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의 얼굴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불가능하다는 거 너도 알잖아.”나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럼 죽은 마음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이주연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나에 대한 네 마음은 식어버려도 내 마음은 아직 그대로야. 적어도 이 감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시간은 줘야지.”나는 그녀의 목적을 대놓고 까발렸다.“감정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내가 모를 것 같아? 지금 우리 집안 돈을 노리고 있다는 거?”돈 얘기에 이주연이 펄쩍 뛰더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최규빈, 돈을 좋아하는 게 뭐 잘못됐어? 내가 돈을 좋아한다고 해서 너에 대한 마음까지 부정하지 마. 예전에 네가 가난한 척하고 거짓말한 바람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너랑 5년이나 함께했는데 돈 좀 달라고 하면 안 돼?”나는 그녀를 차분하게 쳐다보았다.“얼마를 원하는데?”이주연이 고개를 내저었다.“돈은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너랑 함께하는 거야.”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돈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걸 갖고 싶은 거겠지.”나는 지갑에서 백지수표를 꺼내 1억 2천만 원을 적은 다음 그녀에게 던졌다.“예전에 널 먹여 살린 건 나야. 5년 동안 너한테 쓴 돈이 얼만데. 아직도 뻔뻔스럽게 돈을 요구하니까 제대로 계산해줄게. 그때 너한테 쓴 돈은 그냥 준 거로 하고 나머지는 나한테 바친 청춘 값이라 생각해. 매달 200만 원으로 계산하면 1년이면 2400만 원, 5년이면 1억 2천만 원이야.”이주연은 1억 2천만 원짜리 수표를 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규빈, 재산이 수백억이 되면서 고작 1억 2천만 원으로 나를 떼어내려고? 그동안 우리의 감정이 이것밖에 안 돼? 내가 정말 사람 잘못 봤어. 날 사랑하긴 개뿔. 나에 대한 네 사랑의 가치가 1억 2천만 원밖에 안 됐구나.”그녀의 말에 나는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다.‘내가 예전의 최규빈인 줄 아나
어머니는 뒷걸음질 치면서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이주연을 쳐다보았다.“저리 치워. 독이라도 탔을지 누가 알아.”이주연은 난처해하며 먼저 한입 먹었다. 그러고는 도시락을 어머니에게 건넸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독을 타지 않았고 맛도 아주 좋아요.”어머니는 밖에서 산 음식인 걸 보고는 버럭 화를 냈다.“이주연, 이건 밖에서 산 음식이잖아. 지금 장난해? 성의를 보여주고 싶으면 직접 만들었어야지.”그녀의 말에 이주연은 기회가 있는 줄 알고 좋아하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내 며느리가 될 자격이 있겠어?”이 한마디 때문에 이주연은 3개월 동안 아침을 직접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주연은 예전에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았다. 아침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후로 손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 생겼다.그녀의 모습에 나는 또 옛 생각이 떠올랐다. 요리를 해본 적도 없었던 내가 이주연을 챙겨주려고 요리를 배웠다. 아직도 내 손에 그때 요리를 하다가 데인 자국과 칼 흉터가 남아있다.어머니는 내 손에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분노를 터트렸다.“그 여자가 내 아들을 고생시킨 것만큼 그대로 돌려줄 거야.”나는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안타까웠다.“그만해요, 이제. 그런 사람한테 복수해봤자 행복하지도 않아요.”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이주연에게 이렇게 말했다.“이젠 그만 찾아와. 우리 집안의 대를 이어줄 수도 없잖아, 너. 이것만으로도 넌 내 며느리가 될 자격이 없어.”그녀의 말에 이주연에게 남았던 마지막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게 그녀의 가장 큰 아픔인데 어머니가 아픈 곳을 찌르니 더는 반격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이주연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맨날 유석민을 찾아가 욕설을 퍼부으면서 못살게 굴었다.“유석민, 이 나쁜 자식아. 너 때문에 난 아이를 잃었어. 날 때리지만 않았어
