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은 황성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나흘 후, 봉구안은 우성에 도착했다.그녀를 따라온 단정은 여전히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중탑에 간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결국 염추는 입으로만 형님을 구하겠다 떠들다가, 형님이 구중탑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물러섰으니 말이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봉구안이 그 황제와 얽혀 있는 모습이 그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결국 그날, 둘이 여관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단정은 참다못해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물었다.“대체 무슨 속셈이십니까? 아직도 저희 형님을 마음에 품고 계신 건가요? 저 형님과 이어질 생각은 있으십니까?”있다면 왜 황제랑 그런 일을 했고, 없다면 왜 목숨 걸고 형님을 구하려 했냐는 것이다.봉구안은 담담히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밥이나 먹거라.”그녀의 눈에 단정은 아직 철부지 아이에 불과했다.그러니 굳이 설명해 줄 필요도 없었다.이번에 구중탑에 간 건 오로지 타오르는 혈기만 믿고 움직였을 뿐, 별다른 계획도 없었다.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쓸데없는 걸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소욱에 대한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와 잠시라도 연을 맺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단회욱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단정은 속에서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전 안 먹겠습니다!”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봉구안은 그를 달래줄 생각이 없었다.안 먹으면 말지, 이 정도 밥이야 그녀 혼자 다 먹고도 남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 또 다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봉구안은 단정이 돌아온 줄 알고 말했다.“아까는 안 먹는다더니…”말을 하다 말고 목소리가 뚝 끊겼다.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단정이 아니었다.위풍당당하게 앉은 그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왜, 못 알아보겠느냐?”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단정은 참을 수 없었다.그가 문을 두드리는 기세라면 문짝이라도 뜯어낼 기세였다.아까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내려와 보니 식사하던 봉구안이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주인장에게 물어봤고, 한 남자가 와서 봉구안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단정이 문을 몇 번 두드리자 갑자기 몇 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그를 위협적인 눈빛으로 쳐다봤다.그들은 마치 단정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태도였다.이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단정은 안에 있는 남자가 황제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문이 갑자기 열렸다.봉구안은 가면 뒤에서 차갑게 단정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니?”단정은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두 분 안에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단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봉구안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 그를 끌고 가버렸다봉구안은 단정을 그의 방으로 데려가 단호히 말했다.“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거라. 한번만 더 이런 소란을 피운다면, 우리는 이제 이곳에서 각자 갈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단정은 분한 듯 말했다.“저는 누구와 어울리시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들 때문에 형님을 구하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저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사람은 반드시 구할 것이다.”최악의 경우, 그녀는 구중탑에서 함께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봉구안은 후회한 적도, 두려운 적도 없었다.하지만 소욱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녀를 어지럽혔다.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두 시진 후, 소욱이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봉구안을 찾았다.그녀가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제 생각엔, 폐하께서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봉구안은 서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소욱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푹 잠을 자고 나니 그의 안색은 훨씬 좋아 보였다.그는 천천히 설명을
그녀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소욱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입을 맞췄다.봉구안은 즉시 그를 밀어내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무슨 짓이십니까.”소욱은 얕은 미소를 지었다.“남녀 간의 정,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니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이다.”이 모든 말은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봉구안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편함이 떠올랐다.그때 그녀는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줄 알고,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감정에 이끌리는 대로 그에게 입을 맞췄던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봉구안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제 시간이 늦었습니다. 방으로 가서 쉬십시오.”소욱은 문 밖을 향해 물었다.“진한길, 지금 이곳에 빈방이 있느냐.”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폐하, 호위병들이 방을 전부 차지하여 남은 방이 없습니다.”