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억.최태준의 주먹이 소유진의 귀 옆을 스쳐 지나가 그녀의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여자한테 손을 대지는 않지만 계속 이리 은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다면 여자라도 예외는 없어.”놀라서 몸을 떨던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고는 유지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내가 이렇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건장한 체격의 최태준을 힐끔 쳐다보던 유지태는 자신의 뱃살을 보며 감히 맞서지 못하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허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심은하가 최태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한테 부축해 일으켜달라고 했다.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거의 피부 외상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소유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옆에 있는 최태준의 기세를 의식한 건지 소유진은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왜... 왜 이러는 거야...”소유진의 앞에 서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소유진의 뺨을 내리쳤다.“난 여자를 때리거든.”순식간에 부어오른 뺨을 감싸고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자 친구가 뺨을 맞은 걸 보고 유지태도 안색이 어두워졌다.“한진 그룹 본부장입니다. 충고 한마디 할게요. 저런 여자한테는 신경조차 쓰지 말아요.”“안타깝게도 당신 마음속의 여자는 허영심이 많은 사기꾼일 뿐이에요.”“고등학교 때, 돈이 없는 날 그렇죠 외면했었죠. 그런데 내가 한진 그룹의 본부장이 되고 나니까 이리 뻔뻔하게 날 찾아왔어요.”“아직도 뭐 청순한 여신인 줄 아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한테 놀아났는지... 아악! 이거 놔요. 아프다고...”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태준이 그의 팔을 단번에 꺾어버렸다.“이거 놔. 청주시에 한진 그룹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 죽고 싶어 환장했어?”남자는 피식 웃었다.“본부장 따위가 감히. 한진 그룹을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가볍게 뿌리치는
유지태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당신 말이야. 심은하가 불러온 사람이지? 대충 공부는 하고 온 것 같은데 제대로 하지 못했어.”“한진 그룹의 딸은 지금 D국에서 유학 중이거든.”그때, 심은하가 바닥에 널려있는 종이 조각을 가리켰다.“이게 뭔데?”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지태를 향해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오늘 D국에서 귀국한 비행기표.”몸이 굳어진 유지태가 고개를 돌려 소유진을 쳐다보았다.“한진 그룹의 딸을 몰라? 너한테는 사촌 언니잖아.”한편, 더 이상 그들과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최태준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기 회사 로비야. 3분 안에 달려와서 여기 상황 정리해.”소유진은 애써 담담한 척하였다.“계속해서 헛소리 지껄여봐.”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다.최태준은 경비원과 옆에서 야단법석을 떨던 몇몇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들 다시는 내 눈에 띄게 하지 마.”“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신속하게 사람들을 데려갔다. 군더더기 없이 잘 훈련되어 있는 걸 보니 돈 주고 구해온 배우일 리가 없다. 그 모습에 유지태와 소유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경찰에 신고했어. 아무래도 우리끼리 처리하는 것보다 이 사람들 데리고 경찰서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법을 어기지는 말아야지.”당황한 유지태는 소유진에게 얼른 전화를 걸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한진 그룹의 친척이 아닌 소유진이 어찌 심은하 엄마의 연락처를 알고 있겠는가? 최태준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진단서를 끊었고 증인과 증거가 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지태와 소유진 두 사람은 바로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었다.그러나 유지태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약혼녀의 이모가 한진 그룹 회장 사모님이라고 난리를 피웠다.“당장 풀어줘. 내가 누구인지 알고나 이러는 거야? 당신들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경찰서 서장 어디 있어? 당장 나오라고 해.”유지태와 소유진 두 사람이
“말도 안 돼. 청소부 딸이 왜 회장님과 가족사진을찍어?”“이건 거짓말이야. 유진이가 어떻게 사촌 동생을 모를 수가 있겠어? 넌 틀림없이 가짜야.”그가 혼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걸 보니 사실을 알고도 감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은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아빠가 너 회사에서 잘랐어. 그동안 회사에서 횡령하고 불법으로 회사 돈 가로챈 거 검찰에 고발할 거야. 배상할 준비나 해.”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잠시 후, 그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애원했다.“미안해. 내가 유진이의 거짓말에 속았어. 나도 피해자라고. 회장님한테 잘 말씀드려줘. 제발 고소하지 말라고.”“여기서 나가면 유진이한테 네 앞에서 무릎 꿇으라고 할게. 욕을 하든 때리든 네 마음대로 해. 네 화가 풀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게.”그녀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가방 안에 있는 녹음 펜을 꽉 쥐었다. 남자 친구가 자신과의 관계를 싹 잘라버리는 걸 소유진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한편, 유지태는 직접 폭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구치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법정 안, 소유진은 피고인석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유지태를 지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죄를 묻을 증거는 충분했다. 심은하가 제시한 의료 진단서도 명백했고 그녀가 한진 그룹의 딸인 걸 알고는 회사 직원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도 해주었다. 소유진은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한정판 가방과 값비싼 인장을 배상해야 했다. 판결을 듣는 순간 소유진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몇백만 원 배상하면 될 줄 알았는데 10년 형을 선고받은 것도 모자라 몇십억의 빚까지 지게 될 줄이야...그녀는 온 힘을 다해 주변 사람들을 밀어내고 심은하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 줘. 다시는 안 그럴게.”“몇십억을 내가 어떻게 갚아?
