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이구나.”기 할아버지의 말투는 여전히 경쾌하게 들렸고 최근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신 모양이었다.“어떻게 할아비한테 전화할 시간이 다 있었어? 소만리랑 애들 데리고 놀러 오지 않으련?”기모진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아내조차 제대로 보호하고 있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할아버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기모진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말했다.기 할아버지도 아무런 의심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온화하고 자상하게 말했다.“할아비한테 무슨 일을 묻고 싶은 거냐?”“경 씨 집안 말인데요.”전화기 너머 할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경 씨 집안? 그 경도 4대 명문가 중 하나인 그 경 씨 집안 말이냐?”“예. 할아버지, 우리 집안이랑 그 경 씨 집안 사이에 무슨 사연 같은 거 있어요? 그 집안에서 15년 전에 돌아가신 그 어르신, 아는 분이세요?”이 말이 떨어지자 할아버지는 확실히 당황하는 눈치였다.기모진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할아버지?”“모진아, 먼저 말해보거라. 무슨 일이 생긴 게냐?”할아버지가 되물었다.즉답을 피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기모진은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그는 원래 할아버지에게 자신과 소만리에 대한 걱정을 더 이상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을 파악하지 않으면 소만리가 경연의 손아귀에서 계속 괴롭힘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소만리가 계속 경연의 통제 아래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기모진은 지금의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할아버지께 설명을 드렸고 할아버지는 이를 다 들은 후 유달리 놀라워하며 말했다.“뭐? 그 어르신 손자가 소만리와 소만리 부모님을 잡아놓고 통제하고 있다고?”그 어르신?기모진은 방금 이 말이 경연의 할아버지를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소만리는 비장한 결정을 내린 후 경연을 찾아갔다.경연은 마침 마당에 한가롭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오후의 햇살이 그의 등 뒤로 부서졌고 맑고 깨끗한 그의 용모는 더욱 온화해 보였다.옥처럼 매끈하고 촉촉한 남자의 가면을 벗겨내면 섬뜩한 악마의 얼굴이 민낯을 드러낸다.소만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그에게로 비장하게 다가갔다.경연은 소만리가 걸어오는 모습을 곁눈으로 흘끗 보고는 깊은 눈동자를 번쩍 들어 올려 소만리의 청아하고 아담한 얼굴에 시선을 떨어뜨렸다.산뜻하게 드러난 그녀의 쇄골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는 자신감과 굴복시켰다는 승리감이 가득한 듯 보였다.“무슨 일로 날 보러 온 거야? 아니면 이미 생각 다 끝낸 거야?”읽고 있던 책을 덮은 그의 모습에 자신감이 가득 피어올랐다.소만리는 경연에게 다가갔다. 다시 이 남자를 마주하니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경연.”“그래, 말해봐?”그는 느긋하게 대답하며 소만리의 얼굴에 눈길을 돌렸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그래.”소만리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내가 당신 말을 잘 듣고 당신의 꼭두각시처럼 산다고 해도 당신은 내 부모님 가만두지 않을 거잖아?”“당신 틀렸어.”경연은 몸을 일으켰고 그의 대답에 소만리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경연도 소만리의 눈에 비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포착하였고 웃으며 말했다.“만약 당신이 내 말을 잘 듣고 순종한다면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때를 봐서 경도로 돌아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할 거야.”이 말을 들은 소만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정말?”경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모든 게 당신 하기에 달린 거지.”그의 대답은 소만리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그럼 만약 내가 하는 일이 당신 마음에 든다면 정말 내 부모님을 놓아줄 수 있다는 거야? 그럼 난? 나도 놔
경연은 아무리 흉악하고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소만리는 경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그의 힘은 그녀의 뼈를 부숴버릴 정도였다.어쩔 수 없이 소만리는 포박당한 채로 경연의 뒤를 따랐고 걷기 불편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다 신발 두 짝이 떨어져 나갔다.경연의 온몸에는 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예전의 온화하고 겸손한 도련님의 자태는 온데간데없었다.그는 소만리를 집 저장실로 끌로 갔다.안에는 각종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고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공간에 낡은 곰팡이 냄새만이 진동을 했다.경연은 소만리를 벽 쪽으로 밀쳤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튀어져 나올 듯한 두 눈으로 사나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려는 거야? 꼭 내가 당신을 괴롭히게 만들어야겠어? 소만리, 잘 들어. 난 당신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는 않아. 당신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하지 않는다구!”소만리는 입술을 오므리며 갑자기 비꼬듯 웃었다.“당신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경연, 당신이 날 어떻게 괴롭히든, 기껏해야 날 죽이는 거지만 절대 기모진을 이기지는 못 해! 영원히! 꿈도 꾸지 마!”