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가연 마음에도 파동이 일었음을 확신한 순간, 연이진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심장이 아까보다 빨리 뛰네.”“긴장돼?”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연이진에 귓볼에 달아오른 임가연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요.”한의사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게 없다더니 심장박동의 미묘한 변화도 금방 알아채는 연이진이었다.“비허 때문에 습기가 과도하게 쌓여서 장과 위의 기능이 약화되어있어.”“인스턴트 음식은 위에 안 좋아, 특히 라면.”자신이 뭘 먹는지조차 한눈에 보아낸 연이진에 임가연이 눈을 크게 뜨자 옆에 있던 진하온이 물었다.“가연이 평소에 라면만 먹어?”“공부하느라 바빠서 먹긴 하는데, 제가 좀 자주 먹었나 봐요.”“건강이 가장 중요한 건데 이 어린 나이에 아무거나 먹으면 어떡해. 밥 잘 챙겨 먹어야지. 그러니까 이렇게 위도 아프잖아.”“이진아, 위약 좀 처방해줘. 얘가 일만 시작했다 하면 너무 열심이라서 또 자기 몸 안 챙기고 라면만 먹을 게 분명해.”그에 연이진은 타이핑을 하면서 담담히 말했다.“위는 오래도록 신경 써야 하는 거야, 약 먹는다고 낫는 게 아니야.”“앞으로도 음식 신경 써서 먹지 않으면 십이지장 궤양, 위염... 그리고 위암까지 걸릴 수도 있어.”위암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임가연은 눈을 들어 연이진을 바라보았다.난자를 팔았을 때의 위험성을 알려줄 때와 똑같이 장난기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위암이라는 말의 파급력은 엄청 났기에 의사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일 뿐인 임가연은 혹시 모를 상황이 두려워서 입술을 말아 물며 대답했다.“밥 잘 챙겨 먹을게요.”“그럼 마침 점심시간인데 밥부터 먹자. 이 근처에 한정식 잘하는 데 있거든. 그런 거 먹으면 위에도 좋을 거야.”“너도 같이 갈래?”“그래.”임가연이 걱정돼 밥을 먹이려고 나가다가 뒤에 있는 연이진이 생각나서 예의상 물은 것인데 웬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연이진을 진하온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워커홀릭이라서 점심시간에도 병원을 벗어나지 않던 사람
“왜 날 볼 때마다 긴장하는 거야?”“긴장 안 했어요...”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연이진에 임가연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따지고 보면 돈으로 얽힌 숨겨야 할 관계인데 우연히 만났다고 해서 인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하지만 연이진은 뭐가 불만인지 천천히 임가연에게로 다가가더니 임가연을 세면대까지 밀어붙였다.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던 임가연은 허리가 차가운 대리석에 닿자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들어 연이진을 바라보았다.이 순간에도 연이진은 고개를 숙이며 임가연에게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뭐 다른 사람이라도 찾은 거야? 그래서 나 피하는 건가? 나보다 돈 더 많이 줘?”연이진의 말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챈 임가연은 서둘러 해명하기 시작했다.“진 교수님은 말 그대로 제 교수님이시고 회사 대표님이세요.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진하온은 임가연이 봐온 사람들 중 가장 따뜻하고 착한 교수님이었기에 임가연은 이 상황이 두려웠지만서도 타인이 그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건 듣기 싫어 용기 내 입을 열었다.하지만 연이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임가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숨 막힐 듯한 아우라와 함께 입을 열었다.“진하온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명심해.”연이진은 제 말을 이해 못 한 건지 미간을 찌푸리는 임가연의 턱을 잡아 올리며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앞으로 또 돈이 필요하면 그냥 나 찾아와. 두 번이나 한 사이니까 잘 맞기도 하고. 너 하는 거 봐서 일당 올려줄 수도 있어.”필터링 없는 연이진의 말에 얼굴부터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르고 머리가 울려와서 임가연은 다급히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우, 우린 이미 끝난 사이에요. 그런 얘기 이제 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임가연은 화장실을 뛰쳐나와 홀에서 뜨거운 얼굴을 매만지며 여지껏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겉보기에는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야한 말을 농담인지 진심인지도 모르겠는 얼굴로 내뱉어서 놀란 걸까, 아니
