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럴 수가...” 조인화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여진아, 너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혹시 임재윤을 박진성이랑 착각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아무리 임재윤이 대단해도 박진성은 어디 사람이야. 양성 박씨 가문의 기업 대표잖아. 수백 개 회사를 거느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골까지 와서 휴양지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오래 머물겠어?”민여진은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서 있었다.뒤늦게 깨닫고 나니 정말 말이 안 됐다.그래 박진성이었다면 진작에 그녀를 데리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그가 여기에 머물 이유도 자신 곁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그러게요. 제가 괜히 착각했나 봐요.” 그녀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한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가슴에 돌을 쑤셔 넣는 거지.” 조인화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하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맞아. 너 전에 임재윤이 네가 아는 한 사람이랑 닮았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혹시 박진성이라는 건 아니지?”민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박진성의 사진은 공개된 게 거의 없었지만 자기 얼굴은 혹시 뉴스에 떠올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엔 조인화가 알아보지 못했을지 몰라도 혹시 기억이라도 한다면...민여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설마요. 제가 무슨 수로 박진성 같은 사람을 만나겠어요. 그냥 제가 알고 있던 사람이 임재윤과 좀 닮아서요.”“아휴, 왜 그래... 박진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무슨 판다도 아니고... 동물원을 가도 돈만 내면 판다도 볼 수 있잖아?” 민여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고 표정이 조금 풀렸다.조인화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그래도 웃으니까 낫네. 너 오늘 밖에서 돌아와서는 얼굴이 완전 창백해서 나 진짜 임재윤한테 과자 뺏긴 것 때문에 기겁한 줄 알았잖아.”“좀 그랬죠...”거짓말로 일관하기도 애매했던 민여진은 조용히 답했다.“그런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요.”“이해 안 가면 직접 물어봐. 벙어리
“사과요?” 민여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하니 되물었다. “그럴 리가...”조인화도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도 아까 그 생각했어. 장미자 할머니의 성격에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사과까지 하다니 말이야. 그것도 대추 한 자루까지 들고 와서 말이야. 본인 입으로 직접 사과하고 싶다길래 네가 바쁘다고 말하고 그냥 돌려보냈어.” 민여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외엔 아무 말도 안 했어요?”“응, 딱히. 내가 나중에 나가서 다시 물어보긴 해야지.” 조인화는 그 대추를 주방으로 들고 가며 말했다. “근데 이 타이밍이 딱 좋긴 하네. 오늘은 대추 넣고 죽이나 좀 끓여줄게.” “좋아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가 씻고 이불도 정리했다.다시 나왔을 땐 조인화는 이미 나간 뒤였고 주방엔 죽이 은근한 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달큰한 냄새가 공기 가득 퍼져 있었고 민여진은 조심스레 손으로 불 조절기를 찾아 불을 껐다.그때 문밖에서 조인화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여진아, 나 지금 무슨 소식 듣고 온 줄 알아?”“무슨 일이에요?”“장미자 할머니 말이야! 왜 갑자기 사과하러 온 건지 너도 궁금했지?” 조인화는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높아졌다.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 “왜요?”“진시우 때문이래. 휴양지 사업 시작되면 우리 마을 집들도 리모델링 들어가잖아. 근데 그 양반이 갑자기 마을 이장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장미자 할머니가 너한테 사과 안 하면 공사 혜택에서 그 집은 빼고, 나중에 이익 분배도 못 받게 하겠다고 했대. 그래서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거였어.”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조인화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웃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속이 더 조여왔다. “왜죠?”한참을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물었다.“진시우 씨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그는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었고 상식적으로도 그는 사업
임재윤의 검은 눈동자가 민여진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오랜 길을 걸어온 그녀의 코끝은 추위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조금 전 진시우의 말을 들으면서 민여진은 문득 임재윤이 가까이 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왜인지 모르게 공기 안에 어색함이 흘렀다.어쩌면 어제 그녀의 태도가 너무 냉정했던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전히 임재윤이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어느 쪽이든,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잠시 후, 임재윤의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밖이 너무 춥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벽을 더듬어 손을 뻗었다.그 손을 임재윤이 살며시 받아 올렸고 그녀의 손은 그의 소매 위에 얹혔다.“따라오세요.”“네.”머리를 숙인 채 걸어가면서 두 사람은 몇몇 사람들과 스쳤다.개발업자, 현장 직원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임재윤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벌써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임 대표 뒤에 따라오는 분은 딱 새댁 분위기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개팅 절대 안 하신다더니 여자 친구가 따로 계셨구먼...” “앞뒤로 나란히 걷는 게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민여진은 얼굴이 화끈해져 손을 뿌리려 했지만 차가운 손끝이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에 감싸이는 순간 그가 오히려 더 단단히 이끌었다.