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먹은 황제가 영화궁을 떠나는 것을 보자, 즉시 뒤따라갔다. 그녀는 감찰관의 직위를 가진 무관으로, 소환이 없이는 입궐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여성이었기에, 아무리 높은 관직에 있어도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논할 수 없었다.결국 황제를 직접 뵐 기회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그녀는 어떤 사안을 고하려 했으나, 눈앞의 황제는 두 눈에 핏줄이 서고 무언가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순간적으로 떨림이 일었다. 황제는 평소에 그저 엄격하고 무뚝뚝한 인상만을 주었을 뿐, 지금처럼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습은 아니었다.“무슨 일이냐.” 소욱의 기세는 마치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주위의 온기를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교먹은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모아 절하며 말했다.“신이 한 가지 병기 설계도를 올리고자 하옵니다!”찬바람이 휘몰아쳐 그녀의 얼굴을 스칠 때, 소욱은 사사로운 일을 단념하고 임금으로서의 자리에 재빨리 복귀하였다. 그는 병기 설계도를 받아 들고 가볍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는 순식간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고, 교먹을 향해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예전부터 들었노라. 그대의 재주가 남다르다 하더니, 여러 신형 병기를 창안하였구나.”“그대를 감찰관에 두기에는 그대의 재능을 묻어두는 셈이로구나.”교먹은 몸을 굽혀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그 눈 속에는 칭찬으로 인한 기쁨은 없었다.무엇보다 이 도면은 그녀가 그린 것이 아니라, 봉구안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영화궁.최상궁은 마치 먹잇감을 맡은 사냥개처럼 급히 안으로 들어가 봉구안에게 보고하였다.“마마, 그 맹 소장군이 아무리 여자라지만, 경계해야 할 자이옵니다.”“들으니, 폐하께서 영화궁을 떠나시자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고 들었사옵니다. 지금쯤 두 사람이 추운 정자에서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것이옵니다.”“에구구... 마마께서 직접 보셨다면 마음이 상하셨겠지요. 그 맹 소장군은 분수도 모르고 남자 앞에서 술잔
봉구안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소위 신형 죽화총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교먹이 보물처럼 여겨 공을 세우려 가져온 것은 사실 그녀가 버린 폐기물에 불과했다.이때, 군기감 내에서는 모두가 그 병기 도면을 둘러싸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맹 대인은 정말 여걸이로구나! 이토록 정교한 도면을 그리다니!""우리 군기감은 이렇게 좋은 물건을 오랜만에 보네! 어서 저 공인들에게 알리게나.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이 신형 대나무 화포부터 제작에 들어가게!""아주 기대가 되는구만!"그들은 도면을 볼수록 교먹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이렇듯 놀라운 여인이 세상에 또 있으랴. 그녀가 남제에 태어나 남제에서 자란 것이 그저 다행스럽게 여겨질 뿐이었다.죽화총, 일명 돌격 화포는 짧으면 한 자, 길면 일곱 자까지 달했다. 외관은 기다란 통처럼 생겼으며, 화약의 폭발을 통해 특수한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였다. 과거의 구형 대나무 화포는 천연의 굵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몇 번만 발사해도 화약의 폭발로 인해 대나무가 매우 약해졌고, 특히 총신 끝부분은 쉽게 파손되었다. 그리하여 폭발 사고가 자주 발생해 화포를 쏘는 자에게 큰 상처를 입히곤 했다. 때문에 이 대나무 화포는 전장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남제의 군기감에서도 매년 일부를 제작하긴 했으나 일시적인 전투에 쓰일 뿐, 그 수량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버리게 되어 자원을 낭비하는 셈이었다.그런데 맹교먹이 그린 도면에서는 대나무 대신 철판을 사용하고, 총신 구조를 간소화하여 폭발 위험이 없고 반복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안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대체처럼 보였으나, 이전에 여러 사장이 시도했지만 그 다음 난관을 넘지 못한 난제였다. 이제 마침내 실행 가능한 방안이 나타났으니 어찌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않겠는가!군기감의 공인들은 의욕을 불태우며 즉시 제작에 착수했다. 교먹이 올 때마다 그들은 달려들어 온갖
효현궁.녕비는 머리를 빗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머리장식을 거칠게 내리치자, 뒤에서 머리를 손질하던 궁녀가 깜짝 놀라다 이내 땅에 무릎을 꿇었다."마마, 노여움을 푸소서!"녕비는 동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띄었다. 오늘은 그녀의 스무 살 생일이었다. 오랜 세월의 고된 삶과 우울함으로 이 얼굴은 이제 소녀 같지 않았다. 화장을 해야만 피부에 광택이 돌고 탄력 있어 보였다. "어디 가서 믿겠느냐? 내가 비의 자리에 있지만, 한 번도 폐하와 동침하지 못했다는 걸."황후가 뒤늦게 들어온 것도 참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궁에 들어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모용가의 모용선까지 그녀보다 우위를 점했다. 그것도 자신의 생일날에 말이다...녕비는 체념하지 않고 궁녀에게 물었다."정녕 폐하께서 정 귀인과 함께 동침하겠다고 하였느냐?"궁녀는 그 자리에 엎드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 정녕 그렇사옵니다."궁녀는 마마의 심기가 불편한 줄 알면서도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정 귀인이 오늘밤 동침할 것이라는 소식은 궁 안에 이미 널리 퍼져 있어 감출 수 없었다.녕비는 조소하듯이 헛웃음을 지었다."좋다. 태황태후께서 정말 수완이 좋으시군. 드디어 외가 손녀를 용상에 올려 놓았구나."이런 불경한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도 자신의 궁에서였기에 가능했다. 궁녀는 덜덜 떨며 억지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권했다."마마, 오늘은 마마의 생신이옵니다. 태후마마께서 특별히 자녕궁에서 연회를 베푸셨으니 다른 사소한 일로 복을 깨트리지 마소서."녕비는 냉소를 머금었다."내가 또 한 살 먹었다는 것이 무슨 축하할 일이라고! 고모께서는 분명 나를 꾸짖으려는 것일 게다!"궁녀는 맞장구치며 말했다."마마는 꽃보다도 아름다우십니다. 마마께서 아직 젊으시니 궁에 새로 들어온 이들도 마마의 빼어난 미모를 따를 수 없사옵니다."녕비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릴 적부터 태후의 눈에 들어 특별히 아낌없이 키워졌겠는가. 그러나
