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달려들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네가 신경 쓰는 물건에 달려들어야 의미가 있지. 우린 월영 씨에게 네가 사실 친아버지가 아닌 사실을 밝힐 거고 너희 집안이 빚더미를 떠안았을 때 월영 씨를 담보로 내놓은 것도 일종의 계략이었다가 다 폭로할 거야.”윤영훈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너와 주영문이 돈이 딸려서 월영 씨를 보호하고 있는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용했지? 너희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월영 씨를 팔아버리는 척 해서 배후가 돈을 내놓도록 강요한 거야. 내 말이 틀렸어?”진실이 드러나자 유현석은 말문이 턱 막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어떻게 알았어?”윤영훈은 비웃으며 일어섰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높은 곳에서 유현석을 내려다보았다. “유현석, 아니, 유용우. 넌 그냥 인간쓰레기일 뿐이야. 이제 와서 뭐 인자한 아버지 코스프레를 하고 있냐?”유현석은 멍하니 제자리에 굳어버렸고 마침내 현실을 직면했는지 바닥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맞아, 난 인간쓰레기야. 내가 우리 월영에게 정말 미안하구나...”“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이실직고해. 월영의 나머지 인생은 네 생각으로 결정될 수 있어.” 윤영훈은 유현석의 마음속 가장 나약한 부분을 공격했다. “네가 오래전에 모셨던 이사장님을 생각해 봐. 그때 널 얼마나 믿었길래 월영 씨와 그 60조를 너에게 맡겼겠어? 근데 넌 그런 이사장을 어떻게 보답했지?”유현석에게 수치심과 자책감, 고통 등 여러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머리를 땅에 박고 여러 번 부딪쳤다. 윤영훈은 차가운 시선으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소파로 돌아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유현석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오늘은 섣달그믐날이구나.”그러자 윤영훈은 느릿느릿 받아쳤다.“그래, 난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너와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유현석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한참 후에 다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설을 쇠고 나서 너희들에게 말하면 안 될까?”윤영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제야 결정을 내렸어?”유현석
유월영은 그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 같은 걸 믿지 않았다. 도박꾼이 영원히 다음번에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녀에게 신빙성이 없었다.단지 그녀는 엄마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유현석을 데리고 병실 밖 복도로 나갔다.“말하세요.”유현석은 그녀를 보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얼굴은 안 아파?”그는 딸의 뺨을 때린 것에 미안한 계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20여 년 동안 한 번도 너를 때린 적이 없는데...”유월영은 조금 짜증이 나는 듯 해서 입을 열었다.“그 얘긴 하지 마세요. 또 다른 할 말 있으신가요?”유현석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20년 동안 가장 자세히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딸이 점점 더 닮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면서 말했다.“네가 처음 집에 왔을 때 겨우 이 정도 크기였어. 하루에 22시간씩 자곤 했었지. 깨워도 깨지 않아 난 네가 아픈 줄 알고 너를 안고 의사들을 찾아갔어. 네 큰 언니는 처음 태어났을 때 너만큼 잠이 많지 않아서 걱정했었거든.”“의사가 괜찮다고 해서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는 걸 알고 별로 좋지 않은 이 세상을 마주하기 싫어져서 계속 잠만 자고 있었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유월영은 그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가 단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말을 왜 하는 거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끊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그때 내가 항상 널 데리고 나가서 햇볕 쬐고, 너에게 장난도 치고 장난감도 사줬었지. 난 너를 잘 돌봐주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니...”“뭘 해도 열정이 오래 가지 못했어.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를 네 엄마에게 맡기고 더 이상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 이 몇 년 동안 너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유월영은 이것은 아버지 한 사람만이 이런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이 다 그랬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유현석은 나타나지 않았고, 유월영도 그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조린 의사가 신주시에 오자 그녀는 어머니의 치료를 주선하랴 설도 보내랴 바쁘게 보냈다.유월영은 밤새도록 어머니를 지켜보다 접이식 침대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품에 있던 전화기기 진동하였다.그녀는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전화기를 받았다. “여보세요?상대방이 말이 없자 유월영은 스피커로 바꿨다.“여보세요? 누구시죠? 의사 선생님이신가요?”“당신 남편.”유월영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화면을 보자 연재준의 전화였다. 그녀는 이 며칠 동안 어머니를 돌보느라 바빠서 그와 카톡으로 몇 마디 나눈 게 다였다. 그가 집에서 설날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재벌 가는 규칙도 많아 아마 그녀에게 연락할 시간이 없어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무슨 일이라니? 그걸 나한테 물어?”연재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쁜 눈으로 달력을 한 번 봐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유월영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달력을 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유월영이 대답이 없자 연재준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오늘 구청에서 출근합니다. 