잠시 후, 그들은 어느 조용한 문 앞에 멈춰 섰고 임재윤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입력해 보여주었다.“여긴 진시우 씨와 제 휴게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안 들어오고요. 난로도 있으니 춥지 않을 거예요.”“네.”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타자를 했다.“아까 그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누구한테든 장난치는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는 좀 조심하라고 하겠습니다.”“괜찮아요.”민여진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저 농담일 뿐이고 딱히 불쾌한 말도 아니었는데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면 더 어색할 수 있었다.임재윤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계속 그렇게들 오해하
민여진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로잡을 만큼 특별한 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재윤 씨, 어제 저녁 식사 때 기억하시죠? 제가 옆에 앉아 있었고 접시에서 과자를 하나 집었는데... 재윤 씨가 그걸 갑자기 치우셨잖아요. 아예 접시째로 다 가져가셨고요. 그거... 왜 그러신 건가요?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임재윤은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었고 더 이상 휴대폰의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민여진은 점점 불안해져 미간을 찌푸렸다.“재윤 씨?”그제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핸드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꼭 말해야 하나요?” “네, 꼭 듣고 싶어요.”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그녀는 이 일 하나로 밤새 뒤척였고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까지 와서 답을 들으려 했다.임재윤은 마치 한숨을 쉬듯 조용히 입김을 내뱉었다.그 소리는 그녀에겐 조금 무겁게 들렸다.그리고 그는 휴대폰으로 문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그 과자는 남은 거였습니다.”“네?”민여진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임재윤은 이어서 타자를 했다. “식당 직원이 다른 방에서 치운 잔반을 들고 가는 걸 봤어요. 그런데 그 접시가 다시 우리 테이블에 올라왔더라고요. 호텔 측이 남은 음식을 재활용해서 서빙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접시를 가져가 따로 처리하려던 거였어요. 식당은 진시우 씨와 제가 예약한 곳이라 민망해서 말하지 못했습니다.”민여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고 이유를 상상하며 밤새 괴로워했던 자신이 한순간 부끄러워졌다. “아니요... 과자는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게 진짜 남은 음식인지 어떻게 아셨어요?”“접시에 있던 과자 종류는 두 가지였어요. 갓 만든 건 색이 연하고 남은 건 색이 더 짙어요. 비교해 보면 티가 나요. 다른 사람이 남긴 음식을 드시게 할 순 없어서 바로 치운 겁니다.”임재윤의 말은 단호했고 논리도 분명했다.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임재윤은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민여진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그 사람이 지니던 차가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임재윤의 손은 피부가 델 듯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고 임재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가슴과 복부 사이 어디쯤 조심스럽게 얹었다.마침 그 자리는 심장이 뛰는 곳이었고 손등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은 뜨겁고 강했다. 그 울림에 민여진은 마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민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임재윤이 더욱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그의 허리로 내려간 손끝에는 단단하고 잘 단련된 근육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압도적인 힘과 긴장감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잠시 후,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놓았고 옷을 더 걷어 올렸다.그건 마치 마음껏 확인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피가 터질 것처럼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그저 확인일 뿐이야. 그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아보면 되는 거야.’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모든 걸 더욱 생생히 느꼈다.그의 숨소리 피부에서 나는 미묘한 향기 손끝에 닿는 근육의 결까지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예전에 박진성과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그의 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그들은 서로의 몸만 공유한 낯선 사이였을 뿐이다.감정도 사랑도 없었다.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임재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제야 민여진도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그러고는 손을 그의 왼쪽 허리로 옮겼다.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칼을 찔렀
