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정신병 환자에게 양보하다.
더 보기어느 날, 정신과 진료실을 지나치다가 또다시 서정아를 보았다. 그녀는 머리가 헝클어졌고 눈빛은 흐리멍텅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고영준이 서 있었고, 그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으며, 뒤에는 한 소녀가 숨어 있었다. 그 소녀는 불쌍한 모습으로 서정아를 쳐다보고 있었다.“서정아, 제발 좀 그만해! 내가 말했잖아, 지윤이는 단지 내 환자일 뿐이야!” 고영준이 짜증스럽게 설명했다.서정아는 미친 듯이 고영준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정말 이 환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난 절대 못 믿어!”“두 사람 채팅 기록 다 봤어! 진짜 역겨워!”고영준의 품에 있던 소녀가 갑자기 울먹이며 말했다. “정아 언니, 고 선생님은 제가 많이 아파서 절 돌봐드리기 위해 집으로 데려가주신 거예요.”“정말 언니가 생각한 그런 사이 아니에요.”고영준은 서정아를 불쾌하게 밀쳐내며 말했다. “아프면 약이나 먹어!”“어떻게 하루 종일 의심만 하는 거야!”동료들은 한쪽에서 지켜보며 수근거렸다. “역시 여전히 쓰레기네.”이 상황, 왠지 익숙했다. 전과 비슷했지만 다르기도 했다. 고영준은 여전히 그 고영준이지만, 나는 서정아와 다르다.그때 신운호가 내 옆에 다가오며 말했다. “서정아 환자의 보고서를 봤는데, 심각한 우울증과 편집증을 앓고 있어요. 하지만 고 선생님이 준 약은 그냥 진정제뿐이라 효과가 없을 거예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정아가 예전보다 더 미쳐버린 거구나.’신운호가 잠시 멈춘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고 선생님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고 선생님의 상태로 봤을 때, 뭔가 일어날 것 같은데, 우리...”신운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정아가 그 소녀를 때리려 했다. 그러자 고영준이 갑자기 소리쳤다.“정말 지긋지긋해!”“죽어버려! 이 미친년아!”신운호는 어디선가 칼을 꺼내더니, 서정아의 가슴에 그대로 찔렀다.“안 돼!” 신운호가 달려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그러나 나는 그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자업자득이었기에, 전혀 동정할 가치가 없었다.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내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곧 새로운 연구 사무실로 가게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정리하다 보니 그 위에 이혼 협의서가 놓여 있었고, 고영준은 이미 서명을 해놓았다. 왠지 이 사실이 연구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기뻤다. 나는 이혼 협의서를 들고 소리쳤다. “여러분! 오늘 저녁은 내가 쏘겠습니다.”내 말을 듣자 사무실의 동료들은 모두 눈치챈 듯 곧바로 환호를 터뜨렸다.나는 오후에 휴가를 내고 바로 법원으로 갔다.법원에서 나올 때, 손에 이혼 증명서를 쥐고 있자니 온몸이 가벼워졌다.고영준은 내 옆에 서 있었고, 그의 표정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차 키를 요구했다.“차 키 내놔.” 고영준은 매우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디 가려고? 내가 데려다줄게.”“고영준, 그새 잊은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 나는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했다. “이 차는 결혼 전에 내 부모님이 사준 거고,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이혼했으니 이제 돌려줘야 되는 거 아니야?”고영준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최근에 네가 계속 안 타길래, 나는 네가...”나는 그의 손에서 차 키를 빼앗은 뒤돌아섰다.방금 신이 나서 물을 사러 갔었던 서정아가 갑자기 내 앞을 막았다.“김은하, 네가 이 정도로 양심 없을 줄은 몰랐네. 결혼한 7년 동안 항상 영준이가 희생해 왔잖아. 그런데 굳이 차까지 가져가려는 거야?” 서정아가 내 코를 가리키며 욕했다. “너 같은 여자는 정말 버림받아도 싸!”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욕까지 하네?’나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정아 씨, 상황파악 좀 제대로 하셔야 할 것 같네요. 첫째, 우리 두 사람이 이혼한 건 당신 같은 내연녀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에요. 둘째, 이 차는 제가 결혼하기 전 재산이라서 당신과는 상관없는 차예요. 셋째, 고
“아악!” 서정아가 비명을 지르며 울먹이는 표정으로 도망갔다.고영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밀쳐내더니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서둘러 그녀를 쫓아갔다.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 웃기고 어이없었다.서정아는 정말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병원 옥상으로 곧장 올라갔다.뭐, 미친놈이랑 미친년이 만나고 있으니 정말 어울렸다.서정아의 목소리가 하도 컸기에 정신과 세미나에 참석 중이던 의사들이 전부 놀라 방 안에서 나왔다.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두 사람도 제일 병원의 이름을 달고 왔으니, 사고가 터지면 나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마지못해 나도 그 뒤를 따랐다.“고영준! 넌 분명 나랑 함께하겠다고 했잖아! 왜 날 속였어?”서정아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절박했으며, 그 안에는 광기마저 담겨 있었다.“정아야, 그러지 말고 진정해! 우리 대화로 풀면 되니까 제발 어리석은 짓 하지 말아 줘!”고영준의 목소리에는 조급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옥상 난간 끝에 선 서정아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그때 옥상에 모인 의사들이 나를 흘깃 보더니, 다시 고영준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저 사람, 고영준 아니야? 