소욱은 다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너와 방을 함께 써야겠구나.”봉구안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차분히 말했다.“아마도 저를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날 밤의 일은…”소욱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알고 있다. 그대가 변덕스럽고 정 없는 여자라는 것을.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봉구안은 어쩔 수 없는 듯 난감해졌다.“폐하, 제가 다시는 폐하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십니까!”소욱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으나, 곧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되는 일이니.”봉구안은 그를 피하려고만 했다.그때, 밖에서 단정의 외침이 들려왔다.“방이 부족하면 저와 같이 써도 됩니다! 제 침대는 넓으니!”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망나니인가.그날 밤, 소욱은 더이상 봉구안과 같은 방을 고집하지 않았다.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큰 적 앞에서 여성에게 탐닉할 때가 아니었다.더구나 그녀가 지금 사랑을 논할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공격’은 자
소욱은 단정과 단회욱의 일행들을 알아보았다. 특히 단정이 단회욱의 친동생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소욱은 이번 여정 내내 단정에게 차갑게 대했으며, 단정 또한 그를 반기지 않았다.단정은 생각했다. 형님은 이 패군보다 열 배, 백 배는 나은 사람이라고…그리고 봉구안, 그 독한 여자는 결국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거라고 믿었다.이틀 후, 일행은 드디어 옥령산 기슭에 도착했다.옥령산은 웅장하고 장엄했으며, 산 정상은 구름과 안개로 뒤덮여 마치 신선이 사는 곳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곳은 신선과 악의 기운들이 공존하는 장소였다.단정은 강렬한 살기를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이 말을 내리자마자 수백 명의 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 길목을 막아섰다.“어디서 온 자들이냐!” 암위 중 하나가 크게 외쳤다.단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뒤에 계신 분은 황제 폐하이시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단정은 이 구중탑이 조정의 소유임을 믿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명하면 남산왕에게 구중탑의 입구를 열라고 하는 것이 쉬울 거라 여겼다.그러나 암위들은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이곳은 남산왕께서 관할하시는 중대한 장소다. 폐하께서 친히 오셨다 하더라도 들일 수 없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단정은 비웃었다.“참으로 거만하군.”소욱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견한 듯 봉구안의 허리에 걸린 옥패를 보았다. 봉구안은 그의 시선을 읽고는 아무 말 없이 옥패를 그에게 건넸다.소욱은 옥패를 높이 들며 명령했다.“남산왕을 데려오거라.”“예!”얼마 지나지 않아 남산왕이 산에서 내려왔다.그의 나이는 4~50대쯤 되어 보였으며, 복장은 평민들과 같았다. 옷 곳곳에 크고 작은 얼룩들이 있어, 군사들을 지휘하는 왕의 모습이라 보기 어려웠다.“신, 폐하께 문안드립니다.” 남산왕은 겉으로는 공손한 태도를 취했으나, 그 눈빛과 표정에는 고집스러운 기질이 드러났다.황제가 이번 행차에서 구중탑을 허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남산왕의 그 얄팍
봉구안은 즉시 소욱을 부축하였다.옆에 있던 진한길도 즉시 달려와 그녀를 도왔다.단정과 남산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너,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남산왕이 즉시 노하여 물었다.봉구안은 소욱을 진한길에게 맡기고 나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남산왕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폐하, 무고한 장병들을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소자는 소환이라 하옵고, 구중탑에 들어갈 것을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남산왕은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 없이 소욱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진한길이 황제를 가마에 태워 보낸 뒤에야 남산왕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남산왕은 다시 봉구안을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진정 구중탑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냐?”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렇습니다!”“좋다.” 남산왕은 아주 시원스럽게 응했다.진한길은 떠나기 전에 봉구안을 향해 간단히 인사를 했다.“소공자, 몸조심하시오!”이 시점에서 진한길은 그녀가 소환임과 동시에 폐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그녀가 황제가 마음속에 간직한 인물이라는 사실도…만약 알았다면, 절대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오로지 황제의 안전만을 염려하며 달리기 시작하였다“이얍!”가마가 멀어지자 단정은 초조해졌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봉구안을 책망했다.“왜 이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까! 삼만 대군으로 오만 대군을 상대해도 반드시 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데…”“닥치거라.” 봉구안이 차갑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단회욱을 구출하는 일은 처음부터 그녀의 사사로운 일이었다.이를 위해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면, 설령 그 사람을 구해낸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누구에게나 가족과 친구가 있지 않겠는가?누구도 죽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단회욱의 목숨이 소중하다면, 그 장병들의 목숨 또한 소중한 것이다.봉구안의 꾸짖음에 단정은 낯빛이 어두워졌다.“정말 어리석습니다.”황제가 앞을 막아주고 있으니, 삼만으
