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주는 봉구안의 기만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은 황실 전체를 우롱한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소욱의 시선이 봉구안에게로 향했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이 일이 천하에 알려진다면 오히려 황실의 명예에 더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 “더구나 황후는 어쨌든 봉가의 여인이니, 선제의 유훈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장공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폐하, 그럼… 그럼 이를 추궁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봉가가 저지른 것은 엄연한 기만죄였다. 황후의 자리는 황명의 결정 사항이다. 어떻게 신부를 바꿔치기할 엄두를 낼 수 있었단 말인가? 더욱이, 황제가 이를 이렇게 가볍게 넘기다니, 이는 말이 되지 않았다. “폐하,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사옵니다!” 장공주는 끝까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황후의 대리 혼례에 관한 증거를 찾느라 그녀는 적잖은 노력을 들였다. 그것을 이렇게 쉽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 황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맹소장군을 모함하고, 황제를 유혹하며, 재물에 눈이 어두운 이 여인이 어떻게 황제를 제대로 보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여인은 황제를 해칠 터였다! 봉구안은 장공주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악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고요한 태도로 소욱에게 돌아서며 공손히 절을 올렸다. “폐하, 신첩 또한 스스로가 덕과 재주가 부족하여 이 자리에 합당치 않다고 여기옵니다.”“신첩은 황후로서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장공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참으로 교묘한 퇴로였다! 이 여인은 정말로 수완이 뛰어난 자가 아닌가! 하지만 사실, 봉구안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녀는 이 궁에 오래 머물 계획이 없었다. 황후라는 자리도 그녀에게는 오히려 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소욱은 그녀의 발언을 단칼에 잘랐다. “
교먹은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곧바로 감금되었다. 한때 위풍당당하던 장군의 군복은 벗겨지고, 그녀의 몸에는 희끗희끗한 죄수복이 걸쳐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 속에는 불굴의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봉구안을 보자마자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를 드리우며 물었다. 주위에 다른 이는 없었기에 교먹은 바로 질책하였다. “언니, 그래도 옛정이 있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매정할 수 있어!” “내가 이런 꼴로 전락한 것을 보니, 이제서야 후련하지?” “어떻게 폐하께서는 언니의 기군죄를 눈감아주신 거지?”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교먹은 봉구안을 조롱 섞인 눈빛으로 훑어보며 비웃었다. “아아… 알 것도 같아. 분명히 침상 위에서 폐하를 기쁘게 하려고 갖은 비위를 맞춘 거겠지!” “그치? 하긴, 궁 안의 여자들은 저 궁 밖의 기녀들과 다를 바 없으니까!” “때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팔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밑에서 기꺼이 몸을 굽힌 거겠지!” “언니, 언니가 이정도 천박할 줄은 몰랐어…”“폐하와 한 침상에 있을 때, 단씨 오라버니를 떠올리기는 했어?” “단 씨 오라버니는 아마 저승에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거야! 언니의 몸은 이미 더럽혀졌어!”“저승에서 단씨 오라버니를 만나도 오라버니는 더 이상 언니를 원치 않을 거야!”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순진하고 소심한 교먹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진면목이었다. 혀를 놀려 온갖 더럽고 악독한 말들로 상대를 능멸하는 모습이었다. 봉구안은 교먹의 말을 일일이 해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교먹, 넌 여기서 얌전히 지내며 남은 생을 반성하며 보내도록 해.” “네가 맹 소장군의 이름을 사칭한 사실을 폭로하지 않은 것은, 너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생명줄이야.” “그러니 평생 이곳에서 반성하며 지내. 더 이상 다른 욕망을 품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 마지막 생명줄마저 내가 직접 끊어버릴 거
북연에서 온 사신 웅염이 당당히 나서며 말했다. “폐하, 저희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저를 보내, 폐하의 생신을 축하드릴 예물을 마련하셨사옵니다.” “다만 오는 길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어, 부득이하게 일정이 지체되고 말았사옵니다.” “소신이 늦게 도착했음을 폐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옵소서...” 이 핑계는 너무도 치졸했다. 분명 일부러 늦게 나타난 것 아닌가! 남제에서 대대적으로 제작한 죽화총이 완성될 때를 노려, 그 공을 가로채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북연 사람들은 어찌 이리도 낯짝이 두껍다는 말인가!남제 조정의 신하들은 속이 상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작 알았더라면, 군기감에서 그렇게 서둘러 제작하지 말라고 하였을 터인데… 일 년, 아니 반 년만 더 미루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황제 소욱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대의 귀와 눈이 유난히 밝은 것 같소.” 웅염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과찬이시옵니다!”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폐하, 언제쯤 그 죽화총을 구경할 수 있사옵니까?” “남제는 대국이니, 동위와 같은 소국처럼 배타적이진 않을 줄로 믿사옵니다.” 이 말을 듣고 조정에 있던 모든 신하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과거 동위가 신무기 '화룡'을 제작했을 때, 북연이 이를 노리고 참견하려 했던 일을 말이다. 북연은 '참관'을 빌미로 병기 도면을 훔치려 했으나, 작지만 기개가 있었던 동위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북연은 이를 계기로 동위를 무례하다며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침략했다. 가련한 동위는 급히 화룡을 제작했으나, 단 한 대로 북연의 대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결국 국토는 유린당하고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북연은 동위에서 빼앗은 화룡을 통해 전장을 제패하며 위세를 떨쳤다. 지금 웅염이 동위를 언급한 것은 곧 남제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북연은 실로 오만함