그녀의 허리가 아주 잘록했고 몸매도 늘씬했다. 검은 티셔츠를 입어 피부가 더욱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연이진의 시선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머물렀다가 골반, 종아리, 발목으로 향했다. 어느 부위든 조금만 바꾸면 다양한 자세가 가능했다.그는 문득 침대에서 아직 해보지 못한 자세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젠 해보고 싶었다.몸을 아래로 짓눌러서 그렁그렁한 두 눈을 보고 있으면 남자의 가장 원초적인 야수 본능이 깨어난다.연이진이 집어삼킬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임가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사이즈를 재고 노트에 기록한 다음 공구를 정리하려는데 미끄러진 바람에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임가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거의 넘어지려던 그때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연이진의 잘생긴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의사 가운의 옅은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고... 고마워요.”임가연은 똑바로 서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연이진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여전히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요즘은 돈이 부족하지 않아?”그녀는 잠깐 흠칫하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이진을 힘껏 밀어내며 일정한 거리를 둔 다음 확고하게 말했다.“부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힘들 때 도와준 건 감사하지만 그건 거래일 뿐입니다.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 하죠.”연이진은 임가연이 이렇게 얘기할 거라고 진작 예상했는지라 차가운 얼굴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그때 임가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어머니의 전화였다.그녀는 더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공구 상자를 챙기고 휴대전화를 꽉 쥔 채 도망치듯 진료실을 부랴부랴 나왔다.텅 빈 진료실에 홀로 남은 연이진은 허공에 떠 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면서 끓어오른
임가연은 연이진이 아직 그녀를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방향을 틀어서 다른 엘리베이터에 탔다.“가연 씨, 어디 갔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전화기는 왜 꺼놨어? 대표님이 가연 씨한테 제때 밥을 사 먹이라고 당부까지 하셨어.”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오늘 그녀를 데리고 온 설계사 정수빈을 만났다. 임가연이 미안해하며 웃었다.“미안해요, 수빈 언니.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어요. 식당에 찾으러 가려 했었는데.”“마침 잘됐다. 나랑 같이 식당 가자. 대표님께서 가연 씨 위가 안 좋다고 밥 먹는 거 지켜보라고 했어.”정수빈은 임가연의 팔짱을 끼고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근무자 신분이라 병원에서 식당 카드를 주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 카드를 긁어 식사하면 되었다.임가연은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 앉은 다음 정수빈과 함께 식사했다.그때 주변에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인파 속에서 도도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저 사람도 식당에 와서 밥을 먹는다고? 분위기를 보면 이런 데 올 것 같지 않은데?’멀지 않은 곳에 연이진이 식판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간단히 몇 가지 음식만 담은 채 한 손으로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임가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자리에 앉을 때 연이진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임가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느낀 임가연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하고는 식사에 집중했다.옆에 있던 정수빈이 말을 걸었다.“가연 씨 왼쪽 10시 방향에 앉은 잘생긴 남자가 가연 씨를 힐끗 쳐다봤어. 혹시 아는 사이야?”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를 얘기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다급하게 부정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저 남자 모두가 인정한 범접할 수 없는 금욕남이야. 가연 씨가 오늘 3층에 사이즈를 재러 갔을 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만나지 못했다니, 너무 아쉽네.”정수빈이 한탄하듯 말했다.‘금욕남?’임가연은 음식을 씹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침대