임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여진에게 물었다.“됐어요?”그의 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있었고, 귀가 달아오른 민여진은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네.”임재윤은 다시 옷을 내려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천천히 글을 썼다.“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 저와 매우 비슷한가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마... 조금은요. 하지만 많이 닮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어떤 사람이냐고? 독단적이고 냉혈 하면서도 무자비한 사람.’민여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박진성의 모습은 항상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모습뿐이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정반대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두 사람을 겹쳐 본 걸까?“잊어버렸어요.”민여진은 박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요.”어쩌면 이건 민여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박진성이라는 이름조차 잊고 아픈 과거를 모두 떨쳐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임재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민여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부 구조를 잘 모르는 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해 줘요.”임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약간 불쾌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민여진의 손목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땅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눈이 손바닥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렸다.“집까지 데려다줄게요.”임재윤이 휴대전화로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안진 마을에 오신 것도 일 보러 오신 거잖아요. 저 때문에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하셨는데 일 보러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길을 아니까
너무 자연스러운 임재윤의 행동에 민여진은 또다시 혼란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털어 버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행동은 박진성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눈은 어깨에도 쌓일 정도로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하지만 손이 잡혀 있어서인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문 앞까지 왔을 때, 임재윤은 멈춰 서서 휴대전화로 말했다.“도착했어요.”민여진은 옷에 묻은 눈을 털며 말했다.“고마워요.”민여진이 대문을 여는 순간까지 임재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임재윤 씨,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하실래요?”“다음에요.”임재윤은 빠르게 글을 쓰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어젯밤, 제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볼 말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 물을 테니까 그때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요.”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임재윤의 발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민여진이 안뜰로 들어가자, 불을 피우고 있던 조인화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수건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방금 불을 피워 놓고 너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마당에 마무리할 게 조금밖에 안 남아서,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했어요.”“이 바보야, 안 추웠어? 내가 여기 있는 옷 몇 벌만 손보고 나가서 도와줄 테니, 너는 일단 앉아서 불 쬐고 있어. 따뜻한 물 좀 떠올게.”“네.”민여진은 앉아서 얼굴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손을 내밀어 차가웠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아까 임재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뜻은 원래 어젯밤에 할 말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민여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눈이 한번 내리자, 기온은 뚜렷하게 떨어졌다.민여진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얇은 옷들이었고 유일하게 맞는 건 조인화의 낡은 옷뿐이었다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너무 자연스러운 임재윤의 행동에 민여진은 또다시 혼란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털어 버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행동은 박진성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눈은 어깨에도 쌓일 정도로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하지만 손이 잡혀 있어서인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문 앞까지 왔을 때, 임재윤은 멈춰 서서 휴대전화로 말했다.“도착했어요.”민여진은 옷에 묻은 눈을 털며 말했다.“고마워요.”민여진이 대문을 여는 순간까지 임재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임재윤 씨,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하실래요?”“다음에요.”임재윤은 빠르게 글을 쓰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어젯밤, 제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볼 말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 물을 테니까 그때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요.”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임재윤의 발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민여진이 안뜰로 들어가자, 불을 피우고 있던 조인화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수건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방금 불을 피워 놓고 너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마당에 마무리할 게 조금밖에 안 남아서,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했어요.”“이 바보야, 안 추웠어? 내가 여기 있는 옷 몇 벌만 손보고 나가서 도와줄 테니, 너는 일단 앉아서 불 쬐고 있어. 따뜻한 물 좀 떠올게.”“네.”민여진은 앉아서 얼굴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손을 내밀어 차가웠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아까 임재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뜻은 원래 어젯밤에 할 말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민여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눈이 한번 내리자, 기온은 뚜렷하게 떨어졌다.민여진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얇은 옷들이었고 유일하게 맞는 건 조인화의 낡은 옷뿐이었다