진한길이 가마를 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가마를 멈춰 확인하려는 찰나, 갑자기 무겁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멈춰라!”진한길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빨리 깨어나실 줄이야!‘소환이 분명 바늘에 약을 묻혔다고 했는데!’휘익…소욱이 가마의 문을 열어젖히며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엔 냉랭한 기운이 서려 있었고, 약효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아 얼굴이 창백하였다.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진한길은 고통을 호소했지만, 곧바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폐하, 신은 그저 온 천하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봉맥이 파괴된다면…”“닥치거라!”소욱의 눈에는 차가운 한기가 가득했다.“소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아니… 모두 함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폐하께서는 어찌 소환을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인가!진한길은 간곡히 간했다.“폐하! 그건 봉맥입니다! 국운이자 폐하의 황위가 걸린 일입니다! 저 소환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만 번 죽더라도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그러나 황제가 하려는 일을 한낱 호위무사인 진한길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숨돌릴 틈도 없이 소욱은 다시 옥령산으로 돌아왔다.남산왕은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 즉각 경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저 패군, 또 탑을 부수러 온 것이겠지! 더 많은 마취약을 먹였어야 했어!’소욱은 남산왕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멀리서 봉구안이 그 열두 명의 여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들은 숲 사이를 누비며 때로는 나뭇가지 위에, 때로는 아래로, 또 때로는 높이 도약하며 싸우고 있었다.소욱은 알고 있었다.그 열두 여자는 옥령산을 수호하는 십이사명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녀들의 무공은 변화무쌍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갑자기 봉구안은 다섯 명의 칼날 공격을 연달아 피하면서 앞의 잔상
죽은 사람은 천룡회 교주가 아니었다.이 사실에 옆에 있던 단정조차 충격을 받았다.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네가 어떻게 그걸 알게 된 거야?”염추 역시 급했지만 침착하게 설명했다.“천룡회에서는 교주, 구왕, 그리고 두 명의 법사들은 평소에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저는 교주 양연삭 곁에서 일했던 심복이었지만, 그들의 가면 아래 얼굴은 몰랐습니다.”“그날 교주가 출관하자, 저는 당연히 모두 교주라고 생각했죠.”“하지만 그가 죽은 후, 그의 목 뒤에 작은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그 점은 제가 우법사에게서 본 것이었습니다.”“우법사는 저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쳐줬었고, 저는 그런 우법사와 꽤 가까이 지냈었거든요.”“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라 여겼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했습니다.”“교주는 폐관 수련을 하며 ‘건성법’을 익혔습니다.”“이 ‘만건성법’은 다른 사람의 내공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무공이죠.”“하지만 그 가짜 교주는 싸우는 동안 이 ‘만건성법’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단정은 여기까지 듣고 난 후, 뒤늦게 상황을 깨달으며 분노했다.“이렇게 중요한 걸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염추는 그가 자신을 탓할 줄 몰랐다.지금 그녀도 무척 조급했다.결국 그녀는 천룡회의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진짜 교주가 살아 있다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염추는 죽고 싶지 않았다…단정이 더 말하려고 하자, 봉구안이 그를 막았다.“염 낭자가 이렇게 먼 길을 와 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폐하, 염 낭자를 안전히 집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마련해 주세요.”봉구안의 말을 들은 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따랐다.“진한길, 사람을 준비하거라.”“예!”염추는 떠나기 전, 일부러 단정을 불렀다.둘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주변은 깊은 밤의 어둠으로 가득차 있었다.염추가 물었다.“그 소환과 회욱 오라버니는 어떤 관계인가요?”“저 사람들도 구중탑에 들어가 회욱
소욱뿐만 아니라 단정도 망설였다.염추를 배웅한 후, 그는 봉구안을 찾아갔다.“양연삭의 내공은 그 두 법사보다도 더 깊습니다.”“게다가 지금은 만건성법까지 익힌 상태죠.”“지금 그와 맞선다면 승산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단지 헛되이 죽게될 것입니다...”“그리고 형님께서는…”그는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숙였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형님은 형수님이 죽는 걸 절대 원치 않을 것입니다!”봉구안의 눈빛은 단호했다.“그 사람이 그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외면할 수는 없어.”“너는 그 십이사명을 이길 수도 없지 않느냐! 왜 허세를 부리는 거야!”단정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설마 형님과 함께 죽으려는 건가요? 형님께서는 절대 형수님의 죽음을 원치 않을 거예요!”다 큰 사내면서 왜 아직도 울며 난리를 피운단 말인가…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사람을 구해낼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시도할 거야.”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었다.단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생각해봤는데 형수님은 탑에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아요…”“형님도 형수님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절대 원치 않을 거예요…”“형님의 가장 큰 바람은 형수님이 잘 살아가는 거였어요.”“그런데 형수님께서 탑 안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그럼 누가 저를 돌봐주겠어요?”그는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형님에게 분명 저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둘 다 죽으면, 저는 그럼 어떡하라고요!”천룡회는 이미 무너졌고, 그의 형도 자취를 감추었다.현재 그는 돌아갈 집도 없는 상태였다.봉구안은 눈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그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그녀의 눈빛이 다소 누그러졌다.“잘 듣거라.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북방 자유각으로 가거라. 이제부터 그 곳이 네 집이 될 것이다.”단정은 강하게 반박했다.“거긴 제 집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집이죠! 형수님과 형, 둘 중 하나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