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준은 처음에 정말 약간 화가 났다...예전에 항상 판을 쥐고 있었던 건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월영의 말에 놀아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이라니.심지어 대학교 졸업 여행 때도, 실수로 폭력 조직에 휘말리고 부패 경찰에게 잘못 걸려 독한 매를 맞았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그러나 유월영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자신을 속인 상대가 그녀라면 화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의 표정이 다시 누그러졌다.“화 안 나, 당신만 무사하면 됐어.”유월영은 그의 그런 태도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도발했다.“내 말 이해 못했나요? 내가 당신을 가지고 놀았다고요.”연재준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도 말했잖아. 당신이 무사하면 그걸로 됐다고.”유월영은 살짝 어금니를 깨물다가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니 정말 마음이 약해질 것 같네요. 우리 사이에 엄마의 목숨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당신이랑 화해하고 전에 원한을 끝내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걸요.”연재준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봤다.“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걸 알아요.”유월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연재준이 눈을 감았다.“그래, 그럴 가능성은 없어.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하는 건 내가 빚진 일이니까, 언젠가 당신 앞에서 내가 죽더라도 그건 빚을 갚는 거야. 그러니 그때 가서도 부담스러워하지 마.”연재준의 말을 들으며 유월영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병상에 누운 연재준이 자세를 바꾼 후 수액 바늘이 꽂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 그런 건 다 제쳐두고, 지금은 와서 나를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될까?”유월영의 눈빛이 흔들렸다.연재준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온몸이 너무 아파서 그래. 한 번만 안아주면 나을 것 같은데.”유월영은 사실 바로 그의 앞에 서 있었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그러자 연재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그녀는 밀어내지 않았다.연재준은 유월영을 한 걸
연재준은 유월영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그런데 생각해 본 적 있어? 현시우와 왜 당신, 왜 그렇게 잘 맞는지? 왜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당신한테 관심을 두고 신경 썼는지?”유월영의 시선이 흔들렸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그리고 현시우의 어머니, 연회 부인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왜 그렇게 당신을 좋아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어?”유월영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연재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현시우와 당신의 유전자 검사해 보는 게 어때?”“무슨 헛소리에요!”유월영은 순간 그를 밀어내고 두 걸음 물러나며 벽에 부딪혔다. 탁 소리가 나자, 진료소의 의사가 급히 다가왔다. “아가씨?”연재준은 그 의사도, 이 진료소도 모두 그녀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유월영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자 의사가 걱정하며 물었다.“아가씨, 아직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셨나요?”연재준의 예측대로 유월영의 지병은 고의로 약을 먹어 병을 유발한 것이었다.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은 여전히 연재준을 응시한 채 말했다.“괜찮으니 우선 나가주세요. 아직 할 말이 있어서요.”의사가 나가자 유월영은 연재준의 옷깃을 잡았다. 손에 힘은 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를 악문 듯 날카로웠다. “하던 말을 똑바로 다시 하세요!”연재준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옛날 집 앞에 있던 야식 노점들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유월영이 크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가가 신고했겠죠. 도시도 관리가 필요하니까요.”“그 가게들은 그토록 오래 존재해 왔고 이웃과도 잘 지냈어. 누가 그런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노점들을 신고할 정도로 한가할까?”유월영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누군가 당신이 그들과 지나치게 접촉하지 않도록 막으려 한 거야. 그 가게 사장이 언젠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할까 봐 두려워서이지. 예를 들면...‘아가씨 옆에 있
병원과 국경에서 일어난 두 번의 소동으로 인해 “폭주 커플”은 외국 사이트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다.호기심 많은 네티즌들은 이들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궁금해했다.[그들은 누구인가?][왜 추격당하고 있을까? 추격하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이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마지막에 어떤 결말이 될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오성민은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부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일단 침묵을 지킬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오성민의 생각은 빗겨나갔다. 연재준과 유월영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귀국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대낮에 부하들을 보내 이들을 가로막고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방송국의 드론 카메라는 하늘에서 모든 걸 지켜보며 하얀색 택시와 네 대의 검은색 세단이 도로 위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을 중계했다. 그들은 서로 번갈아 앞서가며 교통이 혼잡한 아침 출근길 차들 사이로 빠르게 질주했다.차량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택시는 갑자기 뒷바퀴를 미끄러뜨려 검은색 차량에서 퍼붓는 총알을 재빨리 피했다. 