어제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에 임가연은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일에 지장이 될까 봐 휴대전화를 켰다. 그런데 켜자마자 최지애가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와 결국 하는 수 없이 다시 꺼버렸다.어제 3층을 다 쟀으니 오늘은 온 하루 6층에 있었다. 다행히 연이진과 만날 일이 없었다.저녁 퇴근 시간, 진하온이 임가연을 데리러 병원으로 찾아왔다.“교수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임가연이 꽤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일 다 끝내고 널 데리러 왔어. 네가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않아서 감시하려고.”진하온이 농담 반 진담 반 섞으며 말했다.임가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출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진하온에게 여러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다. 게다가 매번 비싼 식당에 갔다. 예전에 학교에 다닐 때는 1년에 한 번도 이렇게 사치를 부린 적이 없었다.“교수님, 사실 제 위가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병원에서 식당 카드를 줘서 요 이틀 식당 밥을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계속 이렇게 얻어먹는 게 너무 미안해요.”“비싼 것도 아닌데, 뭐. 별거 아니야.”진하온은 손을 내저으면서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여기까지 왔는데 내 체면 봐서 같이 먹어주면 안 돼?”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당연히 거절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다음에 월급 받으면 교수님께 제대로 대접할게요.”“기억하고 있을게. 아직 나한테 밥 한 끼 빚지고 있어.”진하온이 통쾌하게 웃더니 임가연의 공구 상자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교수님, 공구 상자는 제가 들게요.”임가연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회사 대표가 공구 상자를 들어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꽤 무겁잖아. 남자가 옆에 있는데 여자가 들게 해선 안 되지.”진하온이 웃으면서 말했다.“넌 그냥 나 따라오면 돼.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하루빨리 적응하도록 해.”임가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교수님은 참 좋은 분이셔. 내가 지금까지 본 교수님들 중에서 가장 살갑고 착한 분이야.’그녀는 속으로
흰 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도도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은 주변에 있는 이성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무뚝뚝하고 차가운 옆모습을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잊히지 않았다.그의 맞은편에 예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정교한 메이크업에 몸매도 늘씬했고 섹시한 블랙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친밀해 보였다.연이진이 메뉴판을 건네자 그녀는 달달하게 웃으면서 음식을 주문했다.임가연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어머, 이진아. 왜 우리랑 같이 안 오나 했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랑 선약이 있었던 거구나.”진하온도 그들을 보고는 다가가서 장난쳤다.연이진은 부정하지 않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 식당이 괜찮다고 해서 한번 와봤어.”진하온이 가볍게 웃었다.“이 집 간이 세지 않아서 위에 부담이 없거든. 그래서 일부러 가연이 데리고 왔어.”“그래? 제자를 엄청 걱정하네? 밥 한 끼 먹이겠다고 이렇게 먼 데까지 찾아오고.”연이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가연을 힐끗거렸다. 임가연은 그의 말속에 다른 뜻이 숨어있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내 제자인데 당연히 신경 많이 써야지. 내가 키운 유일한 인재란 말이야.”진하온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됐어. 데이트 방해하지 않을게. 각자 알아서 먹자.”연이진은 웃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진하온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마침 주문한 요리도 나왔다. 두 사람은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이 한 끼가 임가연에게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옆 테이블의 연이진이 그녀를 힐끗거리기만 해도 정확히 다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이진이 일부러 그러는 듯싶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무심코 마주칠 때마다 임가연은 당황해하면서 피했다. 그녀가 피할수록 왠지 더 달라붙는 것 같았고 떼어내기 어려웠다.“임가연?”맞은편의 진하온이 부르고 나서야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단 거 좋아해? 이 디저트 다 먹었네? 다른 요리도 맛있으니까 먹어봐봐.”진하온이
