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경연의 차에 탔다.텅 빈 왼손 약지를 바라보니 그동안 기모진과 헤어지고 만났던 세월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그는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 세월 동안 기모진은 정말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아마 사랑했을 것이다.사랑했으므로 그때 기모진은 다른 모든 것들을 다 제쳐두고 오로지 소만리를 보호했을 것이다.사랑했으므로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순수한 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보였을 것이다.그러나 기모진, 우리 사이가 도대체 언제부터 잘못 되었을까.그녀는 말없이 쓰린 가슴을 부여잡았다. 경연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만리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결혼식은 간단하게 하고 싶은데 어때요?”경연은 다정하게 소만리의 의견을 물었다.경연의 집안은 경도 명문 중 하나였다.경연이 결혼하면 결혼식은 반드시 화려하고 온 동네 떠나갈 듯 멋지게 치를 것이었다.소만리는 아마도 자신이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데다 세 아이까지 데리고 있기 대문에 경연의 부모가 체면이 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소만리는 경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려고 하는 순간 경연이 입을 열었다.“이건 내 뜻이에요. 혹시 나중에 당신이 다시 기모진에게 돌아갈지도 모르니 조촐하게 지내는 편이 당신한테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소만리는 경연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었고 감동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경연, 난 당신과 충동적으로 결혼하는 게 아니에요. 기모진과 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니구요. 어쩌면 인연이란 결국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랑 기모진은 돌고 돌아 그렇게 오랜 세월 함께 지냈지만 결국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이게 숙명일지도 몰라요.”소만리의 눈빛이 반짝였고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내가 가장 힘들 때 하늘이 당신을 만나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요.”경연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마지막으로 정착하고 싶은 울타리가 되고 당
소만리가 마침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방안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방금 검은 그림자가 눈앞을 스쳐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소만리는 민첩하게 반응하여 즉시 불을 켰지만 불 켜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오직 웨딩 앨범 한 권이 펼쳐진 채 침대 위에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소만리가 다가가자 콧김에 희미하게 시원한 쿨 민트 향이 났다.그녀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웨딩 앨범 속 웨딩 사진에서 풋풋하게 웃고 있는 자신과 싸늘한 눈빛을 한 남자를 보며 소만리는 앨범을 살짝 집어 들고 있는 힘껏 반쪽을 찢어버렸다.베란다 커튼 뒤에 서 있던 기모진은 이 광경을 보고 마치 심장이 날카로운 칼로 두 쪽이 나는 것 같았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만 상자를 살며시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는 소만리를 지켜보았다.그녀가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본 후에야 기모진은 방으로 돌아왔다.찢어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웨딩 사진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남겨놓은 상자를 들고 안에 있던 두 개의 결혼반지와 일곱 빛깔 조가비와 책갈피를 보고 순식간에 얼음조각처럼 얼어붙었다.그러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은 오히려 그의 가슴을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소만리, 당신 꼭 행복해야 해.”그는 버려진 한 쌍의 결혼반지를 움켜쥐고 온몸이 무너진 채로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그들의 일곱 빛깔 조가비와 책갈피는 이제 그들의 과거가 되었을 뿐이다.소만리, 이젠 안녕.모진 오빠는 처음에 영원히 너와 함께 하고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결국 지키지 못했어.소만리, 너의 다음 생은 모진 오빠가 꼭 약속 지킬게. 다음 생에도 만나는 걸로 예약한 거야....소만리는 경연과 결혼식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결혼식은 조촐히 치르기로 했지만 경연은 소만리가 웨딩드레스를 입기를 원했다.소만리는 오늘 웨딩숍에서 웨딩드레
”모진, 뭘 보고 있는 거야? 초록불이야.”강연은 귀띔해 주며 기모진의 시선이 닿는 쪽을 쳐다보려 했지만 차가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기모진은 휴지 한 장을 뽑아 입가의 핏자국을 닦아냈다.강연은 기모진이 피를 토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받치고 기모진에게 홀딱 빠진 눈빛으로 운전 중인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모진, 당신 정말 매력적으로 생겼어. 예전에 많은 남자들과는 그냥 놀기 삼아 만났지만 당신은 그들과 달라. 정말 내 평생 당신과 함께 살고 싶은 충동이 들어.”기모진은 강연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당신 정말 그렇게 내가 좋아?”“물론이지.”강연이 홀딱 빠져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날 서서히 사랑하게 할 자신 있어. 소만리를 완전히 잊게 해줄게. 난 오래 같이 지내면 정든다는 말 믿거든.”기모진은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나도 믿어.”강연은 기모진의 이 대답이 너무나 흡족했다. 하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듯 방금 기모진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보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소만리가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는 일이 끝나자 예선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의 얼굴빛이 살짝 변하더니 급한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한다고 했다.경연은 꽃 다발 두 개를 사서 소만리를 데리고 사화정과 모현을 보러 묘지에 갔다.“엄마 아빠, 여기 이 분은 경연이고. 내 신랑 될 사람이에요.”소만리는 묘비를 바라보며 경연을 소개했다.“이번엔 정말 잘못되지 않을 거예요. 엄마 아빠 우리 축하해 줄 거죠?”경연은 소만리 곁에 서서 이 말을 들으며 묘비를 바라보았다.소만리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어떤 말이나 소식을 알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사화정과 모현에게 제사를 지낸 뒤 소만리는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갈 준비를 했다.차에 올라타자마자 소만리는 유치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젊은 여교사는 타는 듯한 목소리로