임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여진에게 물었다.“됐어요?”그의 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있었고, 귀가 달아오른 민여진은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네.”임재윤은 다시 옷을 내려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천천히 글을 썼다.“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 저와 매우 비슷한가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마... 조금은요. 하지만 많이 닮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어떤 사람이냐고? 독단적이고 냉혈 하면서도 무자비한 사람.’민여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박진성의 모습은 항상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모습뿐이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정반대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두 사람을 겹쳐 본 걸까?“잊어버렸어요.”민여진은 박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요.”어쩌면 이건 민여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박진성이라는 이름조차 잊고 아픈 과거를 모두 떨쳐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임재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민여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부 구조를 잘 모르는 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해 줘요.”임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약간 불쾌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민여진의 손목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땅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눈이 손바닥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렸다.“집까지 데려다줄게요.”임재윤이 휴대전화로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안진 마을에 오신 것도 일 보러 오신 거잖아요. 저 때문에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하셨는데 일 보러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길을 아니까
임재윤은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민여진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그 사람이 지니던 차가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임재윤의 손은 피부가 델 듯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고 임재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가슴과 복부 사이 어디쯤 조심스럽게 얹었다.마침 그 자리는 심장이 뛰는 곳이었고 손등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은 뜨겁고 강했다. 그 울림에 민여진은 마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민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임재윤이 더욱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그의 허리로 내려간 손끝에는 단단하고 잘 단련된 근육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압도적인 힘과 긴장감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잠시 후,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놓았고 옷을 더 걷어 올렸다.그건 마치 마음껏 확인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피가 터질 것처럼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그저 확인일 뿐이야. 그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아보면 되는 거야.’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모든 걸 더욱 생생히 느꼈다.그의 숨소리 피부에서 나는 미묘한 향기 손끝에 닿는 근육의 결까지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예전에 박진성과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그의 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그들은 서로의 몸만 공유한 낯선 사이였을 뿐이다.감정도 사랑도 없었다.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임재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제야 민여진도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그러고는 손을 그의 왼쪽 허리로 옮겼다.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칼을 찔렀
민여진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로잡을 만큼 특별한 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재윤 씨, 어제 저녁 식사 때 기억하시죠? 제가 옆에 앉아 있었고 접시에서 과자를 하나 집었는데... 재윤 씨가 그걸 갑자기 치우셨잖아요. 아예 접시째로 다 가져가셨고요. 그거... 왜 그러신 건가요?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임재윤은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었고 더 이상 휴대폰의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민여진은 점점 불안해져 미간을 찌푸렸다.“재윤 씨?”그제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핸드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꼭 말해야 하나요?” “네, 꼭 듣고 싶어요.”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그녀는 이 일 하나로 밤새 뒤척였고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까지 와서 답을 들으려 했다.임재윤은 마치 한숨을 쉬듯 조용히 입김을 내뱉었다.그 소리는 그녀에겐 조금 무겁게 들렸다.그리고 그는 휴대폰으로 문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그 과자는 남은 거였습니다.”“네?”민여진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임재윤은 이어서 타자를 했다. “식당 직원이 다른 방에서 치운 잔반을 들고 가는 걸 봤어요. 