연이진의 태도가 갑자기 180도 바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감히 건드릴 수도, 매달릴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수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 바닥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게다가 엄청난 권력을 지닌 북성의 연씨 가문 출신이다.이런 남자는 멀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건드려선 안 되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여자는 하는 수 없이 실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연이진은 차를 돌려 버스 정류장 옆에 멈춰 섰다. 임가연이 아직 홀로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타.”그는 유리창을 내려 용건만 말했다. 임가연은 흠칫 놀랐다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수석이 텅 비었고 아무도 없었다.‘아까 그 여자는 갔나? 무슨 뜻이지? 그 여자를 데려다주자마자 또 날 만나러 온 거야?’임가연은 그의 차에 타고 싶지 않아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다.“버스 타고 갈게요.”연이진이 계속하여 말했다.“타. 물어볼 게 있어.”‘우리 사이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그녀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뒷걸음질 치면서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 연이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임가연, 말귀 못 알아들어?”임가연은 정류장에 등을 기댄 채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입술만 씹으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녀가 타지 않으니 연이진도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 대치하던 그때 뒤에 차가 클랙슨을 울리면서 재촉했다.하지만 연이진은 듣지 못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임가연을 빤히 노려보았다.“이봐요. 얼른 타요. 부부 싸움을 차에서 하면 안 돼요? 이렇게 길을 막아선 안 되죠.”“그러게 말이에요. 교양도 없이.”뒤에 있던 한 운전자가 소리를 지르자 다른 운전자들도 재촉하기 시작했다.결국 낯가죽이 두껍지 못했던 임가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타려 했지만 한참을 당겨도 열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탔다.“안전벨트.”연이진이 귀띔했다. 임가연이 안전벨트를
연이진은 임가연이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임가연, 이젠 대들기까지 한다, 이거야?”임가연은 계속 용기 내어 말했다.“사실이잖아요. 그리고 교수님은 이진 씨한테 얼마나 다정하게 대하는데 이진 씨는 뒤에서 나쁜 말만 하고 또 이간질이나 하잖아요. 내가 멀리해야 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진 씨 같은데요?”연이진이 핸들을 어찌나 꽉 잡았는지 팔의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그래.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얌전하던 고양이가 이젠 따박따박 대들기나 하고. 그것도 아무런 조짐도 없이. 침대 위에서 고분고분하던 모습은 다 가식이었어.’“차 문 열어주시죠, 연이진 씨.”임가연이 차갑게 한마디를 던지자 연이진이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차 안에서 그의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그녀의 겉과 속을 다 꿰뚫어 볼 기세였다.하지만 그녀는 전혀 겁먹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틀이나 피해 다녀서 이젠 지칠 대로 지쳤다.“임가연, 대단해, 아주.”연이진이 갑자기 싸늘하게 웃으면서 겨우 한마디 했다.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 임가연은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혹시 그가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눈 깜짝할 사이에 아파트 단지로 사라졌다.연이진은 짜증이 밀려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몇 모금 피우니 더욱 짜증이 나서 그냥 꺼버렸다.조금 전 그녀가 한 얘기를 생각하며 두 눈을 감고는 낮은 목소리로 욕했다.“X발.”따박따박 대들던 모습만 생각하면 마음 같아서는 꼼짝도 못 하게 괴롭히고 싶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너무 살살한 모양이다.임가연은 거의 집으로 뛰어오다시피 했다. 문 앞에 기댄 채 가슴을 내려치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조금 전 그 얘기는 홧김에 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너무한 것 같았다.‘엄청 화났겠지?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새 여자 친구도 생겼는데 완전히 등 돌린 거라고 생각하지, 뭐. 앞으로 피하면 돼.’임가연은 욕실로 들어가
어느덧 밤이 어두워졌다.임가연은 진하온과 식사를 마친 후에 천지국제센터로 왔다.그는 대문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옆문으로 들어가 기다란 지하 복도를 지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관람석으로 올라왔다.“여기서 내려다보면 건물 내부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어.”진하온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임가연은 눈을 떼지 못했다.4년 만에 드디어 이 건물을 내부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책에 사진이 있어도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이곳은 북성의 모든 건축학자들의 꿈이다.임가연은 넋을 놓고 구경했다. 대들보와 기둥 하나하나를 열심히 보면서 나중에 그녀도 이런 건물을 설계할 거라고 다짐했다.