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유월영은 그대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예전에 레온 정원에서 온천을 즐기던 중, 유월영은 서정희한테서 현시우가 국내 한 회사를 인수해 우회 상장이라는 경로를 통해 그 동안 해외에서의 산업을 국내로 이전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 있었다.당시에는 이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방금 신연우의 얘기를 듣고 보니...설마 현시우가 진짜 외국에서 돌아오려고 하는 건가?유월영은 뒤통수를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들어 작년 섣달 그믐날을 떠올렸다.연재준의 마음에 쭉 두고 있었던 지난해 섣달 그믐날에 그녀도 현시우를 만났다.신연우는 최근 몇 년 동안 가끔 국내로 돌아오곤 했으며 유월영과도 여러 번 만난 적 있었다.유월영의 눈빛은 추억 속에 잠겼고 너무 감성에 젖어 있었던 나머지 문 앞에 있는 연재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연재준은 유월영이 뭔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표정을 보며 이 순간 그녀가 도대체 어떤 추억 속에 빠졌는지 알고 싶었다.잠시 후, 유월영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은 전화를 받았다. “승연 언니.”이승연이 말문을 열었다.“서씨 가족이 방금 나에게 연락했어. 너랑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유월영은 담담하게 거절했다. “난 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어.” 그렇다고 해서 유월영이 서씨 가족을 만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3시로 약속을 잡자.”유월영이 만남에 동의하자 이승연은 되려 약간 놀랐다. “너, 생각이 바뀌었구나?”유월영은 눈을 내리꽂으며 말했다. “승연 언니, 합의서를 나 대신 준비해 줄 수 있어? 금액은 30억 원으로 적어놔. 그들이 이 금액에 동의하면 내가 그들과 합의할게.”이승연은 그 말에 살짝 의아해했다. 어젯밤 유월영은 분명히 합의하는 데 강한 반대의 의지를 보여줬는데 어떻게 갑자기 마음을 고쳐 먹은 걸까?하지만 유월영이 합의하는 데 동의하고 이 사안에 마침표를 찍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승연은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호텔 방 안에서 연재준은 전화를 걸어 사람을 시켜 바꿔 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연재준의 이 병은 갑자기 발작한 것이 아니었다.일찌감치 봉현진에서 살짝 불편함을 느꼈고 유월영 때문에 밤새도록 서울에 와 피곤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폭설까지 맞자 결국 열이 나고 말았다.연재준은 전신 거울을 보며 셔츠를 입었고 긴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씩 끼워 넣었다. 입체적인 얼굴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유월영 앞에서 보였던 그 무례한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그렇다. 연재준이 어젯밤 유월영의 방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 무례함과 뻔뻔함 때문이었다. 사실 유월영은 연재준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과거에 있었던 그 일들 때문에 유월영은 연재준이 무척이나 거북했다. 그들의 화해도 한 장의 종이처럼 가냘팠고 힘이 없었다. 새해 첫날에 겨우 쌓은 호감은 백유진 덕분에 깔끔하게 파괴되었고 유월영은 지금 다시 연재준에게 높은 가슴의 담벼락을 세웠다.정말 인과응보가 따로 없다.연재준은 짜증을 내며 외투를 입고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그리고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이혁재를 만났다.이혁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재준아, 너 신주시로 돌아갔지 않았어?”연재준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제 왔어.”이혁재는 친구의 썩 좋지 않은 인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 정말 병들었어? 병원에 가봤어?”연재준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이젠 다 나았어.”이혁재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연재준은 미동도 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우뚝 서서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이혁재는 그제야 눈앞의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 그렇구나, 넌 일부러 아픈 척 핑계를 대고 유 비서와 화해하려고 온 거구나? 참 잘했네, 재준아. 넌 이제 하다 하다 불쌍한 컨셉까지 잡고 달려드는구나.”그는 연재준을 2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연재준이 이 정도로 비참한 수단까지 이용하는 것을 본 적