이주연은 바닥에 널브러진 종잇조각을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규빈, 잘 생각해. 이건 네 회사를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계약이야. 혹시 더 많은 걸 원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요구는 꿈도 꾸지 마. 마지막으로 널 도와주는 거라는 거 명심해.”나의 핏발이 선 두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이주연,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무슨 날인데?”이주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회사에 알록달록한 장식이 걸려있었다.“회사 설립 3주년? 그게 뭐 축하할 일이라고. 직원이 열몇 명뿐인 작은 회사인 데다가 곧 망하게 생겼는데 축하는 무슨. 대표가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었더라면 부대표인 내가 계약 때문에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근데 힘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나 곧 갑 측 회사에 출근하거든.”이주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나는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주연의 결혼반지는 진작 보이지 않았다.“주연아, 까먹었나 본데 오늘은 회사 설립 3주년이자 우리 5주년 결혼기념일이야. 결혼 2년 차에 네가 임신했었지만 아이를 지우겠다고 했어. 능력 있는 여자가 되겠다고 했고 아이 대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난 네 소원을 이뤄주려고 빚까지 지면서 이 회사를 차렸고 우리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키웠는데...”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주연은 테이블에 있던 결혼반지를 바닥에 던지더니 힘껏 밟았다. 결혼반지가 심각하게 변형되면서 부러졌다. 마치 변질한 우리 결혼처럼.“최규빈, 지금 나한테 그 얘기는 왜 하는 건데? 동정심을 유발해서 일전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고? 넌 여전히 무능하고 찌질해. 이혼할 때까지도 와이프의 피를 빨아먹으려 하다니.”나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오해한 것 같은데 이혼해도 이 회사 말고 다른 건 일전 한 푼 가질 생각이 없어. 네가 이 감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나도 버틸 이유가 없지.”이주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수작이야? 이 회사는 빚 말고
이주연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했다.5년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끝이 났다.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이상 무슨 생각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지금은 회사 경영난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5년 전에 이주연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했었다. 믿음직스러운 여자가 아니라고 했고 게다가 두 집안의 차이가 심하다고 했다.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의 편견이라 생각했다.나의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이주연과 초고속결혼을 강행했다. 결혼 후 본가에 자주 찾아가지 않았고 연락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회사도 물려받지 않고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이주연은 나의 부모님을 싫어했다. 그분들이 도움도 안 되고 매정한 사람들이라 했다.사실 나는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이주연에게 나의 가정 형편을 얘기하지 않았다.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안목이 정확했다. 이주연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결혼해서 2년 동안 나는 대기업에서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는 이주연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좋은 일자리를 그만뒀다.그러고는 수년간 모은 적금과 은행에 대출까지 받아 광고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점차 자리를 잡고 일어서게 되었다.고객을 만나기 좋아했던 이주연은 영업팀에서 일했다. 매번 크고 작은 계약을 성사할 때마다 반나절 동안 입이 귀에 걸려있는 건 기본이었다.사실 나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꽤 많은 인맥을 쌓았기에 계약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주연이 성취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 인맥을 줄였고 내가 몰래 성사한 계약을 이주연에게 양보하기도 했다.그리고 나는 뒤로 물러나서 방안을 만드는 데만 몰두했고 심지어 더 많은 정력을 가정에 쏟았다.이제 곧 고령의 산모가 될 나이인데도 일에만 몰두하자 나는 이주연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회사가 부도 위기에 놓였다는 가상 상황을 만들었다.그런데 큰 계약