경연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그는 손바닥으로 소만리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조르며 음흉한 눈빛으로 말했다.“소만리. 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단 말이지?”“두려워.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까 봐!”“너...”경연은 폭발할 듯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순간 손가락에 모든 힘을 가중시켰다.소만리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용서를 빌지도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다.경연은 소만리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더 힘을 주고 싶었지만 그는 갑자기 손에 더 힘을 줄 수 없었다.그는 자신이 소만리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호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었다.만약 그가 소만리를 사랑한다면 이 게임은 반드시 지는 거라고
소만리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경연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죽일 거면 죽여. 앞으로 기모진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게 죽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요 며칠 그녀는 이미 경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도 무뎌졌고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능력도 없었다.경연은 지금 이런 태도를 보이는 소만리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굳이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려 하다니. 소만리,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경연의 말간 얼굴이 갑자기 분노로 흉악하게 일그러졌다.그는 소만리를 차가운 바닥에 대고 눌렀고 통제력을 잃은 호랑이처럼 거칠고 사납게 그녀의 윗옷을 찢었다.“꺼져!”소만리는 강하게 저항했다.경연은 그녀의 두 손을 필사적으로 잡았고 한 손으로 소만리의 머리를 꽉 잡은 후 고개를 숙여 얇은 입술을 소만리의 입술에 가져갔다.소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경연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닿았고 그 부드러운 감촉은 경연의 마음속 억눌린 감정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그의 눈에는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고 그 순간 자신이 소만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그녀를 얻으려는 것이 단순히 기모진에 대한 복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진실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하지만 그의 격렬한 접촉에 소만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그녀는 경연의 팔을 물었다. 경연이 잠시 정신을 잃은 틈을 타서 얼른 일어나 저장실 문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두어 걸음 떼었을 때 그녀의 발바닥은 깨진 밥그릇 파편을 밟아버렸다.신발도 신지 않은 그의 발에 파편이 그대로 박혀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소만리는 발바닥이 찢기는 고통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파편을 밟고 뛰쳐나갔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내면에 쌓였던 두려움이 그녀를 경연의 통제권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경연은 소만리에 대한 마음속 애증이 베어 나온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시중을 불렀다.“남사택을 불러와. 어서!”시중은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 실험실에 있는 남사택을 부랴부랴 불렀다.남사택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손과 발에 피를 흘리고 있는 소만리가 보였고 침대 시트 군데군데 핏자국이 어지러이 물들어 있는 것이 보기 흉했다.“당장 상처 치료 좀 해 줘.”경연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남사택은 즉시 약 상자를 가져왔다.그는 피곤하고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는 소만리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애써 목소리를 낮추려는 듯 남사택은 경연이 나간 방문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당신네 두 부부 이제 좀 그만 고집부려, 응?”소만리는 갑자기 눈빛이 변했다.담담한 표정의 남사택을 바라보았고 그가 말하는 ‘두 부부’가 누굴 말하는 건지를 구분하지 못했다.남사택은 소만리의 얼굴빛이 변하는 걸 알아차렸지만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주의해. 그렇지 않으면 염증이 생겨서 괴로운 건 당신 자신이 될 테니까.”그가 주의하라는 말을 남기자마자 경연의 모습이 다시 방문 앞에 나타났다.소만리는 다가오는 경연을 경계하며 그와 거리를 두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경연은 곧장 그녀 앞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그녀의 허리를 걷어 올렸다.“또 뭘 하려고 이러는 거야! 경연, 내려줘!”소만리는 경연이 계속 그런 일을 강요할까 봐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경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소만리를 그의 방으로 데려와 침대에 내던졌고 냉랭한 얼굴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소만리는 붕대로 감싼 발끝으로 쫓아갔지만 경연이 문을 잠가 버렸다.“경연, 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 우리 부모님 건드리지 마!”문짝을 사이에 두고 소만리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그녀의 심장 박동은 이미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뛰고 있었다.