”풍덩풍덩.”기여온은 물속에서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며 마구 발버둥 쳤다.강연은 수영장 옆에 서서 기여온이 서서히 몸부림치지 않고 수영장 바닥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눈빛은 더욱 변태적으로 변하며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소만리. 곧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강연은 웃으며 출입구 쪽으로 돌아서서 기여온의 사체가 떠오르면 처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방에서 전화를 받으러 나온 강자풍이 수영장 옆을 지나가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는 처음에 무슨 새가 수영장 물 위를 푸드득거리며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어린아이였다.그는 왜 어린아이가 여기 물속에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물에 뛰어들었다.물 속에 들어가서 이 어린아이가 기여온이라는 것을 본 후 강자풍은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얼른 자신의 정신을 진정시키고 의식을 잃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여온을 수영장 밖으로 끌어냈다.“여온아! 여온아!”강자풍은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했다.아무리 그가 기여온을 불러도 이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여온아!”강자풍은 작은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반응이 없자 강자풍은 당황해서 두 손까지 덜덜 떨었다.그는 즉시 사람을 불렀고 바로 그의 부하 백작과 홍차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자마자 그들은 강자풍에게 일깨우듯 다급하게 말했다.“빨리 인공호흡해요! 심폐소생술도!”“인공호흡? 심폐소생술?”“빨리요. 도련님. 어차피 첫키스는 이미 물 건너 갔는데 뭘 망설이고 있어요? 어서! 지금 아이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어서 해야 해요!”“도련님,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배운 적 있어요!”홍차라는 남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강자풍 앞으로 나오려고 했다.그때 강자풍은 갑자기 눈빛이 이상하게 결연해지더니 기여온의 작은 코를 잡고 아이의 작은 입을 열어 몸을 구부려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여
강자풍이 자신은 당당한 듯 떳떳하게 화가 섞인 말투로 말했다.“내 여동생이야. 어렸을 때 오빠랑 샤워 안 해 본 사람 있어! 내가 보면 어때서! 게다가 난 그냥 여온의 옷을 갈아입힐 뿐이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상스러운 짓은 안 해!”백작과 홍차는 이 말을 듣고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방에서 강자풍은 기여온의 옷을 조심스럽게 갈아입히고 백작과 홍차에게 즉시 쇼핑몰에 가사 옷을 사 오라고 했다.자신은 부드러운 손길로 기여온의 머리를 말려주고 얼굴도 닦아주었다.여온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자 강자풍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오빠가 있으니까 여온이 이제 괜찮을 거야.”그는 여온에게 그렇게 대답했지만 기여온이 어떻게 자기 집 수영장에 빠져 버둥거리고 있었는지 이상하게 여겼다.그는 강어만큼 장사 수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진 않았다.그의 머릿속에 순간 강연이 떠올랐다. 여온이 깨어나면 강연을 찾아가 죄를 묻기로 했다....소만리와 경연은 오랫동안 공원을 찾아봤지만 여온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아는 사람을 동원해 CCTV도 살펴보았지만 어떤 의심스러운 점도 찾지 못했다.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소만리는 지친 모습으로 공원 정문에서 나와 차들이 오가는 길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경연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에 맺힌 눈물방울을 살며시 닦아주었다.“걱정 마요. 꼭 찾을 거예요.”“만약 납치당한 거라면 상대방이 돈을 받기 전까지는 여온이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경연이 따뜻하게 위로했다.눈앞에 늘어선 가로등을 바라보는 소만리의 눈물이 희미한 빛에 흔들렸다.“내게 있어 여온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내 인생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울 때 이 아이는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어요. 여온은 내 딸일 뿐만 아니라 내 희망이기도 해요.”소만리는 이어 말했다.“그저 조용히 평온하게 살길 바랄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죠? 난 이미 부모님도 잃었고, 평생 함