“심은하, 잘못했어. 예전에는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하지만 날 믿어줘. 난 유진이를 사랑하지 않아. 유진이의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난 거야.”“너도 알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라는 걸. 그 당시 네가 내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난 널 원망하지 않았어. 그동안 늘 널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심은하의 집을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유지태는 집 앞까지 찾아와 며칠 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나무 그늘에서 뛰쳐나와 다짜고짜 애틋한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구역질이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그 당시 그가 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옮기면서 그녀는 유지태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는 첫날부터 그녀를 괴롭혔고 심지어 자습 시간에 강단에 서서 애들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심은하는 내 여자 친구이니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고...유지태를 따라다니던 남자애들은 심은하를 볼 때마다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장난쳤다. 짜증이 났던 그녀는 그를 전학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고 소유진과 점점 가깝게 지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거리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랬던 것 같다.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한진 그룹의 딸이라는 걸 알고는 또 이리 뻔뻔스럽게 찾아왔다. “은하야, 나랑 사귀자.”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바로 그때, 심은하가 손을 흔들자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나타났다.지난번에 사고를 당한 이후로, 심현섭이 그녀에게 경호원들을 붙여준 것이다. “이 인간 쫓아내.”경호원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유지태는 낭패한 모습이었다. “유지태, 똑똑히 들어. 너 같은 쓰레기를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야.”뒤돌아서던 그녀가 한마디 더 내뱉었다.“그리고 집을 팔든 차를 팔든 당장 돈부터 갚아.”그는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날 밤, 고등학
정신을 차리려고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눈앞 유지태의 그림자가 계속 흔들리기 시작했다.“심은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돈을 갚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짓까지 하지 않았을 거라고.”“처음에는 약을 쓸 생각이 없었어. 건달들 불러서 널 괴롭히게 한 다음 내가 나타나서 널 구해줄 생각이었어. 네가 나한테 감동받게.”“그런데 경호원들이 한시도 네 곁을 떠나지 않더라고. 손을 쓸 기회가 없었지. 걱정하지 마. 네가 내 여자가 된다면 한진 그룹은 내가 지금보다 더 크게 키울 테니까.”“날 믿어. 날 남편으로 선택하는 게 아마 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될 거야.”느끼한 얼굴로 주절대고 있는 그를 때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온몸이 나른해져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포기해. 건장한 남자라도 이 약을 먹으면 맥을 못 추니까. 너같이 연약한 여자가 무슨 힘이 있겠어”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손끝이 닿은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보면서 지금의 체력으로 유지태를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그러나 그가 또다시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칼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지만 약 때문에 제대로 들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칼이 땅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냈다.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도망칠 수 없는 걸까?절망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의 발길질에 문이 열렸다. 이내, 유지태는 멀리 튕겨 나가더니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그녀는 따뜻한 품에 쏙 안겼다. “은하야, 괜찮아?”최태준이었다. 안심이 된 그녀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최태준은 눈이 빨갛게 된 채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를 꽉 안았다.“다행이다. 네가 무사해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어렸을 때부터 봐온 최태준은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회사로 갈게요.”D국에서 석사 공부를 한 지난 5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그러나 어찌 됐든 이젠 유학 생활을 끝마치고 드디어 귀국하게 되었다. 한진 그룹 본사 88층짜리 높은 빌딩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아빠가 날 위해 일궈놓은 회사라...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어 SNS에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 [내가 이 세상 가장 사랑하는 남자, 당신이 보고 싶어 졸업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요.]