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민아 씨가 올 곳이 아니에요.”“누구랑 같이 왔어요? 지금 당장 그 사람과 함께 돌아가요.”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이제야 내가 걱정되는 건가? 그동안 수도 없이 문자를 보냈을 때는 줄곧 감감무소식이었다가.’그는 예전과 같이 짧게 몇 글자만 보내왔지만 소민아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내가 갈게요.”기성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였다.소민아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놈, 이제야 올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대체 뭘 한 건데!”그녀는 거울 속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빠르게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간단히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립스틱까지 바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생기진 않았네.그녀가 옷을 갈아입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면북의 밤공기는 조금 쌀쌀했기에 그녀는 목도리를 둘렀다.그녀가 문을 나서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아가씨, 이곳의 밤은 위험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시키시고 방에만 계십시오. 어디에도 나가면 안 됩니다.”소민아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는 말했다.“그렇군요! 그럼 귤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저 귤이 먹고 싶어요.”“알겠습니다.”다른 경호원들도 한 명씩 그녀에게 속아 자리를 비웠다.소민아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뛰어나갔다. 1층 문밖에도 총을 소지한 두 명이 경호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걸어 나가도 막아서지 않았다.소민아는 핸드폰을 들고 5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기성은이 말했던 강가로 한달음에 뛰어갔다.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강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꾸르륵거리는 물고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소민아는 다급한 마음에 강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라도 기성은을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휘청이던 몸의 중심을 잡고 살펴보니 눈앞에 건장한
차가운 밤바람에 체온이 떨어지자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은밀한 위치에 멈춰선 차에 올라타고는 히터를 틀었다.소민아는 바로 그의 몸에 올라타고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껏 키스한 다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기성은 씨, 3년 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3년 안에 서울로 돌아와요. 그동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냥 3년 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하나만 해줘요.”“기성은 씨만 원한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기성은 씨를 대신해 총괄 비서 자리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전 대표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요.”기성은에게 있어 모든 것이 미지수다. 3년이라...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3년이 있을 수 있을까.“이곳을 떠나면 동의할게요.”소민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힘들게 왔는데 허탕을 치면 안 되죠. 날이 밝기 전엔 갈 생각하지 말아요.”소민아가 그의 옷 단추를 풀었다.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 소민아는 거칠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기성은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성은도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송시아도 왔어요. 저 곧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기성은 씨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기성은이 바깥을 쳐다보니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내가 송시아의 동생이라면, 나 미워할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그건 알고 있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민아는 다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평온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심어 주었다.“그럼 기성은 씨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 여자를 언니로 인정해야 할까요? 제 머릿속엔 조각조각 찢어진
기성은은 그녀를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소민아가 돌아가 보니 송시아는 밤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송시아가 어디에 갔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베개를 등에 받히고 침대에 누웠다.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소민아에겐 더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송시아가 돌아왔을 때, 소민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선 베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 옷깃에 묻은 자국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송시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버렸다고?신이랑이 기성은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배경도, 돈도 없는 기성은을 좋아하게 된 걸까.송시아도 밤새 바쁘게 보냈던 지라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소민아의 옆에 누웠다.소민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가 피어올랐다.그 움직임에 송시아도 깨어났다.소민아가 말했다.“방이 두 개나 있는데 왜 하필 내 침대에 누운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예전엔 언니랑 딱 붙어 자는 거 좋아했잖아.”소민아는 그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아이가 있든 없든 난 끝까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소민아는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 송시아에게 물었다.“우리 언제 돌아가요?”“어젯밤 기성은 만났어? 기성은도 너한테 꽤 마음이 있나 보네.”“묻고 싶었던 건 물어봤어?”“안 물어봤어요.”송시아는 화장대에 앉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귀걸이를 걸며 말했다.“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기성은을 선택하면서 신이랑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봤어? 신이랑은 널 위해 제일 돌아가고 싫어하던 본가로 들어갔어.