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은은 즉시 연재준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대표님, 이 변호사가 그 별장에 대해 알아보고 있답니다.”이승연이?연재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왜 갑자기 그 별장에 찾아간 걸까...’‘월영이가 부탁한 건가?’‘어쩐지 그녀의 행동이 요즘 이상하다 느꼈더라니. 그녀는 다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일부만 알고 있으려나?’연재준은 이미 연회장에 들어섰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서 나갈 수 없어, 하정은에게 눈빛을 보냈다. 하정은도 그의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연재준은 표정 변화 없이 연회장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오늘 상회의 주제는 “오색찬란”이었다. 연회장에 걸린 샹들리에는 꽃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바닥에도 꽃을 수놓은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있었다. 구석구석에 장식된 꽃은 세계 곳곳에서 공수하여 들여온 보기 드문 품종의 꽃들이었으며 한눈에 봐도 사치스럽고 휘황찬란해 보였다.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정장을 입은 남자, 드레스 차려입은 여자, 각각 술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며 서로 부르는 호칭은 “대표” 아니며 “사장”이었으며 가장 직급이 낮은 사람도“이사”였다. 연재준이 들어서자마자 몇 명의 사장들이 와서 아는 체를 했다. 그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는 웨이터의 손에서 레드 와인 한 잔을 가져왔다. 그는 키가 크고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손에 든 붉은 색 와인과 손목시계의 어두운 하늘색이 어우러져 불빛 아래서 형용할 수 없는 조화와 우아함을 빛내고 있었다. “엊그제 해운그룹에서 발표한 전년도 재무 보고서를 봤는데 전년 대비 202% 성장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연 대표님을 직접 만나 뵙고 축하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연 대표님은 정말 젊고 유능하십니다. 해운그룹이 대표님께서 맡으신 후부터 정말 고공행진이네요”“조 사장님 과찬입니다. 업계가 호황이라 그렇죠.”“올해는 해운그룹이 더 대박 날 것 같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영안 프로젝트도 수익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이잖습니까? 거기다
“하하하, 저도 제 딸을 연 대표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연 대표님의 눈에 들어 하실 지 모르겠어요!”다른 사람들은 반응하고 즉시 대화에 끼어들었다.“손 대표, 그건 안 되지. 그렇게 얘기하면 저의 여동생도 연 대표님을 흠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연 대표님, 제 여동생이 올해 막 대학을 졸업했는데 오늘 마침 이 자리에 참석했어요. 제가 바로 불러올까요!”연재준은 그제야 싱긋 웃었다.“여러분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습니다만, 제가 이미 결혼해서요.”사람들은 놀래서 눈이 휘둥그레졌다.“들어본 적 없는데!”“해운그룹 대표가 결혼한다면 주식 시장에까지 영향을 줄 말한 빅 뉴스인데, 왜 아무런 소식 못 들었지?”“연 대표님과 결혼하신 분은 어느 재벌 가문의 따님이신가요?”“아마 여러분들도 다 아실 겁니다.”연재준은 원래도 결혼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번 현씨 가문에서 주최한 연회에서 유월영이 자기 아내라는 걸 공개하기에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저의 예전...”비서라는 단어가 말이 나오기도 전에 청아한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결혼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이제까지 누구도 사람들 앞에서 연재준의 말을 가로챈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말을 반박했던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들려온 겁 없는 소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사람들 향해 걸어오는 남자는 용모가 준수했고 몸매가 훤칠하여 연재준과 막상막하였다.흰색 정장 차림에 안에는 회색 조끼를 받쳐 입었으며 하늘색 넥타이를 매치하여 차분하고 청초해 보였으며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일반적인 생김새는 아니었는데 얼굴은 낯설어 신주시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인 듯했다...이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회의 회원들이었으며 회원이고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면 한 가지 가능성만 생각할 수 있었다.“그...현 회장님의 둘째 아드님인 현시우, 현 대표님 아닌가요?”틀림없었다.현시우였다.연재준도 천천히 돌아서서 남자를 바
“저쪽에서부터 너희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친구끼리 그러면 남들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어? 재준아, 시우야, 너희들 학교 다닐 때 친구였잖아. 겨우 몇 년 못 봤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야?”현 회장은 그들을 화해시키려 했다. 하지만 연재준과 현시우는 그들이 오늘 입은 옷 색깔처럼, 검은색과 하얀색이어서 천성적으로 물과 불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눈부신 샹들리에가 연회장을 비추고 있었고 2~3m 사이를 두고 연재준과 현시우의 시선은 공중에서 마주치고 불꽃이 튀었다. 현 회장의 말은 두 사람의 기억을 10년 전으로 돌렸다. 현시우, 패배를 인정해. 내일부터 다시는 신주시에서 너를 보고 싶지 않아. 최대한 멀리 꺼져줘. 내가 봐주지 않으면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연재준 잊지 마, 내가 원하니까 나를 이길 수 있었던 거야.10년 전만 해도 두 사람은 소년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혈기 왕성한 때였으며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되어 이제는 풀어지지 않을 앙금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두 마디 말로 풀릴 수 없었다. 현 회장은 두 사람이 말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옛날 일은 기억나지 않으면 지나가게 두고, 앞으로 신주시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많을 거야. 따지고 보면 의형제인데 앞으로 일에서도 서로 도와주고 그래야지.”연재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현 회장님, 제가 이미 얼굴도 비췄고, 뒤에 있는 회의는 비서가 대신할 겁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벌써 가려고? 재준아, 잠까만! 재준아!”현 회장의 부름에도 연재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동시에 하늘가의 먹구름이 온 도시를 뒤덮었다. 연재준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었다. 그는 오늘 현시우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매번 그를 떠올리면 혐오감을 느꼈고, 오늘도 그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그와 1초도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연재준은 10년 전 복싱 체육관에서의 몸싸움을 떠올렸으며 작년, 아니