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은하?”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누구...”그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툭 쏘아붙였다.“이렇게 변해있을 줄은 몰랐네. 일부러 날 찾아온 거 아니었어? 왜 시치미를 떼고 그래?”“밀당도 정도껏 해야지. 난 밀당하는 여자 매력 없던데.”말을 하던 그가 고개를 살짝 젖히고는 자신 있게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익숙한 그 행동에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떠올랐다.“유지태?”고등학교 시절 귀찮게 그녀를 쫓아다니던 남학생이었다. 그에게 별로 좋은 인상이 없었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때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잘 나가니까 나한테 다시 돌아오고 싶은 거야?”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 건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집요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탓에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욕설을 퍼붓기도 전에 화려한 옷차림의 한 여자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심은하, 여우 같은 계집애. 당장 내 남자 친구한테서 떨어져.”그러더니 이내 심은하의 얼굴을 향해 가방을 휘둘렀다. 유지태한테 손목이 잡혀버린 그녀는 왼쪽 얼굴을 그대로 맞았다. “뭐 하는 거야?”가방에 달린 금속 장식이 눈썹에 부딪혔고 하마터면 눈을 다칠 뻔했다. 영문도 모른 채 한 대 얻어맞으니 그녀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
심은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였다.“이건 명백한 모욕이에요. 이 여자가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거라고요. 난 이 두 사람과 잘 알지도 못해요.”이때, 소유진이 한마디 쏘아붙였다.“이 세상에 자신을 내연녀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녀의 쳐다보는 소유진의 눈빛은 의기양양했다. 높은 자리에서 그녀를 심판하고 있는 것처럼. “다들 들었지. 남의 남자를 빼앗는 인간은 사람들한테 이렇게 경멸받는 거야. 다들 뭐하고 서 있어? 얼른 시작해.”소유진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심은하의 뺨을 내리쳤다. 막으려고 손을 뻗는데 소유진이 그녀의 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엄청난 고통에 허리가 굽혀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피해? 남의 남자 꼬실 때는 왜 피하지 않았어?”심은하는 배를 움켜쥔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오늘 한진 그룹으로 온 이유는...”철썩.소유진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오른쪽 뺨을 내리쳤다.“속이 다 후련하네.”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고 그녀의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네가 오늘 한진 그룹에 온 건 지태가 한진 그룹의 본부장인 걸 알았기 때문이잖아?”소유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빤히 노려보았다. “여우 같은 계집애. 돈도 좋아하고 허영심도 많은 된장녀였네.”그러더니 그녀의 목에 있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지태가 나한테는 이런 비싼 선물을 사준 적이 없었는데. 너한테 이런 걸 다 사줬어?”한편, 유지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시종일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핏자국이 배어 나오고 옷이 너덜너덜해져 낭패한 모습이었다.“이건 우리 엄마 생일 선물로 주신 거야...”그 말에 소유진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청소부 아줌마가 이런 비싼 선물을 딸한테 한다고?”몸 구석구석 새겨진 상처 때문에 그녀는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이때, 사고가 날까 봐 걱정되었던 경비원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이내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한진 그룹 회장 딸이라고?”“한진 그룹 회장님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알고나 하는 얘기야? 너 같은 사람은 평생 우러러볼 수 없는 분이라고.”그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던 유지태가 앞으로 다가와 소유진에게 손을 놓으라고 눈치를 줬다.“심은하,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아무리 네가 성이 심씨라도 해도 그렇지 한진 그룹의 딸이라니.”심은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내가 우리 아빠 딸인 건 사실이니까. 거짓말까지 할 필요 있겠어?”“다른 사람을 속인다고 너 자신까지 속이지는 말아야지.” 눈빛이 어두워지던 그가 소유진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네가 회장님 딸이라고? 그럼 소유진도 알아?”무슨 뜻으로 저리 묻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고등학교 동창.”그 말에 한껏 긴장했던 그의 안색이 그제야 풀렸다.“회장님 딸? 사촌 언니도 몰라보면서 뭔 회장님 딸이야? 사기를 치려면 미리 잘 알아보고 사기 쳐.”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엄마는 외동딸인데 나한테 사촌 언니라니?