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듯한 남자의 행동은 기모진과 강자풍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차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기모진과 강자풍은 동시에 여온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갔다.기모진의 마음은 마치 만 미터 상공에 매달려 자신 때문에 차디찬 바닥으로 떨어진 아이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산과 물을 사이에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기모진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는데 차가 갑자기 격렬한 폭발음을 내었다.“여온아!”강자풍이 절규하듯 외쳤다. 기여온의 작은 몸은 폭발하는 기류에 의해 튕겨졌고 기모진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떴다.그는 날아오르듯 달려가 땅에 떨어지려는 기여온을 가까스로 받았다.“여온아!”기모진은 아이를 품에 겨우 안았다.“여온아! 여온아!”어린 녀석은 힘없이 동그랗고 큰 눈을 깜빡거리더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움직이고 뭐라고 말하려는 듯했다.아빠.비록 작은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기모진은 기여온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여온아! 여온아!”기모진은 가슴이 뛰며 황급히 아이를 안았지만 아이의 등 뒤에 손이 닿자마자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손을 들어보니 선홍색 핏빛이 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여온아!”기모진의 눈에서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강자풍도 급히 달려와 이 광경은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여온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오빠랑 약속했잖아. 커서 오빠 여자친구 되겠다고. 여온아!”기모진은 강자풍이 지금 한 말을 따질 여유가 없었고 그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넌 가서 차를 가져와. 빨리!”그는 초조하고 불안하게 고함을 지르며 품에 안겨 얼굴이 점차 창백해지는 어린 공주를 보며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여온아, 아빠의 작은 공주님. 아빠가 잘못했어.아무 일 없을 거야. 아빠한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줘....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소만리는 경연의 차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기모진의 소식을 기다리고
소만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깨어나 보니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유일한 빛은 자동차 불빛뿐이었다.차 문을 열자 경연이 문밖에 서 있었다.“도착했어. 내려.”소만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한 후 차에서 내렸다.경연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였고 소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검은색뿐이었고 마치 거대한 천으로 세상을 뒤덮어 놓은 것 같았다.두 사람의 엇갈리는 발걸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몇십 미터를 걸었더니 앞쪽에 점차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경연은 눈동자로 잠금을 해제한 뒤 문을 열어 뒤따라오는 소만리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먼저 옛 친구를 만나 보기로 하지.”경연의 말이 떨어지면서 소만리의 눈에 한 줄기 그림자가 나타났다.그녀의 시선에 포착된 것은 그녀가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던 그 남자였다.“남사택?!”소만리는 너무도 뜻밖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이 바로 남사택이라고 확신했다!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남사택을 향해 걸어가려고 할 때 그녀 앞에 뭔가 투명한 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소만리는 주먹을 들어 벽을 힘껏 두드렸다.실험을 하고 있던 그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소만리를 본 남사택은 의외로 별로 놀라지도 않고 검은 뿔테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소만리, 오랜만이야.”소만리는 맹렬하게 투명한 벽을 쾅쾅 내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남사택,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 당신은 의사야! 의사의 사명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해치는 게 아니야!”소만리의 감정이 격해진 것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기모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남사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당신이 틀렸어. 난 의사로서 한 게 아니야.”“남사택!”“그때 난 당신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당신 몸으로 내가 하고 싶은 실험을 했을 뿐이야.”남사택은 소만리를
눈앞에 해독제를 본 소만리는 기모진을 생각했다.그녀는 기모진이 경연의 비열한 요구에 타협하는 걸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그러나 그가 극심한 고통에 치를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더 잘 안다.소만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확신에 가득 찬 경연의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경연, 당신이 요구할 수는 있어. 그렇지만 얼토당토않는 요구라면 난 당신과 타협하지 않을 거야.”경연은 소만리에게 다가가 손에 든 해독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마도 당신은 거절할 이유가 없을 거야. 기모진이 괴로워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승낙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병원.기모진은 초조하게 복도를 왔다 갔다 하였고 특유의 침착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의 손에는 아직 씻지 못한 여온의 피가 남아 있었다.기모진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기여온은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 했지만 그가 외면했다.이런 그의 행동이 얼마나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여온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아빠라고 부르려고 했었다.비록 그는 아직도 아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그 입모양은 분명히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아빠.그의 어린 공주가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기모진의 마음속에 수많은 유리 파편이 흩어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강자풍도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그는 당시 기여온과 기란군을 데리고 유치원을 떠난 것을 너무나 후회하고 있었다.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 기모진이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기모진은 노발대발하며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라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하고 강자풍을 꾸짖었다.“강자풍, 당신 뭐하러 우리 딸한테 찾아온 거야! 왜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왔어! 데리고 나왔으면 잘 돌봤어야지!”강자풍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기모진이 하는 원망을 다 듣고 있었다.“여온이 잘 돌보지