하지만 길가에 있던 무고한 차량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방호벽에 부딪혀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났고 수 킬로미터에 걸친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도로가 막혀 있었고 교통경찰이 현장에 바로 도착했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길에 갇힌 차주들은 창문을 내려 앞차 차주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자신도 이내 뒤차로부터 욕을 먹으면서 앞뒤로 다투기 시작했다.경찰, 소방대, 구급차, 도로 구조 서비스와 차량 보험 회사들까지 현장에 도착했고 도시는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오성민은 생방송을 본 즉시 엘리자베스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모든 사람이 연재준과 유월영의 행방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몰라요?”“당연히 알고 있어요.”“알고도 이렇게 대놓고 추격하다니 자신을 들어내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오성민이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그들이 무슨 계략을 가지고 있든 사람이 죽기만 하면 우리가 이긴 거야!”이렇게 된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그녀가 유월영과 연재준, 특히 유월영만 죽일 수 있다면 대승을 거둘 것이다. 그 외의 일들은 나중에 처리하면 그만이다!경찰이 조사하려 하면 죄를 뒤집어쓸 사람을 내세우고 약점을 잡히면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증거를 없앨 것이다.정말로 재판에 서게 되더라도 그녀에겐 최강의 변호팀이 있어 무죄를 받을 수 있다!“못 할 것도 없지. 사람 두 명 죽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여론이나 네티즌 따위, 누가 파리 떼 같은 그들의 의견을 신경 쓰겠는가?엘리자베스 부인은 레온 가문과 레온 그룹, 이 거대한 상업 제국을 손에 넣고 싶었다. 왕관을 쓰고자 하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자신을 달래며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고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엘리자베스 부인은 어두운 길을 끝까지 가기로 결심했다.“모든 준비는 끝났어. 그들이 살아서 떠날 가능성은 없어! 좋은 소식을 기대해!”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결연히 전화를 끊었다.“멍청한 것!”오성민은 핸드폰을 벽에 던졌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그의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렸다.그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화면에는 아직도 추격전을 생중계하고 있었다.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한 마지막 사건은 1994년 '심슨 살해 사건'이었다.그때도 온 미국 국민이 텔레비전을 통해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지상에서는 순찰차가 도망치려는 심슨을 추적하는 장면을 목격했다.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떨궜다. 유리 렌즈 뒤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고 냉혹해졌다.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엘리자베스 부인이 말한 대로 그녀가 정말 유월영과 연재준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그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큼 최악인 상황은 없었다.오성민은 깊이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어 다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
심복은 식은땀을 닦으며 불안하게 말했다.“사모님, 위에서 조사팀을 꾸려 이번 사건을 철저히 조사한다고 합니다. 혹시 사모님에게까지 닿을까 걱정됩니다.”“형식적인 조사일 뿐이야. 누가 두 명의 외국인 때문에 대규모 경찰력을 낭비하겠어? 설령 연씨 가문이 추궁하려 해도, 그들이 여기까지 손을 뻗을 순 없어.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얘기해서 외부에서 오는 요구를 무시하라고 해둬.”엘리자베스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이 정도 작은 일쯤은 해결할 수 있지 않니? 이런 일로 나를 방해하지 마. 이제 다음 계획을 생각해야 해. 어떻게 하면 크로노스를 끌어내릴 수 있을까? 이제 고민서도 없으니 크로노스를 도울 사람이 없을 거 아냐. 이젠 두렵지 않다고.”“흥, 나는 그 애랑 달라. 나는 레온 가문 사람이야. 가문을 이어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 가족 모두가 나를 지지해 줄 거야. 내가 가문의 수장이 되면 아무도 감히 나를 조사하지 못할 거라고.”엘리자베스 부인은 완전히 야심에 찬 꿈에 빠져들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녀는 자신의 꿈이 곧 산산조각 날 것을 알지 못했다.“아, 맞다. 오성민한테 전화해서 그를 안심시켜야겠어. 내가 이렇게 일 처리를 잘하고 있으니.”엘리자베스 부인이 막 핸드폰을 집어 든 순간 누군가 저택의 대문을 밖에서 강제로 열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들어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그들은 체포영장을 꺼내 보였다.“엘리자베스 레온, 당신은 고의 상해죄, 교통수단 파괴죄, 공공 안전 위협 죄, 테러 조직 가담 및 테러 활동 교사죄, 불법 무기 및 탄약 소지죄, 그리고 고의 살인죄로 체포되었습니다!”엘리자베스 부인은 무려 3분 동안 멍해 있었다.그녀는 경찰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비행기 사고는 이제 막 발생했잖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온 거지?’‘폭탄을 설치한 그 두 사람이 고발한 건가? 그들은 자신의 가족 안전이 위협받을 거라는 걸 모르나?’그녀는
