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납치범에게 걸려온 전화인 줄 알았는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만리, 당신 벙어리 딸 못 찾아서 걱정이지?”앞서 걸어가던 소만리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누구야?”“내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고, 당신 벙어리 딸이 곧 당신 부모님 곁으로 갈 거라는 것만 알면 돼.”여자는 비꼬는 말투로 이 말만 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기모진은 차에 올라타 소만리가 멀찌감치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차에서 내려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소만리, 당신 기란군 데리고 집에 있어. 난 여온이 찾아올게.”소만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기모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모진.”“걱정하지 마.”기모진은 소만리의 눈에 어린 걱정을 읽고 그녀를 달래며 가늘고 긴 눈에 깊은 애정과 애틋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날 믿어. 내가 꼭 우리 귀한 딸 무사히 집으로 데려올게.”우리 귀한 딸.소만리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기여온을 아끼는 기모진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그래, 당신이 우리 딸 집에 데려올 때까지 기다릴게.”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응.”기모진은 소만리의 머리를 애처롭게 만지작거리다가 차를 몰고 떠났다.소만리는 집으로 돌아와 여온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방금 걸려온 전화가 너무 마음에 걸렸다.이 여자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었다. 소만리가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말투로 보아 소만리를 아주 싫어하는 분위기였다.소만리는 서둘러 이 전화번호를 조사해 보았더니 해외에서 온 전화였다.그녀는 힘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끝없는 번뇌와 알 수 없는 어둠이 그녀를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엄마.”소만리는 기란군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그녀가 눈을 들어보니 아이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그녀에게 건네는 것이었다.“엄마, 물 좀 마셔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란군이 같이 있어 줄게요.”소만리는
경연은 소만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차에서 내려 소만리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차에 타.”소만리는 지금 기여온에게 온 마음이 쏠려 있어 경연과 옥신각신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무슨 일로 날 찾아왔어?”“기모진의 몸속 독소를 제거하는 시약 갖고 싶지 않아?”소만리는 눈을 들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차분한 표정을 하고 남자를 바라보았다.“타라니까.”“당신 차 타지 않을 거야.”소만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정말 시약이 있어도 나한테 쉽게 주지 않을 거잖아. 경연, 다시는 당신을 믿지 않을 거야.”소만리는 차갑게 돌아섰다.“만약 당신이 포기한다면 기모진이 당신 눈앞에서 죽는 것을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을 의미해. 독소에 중독된 사람이 죽기 전에 어떤 모습인지 알아?”“신경이 경색되고 피부가 썩어 가지. 마지막 죽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 채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되지.”경연의 이런 표현에 소만리의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먹을 홱 쥐고 돌아서서 곧장 경연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그 사람에게 정말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난 그 사람을 떠나지 않을 거야. 지금 나와 기모진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하는 거잖아? 경연, 당신 뜻대로 안 돼!”경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만리가 자신의 멱살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소만리, 생각해 봐. 정말 그런 날이 와도 당신 지금 그 결정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그의 말이 떨어지자 멱살을 잡고 있던 소만리의 두 손에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기모진이 언젠가 죽기보다 더 힘든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경연을 증오하는 소만리의 눈빛이 점차 진정되었다.“이혼 합의서 처리하려던 그날 사고가 났고 퇴원 후 언론에 폭로되었고 그로 인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호텔에 묵게 되었고 일용품을 가져다 달라고 나를 속인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당신 계획이었지?”경연은 소만리의 묻는 말에 담담한 표정
기모진의 말이 울리자마자 기모진은 칼집에서 튀어나온 칼날처럼 남자를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남자는 비록 몸집이 우람했지만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는 기모진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봉지를 버리고 돌아서서 뒤로 달려가면서 동시에 전화를 걸었다.“들켰어! 빨리 꼬맹이 데리고 도망가! 정 안 되겠으면 죽여 버려!”죽여 버려!이 말이 기모진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바로 달려가 한 발을 들어 그 남자의 등 뒤를 매섭게 걷어찼다.남자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심하게 넘어졌다.그러나 그는 다시 재빨리 일어나 계속 앞으로 뛰려고 했을 때 바로 앞에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순간 앞에 있던 사람에게 발길질을 당했고 육중한 몸은 기모진 앞에 널브러졌다.그는 다시 일어나려다 가슴 갈비뼈가 부러진 듯 얼굴이 창백해졌고 몸을 펴지 못하고 괴로워했다.기모진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강자풍을 의아해하며 바라보았다.그러자 강자풍은 아빠인 기모진보다 더 흉악하게 달려들어 땀투성이가 된 남자를 잡아당겼다.“말해! 여자아이 어디로 데려갔어! 지금 어딨냐고!”“당신이 이놈을 때려서 말을 못 하게 되버렸군.”기모진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갑자기 타이어 마찰음이 날카롭게 들렸다.기모진과 강자풍이 동시에 눈을 들어보니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후진했고 뒤따라 핸들을 꺾고 곧장 도로로 돌진했다.기모진과 강자풍은 동시에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꼈다.그 차가 그들의 눈앞을 지나가는 순간 그들은 동시에 뒷좌석 차창을 보았다.기여온은 그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내밀었다.꼬마는 입을 열지 못하고 묶인 두 손으로 끊임없이 차창을 두드렸다.기모진과 강자풍이 이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여온아!”차체가 심하게 한 번 흔들렸지만 그들은 모두 기여온의 눈에 무력하고 갈망하는 눈빛을 잊을 수가