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강용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연하게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네요!” “손님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죠? 아까 싸움을 벌였던 놈들은 이 지역 갱단이에요. 그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부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벌어놓고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벌어진 거더라고요. 이곳 밤은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고를 꺼내 등에 나 있는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강용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귀로 들었죠.” 그의 등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 두 군데가 더 있었다. 장소월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 아까는 제가 신세를 졌어요.” 그는 차갑게 거절했다. “됐어요. 당신들 같은 외지인들은 알아서 몸조심이나 하세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다. 조금 전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이미 경찰차에 태워져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경찰들과 현지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아는 무서움에 딸꾹질을 하며 장소월의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월아, 저 사람들 뭐라고 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묻는 것 같아. 저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설명해 주고 있어.” 바깥에 있던 가게 사장도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시끄러움이 가라앉은 뒤 문밖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했고, 아까 총을 맞은 사람의 허연 뇌수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경찰들이 떠나자 그가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돼요.” 이어 그는 부엌에서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핏자국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그의 분주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느낌이 틀린 걸까? 그래.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연우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분명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정말로 전연우라면 저토록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밤 8시 30분, 강용은 갑자기 확인하려는 충동이 생겼는지 야식을 먹으러 건너편 국숫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대에는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막 근처라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녔지만, 밤에는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장소월은 니트 롱스커트와 옅은 색 코트 차림에, 목에 두른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여행 온 한국인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년 이상 머무른 주민들이었다. 가게 밖에선 손님들이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야식을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장이 기타를 들고 이곳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장소월은 거의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간신히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꼬치구이를 만들 때 피어오른 짙은 연기가 매캐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아는 임신 중이라 이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따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주었다. 장소월은 또다시 낮에 주문했던 만둣국을 시켰다. 가게에는 종업원이 한 명, 요리사가 두 명 있었다. 만둣국이 나오자 장소월은 만두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강용이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럼 말해 봐. 내가 만든 거랑 이것 중에 뭐가 더 맛있어? 말 잘해. 아니면 다신 안 해줄 거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 “그래야지.” “다 못 먹겠으면 나한테 줘. 먹던 거라도 상관없어.” 이 만두의 맛, 그리고 안에 들어간 속 재료까지, 전생에 그녀가 만들었던 만두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갑자기 앞 테이블에 있던 술 취한 남자 두 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먹까지 오가기 시작하자 사장이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 결국 두 사람 싸움은 패싸움으로 번졌고,
장소월이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간단히 대답을 마치고 차갑게 몸을 돌렸다. 강용이 탁자 위에 국수를 올려놓았다.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국수 위에 떠 있는 파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용은 재빨리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너 많이 못 먹잖아. 남은 건 내가 처리해줄게.” 소현아가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위층에서 내려와 킁킁거리며 말했다.“음! 맛있는 냄새! 소월아, 뭐 먹고 있어? 나도 먹을래.” “바보야, 정신 차려! 겨우 국수 한 그릇인데, 세 명이서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소현아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조금만 먹을게.” 소현아는 얼른 달려가 젓가락을 가져왔고,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장소월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강용이 말했다. “국물만 좀 남겨줘.” 소현아가 말했다. “나도 국물.” “파 싫으면 나한테 줘.” “파 싫으면 나한테 줘.” “바보야, 남의 말은 왜 따라해!”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얘 나한테 욕했어. 그러니까 얘한테 면 좀 조금만 주고 나한테 많이 줘.”장소월이 말했다. “그래. 내 국수 나눠줄게.” “역시 소월이가 최고야!” 건너편 국숫집 안,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별이는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아이 변장을 하고 있어 본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딸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넌 계속 이런 모습으로 지내.” 별이는 손으로 유리를 긁으며 작은 얼굴 전체를 유리에 바짝 붙인 채 조용히 맞은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눌한 발음으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엄마...”“괜찮아, 곧 만나게 될 거야.” “소월아...” 장소월은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줄곧 지워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최근 예민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걸까. 세 사람은 국수 한 그릇을 2분