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로비에 몇몇이 들어왔는데 위층에 있는 진하온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아주 친한 사이 같았다.“진 대표, 거기서 뭐 해? 내려와서 같이 놀자.”진하온은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오늘은 일이 있으니까 너희들끼리 놀아.”“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는 게 뭐 큰일이라고. 거기 가만히 서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어. 내려와서 우리한테도 좀 소개해줘. 우리가 나쁜 사람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서 그래?”그때 누군가가 분위기를 띄웠다.“그러게 말이야. 알고 지내면서 앞으로 도움도 주고 좋잖아.”그들의 말에 진하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임가연에게 물었다.“가연아, 내려갈래? 다들 북성에서 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앞으로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건축하는 사람이라면 인맥은 필수였다. 게다가 저 무리는 딱 봐도 꽤 괜찮은 사람들 같았다.임가연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에게 고객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진하온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내가 쏠 테니까 룸 하나 잡아. 금방 내려갈게.”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종업원에게 룸을 잡아달라고 했다.그
그의 얼굴만 봐도 송태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삼촌,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요? 소리라도 좀 내지.”연이진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보면서 말했다.“봐야 하는 거, 보지 말아야 하는 거 다 봤어.”송태준은 등골이 오싹했다.“난 그냥 걔랑 장난한 거예요. 뭐 어쩌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연이진은 시선을 거두고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아들이 강간 미수, 납치, 폭행, 집단 범죄 혐의를 받고 있어요. 오늘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당신 대신 내가 경찰서에 보낼 겁니다.”송태준은 머리가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삼촌...”상대가 뭐라 했는지 연이진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두 눈에 차가운 기운이 더 짙어졌다.“꺼져. 네 아버지가 널 찾고 있어.”아버지라는 소리에 송태준은 안색이 다 창백해졌다.평소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든 아버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연이진이 한마디만 해도 적어도 3개월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다.지난번에 연이진을 건드렸을 때 갈비뼈와 두 다리가 부러져 창고에 3개월 동안 누워있었는데 진통제조차 주지 않았다.송태준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삼촌, 여자 때문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혹시 걔랑 진짜 뭐라도 있는 거예요?”연이진이 날카롭게 째려보았다.“한마디만 더 물었다간 처벌이 배가 되는 수가 있어.”송태준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연이진이 탄 랜드로바가 사라질 때까지도 송태준은 어두운 얼굴로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형님, 이제 어떡해요?”옆에 있던 부하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물었다.“어떡하긴 뭘 어떡해? 피가 나는 거 안 보여? 가서 약 발라야지.”송태준은 화를 내면서 손에 묻은 피를 털고는 초라한 모습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X발, 임가연 이 나쁜 년. 언젠가는 널 따먹고 만다, 내가.’...그 시각 차 안, 진하온은 운
임가연이 샤워기를 틀자 뜨거운 물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러운 것들을 싹 다 씻어버리고 싶었다.그 후 며칠 동안 임가연은 연이진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맞은편에 살아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임가연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늦게 퇴근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진하온과 함께 현장에 나가 설계를 배웠고 저녁에는 집에서 복습했다.진하온이 그녀가 습득력이 빠르다고 칭찬을 했으니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났다.임가연은 진하온과 함께 매일 병원에 나가 현장에서 일했는데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이 기분이 매우 좋았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올 무렵 임가연은 공구를 잔뜩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현재 진하온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 퇴근할 때 자주 차를 얻어타곤 했다.진하온이 다른 일 때문에 아직 내려오지 않아 임가연이 주차장에서 잠깐 기다렸다.