꿰뚫어보는 듯한 기모진의 눈동자가 강자풍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강자풍, 내가 왜 이런 모습으로 변했는지 알아?”강자풍은 기모진이 이 말을 할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회색 머리카락, 호박색 눈동자의 기모진을 보니 이전 그의 모습과 달라져도 너무나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기모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강자풍이 멍하니 있으니 곧이어 기모진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너의 누나 강연이 만성 독소를 이용해서 날 이 꼴로 만들었어.”“뭐?”강자풍은 너무 놀라 되물었다.“강연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어? 어떻게 당신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허.”기모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여자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세상에서 오직 소만리만이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강자풍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에게 왜 강연 같은 누나가 있는지 더욱 혐오스러웠다.차 안의 분위기는 잠시 침묵에 빠졌고 잠시 후 강자풍은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기모진, 당신 방향 잘못 잡은 거 아니야? 왜 아직도 그 차가 발견되지 않는 거야?”기모진은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그 골목을 나오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오지. 하나는 시내로 하나는 교외로. 난 그 납치범이 이런 퇴근 시간에 차가 막히는 길을 택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강자풍이 듣기에 꽤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달려왔는데도 그 차가 발견되지 않자 여전히 기모진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바로 그 순간, 바로 앞쪽에서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큰일 났어! 설마 그놈들 차가 사고 난 건 아니겠지!”강자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모진은 액셀을 세차게 밟아 앞으로 달려갔다.1킬로미터쯤 전진한 후에 그는 검은 차가 길가 나무에 부딪혀 차 앞 범퍼 전체가 움푹 들어간 것을 보았다.그런데 그 깡마른 남자는 발을 다친 듯 절뚝절뚝 걸어 나오며 뒷좌석으로 가서 기여온
미친 듯한 남자의 행동은 기모진과 강자풍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차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기모진과 강자풍은 동시에 여온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갔다.기모진의 마음은 마치 만 미터 상공에 매달려 자신 때문에 차디찬 바닥으로 떨어진 아이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산과 물을 사이에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기모진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는데 차가 갑자기 격렬한 폭발음을 내었다.“여온아!”강자풍이 절규하듯 외쳤다. 기여온의 작은 몸은 폭발하는 기류에 의해 튕겨졌고 기모진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떴다.그는 날아오르듯 달려가 땅에 떨어지려는 기여온을 가까스로 받았다.“여온아!”기모진은 아이를 품에 겨우 안았다.“여온아! 여온아!”어린 녀석은 힘없이 동그랗고 큰 눈을 깜빡거리더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움직이고 뭐라고 말하려는 듯했다.아빠.비록 작은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기모진은 기여온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여온아! 여온아!”기모진은 가슴이 뛰며 황급히 아이를 안았지만 아이의 등 뒤에 손이 닿자마자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손을 들어보니 선홍색 핏빛이 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여온아!”기모진의 눈에서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강자풍도 급히 달려와 이 광경은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여온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오빠랑 약속했잖아. 커서 오빠 여자친구 되겠다고. 여온아!”기모진은 강자풍이 지금 한 말을 따질 여유가 없었고 그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넌 가서 차를 가져와. 빨리!”그는 초조하고 불안하게 고함을 지르며 품에 안겨 얼굴이 점차 창백해지는 어린 공주를 보며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여온아, 아빠의 작은 공주님. 아빠가 잘못했어.아무 일 없을 거야. 아빠한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줘....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소만리는 경연의 차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기모진의 소식을 기다리고
소만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깨어나 보니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유일한 빛은 자동차 불빛뿐이었다.차 문을 열자 경연이 문밖에 서 있었다.“도착했어. 내려.”소만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한 후 차에서 내렸다.경연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였고 소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검은색뿐이었고 마치 거대한 천으로 세상을 뒤덮어 놓은 것 같았다.두 사람의 엇갈리는 발걸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몇십 미터를 걸었더니 앞쪽에 점차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경연은 눈동자로 잠금을 해제한 뒤 문을 열어 뒤따라오는 소만리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먼저 옛 친구를 만나 보기로 하지.”경연의 말이 떨어지면서 소만리의 눈에 한 줄기 그림자가 나타났다.그녀의 시선에 포착된 것은 그녀가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던 그 남자였다.“남사택?!”