분명 김은하 남편이잖아?”“근데 저 여자는 또 뭐야? 집착 증상이 엄청 심해 보이네. 도대체...”“의사가 환자와 만나고 있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고영준은 서서히 서정아에게 다가갔다.“가까이 오지 마!”서정아는 더욱 흥분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넌 나를 속였어! 이제 내 인생 유일한 빛이 사라졌어!”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난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너와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나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서정아, 이혼 협의서는 이미 준비됐어. 고영준도 곧 도장 찍을 거야. 그러니까 얼른
나는 그의 코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비꼬듯 말했다.“난 그래도 논문 몇 편은 썼는데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잖아!”그리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여자가 뭐? 너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그때 신운호가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김 선생님, 이번 세미나는 사흘 동안 열릴 예정인데 밤에 일정이 따로 있으신가요?”그 말을 듣자마자, 고영준이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는 얼른 끼어들었다.“신 교수님, 김은하는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끼리 일정이 있죠.”신운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그래요.”그는 나를 보며 다시 말했다.“김 선생님, 만약 변호사가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아는 변호사가 많으니 추천해 드릴게요.”고영준은 갑작스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내가 신운호를 따라가려 하자 손을 잡아챘다.“김은하, 넌 아직 내 아내야. 그런데 감히 다른 남자랑 가겠다는 거야?”“꼭 이런 식으로 날 창피하게 만들어야겠어?”‘네가 창피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나는 차갑게 그를 노려보며 한 글자씩 똑똑히 말했다.“고영준,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그리고 설아 씨, 영미 씨 일은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그러면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서정아를 힐끔 보았다.“네 사랑스러운 환자가 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문밖에 나오니 서정아가 불쌍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꼭 내가 그녀의 남자를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호텔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뒤, 기분 좋게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고영준이었다.나는 문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무슨 일인데?”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네 가방.”순간 당황한 나는 그제야 내가 가방을 회의장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문을 살짝 열어 가방만 받고 닫으려고 했는데, 그가 힘으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고영준이 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놓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내 가방 뒤졌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 내 이름을 힘껏 눌러 적었다.곧 직원이 내게 입장권과 방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김 선생님, 당신의 입장권과 객실 카드입니다.”물론 서정아는 당연히 입장할 수 없었다. 그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영준아, 내 잘못이야.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얼른 들어가 봐.”나는 더 이상 그들과 말을 섞기 싫어 등을 돌려 걸어갔다.그때 뒤에서 맑고 씩씩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김 선생님, 잠시만요!”고개를 돌리니, 하얀 가운을 입은 키 큰 남자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누구세요?” 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이번 세미나 주요 담당자 중 한 명입니다. 전 신운호라고 합니다.”신운호. 왠지 익숙한 이름이다. 신운호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가로, 꽤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위엄 있어 보였다.신운호는 미소를 지으며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영준과 김은하를 흘낏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김 선생님께서 쓴 논문을 모두 읽어봤습니다. 정신과 분야에서 보기 드문 인재시더군요.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쓸데없는 사람들과 일 때문에 방해받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나와 고영준의 소문이 이미 널리 퍼졌나 보네.’나는 싱긋 웃은 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신 교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압니다. 제 앞길을 농담 삼아 망칠 생각은 없으니까요.”