이주연과 유석민이 옷을 헐벗은 채 한데 뒤엉켜있는 영상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짐승처럼 낯뜨거운 신음을 냈다.나는 화를 내며 동영상을 끄고는 여자를 쳐다보았다.“당신 누구예요? 이 영상을 보여주는 목적이 뭐죠?”여자는 선글라스를 올리면서 경박스럽게 말했다.“내가 누구인지 당신도 이미 눈치챘을 것 같은데요? 우리 다 피해자인데 서로 아는 사이만 만나라는 법은 없잖아요. 이 자료 그쪽한테 필요할 것 같으니 그냥 줄게요.”그러고는 병실을 나가버렸다. 공기 속에 그녀의 향수 냄새만 남았다.나는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런 사적인 영상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라면 유석민의 여자인 게 분명했다. 이 자료로 이주연에 대한 마지막 환상까지 완전히 깨져버렸다.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않아 병원에 이틀 정도 더 입원해야 했다. 하도 따분해서 휠체어에 앉아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러다가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애가 3개월이 됐는데 지우라고? 절대 못 지워. 애만 낳으면 그 여자랑 이혼하겠다면서 뭐가 그렇게 복잡해? 쉬지 않아도 되니까 당장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줘. 뭐? 일자리도 주지 않고 명분도 안 주면 그냥 이대로 있으라는 거야?”이주연의 목소리가 내 귀에 정확히 때려 박혔다.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었다.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의 내연녀가 되는 걸 택했다.그때 우리의 아이를 낳자고 했을 땐 기어코 지우겠다고 하더니 남이 원하지도 않는 아이는 낳겠다고 했다.하지만 이주연에게 무슨 일이 있든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주연은 전화를 끊고 돌아서다가 나를 보고는 노발대발했다.“최규빈 이 변태 자식아, 날 미행한 것도 모자라 엿듣기까지 해? 사람이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 있어? 나랑 석민 오빠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끼어들 생각인가 본데 꿈 깨. 난 무조건 이혼할 거야.”나는 어이가 없어 피
이주연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메모리 카드를 주웠다.“이게 뭐야?”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네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직접 봐봐.”이주연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메모리 카드를 노트북에 꽂고 영상을 확인했다. 그런데 1초도 보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규빈아, 내가 잘못했어. 당장 이혼해줄 테니까 제발 이 영상 퍼뜨리지 마. 만약 내 명예가 훼손되면 석민 오빠한테 버림받을 거란 말이야.”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헛구역질이 났다.이런 상황에서도 내연남에게 버림받을까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의 속을 뒤집어놓았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그래. 이혼하자. 근데 내가 수십억을 대출받아서 이 회사 규모를 늘렸거든. 그러니까 이 빚도 네가 절반 감당해야 해.”나는 미리 준비한 대출 증명서를 그녀 앞에 들이밀었다. 이주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핏기라곤 없이 창백해졌다.“최규빈, 집안을 망치려고 작정했어? 이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하마터면 너한테 발목 잡힐 뻔했어. 지금 당장 이혼해.”이주연은 흥분한 나머지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느긋하게 옷소매를 정리했다.“이혼? 아직 채무도 나누지 못했는데 무슨 이혼을 해? 잘못한 사람은 너고 다른 남자 아이까지 가졌으니 채무를 더 많이 부담해야지. 그리고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아서 빚을 갚기에도 모자랄걸?”나는 일부러 이혼을 미뤘다. 아니나 다를까 이주연이 조급하면서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최규빈 이 나쁜 자식아, 살기 힘드니까 내 발목을 잡으려고? 재산은 일전 한 푼도 가지지 않을 테니까 채무도 나한테 맡길 생각 하지 마. 오늘 당장 이혼 도장 찍지 않으면 회사 가서 난동을 부릴 거야. 많은 직원과 고객이 볼 텐데 앞으로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겠어?”나는 때가 된 것 같아 일부러 투항하는 척했다.“정말 무서운 여자구나, 너. 이혼 합의서 작성할 테니까 10분만 기다려. 이혼하면 멀리 꺼져. 다신 내 인생을 방해하지
부모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더니 내 말을 이해하고는 분노하며 상을 내리쳤다.“괘씸해서, 원. 아들, 걱정하지 마. 나한테 화풀이할 방법이 있어.”어머니는 나 대신 복수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괜찮아요, 엄마. 날 떠났으니 이젠 비참해질 일만 남았어요.”부모님은 이젠 나이가 들었다면서 힘에 부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집에 자식이라곤 나 하나뿐이라 회사는 내가 물려받아야 했다.하루하루 늘어나는 부모님의 흰머리를 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이주연 때문에 부모님과 멀리했었다. 정말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부모님과 화해한 후 나는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했다. 