병원에서 나온 유월영은 곧바로 자신의 차로 가지 않고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이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루 종일 흐리던 날씨가 마침내 소나기를 퍼부었다. 유월영은 행인들과 함께 편의점으로 비를 피했다. 문득 배고픈 느낌이 들어 편의점 도시락 하나 사서 창가 자리를 찾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락이 맛이 없는 연유인지, 아니면 머릿속의 생각 때문이지 그녀는 몇 숟가락 먹다가 삼키기 힘들어 아예 뚜껑을 닫아버리고 창밖에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서 고해양과 해양그룹을 검색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취를 남기기 마련이었으며 비록 사건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도화선은 광산이 붕괴하여 100여 명의 광부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해양그룹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관련 부서는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했다. 해양그룹이 규정을 위반하고 심지어 불법으로 운영했던 사실이 지속적으로 적발되었으며 모두 큰 죄로 여겨져 고해양은 그렇게 감옥에 들어갔다. 그렇게 이어진 조사, 재판, 배상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회사도 파산하고 해양그룹은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간단하게 끝난 일이라면 왜 현시우는 양아버지의 죽음이 나의 신상과 관련이 있다고 했을까?’‘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은 양아버지는 살해당했거나 자살을 강요당했다는 뜻인 거야?’만약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라면 해양그룹의 일은 알려지지 않은 내막이 있는 게 분명했다.유월영은 이승연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승연 언니, 아까 내가 전화 온 걸 못 봤네. 무슨 일이야?”“내가 카톡으로 사진 몇 장 보냈어. 한 번 봐봐.”“알았어.”유월영은 다시 카톡에 들어갔다. 그건 유현석이 납치된 채 차에 오르는 CCTV 장면의 캡처 사진 여러 장이었다. 유월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설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야?”“맞아.”이승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재준은 가소로운 듯 웃었다.“현시우, 당신 무슨 자격으로 남의 아내를 데리고 가려고 하지?”그는 담담하게 따져 물었고, ‘남의 아내’네 글자에 유난히 힘주어 말했다.현시우도 우산을 살짝 치켜 올리며 차분하게 대꾸하였다. “연재준, 당신이 월영의 뒤에서 몰래 한 짓 중에 어느 것이 당신이 말하는 남편이라는 자격에 어울리는 행동이지?”유월영은 민감하게 반응을 하면서 즉시 물었다.“나 몰래 한 짓?”연재준이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하정은도 바로 우산을 들고 그의 뒤에 섰다. 굵은 빗방울들이 우산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연재준은 무거운 목소리로 유월영에게 말했다. “월영아, 우선 나랑 집에 가자.”현시우가 비웃는 듯 말했다.“왜? 찔리는 게 있나 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월영이가 알게 될까 봐 겁나?”연재준의 눈은 밤처럼 까맿다. 그는 현시우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월영이 한테 얘기하는 게 과연 그녀에게 좋은 일인지 생각해 봐. 그녀의 힘으로 뭘 할 수 있겠어?”유월영이 연재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나한테 뭘 얘기해요?”“너한테 속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나아.”현시우가 그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게다가, 연 대표도 월영이를 위해 그러는 척할 필요 없어. 당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얻고 싶어 그러는지 나는 잘 알거든.”유월영의 시선은 이번에 현시우를 향했다. “뭘 얻는다니?”연재준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래? 현 대표가 도대체 뭘 안다는 건지 들어나 보지.”현시우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확실해? 내가 월영이 앞에서 얘기해도 괜찮은지?”연재준의 얼굴은 무표정하였지만 눈 속의 살기는 현시우를 향했다. 현시우도 그런 그의 시선을 눈 깜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이 두 남자는 바로 그녀의 앞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월영의 고개는 그들 따라 이리저리 돌아가다 현기증이 났고 끝없이 들리는 정보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게 다...’‘이게 다...무슨 소리람...’과
