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겠어요. 내가 항상 민아 씨 뒤에 서 있을 테니까 어려움이 생기면 꼭 말해줘야 해요. 네?”소민아는 활짝 웃으며 형제 대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뻔뻔함을 무릅쓰고 이랑 씨를 찾아올게요.”총괄 비서 자리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다. 쟁취할 욕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소피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아니면 그녀 역시 송시아에게 허리를 숙이고 밑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피아는 회사에서 근무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능력 면에서도 비서팀 직원 중에서 출중한 편이었다.그녀와 맞서려면 소민아에겐 더 발전할 시간이 필요했다.소민아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기에 그 자리를 손에 넣는 건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다.소민아는 오늘부터 정식으로 업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신이랑만 바삐 돌아치고 그녀는 옆에서 누워만 있던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저녁 퇴근 시간, 신이랑은 마지막으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소민아는 돌아가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저 이렇게 입어도 괜찮을까요?”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에서 걷고 있었다. 신이랑은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고, 소민아는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자리라 평소 안 하던 화장도 옅게 했다.신이랑이 자세히 그녀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예뻐요.”소민아는 그의 칭찬에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그래요? 고마워요.”차가 출발하니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신이랑의 여자친구로 위장해 부모님을 뵙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꽉 잡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바라보았다.“이랑 씨 부모님들 말이에요. 제가 가짜 여자친구란 거 알아채지 못하시겠죠? 저와 함께 간다고 말씀드렸어요?”신이랑이 핸들을 잡고 운전에 집중하며 말했다.“그분들에게 말씀드릴 필요 없어요. 민아 씨,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클라이언트와의 식
신수지가 멍하니 신이랑을 쳐다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오빠.”신이랑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 난 그쪽 오빠 아니야.”신수지는 어렸을 때부터 공주처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던 인시윤 또한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인씨 가문이 꽤나 잘 나간다고 해도, 결국엔 신씨 가문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해야 한다.그런 콧대 높은 그녀에게 신이랑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신수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았다.“엄마, 저 남자가 한 말 들었어요?”유연홍이 신수지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됐어. 다 네가 아까 그런 말을 한 탓이잖아. 밥 먹을 때 오빠한테 음식 많이 집어줘. 넌 지금 철없는 나이니까 그러면 오빠도 용서해줄 거야.”소민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집 식구들은 하나같이 위선 덩어리다.신군회의 시선이 소민아에게 닿았다.“이분이 네가 말했던 여자친구야?”신이랑이 대답했다.“네. 하지만...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에요.”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런 냉정한 태도로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신이랑이 병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을 매정히 외면해버렸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이제 와 여자친구에 대해 묻겠는가.설이 지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와서 가족 모임이라니, 어이가 없었다.신이랑은 밥상 아래에서 소민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소민아는 그의 떨리는 손에서 괴로운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두 부자 사이엔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어 올랐다.신군회가 분노하며 밥상을 탕 두드렸다.“저번에 나한테 부탁할 때는 이런 태도 아니었잖니!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신이랑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연홍이 애써 웃으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려 했다.“됐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화
유연홍이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빨리 가려고?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았어.”신군회도 말을 거들었다.“잠깐 기다려라.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신이랑이 말했다.“저더러 집에 들어가 살라는 뜻은 거두세요. 저한텐 저만의 삶이 있어요.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신이랑의 말은 무척이나 매정했다.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서 말이다.신이랑이 소민아의 의자에 걸어두었던 그녀의 외투를 집어 들자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민아는 그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뒤로하고 신이랑과 함께 걸어갔다. 룸 밖으로 나간 뒤, 그녀는 신이랑의 팔짱을 풀고 몸을 돌리고는 안에 있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꼬마 아가씨,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할 때 낮은 목소리로 말해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다들 성인인데 그 정도는 조심해 주셔야죠.”떠나기 전, 소민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신이랑은 웃으며 소민아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그가 호텔을 나서고 차 운전석에 앉았을 때, 핸드폰에 신군회가 보낸 기다란 문자가 도착했다.[이랑아, 아버지가 잘못했다는 거 알고 있다. 그때 너를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단다. 이제 이 아버지는 널 보호할 능력이 있어. 너한테 진 빚을 갚고 싶구나. 너만 돌아온다면 우리 신씨 가문이 소유한 모든 것을 너한테 주마. 수지는 네 여동생이야. 아직 나이가 어리니 성인만 되면 시집보낼 거야. 네 그 여자친구 말이다. 내가 알아봤는데 출신이 보잘것없더구나. 그런 여자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소민아가 신이랑의 낯빛을 살폈다.“왜 그래요? 그 사람들이 또 화나게 했어요? 내가 가서 혼내줄까요?”신이랑에게서 이토록 나약한 면을 본 적은 극히 드물었다. 아무리 그가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한들 소민아가 어찌 그의 괴로움을 알아채지 못하겠는가.신이랑은 정신을 차리고 핸들을 더 힘주어 잡았다.“오늘 일은 미안해요.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
