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먹은 황제가 영화궁을 떠나는 것을 보자, 즉시 뒤따라갔다. 그녀는 감찰관의 직위를 가진 무관으로, 소환이 없이는 입궐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여성이었기에, 아무리 높은 관직에 있어도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논할 수 없었다.결국 황제를 직접 뵐 기회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그녀는 어떤 사안을 고하려 했으나, 눈앞의 황제는 두 눈에 핏줄이 서고 무언가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순간적으로 떨림이 일었다. 황제는 평소에 그저 엄격하고 무뚝뚝한 인상만을 주었을 뿐, 지금처럼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습은 아니었다.“무슨 일이냐.” 소욱의 기세는 마치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주위의 온기를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교먹은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모아 절하며 말했다.“신이 한 가지 병기 설계도를 올리고자 하옵니다!”찬바람이 휘몰아쳐 그녀의 얼굴을 스칠 때, 소욱은 사사로운 일을 단념하고 임금으로서의 자리에 재빨리 복귀하였다. 그는 병기 설계도를 받아 들고 가볍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는 순식간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고, 교먹을 향해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예전부터 들었노라. 그대의 재주가 남다르다 하더니, 여러 신형 병기를 창안하였구나.”“그대를 감찰관에 두기에는 그대의 재능을 묻어두는 셈이로구나.”교먹은 몸을 굽혀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그 눈 속에는 칭찬으로 인한 기쁨은 없었다.무엇보다 이 도면은 그녀가 그린 것이 아니라, 봉구안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영화궁.최상궁은 마치 먹잇감을 맡은 사냥개처럼 급히 안으로 들어가 봉구안에게 보고하였다.“마마, 그 맹 소장군이 아무리 여자라지만, 경계해야 할 자이옵니다.”“들으니, 폐하께서 영화궁을 떠나시자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고 들었사옵니다. 지금쯤 두 사람이 추운 정자에서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것이옵니다.”“에구구... 마마께서 직접 보셨다면 마음이 상하셨겠지요. 그 맹 소장군은 분수도 모르고 남자 앞에서 술잔
봉구안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소위 신형 죽화총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교먹이 보물처럼 여겨 공을 세우려 가져온 것은 사실 그녀가 버린 폐기물에 불과했다.이때, 군기감 내에서는 모두가 그 병기 도면을 둘러싸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맹 대인은 정말 여걸이로구나! 이토록 정교한 도면을 그리다니!""우리 군기감은 이렇게 좋은 물건을 오랜만에 보네! 어서 저 공인들에게 알리게나.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이 신형 대나무 화포부터 제작에 들어가게!""아주 기대가 되는구만!"그들은 도면을 볼수록 교먹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이렇듯 놀라운 여인이 세상에 또 있으랴. 그녀가 남제에 태어나 남제에서 자란 것이 그저 다행스럽게 여겨질 뿐이었다.죽화총, 일명 돌격 화포는 짧으면 한 자, 길면 일곱 자까지 달했다. 외관은 기다란 통처럼 생겼으며, 화약의 폭발을 통해 특수한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였다. 과거의 구형 대나무 화포는 천연의 굵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몇 번만 발사해도 화약의 폭발로 인해 대나무가 매우 약해졌고, 특히 총신 끝부분은 쉽게 파손되었다. 그리하여 폭발 사고가 자주 발생해 화포를 쏘는 자에게 큰 상처를 입히곤 했다. 때문에 이 대나무 화포는 전장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남제의 군기감에서도 매년 일부를 제작하긴 했으나 일시적인 전투에 쓰일 뿐, 그 수량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버리게 되어 자원을 낭비하는 셈이었다.그런데 맹교먹이 그린 도면에서는 대나무 대신 철판을 사용하고, 총신 구조를 간소화하여 폭발 위험이 없고 반복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안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대체처럼 보였으나, 이전에 여러 사장이 시도했지만 그 다음 난관을 넘지 못한 난제였다. 이제 마침내 실행 가능한 방안이 나타났으니 어찌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않겠는가!군기감의 공인들은 의욕을 불태우며 즉시 제작에 착수했다. 교먹이 올 때마다 그들은 달려들어 온갖