그때 옆에 람보르기니 한 대가 멈춰 섰다. 임가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길을 피했다. 그런데 차 문이 열리더니 남자 몇몇이 차에서 내렸다.“임가연 아니야? 돈 많은 남자라도 만났어?”‘이 껄렁껄렁한 목소리는...’임가연이 고개를 들자마자 맨 앞에 선 송태준과 눈이 마주쳤다.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여전히 건달처럼 껄렁한 모습이었다.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임가연이 고개를 돌리고 피하려는데 송태준이 앞길을 막았다.“왜 도망쳐? 오랜만이라 이 오빠를 잊었어?”송태준이 웃으면서 말했다.“진 교수님 따라서 건축을 배우더니 꼴이 이게 뭐야? 얼굴에 먼지가 가득하잖아. 내가 닦아줄게.”그가 손을 대려 하자 임가연은 본능적으로 피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저리 치워.”“어머? 그동안 성격이 좀 사나워졌다, 너? 그러니까 더 재미있어. 오늘 기분도 좋은데 나랑 갈래?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괜찮으니까 그냥 가던 길 가.”임가연이 싸늘하게 거절하자 송태준도 표정이 굳어졌다.“뭐야?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던 부하가 매정하게
‘뭐라고?’화들짝 놀란 임가연이 고개를 들었다. 연이진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불빛에 그의 눈빛도 어두웠지만 그 속에 욕망이 가득 숨어있는 게 보였다.당장이라도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았다.임가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만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못 알아듣겠어? 그럼 더 알아듣기 쉽게 직설적으로 얘기할게. 내 애인이 돼줬으면 좋겠어. 쭉 해주면 더 좋고. 지금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을 때 많은 걸 요구해도 돼.”연이진이 그녀의 볼을 만지면서 차갑게 말했다.“얼마 줄까? 얼마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줄게.”쿵...임가연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고 손가락마저 부들부들 떨었다.‘지금까지 나한테 그랬던 게 다 그 목적 때문이었어? 잠자리해주는 애인이 되어주길 바라서?’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힘껏 고개를 돌렸다.“싫어요.”“뭐?”연이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잠자리나 하는 애인이 되기 싫다고요. 만나기도 싫고요.”임가연이 용기 내어 말했고 눈빛도 아주 확고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거절할 줄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날 만나지 않으면 진하온을 만나려고?”임가연은 어이가 없었다.‘여기서 갑자기 사부님 얘기가 왜 나와?’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연이진이 계속하여 말했다.“진하온이 돈이 많긴 하지만 여자한테 별로 쓰지 않아. 지금 네 월급으로 생활하는 데 쓰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을 텐데 열심히 일해서 밑 빠진 독 같은 가족을 다 챙길 수 있을 것 같아?”“연이진 씨...”임가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 집 일을 어떻게 알고 있지?’연이진이 덤덤하게 웃었다. 처음 잠자리한 그날 밤 그녀가 잠든 후 베개 옆에 놓인 그녀의 휴대전화가 한밤중까지 진동했다.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임가연이 지금 돈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다음 날 오전에 조사해본 결과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는 고개를 들고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연이진을 쳐다보았다.진하온이 옆에 있는데도 이렇게 당당하게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가연아, 왜 그래?”진하온이 물었다.“아니에요. 방금 손에 경련이 일어나서요.”임가연은 숟가락을 줍고는 경고의 눈빛으로 연이진을 쳐다보았다. 연이진은 고개를 숙인 채 느긋하게 된장찌개를 먹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찌나 무뚝뚝하고 차분한지 평소의 금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식탁 밑에서 까불거리는 발이 그의 발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가식 덩어리야, 진짜.’임가연은 숟가락을 꽉 잡고 조용히 종아리를 뒤로 피했다. 그런데 연이진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무릎을 지나 허벅지 사이를 터치하려 했다. 그녀가 물러설수록 그는 더욱 제멋대로 움직였다.결국 임가연은 참다못해 고개를 들어 연이진의 도발 섞인 두 눈을 빤히 째려보았다.‘날 난감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어.’“가연아, 자. 고기 많이 먹어. 너 너무 말랐어.”진하온은 아무것도 모르고 임가연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그녀는 불편함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사부님.”“그래. 많이 먹어.”식탁 밑의 발이 그녀의 허벅지를 터치했다. 임가연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허벅지로 발을 꽉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힘이 너무 세서 손쉽게 빠져나왔고 임가연이 아무리 저항해봤자 괜히 힘만 빼는 격이었다.