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실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봉구안도 스스럼없이 소욱의 복부를 매만졌다.소욱은 숨을 꾹 참고 근육이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잠시 후, 봉구안은 좋아하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욱을 바라봤다.“그렇게 바쁘신 와중에 언제 수련까지 하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하루의 시작은 아침에 있지. 외적이 호시탐탐 내 나라를 노리는데 짐도 건강한 몸상태를 유지해야 군사를 이끌고 싸우지 않겠느냐. 그래서 요즘 수련을 좀 했다. 어떠냐? 황후는 만족하느냐?”그는 그녀의 대답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의 귓가로 다가가서 얕은 숨결을 토해냈다. 평온했던 그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그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오늘 밤, 부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소욱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그녀를 품고 싶었다.그는 큰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힘껏 그녀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봉구안은 가볍게 그를 밀치고는 그의 건장한 어깨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은 술에 취한 것처럼 눈빛이 몽롱해졌다.소욱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을 때, 봉구안은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안 됩니다.”그 말에 소욱은 잘 훈련된 신병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먼저 돌아가서 짐을 기다리고 있거라. 저녁에 영화궁으로 가겠다.”그는 태의의 권고도 잊지 않고 휴식에 주의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그날 오후, 봉구안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남자 복장으로 위장하고 궁을 나섰다.그림자 호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고 무예를 잘하는 만추도 동행했다.황후와의 첫 외출이라 만추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마차 안, 봉구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눈을 뜨자마자 바짝 긴장한 만추를 보고 말했다.“긴장 좀 풀거라.”“예!”하지만 만추는 진짜로 긴장을 풀 수 없었다.황후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라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하물며 맹 소
봉구안은 짐짓 안타까운 척 말했다.“자네한테 불공평한 일인 건 알아.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대연은 약을 삼켜버렸다.순간 봉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남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이 정도까지 희생한단 말인가.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작별을 고했다.봉구안이 말했다.“폐하께서는 태중의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여 나에게 푹 쉬면서 태교에만 집중하라고 하였다. 그러니 교무당도 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볼일이 있다면 바로 폐하께 아뢰면 된다.”담대연이 말했다.“남제에는 유능한 인재와 장수가 많습니다. 저는 남제 백성도 아니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도 폐하께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제가 남제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완전한 거미줄 통로를 찾고 전쟁시기에 도움이 되는 것뿐이겠지요.”봉구안도 그 말에 동의했다.“자네가 거미줄 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폐하를 설득하겠다.”그 후 담대연은 황후의 마차를 배웅했다.객잔으로 돌아가자 그의 부하가 조심스레 물었다.“공자, 저들이 곤란하게 하진 않았나요?”자리에 앉은 담대연은 가슴 부상을 만지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황후가 정말 회임이라도 했단 말인가.’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남제 협공의 준비단계는 이미 마무리되어가는 단계였다.저들이 눈치채고 대비책을 세우려 할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황궁.일찍이 정무를 끝낸 소욱은 영화궁으로 걸음했지만 어두컴컴한 궁전만 그를 반기고 있었다.내전으로 들어간 그는 궁인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다.바깥 복도에 선 유사양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왜 불을 밝히지 않은 것일까?갑자기 내전에서 황제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유사양은 곧장 내전으로 달려갔지만 갑자기 나타난 만추가 그의 앞을 막았다.“유 태감, 폐하와 마마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시려는 겁니까?”유사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불도 안 밝히고 무슨 좋은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내전.소욱은 봉구안에게 밀쳐져 침상에 쓰러졌다. 그의 양손은 침
8월 중순이 되자 태양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봉구안 일행은 순조롭게 서여국에 도착했다.여자가 대권을 잡은 서여국이었기에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이 꽤 많았다.순찰을 도는 수비군마저도 전부 여인이었다.예전의 서여국도 남자가 대권을 잡은 시기가 있었다.하지만 한차례 나라가 뒤집힐 정도의 전쟁이 있은 후 사내들은 모두 전장에서 죽고 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었다.나중에 사내들이 천천히 많아지긴 했지만 권력의 맛을 본 여인들은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황실은 여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인에게만 황위를 넘겨주었다.간택된 관료들도 대부분이 여인이었다.사내도 관료가 될 수는 있었지만 극히 적었고 실권을 잡을 수도 없었다.서여국의 여인들은 상위자가 여인이어야만이 이 대권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만약 사내가 대권을 잡는다면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그래서 서여국 황제는 아들이 있지만 황위는 공주에게만 물려주기로 되어 있었다.봉구안은 몰래 온 사절이기에 대놓고 알현을 청할 수 없었다.그녀는 사람을 보내 서여국 내정을 자세히 알아본 후에 움직이기로 했다.조사를 나갔던 비응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공자, 서여국 법도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현임 황제는 40세인데 슬하에 아들딸이 없어요. 법도대로면 방계 친척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하거나 적합한 후보가 없으면 능력이 있는 자에게 물려준다고 합니다.”황실의 성이 바뀌는 건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이건 모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함이고 백성들에게 황위를 외족 여인에게 물려주더라도 절대 사내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황실의 의지이기도 했다.다른 비응군이 계속해서 아뢰었다.“공자, 제가 알아본 바로 서여국 황제에게는 잃어버린 쌍둥이 여동생이 있는데 몇 달 전에 드디어 찾았다고 합니다. 현재 황제는 중병을 앓고 있고 아마 그 여동생이 유력 후보인 것 같습니다.”“성 안에 도처에 의원을 찾는다는 공시가 붙었습니다. 서여국 황제의 병세가 그