효현궁.녕비는 머리를 빗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머리장식을 거칠게 내리치자, 뒤에서 머리를 손질하던 궁녀가 깜짝 놀라다 이내 땅에 무릎을 꿇었다."마마, 노여움을 푸소서!"녕비는 동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띄었다. 오늘은 그녀의 스무 살 생일이었다. 오랜 세월의 고된 삶과 우울함으로 이 얼굴은 이제 소녀 같지 않았다. 화장을 해야만 피부에 광택이 돌고 탄력 있어 보였다. "어디 가서 믿겠느냐? 내가 비의 자리에 있지만, 한 번도 폐하와 동침하지 못했다는 걸."황후가 뒤늦게 들어온 것도 참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궁에 들어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모용가의 모용선까지 그녀보다 우위를 점했다. 그것도 자신의 생일날에 말이다...녕비는 체념하지 않고 궁녀에게 물었다."정녕 폐하께서 정 귀인과 함께 동침하겠다고 하였느냐?"궁녀는 그 자리에 엎드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 정녕 그렇사옵니다."궁녀는 마마의 심기가 불편한 줄 알면서도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정 귀인이 오늘밤 동침할 것이라는 소식은 궁 안에 이미 널리 퍼져 있어 감출 수 없었다.녕비는 조소하듯이 헛웃음을 지었다."좋다. 태황태후께서 정말 수완이 좋으시군. 드디어 외가 손녀를 용상에 올려 놓았구나."이런 불경한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도 자신의 궁에서였기에 가능했다. 궁녀는 덜덜 떨며 억지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권했다."마마, 오늘은 마마의 생신이옵니다. 태후마마께서 특별히 자녕궁에서 연회를 베푸셨으니 다른 사소한 일로 복을 깨트리지 마소서."녕비는 냉소를 머금었다."내가 또 한 살 먹었다는 것이 무슨 축하할 일이라고! 고모께서는 분명 나를 꾸짖으려는 것일 게다!"궁녀는 맞장구치며 말했다."마마는 꽃보다도 아름다우십니다. 마마께서 아직 젊으시니 궁에 새로 들어온 이들도 마마의 빼어난 미모를 따를 수 없사옵니다."녕비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릴 적부터 태후의 눈에 들어 특별히 아낌없이 키워졌겠는가. 그러나
영화궁.정 귀인이 침소에 들었는데도, 황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 비해 최 상궁은 몹시도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 귀인이 황자를 잉태하게 된다면, 황후의 은총이 더는 유일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 귀인은 원래 영비와 똑 닮았기에, 황제가 그 이후에도 충분히 총애를 줄 것이 틀림없었다. “마마께선 어찌 저리도 태연히 자녕궁에 가서 녕비마마의 생일을 축하해 주실 생각을 하시는 걸까요! 걱정이 되지도 않으신가 봅니다…”……자녕궁.태후, 황후와 여러 후궁이 녕비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였지만, 그 분위기는 도통 들뜨질 않았다. 많은 사람의 마음은 이미 방비전에 가 있었다. 이 술이 입에 맞지 않게 느껴질 뿐이었다. 태후는 본디 자신도 후궁에서 시작한 사람이라, 저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말했다. “이미 궁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한 가족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녕을 빌어야만 이 궁이 화합을 이룰 수 있으며, 그래야 폐하께서도 천하에 더 많은 마음을 쏟을 수 있느니라.”“정 귀인이 비록 오늘 자리하진 못했으나, 특별히 예물을 보내오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정 귀인을 배려하고, 폐하의 침소에 들 기회를 얻었다 하여 원망하지는 말거라.”모든 후궁이 마음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으나, 입으로는 일제히 대답했다. “예, 태후마마.”태후는 다시 황후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다른 후궁들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황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 귀인이 침소에 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하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태후는 황후가 정 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황후, 너는 이제 홀 몸이 아니니, 이토록 추운 날에는 특히 조심해야 하느니라.”봉구안이 고개를 숙여 말했다. “예, 태후마마.”곧이어 태후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정 귀인이 침소에 들었으니, 머지않아 이 궁에 경사가 또 찾아올지도 모르지 않느냐.”그
“황후마마.” 강빈이 나무 뒤에서 걸어나오며 무거운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은 담담히 물었다.“무슨 일로 날 찾아온 것이냐?”“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야?”강빈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내전에 이르자, 강빈은 격하게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황후마마,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봉구안은 차분하게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여 시침을 원하느냐?” 차가운 목소리였다.강빈은 입술을 꼭 깨물고,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저는 어떻게 총애를 받는지 모릅니다.”“정 귀인은 저보다 늦게 입궐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황후마마, 오늘 밤 녕비가 무례한 언사를 내뱉었으나, 그 말이 전혀 과장은 아닙니다. 마마께서는 황손을 품고 계시니 시침을 받을 수 없지 않으세요? 행여나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까 두렵습니다…”“차라리 그럴 바엔 저라도 마마를 대신해 폐하를 모시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마마와 마음을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진심어린 간청이었으나, 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강빈, 폐하께서 누구를 총애하실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강빈의 눈물은 더욱 투명하게 빛나며 애처로운 모습이 되었다.