장공주는 자신이 황후를 업신여긴다 여겼지만, 정작 이 죽화총의 도면을 그린 이는 다름 아닌 봉구안이었다. 그녀는 교먹이 반드시 개량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으나, 교먹은 처음부터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교먹은 그저 이 기회를 붙잡아 감옥을 벗어나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보니 주저함이 앞섰다. 특히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죄에 또 죄를 물게 될 것이다.” 소욱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교먹은 마음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그저 시험 삼아 해보겠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그녀의 이런 얕은 수작은 황제에게 절대 통하지 않을 터였다.장공주는 불안해하며 간청했다. “폐하, 맹교먹은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말하려던 순간, 교먹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할 수 없사옵니다.” 장공주는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먹이 방금 뭐라고 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기존의 도면에 몇 가지 기계를 더하는 것에 불과한데, 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던 교먹에게 어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교먹의 등에는 이미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죄를 더 짊어질 수 없었다. “폐하… 소인 확신할 수 없사옵니다.”봉구안은 냉랭한 눈빛을 보냈고, 소욱은 교먹에게 더욱 크게 실망했다. 이토록 위급한 순간에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다니… 그가 기억하던, 절망 속에서도 출구를 찾던 소년 명장은 사라진 듯했다. 장공주는 교먹을 감싸며 다시 나섰다. “폐하, 맹교먹은 그저 잘못될까 두려워 말한 것뿐이옵니다.” “제발 이 아이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옵소서.” “지금은 힘을 뭉칠 사람이 많을수록 득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녀는 그러면서도 봉구안을 노려보았다. “황후마마, 어쩌자고 맹교먹을 이토록 몰아붙이는 것입니까!” 소욱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북연 사신들은 연일 남제의 군기감에 머물며 기세등등하게 구는 중이었다. 그들은 한 군기고 앞에 이르렀으나, 출입을 금지당하자 크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사신을 대표하는 웅염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황제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죽화총을 보여주겠노라 약조하셨다. 너희 따위가 어찌 감히 이를 막겠단 말이더냐!” 군기감의 감장이 직접 나서 예를 갖추며 사죄했다. “대인, 죽화총은 아직 완전히 제작되지 않았사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청하옵니다.” 웅염은 남제가 이를 일부러 지연하고 있음을 눈치챘으나, 남제가 이미 몸을 낮춘 상황에서 북연이 지나치게 몰아붙였다가는 도리어 화를 부를 수 있음을 알았다. 며칠을 더 기다린다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떠나기 전, 웅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어차피 우리 북연에게 보여주게 될 터. 더 이상의 시간은 끌지 말거라!” 그가 떠난 뒤, 군기감의 관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분개했다. “북연의 횡포가 정말 도를 넘었군!” …저녁이 되자, 소욱은 영화궁에서 봉구안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조용히 말했다. “맹교먹의 죄가 산처럼 쌓여 있소.” “이번에 큰 공을 세운다 한들, 짐은 그 아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은 이어질 주제를 꺼내기 위한 서두였다. 그는 봉구안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장공주의 말도 맞소.”“짐은 맹교먹에게 감옥 안에서라도 도안을 그리게 할 것이오.” “그 아이가 성공한다면 당장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터…” “짐은 그대가가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번 일은 대의를 위한 것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아주시오.” 봉구안은 손을 빼내며 고개를 숙여 말했다. “신첩, 명심하겠사옵니다.” 등불 아래 비친 그녀의 옅은 미소를 본 소욱은, 잠시 감정이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협소한 공간, 침상 위에서 봉구안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소욱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그녀를 한 치의 여유도 없는 곳에 가둬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입맞춤을 피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 갑작스레 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왜 피하는 것이오?” 봉구안의 눈동자는 고요한 우물과도 같았다. 그녀의 두 주먹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소욱은 이를 갈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레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훑으며, 숨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숨결은 거칠어졌고,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허리띠에 닿아 단숨에 풀어버렸다. 