부인, 내가 지금 병원 아래에 있어. 가족관계증명서랑 잊지 말고 챙겨와.”“...”유월영은 그제야 새해 지나고 혼인신고 하러 가기로 약속했던 걸 기억해 내고 벌떡 일어섰다.연재준이 재촉했다.“굼벵이 아가씨, 빨리 내려와.”연재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유월영은 아직도 머리가 멍한 듯 서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비록 설 전부터 두 사람이 얘기했지만 그녀는 그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래서 너무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와 재준 씨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된다고?’ 침대 위에서 듣고 있던 이영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신을 차리라는 듯 웃으며 재촉했다.“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씻고 내려가.”유월영은 어머니의 말대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
유월영은 당연히 조서희의 충격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연재준도 오늘 흰 셔츠를 입은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유월영은 그가 하얀 셔츠를 입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예전에는 검은색이 차분해 보이고 귀티가 나서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하얀색 셔츠를 입은 그를 보니 의외로 부드러운 기질에 온유해 보이기도 했다. 유월영은 그에게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불평했다.“어제 문자 보낼 때도 알려주지 않고. 난 오늘 준비도 못 했다고요.”어젯밤 그는 그녀에게 사촌 여동생의 고양이가 공중제비하는 영상을 보내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고양이가 공중제비할 수 있다니 그녀는 너무 신기해서 그에게 몇 개 더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이 고양이 좋아해? 내가 가서 뺏어 줄게.”유월영은 왠지 그가 여동생의 고양이를 훔치는 짓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급히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을 돌렸다.“어렸을 때 나도 고양이를 키웠던 적 있어요. 매일 밤 데리고 같이 자기도 했어요.”그 말을 듣자 연재준이 바로 생각을 바꿨다.“안 뺏어줄래. 넌 나랑만 자야 해.”두 사람은 이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만 하면서 보냈다. 연재준은 혼인신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었다. 연재준은 씩 웃으며 조수석 차 문을 열어줬다.“뭘 준비하려고? 넌 사람만 오면 돼.”유월영이 걸어가서 허리를 굽혀 차에 타려다가 조수석에 놓여있는 붉은 장미 꽃다발을 발견했다.연재준은 팔을 차 문에 올려놓고 살짝 몸을 숙인 채 안을 가리켰다. 잘생긴 눈매는 꽃보다 더 눈부셨다.“이번에는 내가 준 꽃을 버리지 않겠지?”“요 며칠 보낸 꽃들도 다 버리지 않았어요.” 그는 요 며칠 음식 외에도 두 번이나 꽃을 보내왔다. 매번 그녀는 꽃병에 잘 꽂아두었다가 시들어서야 버리곤 했었다. 연재준은 옛날 일을 떠올리면서 말했다.“내가 처음으로 선물한 꽃을 쓰레기통에 버렸잖아. 윤영훈이 사진도 찍어 보내줬었어.”유월영은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지만 그가 화냈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
유월영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려 연재준에게 물었다. “연 회장님, 우리가 혼인 신고하러 가는 걸 알아요?”“아직 말하지 않았어. 훼방을 놓을까 봐, 다 한 다음에 말하려고.”연재준은 무서울 게 없는 듯 말했다.하지만 유월영은 연 회장이 그러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전에 그녀와 연재준이 잘되기를 바랬으며 그녀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재준 씨, 시은이라는 분 알아요?”“아니. 누군데?”그녀는 조서희네 고향에 있는 임신한 신비한 여자였다. 유월영은 처음에 그 여자가 연재준의 애인이라고 의심했었다.그러다 서정희 부모로부터[상속인은 너 하나가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또 연재준이 간병인을 매수하여 이영희를 해치려던 사람이 문 부인이라는 말을 들은 후 유월영은 어렴풋이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 여자와 배 속의 아이가 연재준과 관련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 그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저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는 셈이었다. 유월영은 가방을 열다가 그 옅은 노란색 봉투를 보고 눈을 깜박이다 꺼내 들었다.연재준은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큰길을 달리다,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천천히 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다 버렸다고 하지 않았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치워놨다가 그날에 다시 찾았어요.”유월영은 봉투를 열고 노란 종이를 꺼냈다. 하늘하늘한 한 페이지가 소년 연재준을 담고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물었다.“이 말 무슨 뜻이에요?”연재준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답했다.“무슨 말? 너무 오래돼서 뭐라고 썼던지 기억 안 나.”방금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지금 그 복수를 할 시간이었다.“그러면 읽어 줄게요. [고개를 들어 달을 보려고 하는데 왜 당신의 모습만 보일까.] 이 구절은 시 같은데, 어느 시인의 시인지 연 대표님은 기억하시나요?”연재준은 다시 도도한 척했다.유월영이 핸드폰을 꺼내면서 계속 이어 말했다.“연 대표님도 모르시는 것 같네요