소만리는 너무도 뜻밖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이 바로 남사택이라고 확신했다!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남사택을 향해 걸어가려고 할 때 그녀 앞에 뭔가 투명한 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소만리는 주먹을 들어 벽을 힘껏 두드렸다.실험을 하고 있던 그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소만리를 본 남사택은 의외로 별로 놀라지도 않고 검은 뿔테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소만리, 오랜만이야.”소만리는 맹렬하게 투명한 벽을 쾅쾅 내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남사택,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 당신은 의사야! 의사의 사명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해치는 게 아니야!”소만리의 감정이 격해진 것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기모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남사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당신이 틀렸어. 난 의사로서 한 게 아니야.”“남사택!”“그때 난 당신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당신 몸으로 내가 하고 싶은 실험을 했을 뿐이야.”남사택은 소만리를
눈앞에 해독제를 본 소만리는 기모진을 생각했다.그녀는 기모진이 경연의 비열한 요구에 타협하는 걸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그러나 그가 극심한 고통에 치를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더 잘 안다.소만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확신에 가득 찬 경연의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경연, 당신이 요구할 수는 있어. 그렇지만 얼토당토않는 요구라면 난 당신과 타협하지 않을 거야.”경연은 소만리에게 다가가 손에 든 해독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마도 당신은 거절할 이유가 없을 거야. 기모진이 괴로워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승낙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병원.기모진은 초조하게 복도를 왔다 갔다 하였고 특유의 침착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의 손에는 아직 씻지 못한 여온의 피가 남아 있었다.기모진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기여온은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 했지만 그가 외면했다.이런 그의 행동이 얼마나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여온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아빠라고 부르려고 했었다.비록 그는 아직도 아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그 입모양은 분명히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아빠.그의 어린 공주가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기모진의 마음속에 수많은 유리 파편이 흩어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강자풍도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그는 당시 기여온과 기란군을 데리고 유치원을 떠난 것을 너무나 후회하고 있었다.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 기모진이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기모진은 노발대발하며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라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하고 강자풍을 꾸짖었다.“강자풍, 당신 뭐하러 우리 딸한테 찾아온 거야! 왜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왔어! 데리고 나왔으면 잘 돌봤어야지!”강자풍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기모진이 하는 원망을 다 듣고 있었다.“여온이 잘 돌보지
하지만 지금 기모진의 감정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기여온의 안위가 불분명하였고 아빠로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속의 불만과 불안을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이때 수술실 불이 꺼졌다.기모진은 급히 일어나 의료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선생님, 내 딸 어떻습니까? 피를 많이 흘렸는데 어디를 다친 겁니까? 내 딸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지요?”그는 횡설수설하며 물었고 눈에는 온통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빛이 가득했다.“아이는 등 뒤에서 쇳조각이 피부를 베고 들어와서 피를 많이 흘려 응급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제때 병원으로 이송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의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그러나 아이의 뇌에 심한 충격이 가해졌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태는 깨어나야 추가 관찰을 통해 알 수 있어요.”이 말을 듣고 기모진은 자신을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만약 그가 그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아이가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빨리 달려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작은 아이를 얼른 안아주었다면 그녀는 폭발하는 기류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모두 그의 잘못이다.이 빌어먹을 아빠.아이에게 아빠로서 사랑을 준 적도 없으면서 오히려 아이를 이런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기모진은 VIP 병동에 가서 잠에서 깨지 않는 작은 인형 같은 얼굴을 보고 자기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도 못하니 이 아이를 만나지 않는 편이 아이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줄곧 생각했다.그러나 그 어린 마음은 아빠의 사랑과 따뜻함이 절실하게 필요했음을 기모진은 간과했다.“여온아, 아빠가 잘못했어. 일어나면 아빠가 꼭 사과할게.”기모진은 기여온의 차갑고 작은 손을 잡고 입술에 갖다 대었다.얼굴이 창백한 아이를 보니 기모진은 도저히 소만리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는 아이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의 어린 공주는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