여러 겹의 옷 위로 그의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매끈한 아랫배를 덮었다. 그는 그녀의 귀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자를 낳아주시오.아니, 황자를 낳거라.” 이것은 협상의 말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그녀의 옷을 마구잡이로 벗기기 시작했다. 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침상 너머의 휘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미간은 단단히 좁혀져 있었다. “폐하, 저는 동침하는 것을 원치 않사옵니다.” 이 말은 마치 평지에 벼락이 치는 듯했다. 소욱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몸을 약간 들어 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돌려 자신의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뭐라고 하였소?” 그의 눈에는 분노와 의문이 뒤섞여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상황에서 그녀는 도대체 무엇이 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거짓말을 문제 삼지 않으려 했는데도 말이다. 봉구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달빛처럼 차갑고, 소나무처럼 단단했다. “폐하께서 황자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낳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옵니다.” 소욱은 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는 차갑고 냉랭
어전.유사양이 황제의 화상약을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황후가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굳이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소욱은 자리에 앉아 책상 가장자리에 손을 올려두었다.봉구안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소매를 조심스레 걷어 올리며 화상 부위를 드러냈다.군영에서 약을 쓰던 경험이 풍부했던 그녀는 능숙하게 약을 발랐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다 끝났사옵니다.”소욱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이렇게나 빨리?”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는 쌓여 있는 상소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상소문을 가져오시오. 짐이 말할 테니, 그대가 대신 적어주시오.”봉구안은 놀란 기색으로 답했다.“폐하, 자고로 궁 안의 여인들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법도이옵니다.”더군다나 그녀가 대필까지 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소욱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전부 쓸데없는 내용들일 뿐이오. 신경쓰지 마시오.”매일 올라오는 상소문 중 정사를 논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대부분은 별 의미 없는 상소들이었다.봉구안은 황제가 과장한 줄 알았으나, 그의 요청대로 상소문을 열자 그것이 과언이 아님을 깨달았다.예컨대, 어떤 지방 관리의 상소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황제 폐하, 강성의 솜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사옵니다. 이는 모두 황제께서 부지런히 국정을 돌보신 덕택이옵니다. 신은 솜꽃을 한 송이 말려 폐하께 바치오니, 강성 백성들의 존경을 전하는 바옵니다.]그리고 상소 끝에는 말라 비틀어진 초라한 꽃 한 송이가 붙어 있었다.봉구안은 어이가 없었다.소욱은 익숙한 듯 말한다.“답장을 적어주시오… 말린 꽃이 참으로도 아름답구나. 하지만 다음에는 보내지 말거라.”봉구안은 망설였다.“신첩의 글씨체가 폐하와 다르옵니다.”“괜찮소.”이런 상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들이었다.그러다 봉구안은 더 이상한 상소를 발견했다.“황제의 용안은 태양처럼 빛나 만민을 비추고, 황제의
봉 부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단독으로 황제를 알현하게 되자, 불안감에 사로잡혔다.황제는 사람을 시켜 자리를 내어달라 했으나, 그녀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궁인이 차를 올렸으나, 그녀는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그녀의 긴장한 모습을 본 소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리 조심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짐이 묻고자 하는 건 단지 황후가 태어난 뒤 곧장 맹가로 보내졌던 일에 대해 너희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뿐이다.”그의 물음에 봉 부인은 더더욱 두려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정했다.“폐하, 누군가가 헛소리를 올린 것이옵니다! 황후는 줄곧 봉가에서 자랐고, 맹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소욱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더 이상 알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더 캐물었다간 봉 부인이 그대로 겁에 질려 기절할 게 뻔했다.그는 나지막이 명령했다.“봉 부인을 궁 밖으로 모셔라.”“명 받들겠습니다!”봉 부인은 혼미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상황을 봉 대인에게 상세히 전했다.봉 부인은 봉구안이 대체한 일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마음을 놓았다.그러나 황제가 이 일에 의심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봉 대인의 얼굴은 다시 창백해졌다.“이거 큰일이구나!”황제가 의심을 품었다면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봉 대인은 불안감에 땀을 흘리며 마음 졸였다.“황후가 아직 황자를 낳지 못한 탓에, 내가 이리도 마음을 졸여야 하다니!”…군기감.북연 사신은 초조해하며 소리쳤다.“며칠이나 지났는데, 죽화총은 아직도 제작이 끝나지 않은 것이오! 설마 일부러 시간을 미루는 것이오?”감장은 여전히 태연히 말했다.“곧 끝납니다. 곧이요.”지하 감옥.맹가의 교먹은 죽화총 개량을 명받아, 혼자 독방에 배치되었다.그곳은 주변에 다른 죄수도 없으며, 오직 그녀가 작업에 집중하도록 꾸려졌다.방 안에는 종이와 붓, 작은 책상 등이 마련되었으며, 장 공주의 세심한 배려 덕에 고문은 커녕 기운도 좋았다.정오, 한 간수가 음식을 들고 교먹의 방으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