“마마, 최소한… 저를 영화궁 근처로 옮겨주세요.”이를 듣자마자 연상이 경계를 높였다. 강빈이 황후의 덕을 입어 황제와 가까이 있으려는 속셈이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다른 빈들이 이를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황후가 이를 허락하신다면 내일 영화궁은 난리가 날 게 뻔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일어나거라.”강빈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저는 입궁하여 폐하의 총애를 받아 아버지가 황성으로 돌아와 만년을 편히 보내도록 돕고자 했사옵니다. 연초 아버지께서는 북방에서 잘 지내신다고 하셨지만, 최근 며칠 밤마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아버지를 꿈속
봉구안은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눈을 뜨니, 소욱이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그의 얼굴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웠다.“깨어났느냐?” 그의 목소리는 쉰 듯 거칠었고, 살기를 띠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이 멀리 가서 보니, 연상이 땅에 엎드려 있었다. 전각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았다. 최 상궁 역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매를 맞으며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었다.“황제 폐하, 저는 중전마마께 충성하였사옵니다! 저는 결코 황손을 해칠 이유가 없사옵니다…” 봉구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욱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누워 있어라!” 그녀는 의아해하였다. 몸에 힘이 없음을 똑똑히 느꼈다.이는 마치 피를 쏟아낸 듯했다.소욱의 목소리는 마치 사막의 모래와 같고, 한겨울의 냉기를 품고 있었다. “네가 진정 아이를 품고 있었더라면, 오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봉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리 심각한 일인가? 연상은 눈이 붉어진 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봉구안이 물었다.“중독이다.” 소욱이 딱 잘라 대답하였다.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하였다.봉구안은 깜짝 놀랐다. 늘 조심하던 그녀가 어찌하여 독에 중독이 되었단 말인가? 소욱은 그녀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답하였다. “서역의 혈분자라 하더구나.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아 술에 섞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더군.” 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 “태중에 있는 황손을 노린 것이옵니까?” 소욱은 답하지 않았다. 그때, 신하가 전각 밖에서 고하였다. “폐하, 소신이 영화궁을 샅샅이 뒤졌사오나 혈분자는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자녕궁 상황은 어떠한가?” 소욱의 음성은 냉랭하여 마치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하였다. “자녕궁에서 아직 소식이 없사옵니다.” 봉구안의 입술이 희게 질리었다. “폐하, 이
정월의 추위는 아직 가시지 않아 땅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내관들은 줄지어 땅바닥에 엎드려 매질을 당하고 있었고, 매가 내려올 때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흘렀다. 모두가 황제를 잔혹하고 포악한 인간이라 했으나, 모용선은 지금껏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목격하게 되니, 그녀는 은근히 불안한 감정이 싹텄다. 모용선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내전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침상 옆에 앉아 깊은 주름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황후는 침상에 누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신첩, 황제 폐하께 문안드리옵니다…” 모용선은 다가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욱은 그녀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 “밖은 추운데, 여기까지 나올 일이더냐?” 이 말은 마치 그녀를 염려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모용선은 상냥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첩은 황후마마가 걱정되어 왔사옵니다. 황제 폐하, 황후마마의 용태는 어떠하옵니까?” 소욱은 봉구연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다른 큰일은 없다.” 모용선의 시선은 황후의 배 쪽으로 향했다. 저 황손이 아직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여봐라, 정 귀인을 방비전에 바래다주어라.” 소욱은 담담하게 말했다. 