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처럼 생겼어. 너랑 동생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낯선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 돼.”경비 아저씨는 진지하게 훈육을 하고 기여온을 안은 채 돌아서며 기란군에게 주의를 주었다.“꼬마야, 얼른 따라와. 곧 수업 시작할 거야.”기란군도 더 이상 경비 아저씨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자풍에게 다가가 작은 얼굴을 들었다.“이거, 돌려줄게요. 내 여동생이 싫대요.”기란군은 손을 뻗어 건네주었다.강자풍은 기란군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상자를 보고 실망한 듯 웃으며 상자를 받아들었다.이렇게 거부하며 자신을 피하려는 기여온을 돌아보며 강자풍은 상자를 손에 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여온아, 오빠가 찾아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오빠는 네가 클 때까지 기다릴 면목도 없고 네가 잘 크는 걸 바라볼 자격도 없어. 여온아, 건강하게 잘 지내. 나중에 혹시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네가 아주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강자풍은 작은 상자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여온이는 오빠한테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어. 이제 그 기쁨을 여온이한테 돌려줄게. 영원히 행복하고 기쁜 하루하루를 살길 바래.”강자풍은 작은 상자를 기여온의 손에 쥐여주었다.기여온은 유리처럼 큰 눈을 들어 갑자기 강자풍을 바라보았다.강자풍은 봄날의 햇살 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여온아, 잘 있어.”그는 말을 마치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훌쩍 돌아섰다.기란군은 한발 앞서 강자풍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정말 가는 거예요?”강자풍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기란군을 한번 슬쩍 돌아보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걸어갔다.기여온은 강자풍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왕방울만 한 눈에 어느새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그녀는 눈을 찡그리며 작은 손으로 상자를 살짝 열어 보
자신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선 경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바다를 마주 보았다.경연, 이 게임은 당신이 질 거야.경연은 소만리가 이미 숨으러 간 것을 눈치채고 손목시계를 유유히 바라보았다.10분을 채우기 위한 마지막 초침의 움직임을 확인한 후에야 경연은 비로소 몸을 돌렸다.이 작은 섬에는 고작 작은 집 하나 달랑 있었다.집의 구조도 상당히 간단해서 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그는 결코 30분 안에 소만리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나 1분 1초가 지날수록 경연은 집안에서 소만리를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안가에 정박해 둔 요트에도 찾아보았지만 소만리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이 작은 섬에서 증발한 것처럼 작은 실마리 하나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이 작은 섬은 거의 한 눈으로 모든 것이 다 파악될 정도였다.이렇게 작은 집 하나밖에 없고 달리 특별한 은신처도 없는데 소만리는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걸까?경연은 기가 막혔다. 얼굴은 초조함에 타들어갔고 입술이 바싹 말랐다.그는 결코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소만리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또 시계를 쳐다보았다. 게임 종료까지 앞으로 10분도 남지 않았다.경연은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찾아보았다.침대 밑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소만리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는 집 밖으로 다시 나가 넓고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그의 마음이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소만리, 정말 당신이 이긴 거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내 마지막 한 달 동안만인데. 당신은 그 시간조차도 내 곁에서 머물고 싶지 않은 거였어. 허.”경연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쓴웃음을 지었고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게임이 거의 끝날 시간이 될 무렵 그는 눈앞의 작은 집을 향해 말했다.“소만리, 이제
”좋아, 지금 당장 여기서 보내주지.”그는 몸을 돌려 요트로 향했다.소만리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목욕가운을 몸에 걸치고는 곧장 경연을 따라 요트에 올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연은 요트에 시동을 걸었다.소만리는 마음속의 큰 돌이 내려앉는 듯했다.모진, 곧 당신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세 아이를 걱정했다.그녀를 사칭한 그 여자가 기모진과 아이들에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꾸밀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기모진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이 여자도 대놓고 아이들을 해코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그녀를 사칭하고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서는 현모양처 역할을 잘 해야 했다.이렇게 생각하니 소만리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소만리가 갑판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았다. 그러나 갑자기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그녀는 목욕가운을 몸에 걸치고도 자신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늦가을인데다 이제 막 바닷물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소만리는 조금 춥게 느껴졌다.그녀는 돌아서서 요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눈을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경연을 보았다.경연은 요트를 자율주행 모드로 설정해 두었다.짧은 그녀의 단발머리가 바람에 이리저리 헝클어지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그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당신 예전에 그랬지. 하늘이 왜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려는지 모르겠다고. 왜 한쪽만 설레게 하느냐고 말이야.”경연은 갑자기 소만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예전에 소만리도 이런 고민으로 아파했던 적이 있었다.“이 세상의 모든 감정이 서로 반응을 보인다면 애가 탄다든가, 마음이 부서진다든가 하는 그런 단어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거야.”소만리는 차분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바닷바람을 타고 경연의 마음속을 훅 들어와 아프게 헤집어놓는 것 같았다.그의 마음이 갈수록 쓸쓸하게 차가워졌다.“경연, 난 당