유월영은 자리를 바꾸기 귀찮아서 그냥 점심때 이승연과 식사한 식당에서 서씨 가족과 만났다. 다만 실내 식당에서 실외의 양산 아래로 이동한 것뿐이었다.새해 연휴가 끝나고 모두가 정상적인 업무 진행 상태로 돌아왔다. 조금 적막해진 거리를 보며 유월영은 갑자기 새해 밤에 연재준과 손을 잡고 북적이는 거리를 걸으며 연극을 보기 위해 연극관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정신을 놓고 있었다.마침내 맞은편의 의자가 누군가에게 밀려내자 유월영은 다시 정신을 차렸고 무의식중에 시선을 맞은편에 돌렸다.하늘에서 눈이 사뿐히 내리고 있었고 자리에 앉은 사람은 연재준이었다.어젯밤과 이른 아침의 병에 찌든 창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깔끔하고 비싼 정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옷깃부터 소매까지 세부적으로 정교했고 잘 다리미질 되어있는 상태를 보니 언제나 높은 곳에서 위풍당당하게 내려다보던 평소의 연재준이었다.유월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연재준에게 질문했다. “재준 씨가 굳이 아픈 몸을 끌고 나를 위해 참전했나요? 그 진심은 고맙지만 난 이 변호사만 있으면 충분해요. 이 변호사는 방금 공증 사무소에 서류를 가지러 가서 곧 돌아올 것이에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신주시로 돌아가세요. 연말에 회사가 얼마나 바삐 돌아가나요.”예전에 연재준과 함께 있을 때 매년 연말은 연재준에게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렇게 바쁜 시기에 이따위 보잘것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하정은은 업무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었으니 부디 해고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당신에게 꼭 도움이 될 거예요.”연재준은 유월영이 주동적으로 말문을 떼자 살짝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병든 내 몸 상태를 걱정해? 아니면 회사를 걱정해? 아니면 내가 너무 빡세게 일할 걸 걱정해?”유월영은 커피를 들며 유유하게 말했다. “난 다만 나 때문에 하정은에게 피해가 가는 게 괴로울 뿐이에요.”연재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딴 사람을 신경 쓰는 건 이렇게 잘 하면서 왜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거야? 분명히 합의하고
한 손으로 사인하고 한 손으로 수표를 건넨 다음 공증까지 받았으니 이 일은 여기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서씨 가족이 떠난 후, 윤영훈은 순식간에 유월영 쪽 사람으로 전환하여 실실 웃으며 제안했다. “우리 근사한 곳을 찾아 제대로 축하 파티를 열죠. 오늘 밤은 내가 살게요. 그냥 플로팅 라이프로 가죠.”유월영과 이승연은 모두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렇게 세 명이 함께 놀러 간다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아, 사람이 너무 적어서 그래요?” 윤영훈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별거 아니에요. 내가 몇 명 더 부를게요!”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의 이런 태도를 보면 윤영훈이란 사람은 유월영이 서씨 가족에 파견한 잠입 요원인 줄 알겠다.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의 합의금을 지급하고도 이렇게 즐거워하며 축하 파티를 준비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하지만 윤영훈이 이 정도로 준비를 철저하게 하자 유월영과 이승연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윤영훈과 그의 친구들 식사 자리에 잠깐 참석하는 걸로만 생각하기로 했다.윤영훈이 부른 사람은 30대쯤 되는 성숙하고 세련된 남자였다. 유월영은 그 남자를 몰랐지만 이승연은 그를 보자마자 멈칫하며 온몸이 굳어졌다.윤영훈이 자연스럽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이분은 오성민이라고 해요. 내 친구예요. 처음에는 이 친구에게 서정희 사건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 함께 식사나 하며 그동안 쌓였던 좋지 않았던 걸 풀어보죠.”오성민은 잘생긴 외모를 갖췄지만 관상을 보면 속이 아주 깊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오성민은 유월영, 이승연과 차례로 악수했다.오성민이 이승연의 손을 잡을 때 조용히 몇 초 동안 더 잡고 놓지 않았고 이승연이 살짝 움직이자 그제야 웃으며 손을 놨다.그들은 둥근 테이블을 중심으로 주위에 앉았고 윤영훈은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말했다. “오 변호사는 서남 지역에서 유명한 형사 변호사예요. 이 변호사는 내 친구를 알고 있었나요?”이승연은 담담한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유월영의 집에서 가정부가 전화를 걸어와 유월영은 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가정부는 유현석이 최근 술에 빠져 매일 술에 절어있어 이영화가 도무지 그를 설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유현석의 몸 상태가 악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유월영에게 묻는 것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떠나는 그날부터 유현석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데 술에 빠지는 정도까지 발전할 줄이야.