화이빌딩은 구청과 매우 가까웠다. 바로 코앞에 거리였다. 유월영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구청에서 뛰쳐나왔다!연재준이 빠르게 쫓아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통화 내용을 듣지 못한 그는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유월영은 그녀를 막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었으며 직접 가서 봐야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갑작스러운 비극은 인간의 본능을 뺏어갔다. 유월영은 말하는 법을 잊은 듯 그저 애원하는 눈빛으로 연재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놓아달라고, 보내달라고, 빨리 가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연재준은 그녀가 처음으로 이런 애원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조금 전의 웃음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다가 그녀를 잡은 손을 놓았다. 유월영은 단숨에 달려갔고 강렬한 움직임에 그녀의 귀는 마치 얇은 막이 덮인 듯 주면 소리가 귀 안에서 메아리 울리는듯했다. 바람은 그녀의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화이빌딩 앞에 도착하자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일은 한 시간 전에 발생하였으며 시신은 이미 장례식장에서 가져갔었다. 현장은 피가 흥건했으며 청소부들이 물줄기로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바닥에 있던 피가 물에 희석되었지만, 지하 하수관에 흘러 들어간 물은 여전히 검붉은색을 띠고 있어 참혹한 현장을 알 수 있게 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있었고 경찰차도 서있었다. 투신 사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술에 취해 발이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니다 법의학자가 술에 취했다는 얘기는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법의학자 왔으니 혹시 살인사건은 아닌지 추측이 나왔고, 또 어떤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죽으면 다 법의학자들이 검사를 하러 온다고 설명하면서 이건 자살이라고 덧붙였다...마지막에 또 어떤 사람이 탄식했다.“설 명절에 자살한 걸 가족들이 알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유월영은 유현
경찰이 그 편지를 가져왔다. 유월영은 한눈에 그것이 아버지의 글씨라는 걸 알아봤다. 그는 단 두 마디를 썼다. [나의 인생은 정말 실패했다. 사는 것도 정말 의미 없어. 내 딸도 내 말을 안 듣고. 꼭 그 연 씨라는 놈과 결혼한다고 하지..그냥 내가 죽을 테니 여기서 끝내자.]“…”그러니까 그는 그 결혼 때문에...꼭 연재준과 결혼하려고 하니 막을 수 없으면 차라리 죽어서 안 보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한 걸까?유월영은 아버지가 이런 이유로 자살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연재준과의 결혼을 반대하는걸 알았지만 이정도로 싫어하는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재준이 그녀를 부축해서 경찰서를 나오는 순간, 그녀는 그의 품에서 기절하였다. 연재준은 그녀를 데리고 동해안 저택으로 가서 의사를 불러들였다. 의사는 진찰 후 그녀가 그저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뿐이며 조금 있으면 깨어날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목소리도 안 나오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있어요.”연재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실어증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모님 깨어나서도 그런 상황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마 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연재준은 마음이 무거워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고 했다. 의사가 간 후 연재준은 방으로 들어가 유월영의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밖으로 향했다.집을 나오면서 그는 잠시 생각하다 핸드폰으로 동해안 저택의 대문을 잠갔다. 그는 차에 올라탄 후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어딘가요?”윤영훈은 짜증 난다는 말투로 대답했다.“방금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유현석이 정말로 투신자살하다니. 쯧. 좋은 단서가 여기서 끊겼네요.”연재준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별장에서 뵙죠.”그는 바로 차를 몰고 별장으로 향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윤영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재준은 그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 설 전날에, 내가 떠난 뒤 유현석에게 또 무슨 말 했어요?”연재준은 윤영훈의 눈을
연재준은 동해안의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유월영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올라가 그녀를 껴안은 채 귀에 낮게 속삭였다.“괜찮아 질거야. 다 괜찮아 질거야.”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유현석이 죽고 거기다 60조가 사라졌으니 앞으로 유월영의 삶은 더 이상 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그리고 그의 예감이 맞았다. 유현석이 죽자, 원래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려던 서력들이 모두 꿈틀대기 시작하였다. 마치 암벽 밑에 깊이 숨겨져 있던 용암들이 한 번의 진동을 거친 후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하는 그날, 모든 것은 불길 속에서 잿더미가 될 것이다....투신자살은 자살 결과중에서 가장 결과가 처참한 방식이었다. 유현석의 시신은 산산조각이 났고, 큰 언니와 큰 형부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시신은 장례식장에서 화장되어 작은 상자에 담겼다. 큰 언니는 울다 실신하여 업혀 나왔다. 길 건너편에 검은색 승용차에서 뒷좌석 창이 내려졌다. 남자는 이 모든 걸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앞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타고 있었고 남자는 바로 영안에서 유월영을 몰래 사진 찍다가 걸린 지남이었고 여자는 비서 한세인이었다. 그래서 뒷좌석의 사람이 누구인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연희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용우도 이제 죽었으니 그 사람들 다음 목표는 유씨 아가씨 아니면 유씨 부인일 겁니다.”현시우는 차창을 올리면서 눈을 감은 채 말했다.“월영이 더는 연재준 옆에 있게 할 수는 없어.”...유월영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방에는 그녀 혼자였고,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일몰의 주황빛은 세상을 밝게 하다 다시 어둡게 만들어, 사람에게 외롭고 쓸쓸하며 마음이 텅 빈 느낌을 주었다. 어깨에 옷이 걸쳐지자 유월영이 고개를 돌렸다. 연재준이었다. 그는 홈웨어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베이지색 스웨터가 그의 인상이 한층 더 부드러워 보이게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