이번 세미나는, 어쩌면 고영준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 인생을 시작할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그때 전국 정신과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신운호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본 고영준이 김은하를 남겨둔 채 허둥지둥 달려왔다.고영준이 손을 내밀며 아부하는 말투로 말했다.“신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제일 병원의 정신과 과장, 고영준입니다.”신운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그의 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사건이 일어난 후, 병원 측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그 발광한 환자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외부에는 고영준이 긴급 종료 버튼을 누른 것은 정당방위였다고 발표했다.모두가 그 말을 믿었지만 난 믿지 않았다.눈앞에서 그 모든 것을 목격했었기에 나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며칠 뒤, 교수님께서 전화가 왔다.[은하야, B시에서 중요한 전국 정신과 세미나가 열리는데, 내가 너를 추천했어. 원장님도 동의하셨고, 네 앞으로의 승진에도 도움이 될 거야. 다만...][다만 고영준도 너희 과의 과장으로 같이 가야 해.]최근 나와 고영준 사이의 일이 정신과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로 퍼졌으니, 교수님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난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교수님, 전 괜찮아요.”오후가 되자, 고영준이 내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가자.”그가 설아와 영미를 죽게 만든 일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고영준과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기에 짐만 챙겨 그 뒤를 따랐다.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쯧.”전에 고영준은 결벽증이 있다며 차 안에서 음식 냄새나는 걸 싫어한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조수석 옆에는 작은 간식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거기엔 ‘정아 전용 간식’이라는 메모까지 붙어 있었다.난 고영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차,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거라는 건 잊지 않았지? 나도 마찬가지로 결벽증이 있어서 더러운 건 싫거든.”고영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간식 바구니를 떼어내 뒷좌석에 던졌다.“정아가 장난친 거야.”내가 아직 차에 오르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힘이 나를 뒤로 잡아당겼다. 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영준아! 어디 놀러 가는 거야? 나도 데려가 줘!”고영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서정아가 따라온 걸 예상치 못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한마디 내뱉었다.“정아야, 장난치지 마. 우린 전국 세미나에 가봐야 해. 정말 중요한 자리지 놀러 가는 게 아니야.”서정아는 그 말을
곧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고영준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예전엔 그가 이혼을 말할 때마다 내가 애원했었기에, 내가 너무나 단호하게 동의한 것에 놀란 눈치였다.옆에 있던 동료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안심했다.고영준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나는 미리 준비해 둔 이혼 협의서를 가방에서 꺼내 그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이혼하자고.”고영준은 이혼 협의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다.“은하야, 너 많이 화난 거 알아. 지금 일부러 그런 거지?”그의 말을 듣자 정말 기가 찰 정도였다.“정아는 진짜로 그냥 환자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런 일로 질투할 필요 없어.”그러자 서정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영준을 바라보고 조용히 속삭였다.“영준아...”내가 그들을 비웃을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갑자기 사무실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이곳은 정신과다. 경보가 울린다는 건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발작을 일으켰다는 의미였다. 이런 일은 한 달에도 몇 번씩 일어나서 나는 이제 익숙했다.“어떻게 된 일이야?” 고영준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서 서정아를 품에서 슬쩍 밀어냈다.간호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다급히 말했다.“오늘 새로 들어온 3급 정신 장애 환자입니다. 원래 오늘 특수 정신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어요...”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3급 정신 장애 환자라니. 그런 환자는 극도로 위험한 경우가 많다.“교수님은? 교수님은 어디 계셔?” 나는 나를 가르치던 교수님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런 긴급 상황은 반드시 그가 처리해야 했다.“교수님은 다른 병원의 회의에 가셨어요. 전화도 꺼져 있어서 연락이 안 돼요!” 간호사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모두의 시선이 고영준에게 쏠렸다. 그는 정신과의 부장이다. 주임이 부재중일 땐 그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우리는 서둘러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한 중년 남성이 반짝이는