영화궁.정 귀인이 침소에 들었는데도, 황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 비해 최 상궁은 몹시도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 귀인이 황자를 잉태하게 된다면, 황후의 은총이 더는 유일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 귀인은 원래 영비와 똑 닮았기에, 황제가 그 이후에도 충분히 총애를 줄 것이 틀림없었다. “마마께선 어찌 저리도 태연히 자녕궁에 가서 녕비마마의 생일을 축하해 주실 생각을 하시는 걸까요! 걱정이 되지도 않으신가 봅니다…”……자녕궁.태후, 황후와 여러 후궁이 녕비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였지만, 그 분위기는 도통 들뜨질 않았다. 많은 사람의 마음은 이미 방비전에 가 있었다. 이 술이 입에 맞지 않게 느껴질 뿐이었다. 태후는 본디 자신도 후궁에서 시작한 사람이라, 저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말했다. “이미 궁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한 가족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녕을 빌어야만 이 궁이 화합을 이룰 수 있으며, 그래야 폐하께서도 천하에 더 많은 마음을 쏟을 수 있느니라.”“정 귀인이 비록 오늘 자리하진 못했으나, 특별히 예물을 보내오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정 귀인을 배려하고, 폐하의 침소에 들 기회를 얻었다 하여 원망하지는 말거라.”모든 후궁이 마음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으나, 입으로는 일제히 대답했다. “예, 태후마마.”태후는 다시 황후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다른 후궁들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황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 귀인이 침소에 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하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태후는 황후가 정 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황후, 너는 이제 홀 몸이 아니니, 이토록 추운 날에는 특히 조심해야 하느니라.”봉구안이 고개를 숙여 말했다. “예, 태후마마.”곧이어 태후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정 귀인이 침소에 들었으니, 머지않아 이 궁에 경사가 또 찾아올지도 모르지 않느냐.”그
“황후마마.” 강빈이 나무 뒤에서 걸어나오며 무거운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은 담담히 물었다.“무슨 일로 날 찾아온 것이냐?”“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야?”강빈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내전에 이르자, 강빈은 격하게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황후마마,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봉구안은 차분하게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여 시침을 원하느냐?” 차가운 목소리였다.강빈은 입술을 꼭 깨물고,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저는 어떻게 총애를 받는지 모릅니다.”“정 귀인은 저보다 늦게 입궐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황후마마, 오늘 밤 녕비가 무례한 언사를 내뱉었으나, 그 말이 전혀 과장은 아닙니다. 마마께서는 황손을 품고 계시니 시침을 받을 수 없지 않으세요? 행여나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까 두렵습니다…”“차라리 그럴 바엔 저라도 마마를 대신해 폐하를 모시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마마와 마음을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진심어린 간청이었으나, 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강빈, 폐하께서 누구를 총애하실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강빈의 눈물은 더욱 투명하게 빛나며 애처로운 모습이 되었다.“마마, 최소한… 저를 영화궁 근처로 옮겨주세요.”이를 듣자마자 연상이 경계를 높였다. 강빈이 황후의 덕을 입어 황제와 가까이 있으려는 속셈이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다른 빈들이 이를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황후가 이를 허락하신다면 내일 영화궁은 난리가 날 게 뻔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일어나거라.”강빈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저는 입궁하여 폐하의 총애를 받아 아버지가 황성으로 돌아와 만년을 편히 보내도록 돕고자 했사옵니다. 연초 아버지께서는 북방에서 잘 지내신다고 하셨지만, 최근 며칠 밤마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아버지를 꿈속
봉구안은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눈을 뜨니, 소욱이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그의 얼굴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웠다.“깨어났느냐?” 그의 목소리는 쉰 듯 거칠었고, 살기를 띠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이 멀리 가서 보니, 연상이 땅에 엎드려 있었다. 전각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았다. 최 상궁 역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매를 맞으며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었다.“황제 폐하, 저는 중전마마께 충성하였사옵니다! 저는 결코 황손을 해칠 이유가 없사옵니다…” 봉구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욱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누워 있어라!” 그녀는 의아해하였다. 몸에 힘이 없음을 똑똑히 느꼈다.이는 마치 피를 쏟아낸 듯했다.