그런데 그 접시가 다시 우리 테이블에 올라왔더라고요. 호텔 측이 남은 음식을 재활용해서 서빙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접시를 가져가 따로 처리하려던 거였어요. 식당은 진시우 씨와 제가 예약한 곳이라 민망해서 말하지 못했습니다.”민여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고 이유를 상상하며 밤새 괴로워했던 자신이 한순간 부끄러워졌다. “아니요... 과자는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게 진짜 남은 음식인지 어떻게 아셨어요?”“접시에 있던 과자 종류는 두 가지였어요. 갓 만든 건 색이 연하고 남은 건 색이 더 짙어요. 비교해 보면 티가 나요. 다른 사람이 남긴 음식을 드시게 할 순 없어서 바로 치운 겁니다.”임재윤의 말은 단호했고 논리도 분명했다.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임재윤의 검은 눈동자가 민여진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오랜 길을 걸어온 그녀의 코끝은 추위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조금 전 진시우의 말을 들으면서 민여진은 문득 임재윤이 가까이 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왜인지 모르게 공기 안에 어색함이 흘렀다.어쩌면 어제 그녀의 태도가 너무 냉정했던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전히 임재윤이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어느 쪽이든,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잠시 후, 임재윤의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밖이 너무 춥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벽을 더듬어 손을 뻗었다.그 손을 임재윤이 살며시 받아 올렸고 그녀의 손은 그의 소매 위에 얹혔다.“따라오세요.”“네.”머리를 숙인 채 걸어가면서 두 사람은 몇몇 사람들과 스쳤다.개발업자, 현장 직원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임재윤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벌써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임 대표 뒤에 따라오는 분은 딱 새댁 분위기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개팅 절대 안 하신다더니 여자 친구가 따로 계셨구먼...” “앞뒤로 나란히 걷는 게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민여진은 얼굴이 화끈해져 손을 뿌리려 했지만 차가운 손끝이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에 감싸이는 순간 그가 오히려 더 단단히 이끌었다.잠시 후, 그들은 어느 조용한 문 앞에 멈춰 섰고 임재윤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입력해 보여주었다.“여긴 진시우 씨와 제 휴게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안 들어오고요. 난로도 있으니 춥지 않을 거예요.”“네.”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타자를 했다.“아까 그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누구한테든 장난치는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는 좀 조심하라고 하겠습니다.”“괜찮아요.”민여진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저 농담일 뿐이고 딱히 불쾌한 말도 아니었는데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면 더 어색할 수 있었다.임재윤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계속 그렇게들 오해하
“사과요?” 민여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하니 되물었다. “그럴 리가...”조인화도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도 아까 그 생각했어. 장미자 할머니의 성격에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사과까지 하다니 말이야. 그것도 대추 한 자루까지 들고 와서 말이야. 본인 입으로 직접 사과하고 싶다길래 네가 바쁘다고 말하고 그냥 돌려보냈어.” 민여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외엔 아무 말도 안 했어요?”“응, 딱히. 내가 나중에 나가서 다시 물어보긴 해야지.” 조인화는 그 대추를 주방으로 들고 가며 말했다. “근데 이 타이밍이 딱 좋긴 하네. 오늘은 대추 넣고 죽이나 좀 끓여줄게.” “좋아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가 씻고 이불도 정리했다.다시 나왔을 땐 조인화는 이미 나간 뒤였고 주방엔 죽이 은근한 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달큰한 냄새가 공기 가득 퍼져 있었고 민여진은 조심스레 손으로 불 조절기를 찾아 불을 껐다.그때 문밖에서 조인화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여진아, 나 지금 무슨 소식 듣고 온 줄 알아?”“무슨 일이에요?”“장미자 할머니 말이야! 왜 갑자기 사과하러 온 건지 너도 궁금했지?” 조인화는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높아졌다.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 “왜요?”“진시우 때문이래. 휴양지 사업 시작되면 우리 마을 집들도 리모델링 들어가잖아. 근데 그 양반이 갑자기 마을 이장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장미자 할머니가 너한테 사과 안 하면 공사 혜택에서 그 집은 빼고, 나중에 이익 분배도 못 받게 하겠다고 했대. 그래서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거였어.”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조인화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웃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속이 더 조여왔다. “왜죠?”한참을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물었다.“진시우 씨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그는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었고 상식적으로도 그는 사업