겉으로는 ‘뉴라이프’ 광고 회사의 대표였지만 사실 가족기업인 명진 그룹에 더 많은 정력을 쏟아부었다.회사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었다. 바로 유석민의 회사가 우리 명진 그룹과 자주 거래를 했다는 것이었다.유석민네 회사의 주문 건 중 99%가 명진 그룹의 주문이었다.아버지는 명진 그룹을 아주 잘 경영했고 명진 그룹과 손을 잡은 회사는 모두 크게 발전했다.‘어쩐지 유석민이 기고만장하더라니. 명진 그룹이랑 손을 잡았으니까 실적 걱정은 없었겠네.’하지만 내가 명진 그룹을 물려받는다면 유석민의 좋은 날도 곧 끝이 날 것이다.1년에 한 번 진행되는 프로젝트 세미나가 곧 시작된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 중요한 세미나에 참석하라고 했다.세미나는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에서 진행하기로 했고 나는 을 측 회사 대표들을 전부 초대했다.세미나가 시작하기 전 나는 먼저 연회를 열었다. 먹고 마신 다음에 내년 사업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준비한 목적은 양측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기회가 어떤 이들이 잘난 척하고 이익을 보려는 기회가 될 줄은 몰랐다.나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고 비서에게 기록하라고 했다. 연회에서 태도가 좋지 않은 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할 생각이었다.그때 유석민과 이주연이 모습을 드러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일하다 보니 나의 상황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장수아는 걱정스럽게 나의 안색을 살피면서 다정하게 위로했다.“대표님, 저런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말아요. 오늘 사업 얘기도 나눠야 하잖아요. 아니면 제가 가서 내쫓을까요? 그리고 회장님께 두 사람을 조심하라고 해야겠어요.”나는 고개를 내저었다.“괜찮아.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우리 부자가 다 지켜보고 있어.”장수아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곧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길 거라는 걸 확신했다.아직 자리에 앉기 전에 유석민과 이주연이 나와 장수아를 발견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이주연이 나를 보더니 또 잘난 척했다.“최규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날 미행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와? 뻔뻔한 것. 명진 그룹은 대기업이야. 너 같은 놈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유석민도 이주연과 함께 나를 비웃었다.“뭐야? 아직도 내 여자를 포기 안 했어? 이혼해서 기회가 없는 건 둘째치고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주연이는 널 쳐다보지도 않아. 그리고 6개월 전에 내 아이도 가졌어. 근데 너랑은 5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애를 낳아주지 않았어. 빈털터리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나가. 안 그러면 이따가 경비가 와서 내쫓는 수가 있어.”나는 두 사람이 뭐라 지껄이면 가만히 보기만 했다. 대체 언제까지 날뛰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심하게 날뛸수록 나중에 더 후회할 테니까.참다못한 장수아가 질문을 던졌다.“제 주제도 모르는 것들. 최 대표님이 누군지 알아?”이주연은 장수아를 보며 더욱 기고만장했다.“최규빈이 누군지 내가 왜 몰라? 빚만 가득한 회사 대표를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내가 버린 헌신짝을 네가 주우려고? 저기 동생, 정신 좀 차려. 남자를 만나려면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야 하는 거야.”장수아는 너무도 화가 나 두 눈에 핏발이 다 섰다.“이주연,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대표님이랑 난 그냥 상사와 부하직원이라고.”이주연이 코웃음을 쳤다.“상사와 부하
어머니는 뒷걸음질 치면서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이주연을 쳐다보았다.“저리 치워. 독이라도 탔을지 누가 알아.”이주연은 난처해하며 먼저 한입 먹었다. 그러고는 도시락을 어머니에게 건넸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독을 타지 않았고 맛도 아주 좋아요.”어머니는 밖에서 산 음식인 걸 보고는 버럭 화를 냈다.“이주연, 이건 밖에서 산 음식이잖아. 지금 장난해? 성의를 보여주고 싶으면 직접 만들었어야지.”그녀의 말에 이주연은 기회가 있는 줄 알고 좋아하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내 며느리가 될 자격이 있겠어?”이 한마디 때문에 이주연은 3개월 동안 아침을 직접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주연은 예전에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았다. 아침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후로 손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 생겼다.그녀의 모습에 나는 또 옛 생각이 떠올랐다. 