소민아는 아파트 단지 마트에서 일상용품과 마실 것들, 그리고 냉동식품을 구매했다.그녀는 비를 맞으며 아파트 안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문에 지문을 찍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소민아는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채 벽에 밀쳐졌다. 이어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기... 기성은 씨?”소민아가 암흑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기성은이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불 켜요.”“네.”기성은은 소파에 앉아 들고 있던 단도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조명이 켜진 뒤, 소민아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간 그녀의 코에 역한 피비린내가 파고들었다. 그녀는 다급히 걸어가 소파에 앉아있는 창백한 얼굴의 남자를 살폈다.“다친 거예요?”기성은이 물었다.“여긴 왜 왔어요?”소민아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내가 먼저 물었어요. 대체 어딜 다친 거예요? 병원엔 왜 안 간 건데요!”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인 피가 잔뜩 묻은 붕대를 본 소민아는 심장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먹먹했고,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기성은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상관할 필요 없어요. 별일 없으면 당장 돌아가요.”“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안 갈 거예요. 다쳤으면서 왜 나한테 전화하지 않은 거예요. 왜... 무슨 일이든 나한테 숨기는 건데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요?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장 안 하고... 우리 사귀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날 이렇게 멀리하는 거예요?”“기성은 씨!”소민아는 벌컥 화를 내며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가벼운 손길에도 기성은은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소민아는 다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건장한 남자의 몸을 그녀가 어떻게 지탱하겠는가.소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기성은에게 깔려버렸다.그녀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기성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그녀 몸 위에 엎드려 있던 남자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소민아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기성은을 부축했다. 그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끌어 침실로 데려갔다.피에 흥건히 젖어 있는 몸을 본 순간, 소민아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기성은 씨, 왜 이래요? 나 겁주지 말아요! 몸에 피가 왜 이렇게 많아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가 아무리 목 놓아 울어도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당황하지 말자. 병원에 안 간 건 기성은 씨만의 이유가 있었을 거야. 집에도 상처를 치료할 약이 있겠지.”소민아는 집안 전체를 뒤집다가 마지막으로 거실 탁자 밑에서 연고와 붕대를 찾아냈다.그녀는 가위로 기성은이 입고 있는 잠옷을 베어냈다. 상처가 나 있는 곳에선 피와 잠옷이 엉겨 붙어 있었다. 소민아는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깨끗이 씻어낸 뒤 연고를 발랐다.기성은은 통증이 느껴졌는지 얼굴을 찌푸렸다.소민아가 말했다.“조금만 참아요. 약 발랐으니까 이젠 안 아플 거예요.”의식을 잃은 기성은의 머릿속에 깊이 감춰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낡아빠진 지하실 안, 족쇄를 찬 몇십 명의 8, 9살짜리 어린 아이들이 갇혀 있었다.기성은도 그중 한 명이었다...기성은은 가장 조용한 아이였다. 어떤 아이들은 바깥에서 납치되어 왔지만, 그는...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아무리 극악무도한 일이 일어나도, 그에겐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집에 갈 거예요!”“엄마아빠 보고 싶어요...”“제발 저희 내보내 주세요! 갖고 있는 장난감 모두 드릴게요.”차가운 지하실 안, 남자아이 한 명이 맨발에 누더기를 입고 무거운 물통을 나르고 있었다. 안엔 이들이 먹을 음식이 들어있었는데, 돼지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의 모습은 예쁜 옷차림의 다른 이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그는 종래로 이렇게 화려한 색감은 본 적이 없다. 파란
핸드폰을 보던 신이랑의 마음에 약간의 불편함이 깃들었다.[민아 씨, 우리 사이에 이럴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15초 뒤에야 신이랑의 답장을 받았다.핸드폰을 내려놓은 그녀는 방 안의 어지러운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핸드폰 진동 소리를 들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신이랑이 그녀의 휴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얼마 후, 신이랑이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소민아는 더러워진 옷들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이어 거실을 포함한 집안 전체를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했다.집안일을 모두 마치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열한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소민아는 슈퍼마켓에서 사 온 물건들을 냉장고 안에 정리해 넣었다.그녀는 장갑을 벗고 땀에 흥건해진 채 깨끗이 청소된 바닥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 자신의 방도 이처럼 깨끗한 적이 없었다.주방 냄비에선 그녀가 만든 죽이 끓어가고 있었다.얼마 후 그녀는 약국으로 가 외상을 치료하는 연고와 붕대를 사 왔다. 집에 남아있던 건 이젠 다 떨어져 버렸다.소민아가 방에 돌아왔을 때, 기성은은 언제 깨어났는지 힘없이 침대에 앉아있었다.“왜 일어나 앉은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죽 가져올게요. 방금 끓인 거예요.”기성은은 손바닥으로 돌멩이라도 얹은 듯 무겁기 그지없는 이마를 만져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탓에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있었다.2분 뒤, 소민아가 갓 만든 죽이 담긴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내려놓자마자 뜨거움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손가락으로 귓불을 잡았다.“왜 아직도 안 갔어요?”기성은이 물었다.소민아가 그의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성은 씨가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제가 어떻게 보고도 외면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 큰일이라도 생기면... 성은 씨 같은 남자친구 또 어디에 가서 찾겠어요.”“됐어요. 얼른 죽 먹어요. 이랑 씨한테 5일 휴가 받았으니까 그동안 보살펴줄게요. 성은 씨가 침대에서 내려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요.