임가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진하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어떻게 된 게 점점 못된 짓만 골라 해?’그러다가 진하온이 집어준 반찬을 먹을 때마다 연이진이 툭 건드린다는 걸 알아챘다.임가연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결국 귀까지 다 빨개졌고 진하온이 집어준 반찬마저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식사가 거의 끝나갔다. 대충 식사를 마친 임가연은 그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황급히 일어나 설거지하러 들어갔다.진하온이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또 거절당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주방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수
연이진은 갑자기 나타난 임가연을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이 무덤덤하게 문에 기대어 있었다.“이사했어?”그가 덤덤하게 묻자 임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리 이웃이 됐어요.”그녀가 일부러 접근했다고 오해할까 봐 괜히 설명까지 덧붙였다.“여긴 우리 회사가 제공한 직원 숙소예요. 오후에 신청했었는데 이 집으로 분배받아서요. 정말 공교롭죠?”연이진이 싸늘하게 말했다.“직원 복지가 아주 좋은 회사네.”임가연은 더는 할 얘기가 없었다. 웬일인지 연이진이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려는데 연이진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잠깐.”“왜요?”임가연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너한테 돌려줄 게 있어.”연이진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런데 손에 하얀 꽃무늬 팬티를 들고 있었다.임가연은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윙 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걸 아직도 남겨두고 있었어?’아침에 옷을 급하게 갈아입을 때 다른 잠옷은 다 챙겼지만 팬티를 화장실에 놓고 나왔다. 그런데 연이진이 팬티를 챙겨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돌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임가연은 민망한 나머지 재빨리 팬티를 받고 옷 주머니에 넣었다.“다른 일... 더 있나요?”“없어.”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더니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손가락 끝을 비비적거렸다.임가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쓰레기를 들고 도망쳤다.쓰레기 수거통이 복도에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연이진네 집 문이 열려있었고 그녀의 집 앞에도 누군가가 서 있었는데 연이진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사부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임가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진하온은 커다란 봉지를 흔들면서 웃으며 말했다.“금방 이사해서 필요한 게 많을 거 아니야. 생활용품이랑 냉장고에 넣을 음식 재료 좀 사 왔어.”그녀는 감동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부님, 숙소
‘세상에... 이런 일이. 연이진 씨랑 같은 동인 건 물론이고 게다가 맞은편 집이라고? 고급 아파트라 한 층에 두 집뿐인데 그렇다면 이 층에 나랑 연이진 씨밖에 없단 말이야?’임가연은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사부님, 여기가 바로 회사에서 마련해준 직원 숙소란 말이에요?”그녀는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았다.“응. 지금 남은 집이 이 집밖에 없어. 근데 사람이 오랜 시간 살지 않아서 청소 좀 해야 해.”진하온이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덜컥 열렸고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임가연은 집 안의 인테리어 스타일과 가구를 본 순간 또다시 넋이 나갔다.‘소파, 티테이블, 서랍장, 침대... 어떻게 된 게 이진 씨네 집 거랑 똑같을 수가 있지?’방향마저 똑같았더라면 잘못 들어온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진하온은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진 걸 보고 바로 물었다. 임가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요.”‘재벌들의 인테리어는 한 설계사가 대량으로 설계한 건가? 어쩜 가구 브랜드까지 똑같지?’“그렇게 긴장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혼자 사는 건데 그냥 편하게 지내. 일만 열심히 하면 돼.”진하온은 임가연이 겁을 먹은 줄 알고 일부러 농담을 건넸다.임가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물었다.“제가 혼자 여기서 사나요?”진하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현재는 너 혼자야. 근데 잠시뿐이야. 다른 숙소에 자리가 나면 다시 이사 가도 돼.”단기라는 소리에 임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긴장됐던 마음도 조금은 놓였다.“네. 고마워요, 사부님.”“고맙긴.”진하온은 그녀의 짐을 방 안으로 옮겨주었다. 집구경을 마친 후 임가연이 짐을 정리하려 하자 눈치 있게 먼저 나가려 했다.“그럼 먼저 정리하고 있어. 오늘 반차 줄 테니까 편히 쉬어.”임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아파트를 나선 진하온은 차 안에서 비서