모용선은 거절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감 어린 빛을 띄고 있었다. “황제 폐하, 신첩이 남아 황후마마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함께 지켜보고 싶사옵니다.” 소욱의 눈빛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만 돌아가 쉬거라.” 그녀가 여기 남아 있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용선은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눈치를 보였다. 그녀가 이곳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황제는 단 한 번만 그녀를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 그의 시선은 온통 황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오늘 밤은 황제가 방비전에서 그녀와 함께 머물기로 되어 있던 날이
태황태후는 다소 의외였다. 황제가 이렇게 쉽게 황후를 내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보아하니 예전에 황제가 폐위를 반대한 이유는 오로지 황후의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소욱이 말했다.“하지만 이 일을 함부로 할 수는 없사옵니다. 할마마마께서는 어떤 이유로 황후를 폐위하시려 하십니까?”태황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후가 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쉽게 그녀를 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서의 일은 대중에게 밝힐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난감했다.“황후가 중병에 걸렸다고 알리도록 하여라.”……황후의 유산 소식은 곧 궁 밖 봉가에 전해졌다. 봉 대인은 마치 큰 재앙이 닥친 듯,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황후가… 유산했다고?”그의 외손자, 장차 태자가 될 아이, 그리고 봉가의 영광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봉 부인은 황후의 건강을 더욱 걱정했다. 그녀는 봉안진에게 당부했다.“네가 가서 자세히 알아보거라. 황후께서 어찌 되셨는지, 그 독이 혹여 몸에 해가 되진 않았는지 말이다…”봉 대인도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그래! 어서 가서 알아보아라. 장차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도 말이다!”이번 태를 지키지 못했더라도 다음 태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그러나 봉 부인은 그의 말에 크게 실망했다.……그 시각, 영화궁 안에서는…지난밤의 대대적인 추궁에도 불구하고 독을 쓴 자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뜻밖에도 몇몇 궁의 첩자가 드러났다. 마치 한바탕 비를 맞은 듯 어지러운 과정이었으나, 끝나고 나니 궁은 오히려 깨끗해진 기운이 감돌았다.봉구안은 독에 중독이 되었지만, 해독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하룻밤 푹 쉰 덕에 이미 많이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평소 그녀가 몸을 단련한 덕분에 일반인보다 회복이 빨랐기 때문이었다.오후가 되어 소욱이 찾아왔다. 그가 들어오자 영화궁의 궁인들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침까지만 해도 영화궁 밖 바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
수만 대군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화약과 진천뢰를 옮겼다.구중탑 내부.양연삭은 계속 위층으로 올라가 마침내 여덟 번째 층에 도달했다. 진기의 영향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다섯 번째 층 이상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지만, 그는 소환과 황제를 찾을 수 없었다.잠시 생각한 뒤, 그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발걸음도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꼭 꼭대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꼭대기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다!”양연삭은 구중탑의 아홉 번째 층에 오르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살폈다.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다.옷자락 한 조각이었다.그는 손바닥에 진기를 모아 그것을 끌어당겼으나, 나타난 것은 단지 겉옷 한 벌일 뿐이었다.“속임수인가?”양연삭의 눈빛이 차갑고 깊어졌다.“나와라!!”그는 광기에 휩싸인 듯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진기로 형성된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공격을 가했다.그때, 밖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안전구역 내부.소욱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산을 폭파하고 있는 모양이군.”그의 눈썹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풀리며 미소가 번졌다.“드디어 끝이 나는군…”쾅!!펑…!고요했던 옥령산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연기와 화염이 뒤덮었다.남산왕은 장병들을 이끌고 안전지대로 물러난 뒤 명령을 내렸다.“폭파하라!