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대표님, 별다른 용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볼게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요.”소민아가 회사에 나온 건 그저 일을 하기 위함이다. 송시아와는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송시아는 그녀의 요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소피아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소민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송시아 씨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마침 점심시간이라 내가 구영관 예약해뒀어.”그녀와 밥을 먹는다니, 소민아는 단호히 거부했다.“전 한낱 비서일 뿐입니다. 송 대표님과 겸상할 자격 없어요. 아니면 이제 다른 방식으로 절 괴롭히시려는 거예요? 아니면 저번처럼 또 그러시려고요? 이번엔 클라이언트한테 던져놓을 생각인가요?”“민아야, 예전 일은 다 오해야. 우리 자매 힘들게 다시 만났는데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면 안 될까? 언니가 어떻게든 너한테 보상할게. 오늘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사람들 소개해줄게. 앞으로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소민아가 창밖을 바라보니 확실히 구영관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그녀는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해버렸다.“전 인맥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전 그냥 제가 맡은 일만 잘하고 싶어요.”송시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너 이 화내는 표정 어렸을 때랑 똑같아. 다만 너무 말랐어. 더 많이 먹어야 해.”“네가 구르미 시리즈에 남고 싶다고 하면 이 언니도 강요하지 않을게. 널 도울 수도 있어. 네가 뭘 하든 언니는 응원할 거야.”“언니랑 같이 점심밥 먹어주면 기성은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게. 어때?”소민아는 심장이 떨려왔다.“정말이에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꼭 잡자 소민아는 불편함에 바로 빼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당연하지. 언니가 어떻게 널 속일 수가 있겠어.”소피아는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앞차와 충돌하려는 순간 그녀가 다급히 차를 세웠다.송시아가 소리쳤다.“운전 하나 제대로 못 해요?”소피아는 연신
만들어둔 음식들이 잇따라 상에 올랐다. 이어 고구마죽이 오르자 송시아는 숟가락으로 한 그릇 뜬 뒤 소민아에게 밀어주었다.“이건 내가 특별히 만들어달라고 한 거야. 나 예전에도 자주 먹었어. 물론 네가 예전에 언니한테 만들어 준 죽과는 비교도 안 돼.”“이젠 언니가 돈 많이 벌었으니까 넌 주방에 안 들어가도 돼.”소민아는 예전 일을 말하고 있는 송시아를 앞에 두고 시선은 다른 곳에 고정하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애써 피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송시아가 웃으며 말했다.“넌 잊어버려도 괜찮아. 이 언니가 다 기억해.”“자, 어서 죽부터 먹어.”“다 먹으면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거 보여줄게.”소민아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지금은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송시아의 유혹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소민아는 몇 분 안에 그릇에 있던 죽을 모두 해결했다.“이제 말해줄 수 있죠? 장난은 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그때 송시아가 핸드폰을 열어 저장해두었던 영상을 재생시켰다.영상 속 기성은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 뒤엔 여러 명의 흉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4,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여자가 무릎을 꿇고 사투리로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중년 여자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울부짖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기성은이 몇 글자 내뱉자 중년 여자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더니 눈동자에 절망감이 가득 차올랐다.이어 여자를 압박하고 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총으로 그녀 몸을 겨누었다...1초 뒤...탕.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피가 사방으로 솟구쳐올랐다.소민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무 놀라 정지 버튼을 눌렀고 더는 계속하여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석으로 뛰어가 가슴을 움켜잡고는 괴롭게 헛구역질했다.소민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난 믿지 못하겠어요
“오빠, 여기 음식 진짜 맛있어요! 다음에도 또 먹으러 와요, 네?”소민아는 이곳에서 신이랑과 신수지와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신이랑이 신수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민아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민아는 깜짝 놀라 신수지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송 대표님이랑 밥 먹으러 왔어요. 저 먼저 갈게요.”“민아 씨.”신이랑은 급히 떠나는 소민아를 따라갔다. 신수지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 빠르게 걷을 수가 없었다.“오빠, 나 기다려요.”신이랑은 문 앞에서 소민아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따라와요.”신이랑은 그녀를 차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띠를 해주었다.신수지가 쫓아와 문을 두드렸다.“오빠, 나 아직 차에 못 탔어요. 오늘 나랑 같이 밥 먹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어떻게 나 혼자 남겨둘 수가 있어요.”신이랑이 창문 유리를 내리고 말했다.“너 혼자 택시 타고 가.”말을 마친 뒤 신이랑은 액셀을 밟고 바로 출발했다. 소민아가 백미러로 살펴보니 신수지는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수지 씨 혼자 저기에 남겨두면 어떻게 해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신이랑은 단번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 예상했다.신이랑이 물었다.“회사로 돌아갈 거예요?”소민아가 대답했다.“네. 당연히 돌아가야죠. 그 여자 한 명 때문에 내 생활이 영향받을 수는 없잖아요.”그녀는 확연히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신이랑은 음악을 틀고 그녀에게 말했다.“뭐 더 먹지 않을래요?”“아니에요. 배 안 고파요.”“회사로 갈까요?”“네. 부탁할게요.”예의를 차린 거리감 느껴지는 말에 신이랑은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이렇게까지 거리를 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신이랑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회사까지 도착했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소민아는 예전과 다르게 오늘은 너무나도 조용했다.사무실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자리에 앉아 보고서와 앞으