더 이상 고영준의 연기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고영준, 우린 이제 끝이야. 더 이상 너랑 이런 역겨운 게임 하고 싶지 않거든.”그때 뒤에서 동료의 어색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서정아가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다.“김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상처를 줄 줄은 몰랐어요...”서정아는 흐느끼며 말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억울한 사람처럼.“전 그냥 영준이가... 빛처럼 제 마음을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아서...”그녀는 말을 하며 손으로 눈가를 살짝 닦아냈다. 그 여리고 무력한 모습은 마치 내가 가해자인 것 같았다.“김 선생님께서 신경 쓰이신다면 제가 당장 다른 주치의로 바꿀게요...”“그러니 제발 영준이를 욕하지 말아 주세요...”나는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정말 연기하느라 힘드시겠어요.” 나는 차갑게 말했다.“전 빠져줄 테니, 이제 고영준은 당신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서정아의 눈에 잠시 기쁨이 스쳤다. 그녀는 천천히 고영준의 옆으로 다가가 고영준의 팔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영준아, 앞으로 다신 널 찾지 않을게. 김 선생님이 속상하시는 건...”그녀의 말을 듣자 고영준은 왠지 안타까운 표정을 보였다.말을 마친 서정아는 내게 커피 한 잔을 건넸다.“김 선생님, 이건 제가 드리는 사과예요. 김 선생님이 이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고 들었거든요.”‘내가 좋아한다고? 처음 듣는 소린데?’더군다나 나는 방금 유산 수술을 끝낸 상태였기에,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 몸이 상할게 분명했다.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가져가세요. 전 안 마셔요.”내가 거절하자, 고영준이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정아가 직접 사과하려고 가져왔는데, 감히 거절을 해?”나는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차분히 설명했다.“나 지금 이거 마실 수 없어
갑자기 고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정아가 걸어온 것이다.고영준은 전화를 집어 들고 베란다로 나가더니, 1분 후에는 소파에 걸쳐 놓았던 코트를 급히 챙겨 들고 신발을 신었다.나는 서정아의 SNS를 열어봤다. 그녀는 잠이 안 온다며 글을 적어 올렸다.서정아의 한 마디만으로 고영준은 나를 내버려 두고 아무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는 이 모든 게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고영준이 날 힐끗 보며 말했다.“제발 그만 좀 해. 정아가 정말 많이 아프니까 혼자 둘 수 없어.”고영준이 문을 나서려는 순간, 갑작스레 아랫배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곧이어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그건 피였다.‘큰일이야. 설마...’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영준... 나, 유산할 것 같아...”[김은하, 내가 분명 이런 거짓말하지 말랬지!]그는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내가 정아한테 가는 걸 싫어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네!]“정말이야... 배가 너무 아프고 피가 계속 나...”아직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는 거칠게 말했다.[그만 좀 해! 이런 유치한 수작 이제 질렸어!][정아는 지금 많이 힘들어. 내가 안 가면 상태가 더 악화될 거야. 넌 의사로서 동정심조차 없는 거야?]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이 아이는 우리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가진 첫 아이인데...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고영준, 제발 부탁이야. 너 나간 지 얼마 안 됐잖아, 지금이라도 돌아와서 나를 병원에 데려다줘. 아직 늦지 않았어...”그러나 그의 대답은 차갑기만 했다.[아까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 넌 그냥 내가 정아한테 가는 걸 막고 있는 거잖아.]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시 전화를 걸어보려 했지만,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절망감과 서러움이 가슴을 채웠다.‘왜
나는 남편 고영준과 결혼한 지 5년 차, 어느 날 고영준의 환자 서정아가 갑자기 단톡방에 고영준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을 올리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우리 영준이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자예요!]나는 지지 않고 한마디를 날렸다.[내일 바로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라도 하시지 그래요?]그러자 고영준은 망설이지도 않은 채 나를 단톡방에서 내쫓았다.그리고 단체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내게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정아는 내 환자야! 심각한 정신 문제가 있는 애인데, 꼭 이렇게 자극해야겠어?] [이것도 이해 못 한다면 그냥 단톡방에서 나가버려.]핸드폰 너머에서 서정아가 억울하다는 듯 훌쩍이며 우는 모습까지 보였다.몇 분 뒤, 서정아는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이번엔 고영준과 손을 꼭 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그래, 난 빠져줄 테니 네 환자랑 잘 먹고 잘 살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