요리를 해본 적도 없었던 내가 이주연을 챙겨주려고 요리를 배웠다. 아직도 내 손에 그때 요리를 하다가 데인 자국과 칼 흉터가 남아있다.어머니는 내 손에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분노를 터트렸다.“그 여자가 내 아들을 고생시킨 것만큼 그대로 돌려줄 거야.”나는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안타까웠다.“그만해요, 이제. 그런 사람한테 복수해봤자 행복하지도 않아요.”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이주연에게 이렇게 말했다.“이젠 그만 찾아와. 우리 집안의 대를 이어줄 수도 없잖아, 너. 이것만으로도 넌 내 며느리가 될 자격이 없어.”그녀의 말에 이주연에게 남았던 마지막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게 그녀의 가장 큰 아픔인데 어머니가 아픈 곳을 찌르니 더는 반격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이주연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맨날 유석민을 찾아가 욕설을 퍼부으면서 못살게 굴었다.“유석민, 이 나쁜 자식아. 너 때문에 난 아이를 잃었어. 날 때리지만 않았어
이주현의 얼굴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불가능하다는 거 너도 알잖아.”나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럼 죽은 마음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이주연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나에 대한 네 마음은 식어버려도 내 마음은 아직 그대로야. 적어도 이 감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시간은 줘야지.”나는 그녀의 목적을 대놓고 까발렸다.“감정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내가 모를 것 같아? 지금 우리 집안 돈을 노리고 있다는 거?”돈 얘기에 이주연이 펄쩍 뛰더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최규빈, 돈을 좋아하는 게 뭐 잘못됐어? 내가 돈을 좋아한다고 해서 너에 대한 마음까지 부정하지 마. 예전에 네가 가난한 척하고 거짓말한 바람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너랑 5년이나 함께했는데 돈 좀 달라고 하면 안 돼?”나는 그녀를 차분하게 쳐다보았다.“얼마를 원하는데?”이주연이 고개를 내저었다.“돈은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너랑 함께하는 거야.”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돈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걸 갖고 싶은 거겠지.”나는 지갑에서 백지수표를 꺼내 1억 2천만 원을 적은 다음 그녀에게 던졌다.“예전에 널 먹여 살린 건 나야. 5년 동안 너한테 쓴 돈이 얼만데. 아직도 뻔뻔스럽게 돈을 요구하니까 제대로 계산해줄게. 그때 너한테 쓴 돈은 그냥 준 거로 하고 나머지는 나한테 바친 청춘 값이라 생각해. 매달 200만 원으로 계산하면 1년이면 2400만 원, 5년이면 1억 2천만 원이야.”이주연은 1억 2천만 원짜리 수표를 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규빈, 재산이 수백억이 되면서 고작 1억 2천만 원으로 나를 떼어내려고? 그동안 우리의 감정이 이것밖에 안 돼? 내가 정말 사람 잘못 봤어. 날 사랑하긴 개뿔. 나에 대한 네 사랑의 가치가 1억 2천만 원밖에 안 됐구나.”그녀의 말에 나는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다.‘내가 예전의 최규빈인 줄 아나
유석민은 나와 아버지에게는 굽신거렸지만 이주연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이주연이 발로 걷어차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열몇 번이나 걷어차면서 욕설을 퍼부었다.“X년, 다 너 때문이야. 그때 계약을 따내려고 나한테 꼬리 친 건 너잖아. 도련님한테 버림받고 이제 와서 내 탓을 해? 넌 그냥 내가 가지고 노는 노리개일 뿐이야.”발에 심하게 걷어차인 이주연은 하혈했다가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우리 호텔에서 인명 사고라도 날까 봐 재빨리 그를 말렸다.“그만해. 유석민,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폭행했으니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네가 감옥 가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우리 호텔 더럽히는 건 용납 못 해. 당장 꺼져.”유석민은 아직도 나에게 잘 보이려 했다.“도련님, 여자는 맞아야만 말을 잘 들어요. 제가 대신 혼냈으니까 앞으로 처리하고 싶은 대로 처리하면 됩니다.”나는 경비원에게 손을 흔들어 끌어내라고 했다.이주연은 바닥에 누워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럽게 애원했다.“규빈아, 내가 잘못했어. 우리 재결합하자. 그리고 나랑 아이 좀 살려줘.”나는 코웃음을 쳤다.“고작 잘못했다는 한마디로 무마하려고? 꿈 깨. 그동안 파렴치한 짓을 그렇게 많이 해놓고 재결합하겠다고?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어. 네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지.”그러고는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보냈다. 