“어떻게 이럴 수가...” 조인화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여진아, 너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혹시 임재윤을 박진성이랑 착각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아무리 임재윤이 대단해도 박진성은 어디 사람이야. 양성 박씨 가문의 기업 대표잖아. 수백 개 회사를 거느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골까지 와서 휴양지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오래 머물겠어?”민여진은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서 있었다.뒤늦게 깨닫고 나니 정말 말이 안 됐다.그래 박진성이었다면 진작에 그녀를 데리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그가 여기에 머물 이유도 자신 곁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그러게요. 제가 괜히 착각했나 봐요.” 그녀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한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가슴에 돌을 쑤셔 넣는 거지.” 조인화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하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맞아. 너 전에 임재윤이 네가 아는 한 사람이랑 닮았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혹시 박진성이라는 건 아니지?”민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박진성의 사진은 공개된 게 거의 없었지만 자기 얼굴은 혹시 뉴스에 떠올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엔 조인화가 알아보지 못했을지 몰라도 혹시 기억이라도 한다면...민여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설마요. 제가 무슨 수로 박진성 같은 사람을 만나겠어요. 그냥 제가 알고 있던 사람이 임재윤과 좀 닮아서요.”“아휴, 왜 그래... 박진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무슨 판다도 아니고... 동물원을 가도 돈만 내면 판다도 볼 수 있잖아?” 민여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고 표정이 조금 풀렸다.조인화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그래도 웃으니까 낫네. 너 오늘 밖에서 돌아와서는 얼굴이 완전 창백해서 나 진짜 임재윤한테 과자 뺏긴 것 때문에 기겁한 줄 알았잖아.”“좀 그랬죠...”거짓말로 일관하기도 애매했던 민여진은 조용히 답했다.“그런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요.”“이해 안 가면 직접 물어봐. 벙어리
그녀는 앞을 볼 수 없고, 임재윤은 말을 못 하니,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돌아온 후, 민여진은 갑자기 조인화에게 물었다. "이모, 임재윤 씨는 어떻게 생겼어요?""왜?"조인화는 깜짝 놀라며 마치 며느리를 빼앗길까 봐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됐어. 네가 정말 임재윤 씨랑 만나고 싶다면 나도 막을 수 없지. 네가 아깝긴 하지만, 오늘 보니 그 사람은 진심으로 널 아끼는 것 같더라.""아니에요."민여진은 조인화가 오해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설명했다."그분이 제 옛날 지인이랑 너무 닮았어요.""옛날 지인?"조인화는 이불을 펴면서 되물었다."무슨 뜻이야? 아는 사람이라면 왜 너한테 아는 척 안 해?""아마 너무 오래돼서 그 사람도 잊어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그분께 빚진 게 있어서,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요.""그렇구나."조인화는 민여진을 늘 착한 아이로 여겼기에, 그녀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과정을 단순화해서 말하는 거라고 여기고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임재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고민했다."사람 외모를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꽤 잘생겼어. 아주 훤칠한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마침 텔레비전에서 인기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이 나왔다. 조인화는 말했다. "저 가수보다 훨씬 더 잘생겼어."민여진은 멍해졌다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박진성의 외모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첫눈에 반했을까?그녀는 진심으로 박진성의 그 얼굴에 홀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뒤이어 일어난 일련의 비극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눈가는 이미 눈물로 촉촉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물었다."이모, 스마트폰 있으세요?""있지. 지금 내가 쓰는 게 스마트폰이야."조인화는 자랑스
그 해답은 거의 선명하게 민여진의 뇌리에 새겨졌다.그렇지 않고서는 그녀는 임재윤이 왜 그녀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타로 떡을 가져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만약 그가 박진성이라면, 왜 낯선 사람처럼 그녀 곁을 지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다시 몇 번이나 손을 씻었다. 겨우 진정되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벽을 짚고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도 누군가 화장실에서 나왔다.“여진아?”민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마을의 이장이었다.“여진아, 왜 나와 있어?”“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그래?”이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마침 잘 됐네. 방에 있으면 따로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이장의 말투에 민여진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무슨 일 있으세요?”“오늘 오후에 장미자 할머니랑 싸웠다면서?”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설명하려 했다.“그게...”“여진아, 나는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진시우 대표님이 우리 뒷산에 그 땅을 좋게 봐서 리조트로 개발하고 싶어 하잖아. 그게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인데, 네가 일을 일으키면 마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걱정돼. 장미자 할머니 건강도 안 좋으신데 혹시 화나셔서 어디가 잘못된 게 개발업자 귀에라도 들어가면...”민여진은 침묵했다.이장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이런 일은 좀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럼 먼저 가 볼게.”주변이 조용해지자 민여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장이 나선 것은 아마 그가 장미자 할머니와 친척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편드는 것은 당연했지만, 완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웠다.경수의 일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그녀는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때, 앞에서 누군가 다가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 후 민여진은 휴대전화의 기계음을 들었다.“왜 밖에 있어요.”임재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