“다시 폭파해라!”남산왕의 반복되는 명령에 진한길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슬그머니 봉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소... 공자, 그 안전구역이라는 곳이 정말 폭파되지 않는 겁니까?”그는 이 상황을 보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봉구안의 다른 쪽에 서 있던 동방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동방가문이 남긴 안전구역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물론 전제는 황제가 정말 안전구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금 가면을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과거 자신이 알던 그 소환이 아니었다.소환이 여인이었다니… 그것도 폐비 봉씨라니…동방세
구중탑 밖, 남산왕은 여전히 굳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이토록 완고한 사람은 봉구안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동방세가 말했다.“저희 선조께서 구중탑으로 옥석비를 보호하신 이유는, 아마도 태조 황제께서 옥석비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길 원치 않으셨기 때문일 겁니다.”진한길이 남산왕 앞에 무릎을 꿇고, 눈가가 붉어졌다.“전하! 방금 말씀 들으셨습니까! 태조 황제께서 정말 옥석비를 필요로 하셨다면 어찌 그것을 진압하셨겠습니까? 진작 그것을 받들어 모셨을 것입니다!”“그러니 더 망설이지 마시고, 어서 구중탑을 파괴하십시오!!”남산왕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냉정하게 돌아섰다.“봉맥은 끊어질 수 없다.”그와 그 장수들의 사명은 봉맥을 지키는 것이었다.봉맥이 끊기면, 그들 모두 죽게 될 터였다.달빛이 봉구안의 얼굴을 비추니, 차갑고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는 남산왕에게 단호히 말했다.“양연삭이 감히 구중탑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나갈 방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 탑을 부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양연삭의 손에 의해 탑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옥석비 역시 그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혼란에 빠질 텐데, 그것이 전하께서 바라는 바이십니까!”남산왕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분명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단정은 형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분노하여 소리쳤다.“이 고집불통 노인네! 봉맥은 끊어질 수 없다고 하면서, 소씨 황족의 혈맥은 끊어져도 된단 말입니까?”“오늘 여기서 저 단정이 맹세합니다! 구중탑을 부수지 않아 저희 형님이 나오지 못하면, 전 소씨 황족을 모두 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위를 잇는 자는 더 이상 없겠죠!”남산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단정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못할 것 같습니까! 이 고집불통 노인네, 먼저 당신부터 죽일 것입니다!”봉구안이 단정을 재빠르게 막았다.단정은 곧 멈
“소환?! 너는 어떻게 나온 것이냐!폐하는!”진한길은 즉시 그녀의 뒤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뒤에는 굳게 닫힌 돌 문 뿐이었다. 돌문 외에 황제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산왕이 급하게 물었다. “소환! 어찌하여 너만 나온 것이냐! 폐하는 어디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봉구안은 즉시 말했다.“전하, 즉시 명령을 내려 구중탑을 폭파하십시오!” 남산왕의 얼굴이 금세 파래졌다. “그럴 수 없다!” “저긴 봉맥이 이어진 곳이기 이전에, 폐하께서 아직 안에 계시지 않는가!” “지금 나의 손을 빌려 군주를 시해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결코 폐하를 시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봉구안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폐하께서는 안전한 곳에 대피해 계십니다. 천룡회 교주는 수시로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 구중탑을 파괴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요!” 그래도 남산왕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그래도 안 된다! 구중탑이 무너지면 봉맥은 반드시 끊어지게 돼. 나는 이 봉맥을 망칠 수 없다! 남제 국운에 관계되는 이 일은 내가 감히 결정할 일이 아니다.”“설령 폐하께서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난 끝까지 구중탑을 지켰을 것이다!”진한길이 노했다. “남산왕 전하! 지금 황제 폐하께서 안에 갇혀 계십니다!”그는 즉시 분부하였다.“어서 빨리 사람을 불러와 구중탑을 폭파할 준비를 하십시오!!” 원래 그는 황제의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금, 황제는 안에 갇혀있는 상태였다.그는 즉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구중탑을 폭파하기 위해 필요한 폭약과 진천뢰는 이미 충분히 준비해둔 상태였다! 남산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거라! 황제는 새로 세울 수 있지만, 남제의 국운은 다시 올 수 없는 법이니...” 봉구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남산왕 전하께서 지키는 것은 봉맥이 아니라 그 황백한 물건들이 아닙니까! 설마 그 보물들이 황제 폐하의 목숨보다