소민아는 서류와 사진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자신과 신이랑이 함께 회사에서 나오는 사진을 보니 심장이 떨려왔다.“왜 이런 사진을 찍은 거예요? 기성은 씨, 뒤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한테 알려줄래요? 내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기성은이 덤덤하게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씨뿐만 아니라 송시아의 일거수일투족도 내 통제하에 있어야 해요. 이번 일은 안다고 해도 민아 씨한테 좋을 것 없어요. 난 민아 씨한테 이 사진의 목적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민아 씨는 이미 오래전에 이번 일에 연루되었어요. 이제 와 벗어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송시아는 언제든 민아 씨한테 손을 쓸 수 있어요. 알겠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저도 그리 나약한 사람은 아니에요.”그녀는 기성은의 옆에 앉아 차가운 그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무슨 일이든 난 성은 씨와 함께 견뎌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성은 씨는 절대 날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나한테 무슨 위험이 닥치든 바로 달려와 구해줄 거잖아요.”“정말 겁도 없는 여자라니까.”한결 부드러워진 기성은의 말투에서 소민아는 그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은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기성은의 깊은 눈동자에 예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소민아의 모습이 담겼다.“참, 이 서류는 뭐예요? 아까 저랑 상관있다고 했으니까 뜯어봐도 되죠!”기성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다음번에요. 서류 잘못 가져왔어요.”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물었다.“그럼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예요? 대체 누가 성은 씨를 해친 거예요? 우리... 신고 안 해요?”신고? 기성은은 이렇듯 순진한 사람은 종래로 본 적이 없다.그가 말했다.“송시아가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그게
“대표님의 유서에는 대체 뭐가 쓰여 있길래 송시아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성은 씨 상처만 보면 마음 아파 미치겠다고요!”기성은은 하나하나 그녀의 질문에 답하며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갔다.“사고가 있던 날, 모든 사람들은 당황하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유독 나만은 그럴 수 없었어요. 만약 대표님이 다쳤다는 소식이 새어나가면 성세 그룹 국내외 백여만 명의 직원들이 영향을 받게 될 테니까요.”그의 말에 소민아는 예전의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곧 그가 무정하다며 원망만 했지, 얼마나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지는 헤아리지 못했다.“만약 정말 유서라고 해도 이상하잖아요! 성은 씨는 대표님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에요. 왜 성은 씨한테 얘기하지 않았겠어요? 제일 궁금한 건 유서에 무슨 내용을 썼느냐예요. 설마 유산 상속일까요?”소민아는 조심스레 기성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대표님한테 대체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있어요?”“알고 싶어요?”“그냥 궁금해서요. 단지 돈이 많다는 것만 알지 그 액수는 상상도 못 하겠어요. 대표님이 소월 언니한테 준 그 결혼반지만 해도 몇백억이잖아요.”“장소월을 찾으면 다 알게 되지 않겠어요?”“하지만, 제가 소월 언니를 찾는 순간 송시아도 찾게 될 거예요. 그럼 소월 언니가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몇 년 동안 편히 지내게 하다가 대표님이 깨어나셨을 때 다시 얘기하는 게 나아요.”기성은은 피곤함이 깃든 얼굴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 여자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있단 말인가?“나가요. 나 쉬고 싶어요.”“이 늦은 시간에 쫓아낸다고요?”기성은의 잠옷을 몸에 걸친 소민아는 뻔뻔하게 이불을 들어 올리고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오늘 밤엔 같이 자요! 저도 피곤하단 말이에요.”기성은은 침대에 앉아있었음에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했다. 소민아가 머리만 이불 밖에 빼꼼 내놓고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공간 조금만 내어주면 안 돼요? 기성은 씨 상처에 닿을까 봐 걱정돼요.”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