“미안해요! 순간 여자친구인 척해야 한다는 걸 잊어버렸어요.”신이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민아에게로 향했다.“민아 씨... 저번 병원에서 송시아가 나한테도 말해줬어요. 그리고 나... 본가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여자친구 일은 계속 민아 씨를 귀찮게 해야 할 것 같아요.”“만약 불편하면 여기에서 끝내고요.”소민아가 주먹을 꽉 말아쥐고 한동안 고민하고는 말했다.“얼마나 더 해야 하는데요?”“...”“이랑 씨도 알다시피 저한테는 기성은 씨가 있어요.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하지만 걱정 말아요. 이랑 씨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협조해 줄게요.”“예전 이랑 씨가 저 많이 도와줬었잖아요.”신이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럼 이 친구한테 아까 송시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회사에 오는 길에서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민아 씨답지 않았어요.”“민아 씨, 걱정이 있으면 말해봐요. 내가 같이 해결해줄게요.”“난...”소민아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말을 삼켜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송시아가 보여주었던 영상이 떠올랐다. 감정 하나 없이 서늘한 표정으로 내뱉은 기성은의 한마디에 그 여자는 피를 튀기며 죽어버렸다. 그에게 있어 사람 목숨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 걸까.“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난 괜찮아요.”그때, 사무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와 신이랑이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소피아가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와 소민아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녀 얼굴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일그러져 있었다.“이건 송 대표님께서 민아 씨한테 보낸 구영관 간식거리예요. 민아 씨가 점심에 밥을 제대로 안 먹었어서 걱정이 되시나 봐요.”말을 마친 뒤 소피아는 자리를 떴다.신이랑이 말했다.“송시아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정말 민아 씨한테 보상하고 싶은가 봐요. 민아 씨는 송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소민아는
피가 낭자한 그 사진들은 소민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소민아가 일하고 있을 때, 컴퓨터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소민아가 살펴보니 송시아가 그 영상과 사진을 보내왔다.그 참혹한 현장이 담긴 사진 하나하나에 소민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다시 봐도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 모든 게 진짜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일면식이 있는 성세 그룹 본부 디자인팀 직원에게 사진 진짜 여부를 감별하는 방법을 물었다.이후 바로 검증을 시작했다.10분 뒤...검증 결과 그 사진들은 모두 2차 가공을 거치지 않은 진짜 원본 사진이었다.얼마가 지났을까.소민아의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컴퓨터 안 사진을 지워버리고는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신이랑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소민아는 가장 위층에 위치한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 전연우가 이곳에 있을 때엔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노크도 하지 않고 바로 벌컥 문을 열었다.사무실 안은 바닥에 서류가 가득 떨어져 있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소피아는 쪼그리고 앉아 그 서류들을 줍고 있었다.다짜고짜 들어온 소민아를 본 소피아가 말했다.“소민아 씨, 여기 대표님 사무실이라는 거 몰라요? 소민아 씨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앞으로 민아는 여기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어요. 이건 내가 민아한테 준 특권이에요. 소피아 씨는 나가 있어요.”소피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 소민아가 물었다.“저한테 그런 사진을 왜 보낸 거예요?”송시아가 말했다.“기성은의 모든 걸 알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게 기성은의 진짜 모습이야. 왜?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소민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고작 이런 게 뭘 설명할 수 있는데요? 앞으로 보내줄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직접 말하기 전엔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어요.”“안 믿는다고?”송시아가 사무실 책상을 돌아 그녀 옆으로 다가왔
소민아는 송시아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고, 경호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비행기 안.“도착하려면 아직 몇 시간 남았으니까 그동안 쉬고 있어.”소민아은 긴장과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꽉 붙들고 앉아 있었다.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는 건가?송시아는 소민아의 핸드폰 화면에 뜬 기성은의 이름을 보자마자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민아야, 남자 한 명한테 네 마음을 전부 다 내주면 안 돼. 남자의 마음은 자그마한 유혹에도 흔들리기가 일쑤거든. 달콤한 말로 꼬드기고는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어. 차라리 네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게 나아.”“네가 정말 기성은이 갖고 싶다고 하면 언니가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결혼은 절대 안 돼.”