기모진은 소만리로 향하는 강연의 뒷모습을 질색하며 불만스러운 듯 차 안에서 내려 따라갔다.“어머나, 정말 달콤하네요.”강연은 소만리와 경연을 향해 비아냥거렸다.소만리는 경연의 품에서 나와 눈을 들어 강연을 보는 동시에 뒤따라오는 기모진을 보았다.그녀의 눈물 젖은 눈동자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져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그러나 소만리는 입씨름하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경연에게 말했다.“경연, 우리 어서 경찰서 가요.”“그래요.”경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경연의 따뜻한 손바닥에 소만리의 손이 닿자 잠시 소만리는 멈칫했지만 놓지 않았다.어둠 속이었지만 기모진은 소만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가 울었다.왜 울지.그는 경연이 소만리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일부러 경멸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경연 씨는 내 전 처를 아껴주고 돌봐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당신이 너무 세심하게 잘 보살펴 주어서 소만리가 거리에서 기쁨에 겨워 울고 있는 겁니까?”그 말에 소만리와 경연은 각각 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강연은 흥미진진한 듯 소만리를 바라보며 음흉한 기운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모진, 역시 당신 관찰력이 좋아. 소만리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보니 정말 울었나 봐. 무슨 일로 그렇게 기뻐하는 거에요?”강연이 한껏 조롱하며 묻는 듯했지만 사실 소만리가 왜 울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소만리가 슬퍼하고 있어. 기여온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구나. 안타깝게도 소만리, 울어도 소용없어. 이미 늦었어. 당신 딸은 이미 당신 부모님 곁에 갔거든!강연은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듯 마지막 울분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소만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맞아, 난 지금 기뻐. 내 약혼자가 방금 평생 나를 사랑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감동받아서 기쁨이 벅차올라 울고 있었어.”소만리는 입가
강연은 이 말에 브레이크를 꾹 밟았다. 흥분과 기대로 가득한 표정으로 잘생긴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모진, 당신 방금 말한 거 정말이야?”“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그동안 내가 당신한테 어땠는지 당신 못 느꼈어?”기모진은 유려하게 되물었다.강연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모진, 지금 당신 말은, 그러니까 누구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당신과 소만리가 낳은 아이가 사고를 당해도 당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기모진은 눈빛에 노여움을 감추고 조용히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이젠 당신만 신경 쓴다고.”“그럼 됐어. 다행이야.”강연은 웃으며 이어 말했다.“내 부하가 오늘 어쩌다가 소만리의 딸과 마주쳤는데 그 아이가 너무 싫어서 그냥 닥치는 대로 그 아이를 해치워 버렸어.”기모진은 갑자기 손가락에 힘을 꾹 주어 주먹을 쥐고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애썼다.“그 아이를 해치웠다는 게 무슨 뜻이야?”“부하가 말하기를 그 아이를 산 채로 물에 던져서 익사시켰다고 했어.”이 말을 듣고 기모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모든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여온. 그는 고통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자신에게 냉정하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아니, 아닐 거야.여온, 아무 일 없을 거야.강연은 곁눈질로 기모진의 표정을 살폈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 아무런 기색이 없는 것 같아서 기뻤다.남사택이 개발한 독소의 효능은 과연 대단했다.이렇게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니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적어도 기모진은 이제 그녀를 떠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기여온은 강자풍에게 구조된 후 오후 내내 깊은 잠을 잤다.어느새 깨어난 꼬마는 몸에 맞지 않는 큰 티셔츠를 입고 침대에 앉아있었다.하얗고 통통한 작은 발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져 살짝 흔들거렸다.그때 양손에 예쁜 원피스를 한 벌씩 들고 오는 강자풍의 모습이 여온의 눈에 들어왔다.“여
기모진은 이것으로 강연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자풍이 노발대발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마침 기분이 좋았던 강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강자풍에게 호되게 욕을 먹었다.강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욕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강자풍의 품에 안긴 채 무사한 여온을 보았다.기모진도 여온을 보았다.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선혈이 낭자한 기모진의 마음에 일순간 안도의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여온.나의 작은 공주님.아무 일 없었구나. 정말 다행이야.아빠는 정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너무 걱정됐어. 너한테 일이 생기면 네 엄마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 거야.기모진은 묵묵히 생각하다가 강자풍이 강연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을 들었다.“너 사람을 시켜서 여온이 납치한 거지? 어떻게 어린아이를 수영장에 던져버릴 수가 있어! 아이가 죽었든 살았든 넌 정말 사람이 아냐!”“강자풍! 입 다물어!”강연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버럭 내고 있었다.“내가 언제 이 꼬맹이를 납치해 왔대? 너 허튼소리 작작 해라!”“네가 아니면 또 누가 있어?”강자풍은 성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품에 안은 귀요미를 바라보았다.“여온아, 이 나쁜 여자가 널 수영장에 던져버렸니? 말해 봐, 오빠가 알아서 처리해 줄게.”“헛! 네가 알아서 처리해? 네가 그 아이한테 뭔데 그래? 강자풍 나한테 이런 말까지 하게 하지 마. 자기보다 열몇 살 어린애를 찾아서 네 미래의 아내라도 되는 양 무슨 연예인들처럼 그런 흉내 내지 마. 네가 양부모라도 되냐?”“강연, 너 입 다물어!”강자풍은 정말 화가 나서 강연의 뺨이라도 때려서 이 여자를 정신 차리게 하고 싶었지만 품에 안고 있던 귀염둥이가 갑자기 내려오려고 발버둥을 쳤다.이 어린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강연의 뒤에 있는 기모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강자풍은 바로 알아차리고 여온이를 내려놓았다.기여온은 눈을 반짝이며 작은 발을 기모진을 향해 걸어갔다.강연은 기여온을 발로 걷어차서 날려버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