눈빛이 흔들리는 소유진을 보고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소유진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유지태의 손을 잡고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저 계집애 헛소리하는 거 듣지 마. 잊었어? 쟤네 엄마가 길가에서 청소하는 거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잖아.”아까부터 엄마가 청소부라고 딱 잘라 말하는 소유진의 말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우리 엄마가 청소부라고 확신하는 건데?”차갑게 콧방귀를 뀌던 소유진은 이내 조금 전까지 득의양양하던 기세를 되찾았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네가 길바닥에서 엄마를 도와 청소하고 있는 걸 나랑 지태가 똑똑히 봤어.”“네가 힘들까 봐 너희 엄마는 옆에서 계속 널 말리고 있었고.”“그렇게 잘해 주는 사람이 엄마 말고 또 누가 있겠어?”고등학교 2학년 때?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
정신을 차리려고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눈앞 유지태의 그림자가 계속 흔들리기 시작했다.“심은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돈을 갚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짓까지 하지 않았을 거라고.”“처음에는 약을 쓸 생각이 없었어. 건달들 불러서 널 괴롭히게 한 다음 내가 나타나서 널 구해줄 생각이었어. 네가 나한테 감동받게.”“그런데 경호원들이 한시도 네 곁을 떠나지 않더라고. 손을 쓸 기회가 없었지. 걱정하지 마. 네가 내 여자가 된다면 한진 그룹은 내가 지금보다 더 크게 키울 테니까.”“날 믿어. 날 남편으로 선택하는 게 아마 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될 거야.”느끼한 얼굴로 주절대고 있는 그를 때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온몸이 나른해져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포기해. 건장한 남자라도 이 약을 먹으면 맥을 못 추니까. 너같이 연약한 여자가 무슨 힘이 있겠어”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손끝이 닿은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보면서 지금의 체력으로 유지태를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그러나 그가 또다시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칼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지만 약 때문에 제대로 들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칼이 땅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냈다.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도망칠 수 없는 걸까?절망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의 발길질에 문이 열렸다. 이내, 유지태는 멀리 튕겨 나가더니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그녀는 따뜻한 품에 쏙 안겼다. “은하야, 괜찮아?”최태준이었다. 안심이 된 그녀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최태준은 눈이 빨갛게 된 채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를 꽉 안았다.“다행이다. 네가 무사해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어렸을 때부터 봐온 최태준은
“심은하, 잘못했어. 예전에는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하지만 날 믿어줘. 난 유진이를 사랑하지 않아. 유진이의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난 거야.”“너도 알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라는 걸. 그 당시 네가 내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난 널 원망하지 않았어. 그동안 늘 널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심은하의 집을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유지태는 집 앞까지 찾아와 며칠 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나무 그늘에서 뛰쳐나와 다짜고짜 애틋한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구역질이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그 당시 그가 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옮기면서 그녀는 유지태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는 첫날부터 그녀를 괴롭혔고 심지어 자습 시간에 강단에 서서 애들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심은하는 내 여자 친구이니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고...유지태를 따라다니던 남자애들은 심은하를 볼 때마다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장난쳤다. 짜증이 났던 그녀는 그를 전학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고 소유진과 점점 가깝게 지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거리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랬던 것 같다.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한진 그룹의 딸이라는 걸 알고는 또 이리 뻔뻔스럽게 찾아왔다. “은하야, 나랑 사귀자.”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바로 그때, 심은하가 손을 흔들자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나타났다.지난번에 사고를 당한 이후로, 심현섭이 그녀에게 경호원들을 붙여준 것이다. “이 인간 쫓아내.”경호원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유지태는 낭패한 모습이었다. “유지태, 똑똑히 들어. 너 같은 쓰레기를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야.”뒤돌아서던 그녀가 한마디 더 내뱉었다.“그리고 집을 팔든 차를 팔든 당장 돈부터 갚아.”그는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날 밤, 고등학