유월영은 갑자기 비틀거리다 손에 우산은 그의 우산과 부딪혔고 빗방울이 튀어 땅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떨어졌다. 그러나 곧 다급한 발걸음들이 웅덩이를 밟고 다가왔다. 유월영이 고개를 들자 현시우의 경호원들이 그들 앞에 반쯤 둘러서 있었다. 앞으로 나서려던 연재준은 얼굴이 굳어진 채 할 수 없이 멈춰 섰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현시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월영이가 앞으로 다시는 당신과 함께 가지 않을 거야.”길을 막고 있는 경호원들을 바라보면 연재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당신이 내게서 그녀를 데려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현시우가 씩 웃었다.“해보지 뭐.”해보라지.연재준은 진작부터 손을 쓰려고 했었다. “사모님 모시고 와.”연재준의 한마디에 주위에서 은밀히 보호하던 경호원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빗속에서 양쪽의 사람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유월영은 그들이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대낮에 길거리에서 패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길에 인적이 뜸했지만, 날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고 길도 막히지 않아 언제든지 사람들이 올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보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뉴스에 나오기라도 한다면...‘해운그룹과 현씨 가문은 모두 큰 타격을 받을 텐데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인가?’지금 상황을 보니 그들은 정말 뒷일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유월영은 심지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난투극이 펄쳐졌다. 연재준과 현시우의 경호원으로 선발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가장 잔인한 격투술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하나같이 흉악하였다.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땅에서는 퍽퍽 주먹이 오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주먹이 살에 부딪히는 소리, 뼈 부러지는 소리,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유월영은 순간 자신이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팔꿈치 때리기,
지남은 뒤를 돌아보았다. 현시우가 멈추라는 말이 없자 그는 엑셀을 밟은채 놓지 않았고 차는 도로를 계속 질주했다.유월영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려 현시우를 노려봤다. “차를 세우라고 해!”현시우는 갑자기 그녀의 위로 몸을 숙여왔다. 순간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고 그의 몸에서 나던 옅은 송백향 나무가 그녀에게 훅 닿았다. 사람마다 안전거리에 대한 기준이 달랐으며 일정한 안전범위를 넘어오면 경보가 울리는 게 당연했다. 유월영은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가방에서 작은 칼을 꺼내 현시우를 향해 찔러왔다.하지만 이내 현시우의 빠른 손놀림에 잡혔고 그는 고개를 숙여 내려봤다. 그건 휴대용 접는 칼이었고 칼날이 날카로워 생각보다 위험해 보였다. 현시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유월영을 바라봤다. 그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싸움과 납치 그리고 자동차 추격에 교통사고까지. 이 모든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며 유월영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행동들이었다.하지만 그래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지금 나한테 칼을 겨눈 거야?”유월영은 입술을 깨문 채 대답이 없었다.지남은 백미러를 고쳐 잡으며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신가요?”“응. 괜찮아.”현시우는 짧게 대답하고 한 손으로 유월영의 칼을 빼앗고 한 손으로 그녀의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매주었다. 탁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난 그저 안전벨트를 매주려고 했던 것뿐이야.”말을 마치고 현시우는 다시 거리를 둔 채 자신의 안전벨트를 채웠다.“연재준은 괜찮을 거야. 하지만 계속 그 사람 옆에 있다간 네가 안 괜찮아.”“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야. 나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내가 스스로 판단하게 해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말고.”유월영은 숨을 고르고 다시 이어 말했다.“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당신이 말하는 대로 다 믿을 수는 없어.”현시우가 말이 없자 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
“...”옛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유월영은 자신도 모르게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 너무 뜬금없지 않아? 10년 전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하고 나를 버리고 해외로 간 사람도 당신이고, 지금 갑자기 나타나서 나보고 같이 떠나자고 한 사람도 당신이야. 날 도대체 뭐로 보는 거야?”“좋으면 입양하고, 싫으면 남을 줘버렸다가 또 생각나면 막무가내로 데려올 수 있는 강아지인 거야?”현시우는 그녀의 굳은 옆모습을 보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화 안 풀린 걸 알아. 또 뭐라고 욕하고 싶어? 계속 해, 실컷 하고 앞으로는 이런 칼로 나를 경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그녀가 칼로 그를 막은 행동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듯했다. 유월영은 덧붙였다.“그리고 난 더 이상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현시우는 덤덤하게 물었다.“너 연재준을 좋아하고 있는 거야?”유월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응.”“어디가 좋아? 3년 동안 당신을 도구로만 여기던 걸? 그가 더 순진하고 새로운 여자를 좋아하는걸? 아니면 그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새 직장 못 구하게 손을 쓴걸?”“...그것도 아니면 당신을 협박해 그의 곁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혼자 외롭게 죽게 놔두겠다고 하던 걸 좋아하는 거야?”“...”유월영은 말문이 막혔다.현시우는 여전히 손에 있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이 말은 냉소적으로 들렸지만 사실 그의 평소의 말투와 다를 바 없었다. 차분하고 조용했으며 공격적이지 않았다. 유월영은 갑자기 서러워져서 소리 질렀다.“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 내가 정말 필요할 때 당신은 나타나지도 않다가 내가 이제 재준 씨랑 잘되고 결혼하니 또 나타나서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하면 당신을 믿어주고, 당신이랑 같이 가야 해?”그녀는 왜 자신이 만나는 남자가 모두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재준도 그렇고 현시우도...유월영은 바로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그는 그런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