소만리는 경연을 차갑게 흘겨보며 말했다.“이제 자유야.”그녀는 갑판의 난간 밖으로 훌쩍 몸을 던졌다.경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소만리!”그는 재빨리 팔을 뻗어 소만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소만리의 결연한 의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망망대해로 이끌었다.“소만리!”경연은 너무나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소만리가 그런 행동을 보이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그녀는 줄곧 그렇게 강직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였었다.그녀의 몸은 바다속으로 몸을 감추었고 희끗희끗한 물보라만이 그녀의 흔적이 여기에 있음을 말해주었다.그 잔잔한 물결 속에서 불현듯 머리를 내밀고 있는 소만리를 발견하자 경연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그제야 경연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던 걱정과 공포가 조금 사라졌다.소만리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수영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경도까지 헤엄쳐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작은 섬까지는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도착해서는 다시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소만리는 경연에게 또다시 알 수 없는 곳으로 강제로 끌려가는 것보다 섬으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소만리,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경연은 열심히 바다 수영을 하고 있는 소만리를 향해 외쳤다.“다시는 당신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그 잠시 동안의 시간도 나한테 주지 않으려는 거야? 왜? 당신을 그렇게 마음 아프게 한 사람은 잘도 용서해 주더니 왜 당신을 따뜻하게 대한 사람한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소만리, 당신 정말 무정해!”경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쓰는 경연의 얼굴이 마치 사랑에 빠진 마귀 같았다.소만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경연이 편집증적인 성격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아마 앞으로도 더없이 쓰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 그녀는 미안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제가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어요.”그 당시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마음에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희망의 샘물 같았다.그녀가 건넨 오백 원짜리 동전이 그의 꿈을 이루어주었던 것이다.옛 시절을 회상하던 경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그의 잿빛 눈동자에 진심으로 사모하는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그는 이렇게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소만리.”그는 소만리를 향해 외쳤다.“고마워.”다시 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결국 용서해 줘서 고마워.“경연, 안 뛰어내리고 뭐해! 얼른 뛰어내려!”“펑!”요트가 갑자기 폭발하면서 강한 기류와 열기가 소만리가 있는 곳까지 덮쳤다.“앗!”소만리가 놀라 외치며 얼른 얼굴을 가렸지만 강한 폭발력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녀는 온몸이 튕겨져 나갔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귀도 윙윙거렸다.동시에 머릿속에 모든 상념이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잠시 정신을 잃었는지 어리둥절해 있던 소만리는 누군가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는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그녀의 모든 지각과 감각은 점차 희미해져갔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즈음, 따가운 햇살이 그녀의 눈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눈을 찌푸리던 소만리는 제대로 눈을 떠보려고 애썼지만 허사로 돌아갔고 따끔따끔한 통증이 얼굴과 피부에 스멀스멀 번지는 것을 느꼈다.“엇.”소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이 아가씨가 깨어난 것 같아.”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소만리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아가씨가 자신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소만리는 아픈데도 억지로 눈을 떠서 눈앞의 상황을 똑똑히 보려고 했다.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며 소만리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희미하게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그 검은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소만리는 일어나려고 애써보았지만 온