하지만 지금 기모진의 감정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기여온의 안위가 불분명하였고 아빠로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속의 불만과 불안을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이때 수술실 불이 꺼졌다.기모진은 급히 일어나 의료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선생님, 내 딸 어떻습니까? 피를 많이 흘렸는데 어디를 다친 겁니까? 내 딸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지요?”그는 횡설수설하며 물었고 눈에는 온통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빛이 가득했다.“아이는 등 뒤에서 쇳조각이 피부를 베고 들어와서 피를 많이 흘려 응급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제때 병원으로 이송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의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그러나 아이의 뇌에 심한 충격이 가해졌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태는 깨어나야 추가 관찰을 통해 알 수 있어요.”이 말을 듣고 기모진은 자신을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만약 그가 그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아이가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빨리 달려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작은 아이를 얼른 안아주었다면 그녀는 폭발하는 기류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모두 그의 잘못이다.이 빌어먹을 아빠.아이에게 아빠로서 사랑을 준 적도 없으면서 오히려 아이를 이런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기모진은 VIP 병동에 가서 잠에서 깨지 않는 작은 인형 같은 얼굴을 보고 자기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도 못하니 이 아이를 만나지 않는 편이 아이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줄곧 생각했다.그러나 그 어린 마음은 아빠의 사랑과 따뜻함이 절실하게 필요했음을 기모진은 간과했다.“여온아, 아빠가 잘못했어. 일어나면 아빠가 꼭 사과할게.”기모진은 기여온의 차갑고 작은 손을 잡고 입술에 갖다 대었다.얼굴이 창백한 아이를 보니 기모진은 도저히 소만리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는 아이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의 어린 공주는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소만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소만리,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안달할 필요 없어.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거야.”“당신처럼 숨어서 웃고 있는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으니 다시는 전화하지 마.”소만리는 냉담하게 경고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려왔다.“당신은 나와 만나고 싶지 않겠지만 난 당신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어. 아니, 당신 벙어리 딸이 지금 병원에 누워 생사를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당신한테 주는 인사 선물이야.”“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소만리는 문득 뭔가 짐작이 갔다.“당신이 내 딸을 납치하라고 시켰어?”“맞아, 나야.”여자는 아주 시원하게 인정했다.“하지만 소만리, 안심해. 난 절대 당신한테는 손 대지 않을 거야. 당신은 건강하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당신 가족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봐.”여자의 마지막 음흉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전화는 뚝 끊겼다.소만리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만리는 그 여자의 말 한마디 사이사이에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몇 년 동안 자신과 원한을 맺을 만한 여자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왜냐하면 이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방금 그 여자가 여온이 병원에 누워 생사를 오가고 있다고 한 말이 떠오른 소만리는 손발이 차가워지고 심장이 궤도를 벗어나 마구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기모진에게 전화를 걸면서 급히 차고를 향해 달려갔다.기란군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기가 따라나섰다가 오히려 소만리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는 일이 생길까 봐 잠자코 발걸음을 돌려 소만리가 운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은 기여온의 병상 앞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을 보았다.아직 조용히 잠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살금살금 병실을 나온 후 핸드폰을 보고서야 두 시간 전에 소만리가
”나 같은 사람은 진작에 죽었어야 해. 예전에는 당신을 다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더니. 지금은 우리 딸을 이렇게 다치게 하고 있어. 난 사람도 아니야!”기모진은 자신을 깊이 원망하고 증오하며 또 한 번 주먹을 벽에 휘둘렀다.“소만리, 나 같은 사람 신경 쓰지 마. 처자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나 같은 냉혈하고 매정한 남자를 다시는 사랑하지 마. 난 자격이 없어. 당신과 아이들은 더 믿음직한 좋은 남자를 만나. 나 같은 남자는 완전히 잊어버려.”그의 말이 무참히 떨어지자 소만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들었다.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기모진, 이제 와서 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거야? 이번 생에 당신 말고 내가 누굴 사랑하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완전히 당신을 잊을 수 있는지 당신 말해 봐! 말해 봐!”소만리는 마음속의 울분을 토해내듯 가슴 먹먹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호통치며 절절하게 말했다.기모진은 얼굴을 떨어뜨렸다. 소만리의 절절한 말을 들으니 더욱 눈앞의 그녀를 대할 면목이 없어졌다.소리 없이 흐느껴 우는 남자를 보며 소만리는 말했다.“말해 봐. 기모진,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그녀의 말이 무겁게 떨어졌고 기모진은 갑자기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소만리. 나는 왜 자꾸 당신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지. 왜...”이렇게 풀이 죽어 의기소침한 그를 보며 소만리는 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참았다. 기모진의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사라진 눈빛에는 사랑과 애틋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모진, 나 좀 봐.”소만리는 그의 얼굴을 들어 참을성 있게 아이를 달래듯 이 남자를 위로해 주었다.“당신이 여온이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거 잘 알아.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아. 그러니 당신도 당신을 탓하지 마.