심하게 다쳐 아이를 잃은 건 물론이고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이주연은 유석민을 고소하여 감옥에 보냈고 배상금까지 받아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물고 뜯으면서 싸우는지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었고 현지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이주연은 돈 많은 남자에게 빌붙었다가 버림받았고 아이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젠 거지마저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난을 겪은 후 이주연은 나에게 매달리면서 재결합하자고 했다.그날 회사에서 퇴근하고 나왔는데 이주연이 또 나를 잡았다.“규빈아, 진짜 날 이대로 버릴 거야? 우리 5년이나 함께했고 나의 가장
그들은 재빨리 나에게 사과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도련님께 실례를 범했을 줄은 몰랐어요. 지금 당장 끌어내겠습니다.”그러고는 유석민과 이주연을 잡고 끌어냈다.유석민은 너무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하는 거야? 난 명진 그룹의 손님이야. 너희들 사람 잘못 봤어. 끌어낼 사람은 최규빈이랑 옆에 있는 저년이라고. 회장님 만나야겠어. 회장님께 다 일러바칠 거야.”바로 그때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군가 그를 찾는 소리를 듣고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누가 날 찾아?”유석민은 재빨리 나를 가리키면서 일러바치기 시작했다.“회장님, 저놈이 몰래 들어와서는 연회를 싹 다 망쳤어요. 그리고 저랑 함께 온 파트너를 때린 것도 모자라 내쫓기까지 했어요. 회장님네 회사 경비원도 약을 잘못 먹었는지 우릴 내쫓지 뭐예요?”아버지의 안색이 매우 어두웠고 볼록 나온 이주연의 배를 힐끗거리더니 이주연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네 파트너야?”유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제 부하인데 얼굴도 예쁘고 일도 아주 잘해요.”이주연은 아버지를 만난 적이 거의 없어 아예 기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미덥지 못한 전 며느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아이 아빠가 너야?”아버지가 물었다. 유석민은 아버지를 끌고 옆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데리고 노는 여자예요. 저런 여자는 손에 넣기 엄청 쉽고 돈밖에 모르거든요. 회장님께서 관심이 있으시면...”아버지는 유석민의 얼굴을 후려갈겼다.“유석민, 너한테 아내가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근데 이런 자리에 내연녀를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 남의 와이프를 임신까지 시켜? 너 같은 형편없는 사람과 손을 잡으면 우리 회사 명예만 훼손돼. 이제 더는 너희 회사와 계약하는 일은 없을 거야.”아버지의 말에 유석민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회장님, 이깟 일로 계약을 취소해서는 안 되죠. 이주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괜찮은 여자를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일하다 보니 나의 상황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장수아는 걱정스럽게 나의 안색을 살피면서 다정하게 위로했다.“대표님, 저런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말아요. 오늘 사업 얘기도 나눠야 하잖아요. 아니면 제가 가서 내쫓을까요? 그리고 회장님께 두 사람을 조심하라고 해야겠어요.”나는 고개를 내저었다.“괜찮아.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우리 부자가 다 지켜보고 있어.”장수아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곧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길 거라는 걸 확신했다.아직 자리에 앉기 전에 유석민과 이주연이 나와 장수아를 발견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이주연이 나를 보더니 또 잘난 척했다.“최규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날 미행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와? 뻔뻔한 것. 명진 그룹은 대기업이야. 너 같은 놈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유석민도 이주연과 함께 나를 비웃었다.“뭐야? 아직도 내 여자를 포기 안 했어? 이혼해서 기회가 없는 건 둘째치고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주연이는 널 쳐다보지도 않아. 그리고 6개월 전에 내 아이도 가졌어. 근데 너랑은 5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애를 낳아주지 않았어. 빈털터리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나가. 안 그러면 이따가 경비가 와서 내쫓는 수가 있어.”나는 두 사람이 뭐라 지껄이면 가만히 보기만 했다. 대체 언제까지 날뛰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심하게 날뛸수록 나중에 더 후회할 테니까.참다못한 장수아가 질문을 던졌다.“제 주제도 모르는 것들. 최 대표님이 누군지 알아?”이주연은 장수아를 보며 더욱 기고만장했다.“최규빈이 누군지 내가 왜 몰라? 빚만 가득한 회사 대표를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내가 버린 헌신짝을 네가 주우려고? 저기 동생, 정신 좀 차려. 남자를 만나려면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야 하는 거야.”장수아는 너무도 화가 나 두 눈에 핏발이 다 섰다.“이주연,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대표님이랑 난 그냥 상사와 부하직원이라고.”이주연이 코웃음을 쳤다.“상사와 부하