소만리는 눈을 크게 떴다.거울 속 이 여자가 자신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두꺼운 거즈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얼굴.눈을 제외하고는 한 치의 피부도 볼 수 없는 미라 같은 얼굴!그녀의 얼굴이...소만리의 두 발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천천히 만졌다.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형편없이 망가졌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아가씨, 괜찮으세요?”옆에 있던 젊은 시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소만리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서 시중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그녀는 뭔가를 물어보려고 입을 떼었지만 몇 마디 채 하지 못하고 목이 잠겨버렸다.“아가씨는 얼굴이 심하게 다쳤어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육 선생님은 실력이 아주 좋은 의사 선생님이니까 빨리 완쾌되실 거예요.”젊은 시중이 아주 다정하고 상냥하게 소만리를 위로했다.하지만 소만리는 차디찬 얼음 호수에 빠진 듯 온몸은 물론 뼛속까지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온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지고 두 다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시중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너무 부정적인 생각하지 마세요. 잘될 거예요.”잘될 것이다.소만리는 이 말이 지금의 자신에게 너무나 사치스럽게 느껴졌다.초점을 잃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부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우선 먼저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젊은 시중이 친절하게 조언했다.소만리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시중이 이끄는 대로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그녀는 침대에 앉아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결국 눈물방울을 떨구고야 말았다.참 기구하고도 슬픈 인생이다.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는 이때 마침 자신의 얼굴이 망가지고 목
”여기가 어디죠?”소만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남자의 걸음걸이가 서서히 느려지며 그는 살짝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강직하고 완벽해 보이는 턱선은 빛을 받아 더욱 유려하게 빛나고 있었다.“여기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집에 가고 싶으면 어서 눈물부터 거두어.”그의 목소리는 그의 기질만큼이나 차가웠다.소만리는 손수건을 움켜쥐었다.“당신이 날 구한 건가요?”“마침 그쪽을 지나가던 길이었어.”그의 대답은 군더더기가 없이 똑떨어졌다.소만리는 그때 요트가 폭발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요트가 접근해 오는 것을 보았다.아마 이 남자는 그때 그 요트에 타고 있다가 마침 경연이 타고 있던 요트가 폭발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구했을 것이다.“고마워요.”소만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그리고 동시에 그때 요트에 타고 있던 경연을 떠올렸다.“내 친구, 내 친구도 구했나요?”“친구?”남자가 의아해하며 돌아섰다.“그때 요트를 몰고 당신을 쫓아오던 그 남자 말인가?”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네. 맞아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만리를 바라보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대답했다.“당신 몸이나 걱정해.”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분명 경연도 많이 다쳤을 것이다.하지만 경연은 지금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녀도 알 길이 없다.그녀는 손수건을 들어 살며시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그렇다. 이렇게 울고 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어왔는데 이 정도로 두려워할 그녀가 아니다.소만리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밤이 되자 헛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정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그녀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갑자기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녀는 예전에 기모진도 요트 폭발 사고를 겪었던 일을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진정시키고 한 가닥 희망을 품어 보았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알고 싶으면 어서 따라와. 꾸물꾸물 대지 말고.”매몰차고 차가운 남자의 짜증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만리의 발걸음이 아직도 여전히 둔한 것은 그날 요트가 폭발한 위력이 대단해서 온몸에 기운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느릿느릿 발을 내디뎠고 두 시중은 그녀가 넘어질까 봐 걱정하며 조심스레 소만리의 뒤를 따랐다.소만리는 시중들의 이런 섬세한 보살핌에 감동했다. 자신이 구조된 것은 정말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별장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모든 장식과 배치는 영국풍이었고 작은 장식품에서 큰 탁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매우 소박해 보였지만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소만리는 점점 자신을 구해준 이 남자의 신분이 보통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좋은 마음으로 그녀를 구해줬을 뿐인데 거기다 대고 꼬치꼬치 이 사람의 집안 배경에 대해 깊이 파고들 이유도 없었다.소만리는 묵묵히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사실 다른 것에 신경 쓸 힘도 없었다.별장은 규모가 매우 커서 소만리는 입구를 나오는 데에도 몇 분이나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화원의 오솔길을 통해 소만리는 눈앞에 작은 현대풍 독채 건물이 있는 것이 보였다.문 앞에 이르자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당신 친구가 안에 있으니 직접 들어가 봐.”그는 뒤돌아보며 소만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소만리는 이 남자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비로소 앞에 있는 작은 독채로 시선을 옮겼다.경연이 이 안에 있을까?그녀는 묵묵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방에 들어서자 회색빛 인테리어 장식에 왠지 음침한 분위기가 엄습해 왔다.집이 크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리고 눈앞의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