소만리는 단번에 이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바로 전화에서 한껏 도발하던 그 목소리였다.제 입으로 기여온이 소만리의 벙어리 딸이라고 말한 그 여자!여자는 미리 준비한 듯 빨간 입술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소만리, 우리 곧 만난다고 했지. 깜짝 놀랬어?”목소리만 듣고 있을 때는 도대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비열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소만리의 머릿속에 점점 윤곽을 드러내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소만리, 듣고 있어요?”전화기 너머에서 실험사가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만리는 여자의 선글라스를 벗기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죄송해요. 듣고 있어요.”소만리가 황급히 대답했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방금 그 여자는 아주 독특한 향기만 남기고 사라졌다.소만리는 이 여자가 일부러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주차장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그녀는 전화기 너머의 실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소만리, 실험 결과 시약의 성분은 모두 안전하고 무해하지만 그 중 두 가지 성분은 우리 실험실의 모든 실험사들이 본 적 없는 것이었어요.”“그럼 그 두 가지 성분은 사람 몸에 들어가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그래서 분석을 더 해 봤는데 다행히 유해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어요.”실험사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소만리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박사님 고맙습니다.”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병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소만리는 기모진이 왔다 갔다 하며 굳은 표정으로 서성이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모진.”기모진이 소리를 듣고 근심이 가득 찬 눈을 들어 소만리를 보았다.“모진, 왜 그래? 여온이한테 무슨 일 있어?”소만리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으며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여온이는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기모진은 위로하며 소만리의 손을 잡았지만 그의 손도 긴장하고 두려운 나머지
소만리의 위로에도 기여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 울었다.방울방울 이슬처럼 떨어지는 아이의 눈물을 보면서 기모진의 마음도 함께 부서져 떨어졌다.그의 딸 여온이는 아빠인 그에게 완전히 실망했을 것이다.그는 여온이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기여온은 소만리의 품에서 한참을 울다가 결국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의사가 또 와서 기여온을 진찰해 보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의사가 떠난 후 소만리는 병상을 지키고 있는 기모진을 위로했다.“모진, 너무 슬퍼하지 마. 여온이는 아직 어리잖아.”“어리니까 여온이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표현했겠지.”기모진이 슬픈 눈으로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속삭였다.“모진.”“소만리, 더 이상 소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나 여온이 잘 돌볼 거야. 아빠가 여온이를 많이 사랑한다는 걸 꼭 느끼게 해 줄 거야.”그의 다짐을 들은 소만리는 마음이 놓였고 미소 지으며 돌아서서 일용품들을 정리했다.이날 소만리와 기모진은 병원에서 계속 머물며 기여온을 돌보고 있었다.기여온의 상태도 많이 안정되어 기모진을 보고도 울지 않았다.그러나 기모진을 대하는 아이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차가웠다.기모진을 아는 척하지도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소만리에게 계속 안아달라고 했다.기모진은 스스로 자초한 상황임을 잘 알고 잠자코 마음속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저녁을 먹고 기여온을 재운 후 소만리가 그릇들을 치우고 있는데 경연에게서 전화가 왔다.기모진이 괜한 오해를 할까 봐 소만리는 단호하게 전화를 받아 말했다.“그래,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기모진에게 거짓말을 했다.“모진, 회사에 일이 있어서 잠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당신 여온이 좀 보고 있어.”기모진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잘 다녀오라며 소만리를 보냈다.소만리가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경연의 차가 길가에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