봉구안은 멈칫하며 고개를 숙였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고개를 다시 들자 황색 침복을 입은 서여국 황제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략 사십 세 정도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한 주름이 져 있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운은 여전했다.이런 황제가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서여국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 같았다.서여국 황제는 싸늘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며 말했다.“자신의 황후를 서여국에 보내다니. 남제 황제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 짐이 널 죽일까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지?”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었기에 봉구안은 대범하게 인정했다.“서여국 폐하를 뵙습니다. 이번에 귀국에 오게 된 건 남제의 황후가 아닌 사절의 신분으로 온 것입니다. 맹 소장군은 더더욱 아니지요.”“위장을 하고 뵙게 된 것은 국세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하지만 저나 남제는 폐하께 무례를 범할 뜻은 없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서여국 황제는 여전히 검을 겨눈 채로 비아냥거렸다.“이미 무례를 저질러 놓고 양해를 바란다? 맹 소장군의 용맹함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남제 황제가 널 사절로 보냈는데 짐이 어떻게 안심할 수 있지?”봉구안은 날카로운 검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여제를 향해 예를 취했다.“소신은 저희 폐하의 명을 받고 서여국 사절이라는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여국 영토이니 폐하께 사신으로서의 예를 취하겠습니다.”“혹여 폐하께선 남제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있으신지요?”서여국 황제의 눈빛이 근엄해졌다.그녀는 검을 내리고 외투를 걸친 뒤에 긴 머리를 위로 올려서 묶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힘없는 황제에서 여제로서의 위엄을 되찾았다.곧이어 상석에 앉은 그녀는 봉구안에게 자리를 권했다.“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거라.”봉구안은 가져온 국서를 서여국 황제에게 내밀었다.“남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전쟁이 터지면 서여국 병사는 남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만
봉구안은 힘겨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리, 소인의 의술이 부족하여 방도가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숙연은 눈물을 흘렸다.“자네도 방법이 없단 말인가…”봉구안은 굳은 표정으로 예를 행했다.“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숙연도 만났으니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궁 입구에 도착하자 관복을 입은 여인 한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궁인이 말했다.“이분은 승상 나리입니다. 예를 행하셔야 합니다.”승상 조여란은 걸음을 멈추고 봉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네가 공시를 뗀 의원이야?”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조여란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서여국에서 여인이 사내에게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무례에 속하지 않았다.조여란은 황제보다 조금 나이도 어리고 더 말라 보였다.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여인이라서 그런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 빨리 나온 거지?”봉구안은 침착하게 답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하여 폐하의 병을 고쳐드릴 수 없어서입니다.”조여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부족한 의술로 공시를 뗐단 말이냐? 어디서 사기나 치던 놈이 궁에 뭐 도둑질할 게 없나 하고 들어온 건 아니고?”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겠지만 봉구안의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는 땀을 닦는 척 이마를 훔치며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용기를 내본 것입니다. 다만…”조여란은 그녀를 홱 밀치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궤변은 듣고 싶지 않다. 여봐라! 이 돌팔이를 끌고 가서 몸을 수색하라! 궁중의 물건을 도둑질한 게 없나 잘 확인하고 곤장 스무 대를 쳐라!”봉구안은 곤장은 두렵지 않았지만 몸을 수색한다면 여인의 신분이 드러나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시위가 다가오자 봉구안은 언성을 높여 물었다.“승상 나리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도둑질한 게 없어도 곤장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조여란은 거만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물론이지! 의술도 변