유월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영화가 유현석을 챙기느라 그녀의 몸이 다시 불편해질까 봐 불안했다.“내일 아버지가 깨어나면 나한테 전화해요. 내가 아버지와 얘기해 볼게요.”가정부는 알았다고 대답했다.유월영이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가 보니 전화하는 짧은 순간에 방에 이승연과 하정은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세 남자는 모두 사라졌다.“남자들은 다 어디에 갔어?”이승연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한 사람은 담배 피우러, 한 사람은 전화 받으러, 한 사람은 화장실에 갔어.”유월영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두 빈자리를 넘어 하정은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넌 방금 신주시에서 돌아왔어?”하정은은 능수능란하게 대답했다. “그래, 난 먼저 유진 씨를 스워시로 가는 비행기에 모셔다드리고 여기 서울로 왔어.”백유진을 스워시로 보내다니? 유월영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하정은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유진 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유월영은 국을 한 그릇 떠서 천천히 마시며 생각에 빠졌다. 연재준이 서슴없이 백유진을 국외로 보내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이것도 연재준이 나에게 부리는 응석인가? 백유진을 보내고 나면 연재준이 더 이상 백유진한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거잖아? 그렇게 먼 나라로 주저 없이 보내는 걸 보면 그냥 날 화나게 하기 위해 백유진을 찾았던 것인가? 연재준이 정말 백유진을 좋아했던 적이 없는 건가?’유월영의 기분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 단지 그렇게 오랫동안 신경이
유월영은 앞 구석에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곧장 걸어갔다.그리고 연재준과 오성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의 분위기를 보면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유월영의 발소리가 들리자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 쪽으로 돌아봤다.오성민은 유월영이 연재준를 찾아온 것을 알고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연재준은 담배를 끄고 유월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왜 나왔어?”유월영은 방금 그들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재준 씨는 성민 씨를 알아요?”연재준이 그 말에 무심하게 말했다. “상가 유람선에서 너와 함께 포커를 치던 그 오 대표를 기억해?”“기억해요.”그날 포커 테이블에는 서울 신씨 가문의 투자 업계 대부 신현우, 신주시 연씨 가문의 재벌 연재준, 송초시 윤씨 가문의 부동산 업계 거물 윤영훈이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용청시 오씨 가문의 IT 업계 거물... 오씨?유월영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설마 그 오씨가 오성민이었단 말인가?연재준은 유월영의 눈 앞을 가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넘기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럽고 촉촉한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눈빛도 그윽해졌다. “오성민은 오 대표의 사촌 동생이야.”그제야 유월영의 머릿속에서 얽혔던 실마리들이 순식간에 전부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그럼 당신이 오성민에게 서정희가 기껏해야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사실을 서씨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한 건가요?”“내가 분명히 말했지? 네가 합의하든 말든 내가 널 이 상황에서 무사하게 빼내는 방법이 있다고.”“...” 연재준이 유월영 몰래 많은 일을 해결한 것 같았고 심지어 주동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유월영의 어머니를 위해 외국 의사를 모셔 온 것이나 서씨 가족에 “간첩”을 심어둔 것도 전부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었다.연재준은 몸을 약간 숙여서 그녀의 시선에 맞췄다.매혹적인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길게 내빼며 첼로가 귓가에서 천천히 울려 심금을