소민아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당신처럼 모든 남자들을 희롱하며 다니라고요? 강지훈, 이젠 그 현씨 남자까지... 정말 대표님이 아무것도 모르실 거라 생각해요? 대표님은 당신 같은 여자 상종도 하기 싫어하세요.”송시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하지만 소민아에겐 조금의 화도 분출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경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적어도 난 전연우 때문에 손해 본 건 없어! 그런데 넌? 기성은에게서 뭘 얻었는데? 기성은의 돈도, 마음도 갖지 못한 거나 다름없잖아.”“그렇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 이용이에요. 항상 이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당신은 돈을 많이 벌긴 했어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지금 당신 처지를 봐요.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나한텐... 적어도 날 사랑해주는 가족들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요.”그 말이 송시아의 마음속 여린 곳을 건드렸다.“언니한텐 네가 있잖아... 넌 언니의 유일한 가족이야. 민아야... 언니가 한 모든 행동들은 다 널 위해서야, 다 우리 자매가 다신 예전과 같은 고초를 겪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널 찾는 걸 포기한 적이 없어.”“심지어 제일 불행한 생각까지도
소민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송시아는 늘 있었던 일인 것처럼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여긴 저런 거 갖고 다녀도 합법이야. 놀랄 필요 없어. 내 옆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그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예요?”주위엔 매캐한 연기가 만연하고 있었다. 소민아는 이곳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송시아가 말했다.“너한테 보여줄게. 성세 그룹에서 연봉 몇억을 받으면서 일하던 총괄 비서가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그렇게 15분을 달려 차가 한 별장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문 하나 외엔 사면이 담벽으로 막혀 있었고, 그 위에는 철사까지 둘려 있었다. 개미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겹겹이 진을 쳐 놓은 것이다.송시아와 소민아는 상대적으로 깨끗한 방으로 안내되었다.경호원이 캐리어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송시아는 손을 휘저어 그들을 내보내 방 바깥에서 경호를 서게 했다.“이따가 내가 널 데리고 사람 몇 명을 만나러 갈 거야. 이곳 면북 관리자들이야.”소민아가 이마를 찌푸리고 송시아를 쳐다보았다.“이곳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여기 사람들과도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송시아 씨, 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요? 다들 범죄자라고요. 경찰에서 알게 된다면 송시아 씨는 감옥에 갈 거예요.”송시아가 덤덤히 웃어 보였다.“이 언니 걱정하는 네 마음은 알지만, 신경 쓸 필요 없어. 이건 너 말곤 아는 사람 없거든. 넌 내 동생이니까 난 널 믿어. 이 언니 신고하지 않을 거지?”“너도 언니가 걱정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잖아.”송시아의 그 말을 인정할 리 없는 소민아였다.“그럴 리가요. 그냥 돌아갔을 때 당신 때문에 누가 날 찾아올까 봐 그래요. 또 당신 때문에 당할 순 없잖아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 소민아의 손을 잡아당겼다.“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언니는 이제 다 가졌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하면 돼. 그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든 언
바깥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그들을 둘러쌌다.송시아는 태연한 얼굴로 소민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이어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문 대표님, 앞으로는 손 간수 잘하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손이 무사할 수 있을지 저도 장담 못 해요.”송시아는 발을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늦었네요. 저와 동생은 이만 쉬어야 하니 가볼게요. 식사 계속하세요.”오늘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면북을 관리하는 4대 명문가 가주들이었다. 하지만 처참하게 당하는 문지강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그들에게 송시아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람이다.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문밖까지 걸어갔을 때, 송시아가 걸음을 멈추었다.“언니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너 먼저 돌아가 쉬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경호원한테 얘기하면 돼.”“언니를 위해 나서줘서 정말 기뻤어.”소민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권력을 얻기 위해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좀 봐요.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왜 저런 나쁜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거예요?”“지금 갖고 있는 권력과 재산들 다 몸을 팔아서 손에 넣은 거예요? 더럽지도 않아요?”송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안 돼? 예로부터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 쾌락을 누리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어. 남자가 여자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탐하는데 난 왜 안 돼?”“민아야, 언니도 아무 남자와 접촉하는 게 아니야. 됐어. 이제 이 일은 더는 언급하지 마. 알겠어? 언니...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어.”송시아가 등 뒤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안전하게 데려다줘.”소민아가 말했다.“기성은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잖아요.”“며칠 뒤면 만날 수 있을 거야.”소민아는 그녀가 검은색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차 안에 남자 한 명이 있는 것 같았지만 너무 어두운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