소욱은 위층으로 달려갔다. 계속 달려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그는 아래로 내려가는 쪽이 생존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래로 내려가면 봉구안에게는 아무런 살길이 남지 않았다.첫째, 그녀는 자신보다 체구가 작고 경공이 뛰어나 내문을 더 빠르게 통과할 수 있어 탑을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둘째, 탑을 나간 뒤에는 남산왕을 설득해 탑을 부숴야 했다. 만약 탑 안에 남는 사람이 봉구안이라면 남산왕은 그녀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곳에 갇혀 있는 사람이 황제인 자신이라면 남산왕도 어느 정도는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결국 봉구안은 탑을 나간 뒤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녀는 그저 자신이 살기보다는 그를 살리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심지어 단회욱과 함께 죽을 각오까지 한 듯했다.그런 그녀의 뜻을 소욱이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는가!…봉구안은 빠르게 1층까지 내려갔다.상황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시간은 더욱 촉박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구중탑은 오직 들어올 수만 있고 나갈 수는 없는 구조였다. 입구가 곧 출구였다.탑을 나가려면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소욱이 탑에 들어온 이상, 진한길과 그 일행은 필사적으로 탑 안으로 들어와 그를 지키려 할 것이다.그러니 문은 언젠가 열릴 터였다.봉구안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제 남은 건 하늘의 뜻이었다.그때였다. 2층에 있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젊은이, 여기서 나갈 수는 없다. 이 구중탑에는 문이 두 개지.”“바깥 문이 열리기 전에 안문이 먼저 닫혀버리는 구조라네.”“가끔 머리를 굴려서 안문 바깥에 미리 서 있으면 괜찮을 거라 착각하는 자들이 있더군.”“하지만 그곳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안문의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게 되지… 못 믿겠으면 한번 해보거라.”봉구안은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그녀는 이미 5층에서 악인들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이 바닥에는 하중 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위에 사람이 발
봉구안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적룡왕과 자룡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 자들 가운데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너희들, 저 둘의 옷을 입고 변장하거라.”악인들은 봉구안의 명령에 불만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또 그 소위 보물이라는 걸 위해서 일단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곳에 갇힌 자들 대부분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예 구중탑에 갇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흉내 내는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쓰자 꽤 그럴싸한 모습이 되었다.잠시 후, 그들은 봉구안을 따라 다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양연삭은 그곳에서 명상을 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뜨며 그들을 노려보았다.변장한 자룡왕이 나서서 예를 표했다.“교주님, 조사해본 결과 뜻밖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다섯 번째 층 바닥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어쩐지 다른 층보다 훨씬 두텁더니…”양연삭은 그들의 몸에 묻은 피를 보며 차갑게 시선을 내리깠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저들을 죽이려 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제가 교주였다면 저 자들을 당장 없애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말한 위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그 말은 은근히 협박의 뉘앙스를 풍겼다.양연삭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충분한 인원을 소집하여 당장 땅을 파거라.”“알겠습니다, 교주님!”봉구안이 제안했다.“외부인을 믿을 수 없으니…”“다섯 번째 층의 모든 이를 몰아내고 저희 손으로 직접 파는 게 어떠십니까?”양연삭의 음성이 날카롭게 변했다.“저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그의 차가운 자신감은 무적의 내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말이 끝나자, 그는 갑자기 기세를 폭발시키며 강력한 힘을 봉구안에게 발산했다. 기류가 즉시 감옥처럼 형성되어 그녀를 가뒀고, 그녀의 몸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진기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그것은 양연삭의 만건성법이었다! 그는 그녀의 내공을 빼앗으려 했다.양연삭의 눈빛은 얼