서여국 황궁을 떠난 후, 봉구안은 바로 객잔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서여국 승상은 비겁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자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그리하여 그녀는 기루에서 남풍관, 그리고 다시 기루에 들렀다. 기회를 엿봐서 의용술로 모습을 바꾼 뒤에 떠나기 위함이고 여기서 뭔가 알아낼 수도 있었다.이런 유흥업소는 정보가 가장 빠른 곳이기도 했다.기루.봉구안은 기생을 한 명 불렀다. 기생이 손님을 받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봉구안은 보름 간 그녀를 독점하기로 하고 돈을 지불한 후에 방에서 가야금만 연주하라고 했다.이러면 그녀의 행적을 감추는데 유리할 것이다.단지 돈이 많이 들어간 것이 조금 씁쓸했다.이 기생의 일당은 은화 3냥이었는데 그녀가 묵는 객잔보다 더 비쌌다.다행히 기생이 말을 잘 듣고 아는 게 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공자, 그건 모르시나 봐요. 저희의 폐하께선 젊으셨을 때 중상을 입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폐하께는 쌍둥이 여동생뿐이니 아마 황위는 숙연 대인에게 물려주실 것 같아요.”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폐하의 병이 심각하냐?”“예. 이미 조회에 안 나오신지 좀 되었다고 해요. 승상께서 국무를 처리하고 계시죠.”봉구안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심한듯 말했다.“승상께서 권력을 독점하신다? 그럼 그 숙연 대인은 그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기생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말했다.“소인이 여기 간판 언니에게서 들은 바로는 숙연 대인이 승상을 추천한 거랍니다. 자신은 한마음 한뜻으로 폐하를 보살피고 잠시 나랏일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서요.”봉구안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다.“술이 괜찮네. 한 단지 더 내오거라.”“공자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제가 같이 한잔 마셔드리겠습니다.”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한쪽은 막강한 권력을 잡은 승상, 한쪽은 미래의 황제가 될 유력후보. 원래라면 서로 경쟁 관계이고 사이가 안 좋아야 마땅하지만 이
은육은 지난번 천지설산에서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황후가 시킨 일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다.승상 쪽 이상한 움직임을 조사하기 위해 그는 매일 한 시진만 잠을 잤다.그러다가 드디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마마, 어젯밤에 서여국 황제의 쌍둥이 동생이 몰래 승상부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승상과 둘이 오래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저는 너무 가까이 갈 수 없어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그들이 서여국 황제를 제거하려는 것 같습니다.”방 안의 비응군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서여국에 큰 대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비응군 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봉구안에게 예를 행했다.“소인이 보기에 서여국 내부에 대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서여국 황제는 스스로를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저희의 제안에 답을 줄 수 없겠지요. 당장 남제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소식을 기다리는 건 저희들이 하겠습니다!”그들은 죽음을 각오할 수 있지만 소장군이 서여국에서 변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대란이 우리에겐 기회일지도 몰라.”다음 날.봉구안은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공시를 떼고 입궁했다.같은 궁인이 천택궁으로 그녀를 안내했다.내전에서 숙연이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꼈다.“언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만 천하에 의원을 찾는다고 공시를 냈으니…”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서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황제가 입을 열었다.“또 공시를 뗀 의원이 왔네?”숙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봉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겉보기에 부드럽고 애수에 찬 눈동자에서 수상한 한기가 넘쳐흘렀다.서여국 황제는 사람을 물리고 봉구안만 내전에 남겼다.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후, 봉구안은 공손히 황제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저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그동안 그녀를 제외하고 공시를 뗀 자가 없었다.“짐의 소식을 기다리라 하지 않았느냐? 전
이들은 어둠 속에서 서여국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일 것이다.그래서 첫 대면에서도 서여국 황제는 주변을 물려달라는 봉구안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 중에 바보는 없었다.몸을 일으킨 서여국 황제는 침대머리에 놓인 생화를 매만지며 말했다.“짐의 병은 아주 어릴 때부터 짐을 따라다녔지. 매년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특히나 최근 몇 달은 줄곧 병상에 누워만 있어서 제대로 정무를 처리할 수조차 없었지. 승상은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 있었다. 짐이 눈치챘을 때 그녀는 이미 만인지상의 위치까지 올라갔더군.”고개를 돌린 황제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봉구안을 보고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짐을 배신한 자들은 전부 죽어 마땅하다.”봉구안이 담담히 물었다.“거기에 친동생도 포함입니까?”순간 서여국 황제의 손이 흠칫 떨렸다.그녀는 봉구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동산국에서 짐에게 사람을 파견해서 같이 남제를 침공하자고 하더군. 솔직히 저들이 약속한 조건이 남제의 제안보다 좋다고는 볼 수 없어도 솔깃한 제안이긴 했어.”“남제를 몇 등분으로 나누어도 우리에게 성 몇 채가 주어지는데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황제의 눈빛이 뱀처럼 서늘하게 빛났다.봉구안이 말했다.“동산국을 선택하셨다면 첫만남에서 저를 죽이셨을 겁니다.”“하!”서여국 황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봉구안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맞아. 짐의 마음은 남제에 좀 더 기울었어.”“동산국이 남제를 멸망시킨 후에 다음 목표가 서여국일지 어찌 알겠느냐.”“다만 서여국 상황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연맹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지금 조정은 승상이 장악하고 있어. 그녀는 동산국과 연맹을 맺고 남제를 멸할 생각이야.”“주인을 배신한 신하라면 죽여 마땅하지요.”봉구안이 차갑게 말했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승상 하나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어려운 건 모든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