기모진은 화면 속 경연의 곱지 않은 웃음과 그가 한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초조함을 느꼈다.그는 경연이 이런 영상 전화를 한 것이 분명히 소만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경연, 소만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기모진은 도무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그가 소리쳐 물었지만 경연은 그저 웃기만 하며 카메라 화면을 돌렸다.카메라 렌즈가 비추는 것은 덩그런 마루뿐이었다.“경연, 말해봐!”기모진은 점점 더 온몸이 동요되기 시작했다.경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모진의 반응을 보았다.기모진이 불쾌해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통쾌함을 느꼈다.그는 기모진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방금 소만리가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가 피로 물든 침대 시트를 카메라에 비추었다.선홍색 핏빛이 기모진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는 마치 칼로 베인 듯 가슴이 저릿저릿했고 눈에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기모진, 봤어? 침대 시트 위에 선명한 붉은색 봤지?”경연은 일부러 기모진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었다.“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서 나온 피야.”그는 화면 속 기모진의 놀란 모습을 보고 기모진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경연! 도대체 소만리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어!”이 순간 기모진은 피가 거꾸로 솟으며 미칠 것 같았다!그는 감히 소만리의 지금 상황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경연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그녀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울지 기모진은 도저히 깊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경연.”기모진은 이를 갈며 증오하는 듯 얇은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말투는 한겨울 눈보라보다도 더 매서웠다.“소만리가 오늘 흘린 핏값은 내가 두 배로 갚아줄 거야.”경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카메라를 돌려 도도하고 경멸에 가득 찬 두 눈으로 차갑게 핏대를 세운 기모진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경연은 증오의 빛을 가득 담아 말했다.“기모진, 할 말이 있거든 날 찾기나 하고 해.”“널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기모진은 책상으로 돌아와 CCTV를 계속 살펴보려 했지만 이미 정신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버렸다.그의 머릿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경연에 의해 구석으로 내몰린 채 괴롭힘을 당하는 소만리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상처투성이가 되어 선혈이 낭자한 소만리의 모습을 상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소만리.”기모진은 안절부절못하며 창가를 왔다 갔다 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그는 집을 나왔고 아까 살펴본 CCTV 기록에 의지해 경연의 차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곳에 차를 세웠다.기모진이 주변 상황을 살피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지금 그녀는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어요.]메시지 속에 지칭하는 그녀는 분명 소만리일 것이다.기모진의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런 메시지를 보냈는지 궁금해졌다.설마 그날 창고에서 그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소만리는 경연의 방에 갇혀서 하룻밤을 지냈다. 경연도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이것은 분명 소만리에게 좋은 일인 셈이다.날이 밝았고 남사택과 시중이 연달아 들어왔다.시중은 소만리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남사택은 약 상자를 들고 소만리에게 다가와 상처를 다시 싸매주었다.예전에 소만리는 남사택의 접근을 거부했지만 지금은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남사택은 소만리가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침착한 표정으로 소만리의 상처를 싸매는 것에만 집중했다.이때 시중이 그녀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남사택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계속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우선 상처부터 낫게 하는 게 좋을 거야.”그는 무심한 듯 내뱉고는 약 상자를 들고 돌아서려고 했다.“남사택.”소만리가 돌아서는 남사택을 불러 세웠다.그녀가 발끝으로 몸을 일으켜 남사택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경연이 문밖에서
소만리는 밤낮으로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핸드폰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경연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올려다보았다.그녀는 놀란 눈으로 기모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화면을 쳐다보았다.그러나 경연이 갑자기 화면을 돌려버렸고 소만리는 핸드폰 뒷면에 비친 카메라만 보일 뿐이었다.모진, 당신이야?당신 목소리 맞지?소만리는 벌떡 일어나 끝까지 화면을 보려고 애써보았지만 걸음을 옮기자마자 경연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 끌어당겼다.그는 소만리의 몸을 돌려 그녀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키고 손바닥으로 소만리의 턱을 꽉 조여 정면의 핸드폰 화면을 보게 했다.소만리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경연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순간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기모진의 얼굴이 파고들었다.“모진...”“소만리!”기모진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하게 귓가로 미끄러져 들려왔다.화면 속 초조한 표정의 남자를 바라보는 소만리의 눈가에 자신도 모르게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그녀는 기모진이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인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경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경연에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기모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소만리의 의도를 간파한 경연이 그녀에게 그런 기회를 줄 리 만무했다.경연은 오히려 소만리의 턱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했다.기모진은 자신의 심장이 두 동강 나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기모진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소만리의 긴 머리가 싹둑 잘려 단발로 변했다는 것이다.예전에 하얀 얼굴에 홍조를 띤 복숭아 같은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초췌하고 창백하게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어느 한구석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여전히 경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소만리의 힘겨운 모습에 기모진의 가슴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욱신거렸다.이 아픔을 그는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녀가 바로 눈앞에 다른 남자에게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는데 그는 정작 그녀를 위해서 아무것도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