창밖의 밤은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은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작은 눈꽃이 겨울바람에 실려 창틈으로 들어왔지만 고작 겨울바람의 추위로는 실내의 습기와 열기를 쫓아내지 못했다.유월영이 이불 밖으로 하얗고 야들야들한 팔을 내밀어 침대 옆 등을 켜려고 했다.그러자 남자가 다시 그녀의 벌거벗은 등을 눌렀고 그녀의 목덜미에 미친 듯이 키스했다. 유월영은 기습 행동에 몸을 떨었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격렬하게 그녀의 척추를 따라 허리까지 쭉 키스했다.유월영은 베개에 엎드려 그 키스가 간지러워 몸을 꼬았고 몸을 돌려 남자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베개 양쪽에 놓으며 머리를 숙여 그녀와 키스했다.유월영은 자연스럽게 연재준이 뭔가... 너무 치근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어젯밤에는 병든 주인 없는 개처럼 유월영을 찾더니 지금은 자꾸 사람에게 치근덕거리는 골든리트리버처럼 보였다.유월영은 연재준과 한 번 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재준이 이렇게 부드럽게 애무하자 자제할 수 없이 폭삭 빠져들었다.어둠 속에서 연재준은 몸을 놀리며 평소의 침착함과 이성적인 모습을 잃은 유월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연희진이 연재준에게 전화해 유월영의 마음을 얻었냐고 묻던 그날을 떠올렸다.연재준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연희진은 아직 연재준이 유월영을 손에 넣지 못한 사실을 눈치채고 연재준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오빠, 그런 말을 못 들어봤나요? 고백은 어린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일이고 성인은 직접 상대방을 유혹해야 한다는 말을요. 그리고 유혹의 첫걸음은 바로 인간성을 버리고 고양이가 되고 호랑이가 되고 또 비에 푹 젖은 강아지가 되라는 것이죠.”“무슨 뜻이지?”“다시 말해 자기 약점을 드러내고 세상 불쌍한 척을 하라는 것이죠. 그러다가 적절한 시기에 본 모습을 드러내 상대방을 순식간에 잡아먹는 거죠.”연희진의 그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연재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유월영을 침대에서 일으켜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그녀의 몸을 자기 어깨에 기대
오성민은 그녀의 냉랭한 눈빛을 보고도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화났어? 당신은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7년이야. 난 누구보다 당신을 잘 알고 있어. 만약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건드린다고 해서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거야.”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승연아, 나 그 여자와 헤어졌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이승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와 혁재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우리의 혼인 관계를 아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오 변호사님은 모르셨나 봐요?”오성민은 그녀가 7년 동안의 감정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은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승연아,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는데.”이승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혁재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에게 발길질 하기 시작했다.“감히 내 마누라한테 치근덕거리다니!”오성민은 날아오는 발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의 정장에 허연 발자국이 찍혔다.고개를 든 오성민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이혁재, 네가 승연이와 결혼하는 이유가 뭔지 내가 모를 줄 알고. 마누라? 지금 나랑 해보겠다는 거야? 승연이가 나를 남편이라고 부를 때 넌 이제 막 대학교에 다니는 동생이었다고.”오성민은 재밌는 일이 생각난 듯 히죽거렸다.“재밌네. 너 언제부터 승연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야? 어쩐지 내가 승연이랑 같이 대학교에 물건 주러 갔을 때, 네가 나한테 그렇게 적대적이더라니, 어린놈이 징그럽게 걔가 너의 이모뻘이라고.”이혁재는 평소에 헤헤거리며 진지한 모습이 적었지만, 이렇게 살기를 띠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쌍'이라고 욕을 한 번 하고는 오성민에게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오성민도 이번에는 더 이상 봐주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복도에서 주먹다짐하며 몸싸움을 벌였다.이승연이 외쳤다.“이혁재.”이혁재가 반응이 없자 그녀도 두 남자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자칫하다 자신도 봉변당할 수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자 이승연은 더 이상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