“아니요. 저희가 새로 고용한 요리사 딸입니다. 와이프가 전 재산 다 훔쳐서 도망갔다고 하더라고요. 돈 한 푼 없이 저희 가게에 와서 일자리를 구하길래, 딱한 마음에 거둬서 일을 시키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요리 솜씨는 정말 일품입니다. 저녁에는 바깥에 나오기 싫으신 손님들을 위해 야식 배달 서비스도 제공합니다. 가정식 요리는 뭐든 다 가능합니다.” “아기 안아 보셔도 돼요.” 장소월은 손목을 만지작거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팔이 안 좋아서요. 떨어뜨릴까 봐 겁나요.” “아... 엄마...” “안아...”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이름이 뭐니?” “태명은 월이라고 하더라고요. 밤에 태어나서 대충 그렇게 지었대요.” 월이라고? 정말 우연인 걸까? 띵. “국수 나왔습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장소월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리사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뒷모습이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장소월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피어올랐다. “아가씨, 국수 나왔습니다.” “저... 저 안 먹을래요.” 장소월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황급히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이봐요. 아가씨, 돈도 이미 내잖아요.” 장소월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앞만 보고 뛰어갔다. 사장이 쫓아 나가 보니, 그녀는 한 민박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참나, 내가 이 가게를 10년 넘게 운영해왔지만, 요리사 보고 도망가는 사람은 처음이야.” 사장은 투덜거리며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냄비를 씻고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당장 저 국수 조금 전 아가씨한테 갖다 줘. 국수가 불어서 내 가게 체면 떨어지면, 월급 제대로 못 받을 줄 알아.” 강용은 장소월을 찾아 나서려던 참에 막 국숫집에서 돌아온 그녀를 발견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래?”
전연우는 깨어났고, 아무런 탈 없이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한다. 대형 스크린에는 그의 뉴스가 쉴 새 없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전연우가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사 전체를 기성은에게 넘겼다는 소식도 포함되어있었다! 처음에는 강용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성세 그룹...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짓밟고 올라선 그 자리를 지금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고? 그렇다면 과거 그가 했던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장소월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강용은 그녀를 데리고 옆으로 빠져나와 양손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더는 그놈 생각하지 마! 지금 삶이야말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네가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데! 설마 다시 그놈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 장소월은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얼른 돌아가자. 우리가 오랫동안 안 보이면 현아 걱정할 거야.” 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전연우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 공포, 두려움, 안도감, 그리고 안타까움... 그녀는 전연우가 아니다. 당시 그녀는 분명 전연우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어쩌면 전연우의 말처럼, 그녀는 영원히 약해빠진 마음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약함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불안한 한 달이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장소월은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을까 봐 두려워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소현아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고, 병원 검사 결과 이란성 쌍둥이로 판명되었다.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 모두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식사량도 점점 늘어났다. 소현아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위층에서 허둥지둥 뛰어 내려왔다. “큰일 났어, 큰일 났어... 강용, 소월이가 없어졌어.” 강용은 즉시 소파에서
장소월은 장을 보러 시장에 나갔다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강용은 이미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동안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용이 직접 요리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전에 했던 말 때문인지,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 이런 평온한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계속 그녀 곁에 있는 것은 강용에겐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강용이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보고 싶으면 가까이 와서 봐.” “그렇게 몰래 훔쳐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데.” 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 손에 들고 있던 식재료를 내려놓자, 강용은 자연스럽게 받아들고 씻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계속 그녀 곁에 머물 생각인 걸까?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그런 건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강용이 팔을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며 말했다. “장소월, 경고하는데 또다시 날 버리고 떠날 생각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런 적 없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장소월은 간단하게 몇 가지 요리를 했다. 현아는 임신한 몸이라 충분한 영양을 보충해줘야 하기에 족발과 백숙도 준비했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재료를 구했다는 건 여간 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남원 별장. 전연우는 회사 일에 완전히 손을 떼고 모두 기성은에게 일임했다. 서재에서 전연우가 별이를 무릎에 앉히고 글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별이는 벌써 세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성은이 물었다. “대표님,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별이는 전연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 이토록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느낌... 