소욱의 목소리는 마치 사막의 모래와 같고, 한겨울의 냉기를 품고 있었다. “네가 진정 아이를 품고 있었더라면, 오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봉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리 심각한 일인가? 연상은 눈이 붉어진 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봉구안이 물었다.“중독이다.” 소욱이 딱 잘라 대답하였다.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하였다.봉구안은 깜짝 놀랐다. 늘 조심하던 그녀가 어찌하여 독에 중독이 되었단 말인가? 소욱은 그녀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답하였다. “서역의 혈분자라 하더구나.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아 술에 섞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더군.” 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 “태중에 있는 황손을 노린 것이옵니까?” 소욱은 답하지 않았다. 그때, 신하가 전각 밖에서 고하였다. “폐하, 소신이 영화궁을 샅샅이 뒤졌사오나 혈분자는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자녕궁 상황은 어떠한가?” 소욱의 음성은 냉랭하여 마치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하였다. “자녕궁에서 아직 소식이 없사옵니다.” 봉구안의 입술이 희게 질리었다. “폐하, 이
정월의 추위는 아직 가시지 않아 땅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내관들은 줄지어 땅바닥에 엎드려 매질을 당하고 있었고, 매가 내려올 때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흘렀다. 모두가 황제를 잔혹하고 포악한 인간이라 했으나, 모용선은 지금껏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목격하게 되니, 그녀는 은근히 불안한 감정이 싹텄다. 모용선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내전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침상 옆에 앉아 깊은 주름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황후는 침상에 누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신첩, 황제 폐하께 문안드리옵니다…” 모용선은 다가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욱은 그녀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 “밖은 추운데, 여기까지 나올 일이더냐?” 이 말은 마치 그녀를 염려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모용선은 상냥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첩은 황후마마가 걱정되어 왔사옵니다. 황제 폐하, 황후마마의 용태는 어떠하옵니까?” 소욱은 봉구연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다른 큰일은 없다.” 모용선의 시선은 황후의 배 쪽으로 향했다. 저 황손이 아직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여봐라, 정 귀인을 방비전에 바래다주어라.” 소욱은 담담하게 말했다. 모용선은 거절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감 어린 빛을 띄고 있었다. “황제 폐하, 신첩이 남아 황후마마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함께 지켜보고 싶사옵니다.” 소욱의 눈빛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만 돌아가 쉬거라.” 그녀가 여기 남아 있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용선은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눈치를 보였다. 그녀가 이곳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황제는 단 한 번만 그녀를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 그의 시선은 온통 황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오늘 밤은 황제가 방비전에서 그녀와 함께 머물기로 되어 있던 날이
태황태후는 다소 의외였다. 황제가 이렇게 쉽게 황후를 내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보아하니 예전에 황제가 폐위를 반대한 이유는 오로지 황후의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소욱이 말했다.“하지만 이 일을 함부로 할 수는 없사옵니다. 할마마마께서는 어떤 이유로 황후를 폐위하시려 하십니까?”태황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후가 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쉽게 그녀를 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서의 일은 대중에게 밝힐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난감했다.“황후가 중병에 걸렸다고 알리도록 하여라.”……황후의 유산 소식은 곧 궁 밖 봉가에 전해졌다. 봉 대인은 마치 큰 재앙이 닥친 듯,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황후가… 유산했다고?”그의 외손자, 장차 태자가 될 아이, 그리고 봉가의 영광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봉 부인은 황후의 건강을 더욱 걱정했다. 그녀는 봉안진에게 당부했다.“네가 가서 자세히 알아보거라. 황후께서 어찌 되셨는지, 그 독이 혹여 몸에 해가 되진 않았는지 말이다…”봉 대인도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그래! 어서 가서 알아보아라. 장차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도 말이다!”이번 태를 지키지 못했더라도 다음 태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그러나 봉 부인은 그의 말에 크게 실망했다.……그 시각, 영화궁 안에서는…지난밤의 대대적인 추궁에도 불구하고 독을 쓴 자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뜻밖에도 몇몇 궁의 첩자가 드러났다. 마치 한바탕 비를 맞은 듯 어지러운 과정이었으나, 끝나고 나니 궁은 오히려 깨끗해진 기운이 감돌았다.봉구안은 독에 중독이 되었지만, 해독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하룻밤 푹 쉰 덕에 이미 많이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평소 그녀가 몸을 단련한 덕분에 일반인보다 회복이 빨랐기 때문이었다.오후가 되어 소욱이 찾아왔다. 그가 들어오자 영화궁의 궁인들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침까지만 해도 영화궁 밖 바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