“말도 안 돼. 청소부 딸이 왜 회장님과 가족사진을찍어?”“이건 거짓말이야. 유진이가 어떻게 사촌 동생을 모를 수가 있겠어? 넌 틀림없이 가짜야.”그가 혼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걸 보니 사실을 알고도 감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은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아빠가 너 회사에서 잘랐어. 그동안 회사에서 횡령하고 불법으로 회사 돈 가로챈 거 검찰에 고발할 거야. 배상할 준비나 해.”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잠시 후, 그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애원했다.“미안해. 내가 유진이의 거짓말에 속았어. 나도 피해자라고. 회장님한테 잘 말씀드려줘. 제발 고소하지 말라고.”“여기서 나가면 유진이한테 네 앞에서 무릎 꿇으라고 할게. 욕을 하든 때리든 네 마음대로 해. 네 화가 풀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게.”그녀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가방 안에 있는 녹음 펜을 꽉 쥐었다. 남자 친구가 자신과의 관계를 싹 잘라버리는 걸 소유진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한편, 유지태는 직접 폭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구치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법정 안, 소유진은 피고인석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유지태를 지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죄를 묻을 증거는 충분했다. 심은하가 제시한 의료 진단서도 명백했고 그녀가 한진 그룹의 딸인 걸 알고는 회사 직원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도 해주었다. 소유진은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한정판 가방과 값비싼 인장을 배상해야 했다. 판결을 듣는 순간 소유진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몇백만 원 배상하면 될 줄 알았는데 10년 형을 선고받은 것도 모자라 몇십억의 빚까지 지게 될 줄이야...그녀는 온 힘을 다해 주변 사람들을 밀어내고 심은하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 줘. 다시는 안 그럴게.”“몇십억을 내가 어떻게 갚아?
유지태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당신 말이야. 심은하가 불러온 사람이지? 대충 공부는 하고 온 것 같은데 제대로 하지 못했어.”“한진 그룹의 딸은 지금 D국에서 유학 중이거든.”그때, 심은하가 바닥에 널려있는 종이 조각을 가리켰다.“이게 뭔데?”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지태를 향해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오늘 D국에서 귀국한 비행기표.”몸이 굳어진 유지태가 고개를 돌려 소유진을 쳐다보았다.“한진 그룹의 딸을 몰라? 너한테는 사촌 언니잖아.”한편, 더 이상 그들과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최태준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기 회사 로비야. 3분 안에 달려와서 여기 상황 정리해.”소유진은 애써 담담한 척하였다.“계속해서 헛소리 지껄여봐.”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다.최태준은 경비원과 옆에서 야단법석을 떨던 몇몇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들 다시는 내 눈에 띄게 하지 마.”“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신속하게 사람들을 데려갔다. 군더더기 없이 잘 훈련되어 있는 걸 보니 돈 주고 구해온 배우일 리가 없다. 그 모습에 유지태와 소유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경찰에 신고했어. 아무래도 우리끼리 처리하는 것보다 이 사람들 데리고 경찰서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법을 어기지는 말아야지.”당황한 유지태는 소유진에게 얼른 전화를 걸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한진 그룹의 친척이 아닌 소유진이 어찌 심은하 엄마의 연락처를 알고 있겠는가? 최태준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진단서를 끊었고 증인과 증거가 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지태와 소유진 두 사람은 바로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었다.그러나 유지태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약혼녀의 이모가 한진 그룹 회장 사모님이라고 난리를 피웠다.“당장 풀어줘. 내가 누구인지 알고나 이러는 거야? 당신들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경찰서 서장 어디 있어? 당장 나오라고 해.”유지태와 소유진 두 사람이