“난 아무한테도 세를 줄 생각이 없어.”연이진이 매정하게 거절하자 진하온이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너무 급해서 그래. 우리가 친구로 지낸 지 몇 년인데 나 좀 도와주라. 한 달이라도 돼.”연이진이 물었다.“그 집을 맡아서 뭐 하려고?”진하온이 대답했다.“어젯밤에 회사의 한 직원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데 이사 가겠다고 하더라고. 걔네 아파트가 너무 복잡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직원 숙소가 패리스 타운에 있으니까 오라고 했거든.”“임가연?”연이진이 덤덤하게 물었다.“어떻게 한방에 알아맞혔지? 역시 너한테는 아무것도 못 숨긴다니까. 어쨌거나 내 제자인데 잘 챙겨줘야지, 안 그래? 근데 네가 세를 주기 싫다면 할 수 없고. 다른 집을 알아봐야지, 뭐.”진하온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의사들은 대부분 결벽증이 있었고 남이 자기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는 걸 매우 싫어했기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연이진이 잠깐 침묵하다가 불쑥 말했다.“세를 줄 수는 있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안 되고 최대한 한 사람만 지낼 수 있게 해. 직원 숙소로 쓰는 건 절대 안 돼.”진하온이 바로 대답했다.“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임가연만 이사를 보낼 수 있다면 그건 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연이진은 전화를 끊은 후 번지수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보냈다. 진하온이 감사의 인사 겸 돈을 보냈지만 받지 않았다.액수가 적은 돈은 눈에 차지 않아 아예 받질 않았다. 진하온도 이미 적응하여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친한 친구라서 나중에 밥 한 끼나 사주면 되었다.진하온은 번지수를 인사팀에 보냈다. 그러고는 인사팀에 절대 말실수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임가연은 빠르게 신청을 마쳤고 숙소 분배도 아주 빨리 진행되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하온이 차 키를 들고 찾아왔다.“가연아, 가자. 마침 오후에 일이 없으니까 이사 도와줄게.”임가연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사부님, 이사는 제가 혼자서 하면 돼요. 짐도 별로 많지 않은데요, 뭐.”“아무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만 출근해야겠어요. 게스트룸 써도 될까요?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임가연은 연이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게스트룸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아침에 음식 재료를 배달한 것 말고 옷도 구매했다. 음식 재료와 함께 연이진의 아파트로 배달됐다.시간이 없어 옷을 씻지도 못하고 태그만 떼고 입었다. 그러고는 가장 저렴한 캔버스화를 신고 부랴부랴 출근했다.다행히 어젯밤에 진하온과 식사하면서 공구 상자를 그의 차에 뒀기에 바로 회사로 가면 되었다.그녀는 집을 나설 때까지도 연이진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연이진은 거실에 앉아 게스트룸에서 거실로 나왔다가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동작 전체가 아주 물 흐르듯이 깔끔했다.그는 소파에 앉아 넋을 놓았다. 차분했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한참이 지나서야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밑반찬 두 가지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돈 받고 그냥 가버려? 장사를 엄청 깔끔하게 하네? 임가연, 아주 잘났어, 그래.’...임가연은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오늘은 병원에 가서 사이즈를 재는 게 아니라 다른 업무가 있다고 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에 할 일을 전부 끝내고 나니 오후에는 좀 여유가 생겨 진하온을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이사할 집을 빨리 찾아야 하니까.“금방 이사한 거 아니었어?”진하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임가연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대충 얘기했다. 지금 머무르는 아파트가 너무 복잡해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만 했다.눈치 빠른 진하온은 그녀의 어려움을 눈치채고 이렇게 제안했다.“가연아, 너만 괜찮다면 우리 아파트에서 살래? 회사와도 가까워서 출퇴근이 편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고.”‘사부님네 아파트? 패리스 타운?’임가연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사부님, 저 아직 인턴이에요. 한 달 월급으로 패리스 타운의 집을 맡는 건 턱도 없어요.”‘그렇게 비싼 아파트를 무슨 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