오성민의 목소리가 떨렸다.“드디어 내 전화를 받아줬구나...괜찮아? 계속 당신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혁재가 방해해서 만날 수가 없었어.”이승연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가볍고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성민 씨. 우리가 헤어진 그 순간에서 그만뒀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고 당신도 이 꼴 나지 않았겠지.”오성민이 어금니를 깨물며 차갑게 웃었다.“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가 7년이나 함께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 관계를 포기할 수 있지? 그렇게 쉽게, 마치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내가 성민 씨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7년 동안 함께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했고 많은 환상을 가졌었어. 그날 문을 열고 그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오성민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말뿐인 미안함은 필요 없어. 당신은 곧 당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내가 원하는 사과는 바로 그거야.”그 말을 끝으로 이승연은 전화를 끊었다.오성민은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소리치며 외쳤다.“승연아! 이승연!”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오성미은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그를 반긴 것은 경찰들이었다.오성민은 신주시에 갇혀 있는 동안 경찰을 여러 번 보았다. 그들은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정신을 괴롭혔고 그는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질문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 듯했다.그들은 체포영장을 직접 꺼내 들었다.“오성민 씨. 당신은 고의 상해죄, 고의 살인죄, 살인 미수, 뇌물죄, 불법 감금죄, 공공 안전 위협 죄, 범죄 교사죄, 국제 범죄, 테러 조직에의 가담한 혐의로 체포합니다. 형법에 따라, 당신을 공식적으로 체포합니다.”“잘 준비하세요. 이번엔 당신 스스로 변호해야 할 겁니다.”...다니엘 저택에서 며칠 만에 처음으로 유월영은 편안하게 뜨거운 물로 목욕했다.그녀는 부드럽
신현우가 백유진을 데려온 건 분명 유월영과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이었다.하지만 오성민은 전혀 아니었다.당시에는 그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이제 전반적인 상황이 드러나면서 그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오성민은 그 틈을 타 유월영과 연재준이 약이 든 술을 마시고 관계를 가지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는 확신했다. 연인 사이에서 외도는 가장 용서받기 힘든 일이고 유월영과 연재준이 얽히면 고귀한 신분인 현시우가 절대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오성민이 원했던 것은 바로 유월영과 현시우의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이었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음을 모두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신현우의 기술단지 폭발 사건까지 계획했다.그랬다.그 폭발 사건의 진짜 범인은 오성민과 엘리자베스 부인이었다.그는 이 폭발 사건을 통해 유월영이 현시우를 오해를 하도록 유도했다. 즉 현시우가 유월영과 연재준의 그날 밤을 용서하지 못하고 신현우에게 보복을 가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이렇게 하면, 두 사람은 서로 오해하고 의심하게 되어 결국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의 계략은 상당히 교묘했고 동료를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신현우는 아직도 자신이 이번 계획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오성민의 유일한 실수는 유월영과 현시우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현시우는 유월영이 계략에 빠져 연재준과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도 그건 그녀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유월영은 현시우가 사람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들은 이성을 유지한 채 반대로 생각했다. 만약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둘이 다툼이 생긴다면 결국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일까?교도소에 있는 윤영훈은 아닐 테고 불을 지른 신현우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연재준까지 배제하면 결국 오성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오성민이 몰래 두 사람에게 덫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현시우와 유월영은 알아챘고 쉽게
처음에 이 계획을 세울 때 현시우는 대부분 유월영의 의견을 따랐지만 두 가지 문제에서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첫 번째는 유월영이 약을 먹어 자신을 아픈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었다.현시우는 그녀가 자신의 몸을 해치면서까지 하는 걸 반대했지만 유월영은 항상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어왔다.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몸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판돈이었다. 도박판의 판돈.오성민과 엘리자베스 부인을 유인하려면 유월영은 자신이 먼저 미끼를 던져야 했다.“우리가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준비를 했으니 굳이 그런 설정은 필요 없을 것 같아. 네 몸도 상하고.”현시우는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그러나 유월영은 단호했다.“그걸 추가해야만 시우 씨가 나에게 얼마나 무정한지를 보여줄 수 있고 그들이 우리의 관계가 정말로 파탄 났다고 믿을 거야. 그래야 뒷일을 안심하고 꾸밀 테니까.”현시우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의사는 돈 때문에 엘리자베스 부인에게 협조하는 거야. 내가 의사한테 돈을 주고 위조 진단서를 작성하게 하면 되잖아.”“그가 돈 때문에 엘리자베스 부인을 돕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우리가 노출될 위험이 생길 수도 있어.”유월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 없어. 내가 약을 먹으면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우 씨가 신뢰하는 의사의 실력을 믿지 못해? 그분도 말했잖아, 이 약은 내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주지 않고 나중에 회복할 수 있다고.”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도 가혹했지만 자신에게도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이 정도의 상처를 입고, 엘리자베스 부인과 오성민의 목숨을 가질 수 있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야.”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두 번째 문제로 부딪혔다.“해독제를 빨리 먹는다 해도, 24시간 내에 네 상태는 여전히 약해져서 자신을 지킬 수 없어. 혼자서 어떻게 추격을 피할 수 있겠어?”현시우는 계획을 세웠다.“한세인을 너랑 같이 보낼게.”현시우는 유월영의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