부모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더니 내 말을 이해하고는 분노하며 상을 내리쳤다.“괘씸해서, 원. 아들, 걱정하지 마. 나한테 화풀이할 방법이 있어.”어머니는 나 대신 복수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괜찮아요, 엄마. 날 떠났으니 이젠 비참해질 일만 남았어요.”부모님은 이젠 나이가 들었다면서 힘에 부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집에 자식이라곤 나 하나뿐이라 회사는 내가 물려받아야 했다.하루하루 늘어나는 부모님의 흰머리를 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이주연 때문에 부모님과 멀리했었다. 정말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부모님과 화해한 후 나는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했다. 겉으로는 ‘뉴라이프’ 광고 회사의 대표였지만 사실 가족기업인 명진 그룹에 더 많은 정력을 쏟아부었다.회사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었다. 바로 유석민의 회사가 우리 명진 그룹과 자주 거래를 했다는 것이었다.유석민네 회사의 주문 건 중 99%가 명진 그룹의 주문이었다.아버지는 명진 그룹을 아주 잘 경영했고 명진 그룹과 손을 잡은 회사는 모두 크게 발전했다.‘어쩐지 유석민이 기고만장하더라니. 명진 그룹이랑 손을 잡았으니까 실적 걱정은 없었겠네.’하지만 내가 명진 그룹을 물려받는다면 유석민의 좋은 날도 곧 끝이 날 것이다.1년에 한 번 진행되는 프로젝트 세미나가 곧 시작된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 중요한 세미나에 참석하라고 했다.세미나는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에서 진행하기로 했고 나는 을 측 회사 대표들을 전부 초대했다.세미나가 시작하기 전 나는 먼저 연회를 열었다. 먹고 마신 다음에 내년 사업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준비한 목적은 양측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기회가 어떤 이들이 잘난 척하고 이익을 보려는 기회가 될 줄은 몰랐다.나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고 비서에게 기록하라고 했다. 연회에서 태도가 좋지 않은 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할 생각이었다.그때 유석민과 이주연이 모습을 드러
이주연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메모리 카드를 주웠다.“이게 뭐야?”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네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직접 봐봐.”이주연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메모리 카드를 노트북에 꽂고 영상을 확인했다. 그런데 1초도 보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규빈아, 내가 잘못했어. 당장 이혼해줄 테니까 제발 이 영상 퍼뜨리지 마. 만약 내 명예가 훼손되면 석민 오빠한테 버림받을 거란 말이야.”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헛구역질이 났다.이런 상황에서도 내연남에게 버림받을까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의 속을 뒤집어놓았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그래. 이혼하자. 근데 내가 수십억을 대출받아서 이 회사 규모를 늘렸거든. 그러니까 이 빚도 네가 절반 감당해야 해.”나는 미리 준비한 대출 증명서를 그녀 앞에 들이밀었다. 이주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핏기라곤 없이 창백해졌다.“최규빈, 집안을 망치려고 작정했어? 이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하마터면 너한테 발목 잡힐 뻔했어. 지금 당장 이혼해.”이주연은 흥분한 나머지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느긋하게 옷소매를 정리했다.“이혼? 아직 채무도 나누지 못했는데 무슨 이혼을 해? 잘못한 사람은 너고 다른 남자 아이까지 가졌으니 채무를 더 많이 부담해야지. 그리고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아서 빚을 갚기에도 모자랄걸?”나는 일부러 이혼을 미뤘다. 아니나 다를까 이주연이 조급하면서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최규빈 이 나쁜 자식아, 살기 힘드니까 내 발목을 잡으려고? 재산은 일전 한 푼도 가지지 않을 테니까 채무도 나한테 맡길 생각 하지 마. 오늘 당장 이혼 도장 찍지 않으면 회사 가서 난동을 부릴 거야. 많은 직원과 고객이 볼 텐데 앞으로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겠어?”나는 때가 된 것 같아 일부러 투항하는 척했다.“정말 무서운 여자구나, 너. 이혼 합의서 작성할 테니까 10분만 기다려. 이혼하면 멀리 꺼져. 다신 내 인생을 방해하지