퍼억.최태준의 주먹이 소유진의 귀 옆을 스쳐 지나가 그녀의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여자한테 손을 대지는 않지만 계속 이리 은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다면 여자라도 예외는 없어.”놀라서 몸을 떨던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고는 유지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내가 이렇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건장한 체격의 최태준을 힐끔 쳐다보던 유지태는 자신의 뱃살을 보며 감히 맞서지 못하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허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심은하가 최태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한테 부축해 일으켜달라고 했다.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거의 피부 외상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소유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옆에 있는 최태준의 기세를 의식한 건지 소유진은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왜... 왜 이러는 거야...”소유진의 앞에 서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소유진의 뺨을 내리쳤다.“난 여자를 때리거든.”순식간에 부어오른 뺨을 감싸고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자 친구가 뺨을 맞은 걸 보고 유지태도 안색이 어두워졌다.“한진 그룹 본부장입니다. 충고 한마디 할게요. 저런 여자한테는 신경조차 쓰지 말아요.”“안타깝게도 당신 마음속의 여자는 허영심이 많은 사기꾼일 뿐이에요.”“고등학교 때, 돈이 없는 날 그렇죠 외면했었죠. 그런데 내가 한진 그룹의 본부장이 되고 나니까 이리 뻔뻔하게 날 찾아왔어요.”“아직도 뭐 청순한 여신인 줄 아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한테 놀아났는지... 아악! 이거 놔요. 아프다고...”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태준이 그의 팔을 단번에 꺾어버렸다.“이거 놔. 청주시에 한진 그룹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 죽고 싶어 환장했어?”남자는 피식 웃었다.“본부장 따위가 감히. 한진 그룹을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가볍게 뿌리치는
가방이 찢기고 정교한 선물 상자가 안에서 떨어졌다.소유진은 그걸 주워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비웃었다.“심은하, 이제 보니 정말 욕심이 많네. 이 남자 저 남자한테서 다 받아먹는 거야?”막을 겨를도 없이 소유진은 그 선물 상자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상자가 부서지고 그 안에 옥으로 만든 인장이 샅샅이 부서졌다. 심은하 그녀의 마음도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희귀 소재로 만들어진 그 인장은 그녀가 여기저기 부탁하고 몇십 억을 들여 어렵게 구한 인장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슬퍼할 새도 없이 소유진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난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 거야.”“이 계집애 얼굴도 찢어버려. 더 이상 남자한테 꼬리치지 못하게.”피를 보려고 하자 옆에 있던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얼굴을 망쳐놓는 건 좀... 이건 법을 어기는 일이야.”“겁날 게 뭐가 있어? 내 남자 친구가 한진 그룹의 본부장인데. 그깟 얼굴에 칼자국에 내는 게 뭐가 대수로운 일이라고.”“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여자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이내 순순히 심은하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주위에 구경꾼들이 점점 더 많아졌지만 어느 누구도 심은하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좋은 구경거리만 기대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핸드폰이 가방에 있는데 가방까지 빼앗기고 말아서...일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보고 경비원은 유지태의 편을 들며 CCTV 전원을 꺼버렸다.무기력감이 온몸에 퍼져 힘을 쓸 수가 없었다.소유진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뒤집으려는 순간,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해.”차갑지만 조각 같이 잘생긴 얼굴,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남자는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최태준의 싸늘한 눈빛은 엄청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강한 카리스마에 여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심은하를 놓아주었다. 그의 모습에 현혹된 소유진도 손에 들고 있던 눈썹 칼을 바닥에 떨어뜨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이내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한진 그룹 회장 딸이라고?”“한진 그룹 회장님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알고나 하는 얘기야? 너 같은 사람은 평생 우러러볼 수 없는 분이라고.”그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던 유지태가 앞으로 다가와 소유진에게 손을 놓으라고 눈치를 줬다.“심은하,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아무리 네가 성이 심씨라도 해도 그렇지 한진 그룹의 딸이라니.”심은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내가 우리 아빠 딸인 건 사실이니까. 거짓말까지 할 필요 있겠어?”“다른 사람을 속인다고 너 자신까지 속이지는 말아야지.” 눈빛이 어두워지던 그가 소유진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네가 회장님 딸이라고? 그럼 소유진도 알아?”무슨 뜻으로 저리 묻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고등학교 동창.”그 말에 한껏 긴장했던 그의 안색이 그제야 풀렸다.“회장님 딸? 사촌 언니도 몰라보면서 뭔 회장님 딸이야? 사기를 치려면 미리 잘 알아보고 사기 쳐.”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엄마는 외동딸인데 나한테 사촌 언니라니?