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그들을 둘러쌌다.송시아는 태연한 얼굴로 소민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이어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문 대표님, 앞으로는 손 간수 잘하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손이 무사할 수 있을지 저도 장담 못 해요.”송시아는 발을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늦었네요. 저와 동생은 이만 쉬어야 하니 가볼게요. 식사 계속하세요.”오늘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면북을 관리하는 4대 명문가 가주들이었다. 하지만 처참하게 당하는 문지강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그들에게 송시아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람이다.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문밖까지 걸어갔을 때, 송시아가 걸음을 멈추었다.“언니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너 먼저 돌아가 쉬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경호원한테 얘기하면 돼.”“언니를 위해 나서줘서 정말 기뻤어.”소민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권력을 얻기 위해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좀 봐요.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왜 저런 나쁜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거예요?”“지금 갖고 있는 권력과 재산들 다 몸을 팔아서 손에 넣은 거예요? 더럽지도 않아요?”송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안 돼? 예로부터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 쾌락을 누리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어. 남자가 여자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탐하는데 난 왜 안 돼?”“민아야, 언니도 아무 남자와 접촉하는 게 아니야. 됐어. 이제 이 일은 더는 언급하지 마. 알겠어? 언니...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어.”송시아가 등 뒤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안전하게 데려다줘.”소민아가 말했다.“기성은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잖아요.”“며칠 뒤면 만날 수 있을 거야.”소민아는 그녀가 검은색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차 안에 남자 한 명이 있는 것 같았지만 너무 어두운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여긴 민아 씨가 올 곳이 아니에요.”“누구랑 같이 왔어요? 지금 당장 그 사람과 함께 돌아가요.”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이제야 내가 걱정되는 건가? 그동안 수도 없이 문자를 보냈을 때는 줄곧 감감무소식이었다가.’그는 예전과 같이 짧게 몇 글자만 보내왔지만 소민아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내가 갈게요.”기성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였다.소민아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놈, 이제야 올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대체 뭘 한 건데!”그녀는 거울 속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빠르게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간단히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립스틱까지 바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생기진 않았네.그녀가 옷을 갈아입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면북의 밤공기는 조금 쌀쌀했기에 그녀는 목도리를 둘렀다.그녀가 문을 나서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아가씨, 이곳의 밤은 위험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시키시고 방에만 계십시오. 어디에도 나가면 안 됩니다.”소민아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는 말했다.“그렇군요! 그럼 귤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저 귤이 먹고 싶어요.”“알겠습니다.”다른 경호원들도 한 명씩 그녀에게 속아 자리를 비웠다.소민아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뛰어나갔다. 1층 문밖에도 총을 소지한 두 명이 경호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걸어 나가도 막아서지 않았다.소민아는 핸드폰을 들고 5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기성은이 말했던 강가로 한달음에 뛰어갔다.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강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꾸르륵거리는 물고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소민아는 다급한 마음에 강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라도 기성은을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휘청이던 몸의 중심을 잡고 살펴보니 눈앞에 건장한
차가운 밤바람에 체온이 떨어지자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은밀한 위치에 멈춰선 차에 올라타고는 히터를 틀었다.소민아는 바로 그의 몸에 올라타고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껏 키스한 다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기성은 씨, 3년 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3년 안에 서울로 돌아와요. 그동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냥 3년 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하나만 해줘요.”“기성은 씨만 원한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기성은 씨를 대신해 총괄 비서 자리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전 대표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요.”기성은에게 있어 모든 것이 미지수다. 3년이라...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3년이 있을 수 있을까.“이곳을 떠나면 동의할게요.”소민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힘들게 왔는데 허탕을 치면 안 되죠. 날이 밝기 전엔 갈 생각하지 말아요.”소민아가 그의 옷 단추를 풀었다.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 소민아는 거칠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기성은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성은도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송시아도 왔어요. 저 곧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기성은 씨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기성은이 바깥을 쳐다보니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내가 송시아의 동생이라면, 나 미워할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그건 알고 있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민아는 다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평온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심어 주었다.“그럼 기성은 씨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 여자를 언니로 인정해야 할까요? 제 머릿속엔 조각조각 찢어진
기성은은 그녀를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소민아가 돌아가 보니 송시아는 밤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송시아가 어디에 갔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베개를 등에 받히고 침대에 누웠다.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소민아에겐 더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송시아가 돌아왔을 때, 소민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선 베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 옷깃에 묻은 자국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송시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버렸다고?신이랑이 기성은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배경도, 돈도 없는 기성은을 좋아하게 된 걸까.송시아도 밤새 바쁘게 보냈던 지라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소민아의 옆에 누웠다.소민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가 피어올랐다.그 움직임에 송시아도 깨어났다.소민아가 말했다.“방이 두 개나 있는데 왜 하필 내 침대에 누운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예전엔 언니랑 딱 붙어 자는 거 좋아했잖아.”소민아는 그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아이가 있든 없든 난 끝까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소민아는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 송시아에게 물었다.“우리 언제 돌아가요?”“어젯밤 기성은 만났어? 기성은도 너한테 꽤 마음이 있나 보네.”“묻고 싶었던 건 물어봤어?”“안 물어봤어요.”송시아는 화장대에 앉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귀걸이를 걸며 말했다.“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기성은을 선택하면서 신이랑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봤어? 신이랑은 널 위해 제일 돌아가고 싫어하던 본가로 들어갔어.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