이주연과 유석민이 옷을 헐벗은 채 한데 뒤엉켜있는 영상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짐승처럼 낯뜨거운 신음을 냈다.나는 화를 내며 동영상을 끄고는 여자를 쳐다보았다.“당신 누구예요? 이 영상을 보여주는 목적이 뭐죠?”여자는 선글라스를 올리면서 경박스럽게 말했다.“내가 누구인지 당신도 이미 눈치챘을 것 같은데요? 우리 다 피해자인데 서로 아는 사이만 만나라는 법은 없잖아요. 이 자료 그쪽한테 필요할 것 같으니 그냥 줄게요.”그러고는 병실을 나가버렸다. 공기 속에 그녀의 향수 냄새만 남았다.나는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런 사적인 영상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라면 유석민의 여자인 게 분명했다. 이 자료로 이주연에 대한 마지막 환상까지 완전히 깨져버렸다.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않아 병원에 이틀 정도 더 입원해야 했다. 하도 따분해서 휠체어에 앉아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러다가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애가 3개월이 됐는데 지우라고? 절대 못 지워. 애만 낳으면 그 여자랑 이혼하겠다면서 뭐가 그렇게 복잡해? 쉬지 않아도 되니까 당장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줘. 뭐? 일자리도 주지 않고 명분도 안 주면 그냥 이대로 있으라는 거야?”이주연의 목소리가 내 귀에 정확히 때려 박혔다.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었다.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의 내연녀가 되는 걸 택했다.그때 우리의 아이를 낳자고 했을 땐 기어코 지우겠다고 하더니 남이 원하지도 않는 아이는 낳겠다고 했다.하지만 이주연에게 무슨 일이 있든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주연은 전화를 끊고 돌아서다가 나를 보고는 노발대발했다.“최규빈 이 변태 자식아, 날 미행한 것도 모자라 엿듣기까지 해? 사람이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 있어? 나랑 석민 오빠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끼어들 생각인가 본데 꿈 깨. 난 무조건 이혼할 거야.”나는 어이가 없어 피
이주연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했다.5년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끝이 났다.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이상 무슨 생각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지금은 회사 경영난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5년 전에 이주연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했었다. 믿음직스러운 여자가 아니라고 했고 게다가 두 집안의 차이가 심하다고 했다.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의 편견이라 생각했다.나의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이주연과 초고속결혼을 강행했다. 결혼 후 본가에 자주 찾아가지 않았고 연락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회사도 물려받지 않고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이주연은 나의 부모님을 싫어했다. 그분들이 도움도 안 되고 매정한 사람들이라 했다.사실 나는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이주연에게 나의 가정 형편을 얘기하지 않았다.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안목이 정확했다. 이주연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결혼해서 2년 동안 나는 대기업에서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는 이주연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좋은 일자리를 그만뒀다.그러고는 수년간 모은 적금과 은행에 대출까지 받아 광고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점차 자리를 잡고 일어서게 되었다.고객을 만나기 좋아했던 이주연은 영업팀에서 일했다. 매번 크고 작은 계약을 성사할 때마다 반나절 동안 입이 귀에 걸려있는 건 기본이었다.사실 나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꽤 많은 인맥을 쌓았기에 계약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주연이 성취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 인맥을 줄였고 내가 몰래 성사한 계약을 이주연에게 양보하기도 했다.그리고 나는 뒤로 물러나서 방안을 만드는 데만 몰두했고 심지어 더 많은 정력을 가정에 쏟았다.이제 곧 고령의 산모가 될 나이인데도 일에만 몰두하자 나는 이주연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회사가 부도 위기에 놓였다는 가상 상황을 만들었다.그런데 큰 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