눈빛이 흔들리는 소유진을 보고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소유진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유지태의 손을 잡고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저 계집애 헛소리하는 거 듣지 마. 잊었어? 쟤네 엄마가 길가에서 청소하는 거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잖아.”아까부터 엄마가 청소부라고 딱 잘라 말하는 소유진의 말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우리 엄마가 청소부라고 확신하는 건데?”차갑게 콧방귀를 뀌던 소유진은 이내 조금 전까지 득의양양하던 기세를 되찾았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네가 길바닥에서 엄마를 도와 청소하고 있는 걸 나랑 지태가 똑똑히 봤어.”“네가 힘들까 봐 너희 엄마는 옆에서 계속 널 말리고 있었고.”“그렇게 잘해 주는 사람이 엄마 말고 또 누가 있겠어?”고등학교 2학년 때?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
심은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였다.“이건 명백한 모욕이에요. 이 여자가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거라고요. 난 이 두 사람과 잘 알지도 못해요.”이때, 소유진이 한마디 쏘아붙였다.“이 세상에 자신을 내연녀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녀의 쳐다보는 소유진의 눈빛은 의기양양했다. 높은 자리에서 그녀를 심판하고 있는 것처럼. “다들 들었지. 남의 남자를 빼앗는 인간은 사람들한테 이렇게 경멸받는 거야. 다들 뭐하고 서 있어? 얼른 시작해.”소유진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심은하의 뺨을 내리쳤다. 막으려고 손을 뻗는데 소유진이 그녀의 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엄청난 고통에 허리가 굽혀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피해? 남의 남자 꼬실 때는 왜 피하지 않았어?”심은하는 배를 움켜쥔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오늘 한진 그룹으로 온 이유는...”철썩.소유진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오른쪽 뺨을 내리쳤다.“속이 다 후련하네.”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고 그녀의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네가 오늘 한진 그룹에 온 건 지태가 한진 그룹의 본부장인 걸 알았기 때문이잖아?”소유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빤히 노려보았다. “여우 같은 계집애. 돈도 좋아하고 허영심도 많은 된장녀였네.”그러더니 그녀의 목에 있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지태가 나한테는 이런 비싼 선물을 사준 적이 없었는데. 너한테 이런 걸 다 사줬어?”한편, 유지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시종일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핏자국이 배어 나오고 옷이 너덜너덜해져 낭패한 모습이었다.“이건 우리 엄마 생일 선물로 주신 거야...”그 말에 소유진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청소부 아줌마가 이런 비싼 선물을 딸한테 한다고?”몸 구석구석 새겨진 상처 때문에 그녀는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이때, 사고가 날까 봐 걱정되었던 경비원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회사로 갈게요.”D국에서 석사 공부를 한 지난 5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그러나 어찌 됐든 이젠 유학 생활을 끝마치고 드디어 귀국하게 되었다. 한진 그룹 본사 88층짜리 높은 빌딩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아빠가 날 위해 일궈놓은 회사라...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어 SNS에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 [내가 이 세상 가장 사랑하는 남자, 당신이 보고 싶어 졸업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요.]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은하?”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누구...”그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툭 쏘아붙였다.“이렇게 변해있을 줄은 몰랐네. 일부러 날 찾아온 거 아니었어? 왜 시치미를 떼고 그래?”“밀당도 정도껏 해야지. 난 밀당하는 여자 매력 없던데.”말을 하던 그가 고개를 살짝 젖히고는 자신 있게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익숙한 그 행동에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떠올랐다.“유지태?”고등학교 시절 귀찮게 그녀를 쫓아다니던 남학생이었다. 그에게 별로 좋은 인상이 없었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때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잘 나가니까 나한테 다시 돌아오고 싶은 거야?”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 건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집요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탓에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욕설을 퍼붓기도 전에 화려한 옷차림의 한 여자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심은하, 여우 같은 계집애. 당장 내 남자 친구한테서 떨어져.”그러더니 이내 심은하의 얼굴을 향해 가방을 휘둘렀다. 유지태한테 손목이 잡혀버린 그녀는 왼쪽 얼굴을 그대로 맞았다. “뭐 하는 거야?”가방에 달린 금속 장식이 눈썹에 부딪혔고 하마터면 눈을 다칠 뻔했다. 영문도 모른 채 한 대 얻어맞으니 그녀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