장소월은 처음이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선 강용이 보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를 향해, 장소월은 심호흡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언제 왔어? 소리도 없이!” 강용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바람 때문에 문이 열렸더라고. 소리가 들려서 와봤어.” “그럼 현아는?” 강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걔 걱정은 안 해도 돼. 돼지처럼 쿨쿨 자고 있어.” 장소월의 말투가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용!” “알았어, 알았어. 최대한 참아볼게. 하지만 말인데,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설마 정말 아이까지 낳게 하려고? 나중에 결국 우리 둘 중 한 명이 키울 거잖아. 소현아 한 명 데리고 다니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장소월이 말했다. “그 아이는 현아의 목숨, 더 나아가 소씨 가문의 운명까지 구할 수도 있어.” 강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강지훈은 전연우보다 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이야. 전연우라면 어쩌면 살아남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강지훈은 가차 없이 죽여버릴 거야.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살길을 열어주지 않거든. 혹시 어느 날 현아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쩌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 용서해줄지도 몰라.” “하지만 강지훈이 아예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건데? 소현아와 배 속 아이 모두 화를 입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도 했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어. 강지훈이 현아를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면 현아를 해치지 않을 테고, 아이는 더더욱 무사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그 아인 강지훈의 핏줄이잖아.” “강지훈은 승부욕이 센 사람이라 전연우와 겨루는 걸 좋아해. 전연우에겐 아이가 있는데 그 사람에겐 없잖아. 그래서 좀 더 확신하게 된 거
남원 별장 버려진 창고 안, 전연우는 눈앞 당황함에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너도 무서운 건 있는가 보네.” 이곳은 예전 장소월이 갇혀 있던 곳이다. 그 오랜 시간 얼마나 외롭게 버텨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울부짖으며 애원하고 있음에도,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른 전생의 기억들이 그가 장소월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소월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그녀의 사랑을 함부로 짓밟고 그녀의 모든 것을 무시해 버렸었다. 그녀가 혼자 외롭게 병들어 죽어간 그 순간에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죽어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숨을 거둔 순간 그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8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한 번, 또 한 번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제 그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돌아왔다. 지금의 송시아를 포함해 과거 그녀의 등에 칼을 꽂은 놈들 모조리 그의 손으로 직접 제거할 생각이었다. “여기 들어오고 싶어 했던 거 아니었어? 목적을 달성했는데 기쁘지 않아?” 송시아의 주위엔 험악한 인상의 건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전연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어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신 애초부터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날 감쪽같이 속인 거고요? 난 당신한테 최선을 다했어요. 전연우 씨... 내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 “또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송시아... 전생에 쓰던 그 더러운 수법이 이번에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전생... 그 단어가 전연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송시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말도 안 돼. 당신까지 환생했을 리 없어.” 남자는
언제부터 문밖에 서 있었는지 모를 강용이 갑자기 나타나 시선을 내리깔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소월은 소현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밥 먹고 있어.”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가서 그릇이랑 젓가락 갖춰놓을게.” 장소월이 문 앞까지 걸어 나가자 강용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그건 너무 위험해. 강지훈이 세상 곳곳을 뒤져서 소현아의 행방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현아에, 그 아이까지 계속 곁에 두는 건, 우리 위치를 드러내는 꼴밖에 안 돼. 너... 설마 다시 잡혀가고 싶은 건 아니지?” “그 외에 우리한테 다른 방법이 있을까? 나는 현아가 서울로 돌아가 강지훈에게 잡혀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강지훈은 그 사람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거든! 절대 현아의 아이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어쩌면 현아까지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몰라.” “강용, 강지훈이든 그 사람이든 모두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놈들 말 한마디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저항할 수 없으니,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현아는 바보가 아니야, 그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일 뿐이지. 누군가 천천히 가르쳐 준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네가 현아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강용이 되물었다. “소현아 때문에 다시 잡혀가게 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두려운 건,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너희 모두 위험에 빠지는 거야. 강용... 나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5년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어, 내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하지만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사실 그녀가 낙일 마을에 간 이유는 강영수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