그녀더러 소욱을 죽이라니?봉구안의 손바닥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양연삭에게 되물었다.“이 탑에서 나갈 방도가 있습니까?”말인즉슨, 황제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양연삭은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황제를 당장 죽여라.”봉구안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소욱을 보호하며 말했다.“보물과 황제, 둘다 필요합니다.”자룡왕은 이미 몸을 가누고 일어서며 양연삭에게 외쳤다.“교주님, 이건 계략입니다! 소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양연삭은 봉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태연하게 고백했다.“저는 소수자입니다. 미남을 좋아하죠. 황제는 제가 아직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만약 황제를 죽이신다면, 여러분 중 누가 이보다 나은 장난감을 저에게 보상해 주시겠습니까?”그녀는 말하며 시선으로 오왕을 훑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 눈빛은 방자하고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참고로, 저는 자극적인 놀이를 좋아합니다. 당신들 중 감당할 자가 있다면, 나이가 좀 많더라도 상관없습니다.”그 말에 자룡왕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양연삭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길을 안내하거라.”봉구안은 마치 아쉽다는 듯 오왕을 흘낏 보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양연삭은 탑의 제9층에서 떠나지 않고, 자룡왕과 적룡왕에게 봉구안을 따라가라고 명령했다.봉구안은 그들을 탑의 5층 돌계단까지 데려갔다.그러고는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그녀는 눈앞의 돌벽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입니다.”자룡왕과 적룡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즉시 봉구안을 죽이려 하였다.그러나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기억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마도 한 층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자룡왕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소환, 경고하겠다. 잔꾀 부리지 말거라!”봉구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교주님께서는 보물의 절반을 줄 만큼 후
봉구안은 원래 쓰던 가면이 깨져버려 다른 이의 가면을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형에 조금 맞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좁고 작아 보였다.소욱은 살기를 가득 담은 얼굴로 중앙에 있는 이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양연삭은 가부좌 자세로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어쨌든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왕이 그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다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벌어졌다.봉구안이 뒤에서 기습을 가해 은침 하나를 소욱의 뒷목에 꽂았다.소욱은 검을 쥔 채 동작을 멈추더니 믿기 힘든 듯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네가 어째서…”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가 들고 있던 검 역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천룡회의 다섯 왕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무슨 상황이지?양연삭은 쓰러진 황제를 한 번 보더니 봉구안을 다시 바라보았다.봉구안은 쓰러진 소욱을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저는 소환이라 합니다.”자룡왕은 분노에 찬 냉소를 터트렸다.“소환? 네가 감히 여기에 나타나다니! 우리가 누군지 알기는 하느냐?”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든 무기를 봉구안의 목에 들이댔다.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압니다. 여러분들은 천룡회의 사람들이지요.”“예전에 우리 천룡회를 멸망시킨 자가 바로 너구나. 오늘, 네놈을 당장 죽여, 천룡회 일원들의 복수를 할 것이다!”자룡왕이 곧바로 공격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저를 죽이신다면, 여러분은 보물을 찾을 가능성이 더더욱 없어집니다.”“멈춰라.”양연삭이 직접 말을 꺼냈다.자룡왕은 즉시 공격을 멈췄다.“네놈,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봉구안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룡왕을 지나쳐 교주 양연삭을 향해 말했다.“여러분처럼 저 또한 이번에 구중탑에 들어온 것은 남제 태조 황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