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장씨 가문의 발표회 현장에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몰려와 북적거리고 발 디딜 틈도 없었다.금도의 모든 부자가 한자리에 모인 듯했다.지금 이 상황은 장정범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머지않아 장씨 가문의 건실 그룹은 서남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고 유씨 가문은 서서히 몰락해 그들의 발밑으로 떨어질 터였다.장정범의 야망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장정범은 단순히 제약 산업에만 머물 생각이 아니라 서남 전역을 노리고 있었고 서남 지역의 절대적 패권을 원하고 있었다.“장정범 씨, 신제품 출시 축하합니다.”박진용이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박 도련님, 오셨어요? 어서 앉으세요.”장정범은 극진한 태도로 맞이했다.박씨 가문은 서남 지역 출신이 아니지만 현재 그들은 협력 관계였기에 장정범도 박진용에게 충분한 존중을 보였다.“장정범 씨 덕분에 이번에 제대로 한몫 벌게 생겼습니다.”왔다 갔다 하는 손님들을 보며 박진용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고작 발표회 하나 열었을 뿐인데 이 정도라면 약이 정식 출시되는 날에는 서남 전역을 들썩이게 할 것이다.위층에 있는 유씨 가문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아까 유정이 박진용에게 전 재산을 날릴 수 있다고 하던 헛소리를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었다.“앞으로 우리 장씨 가문 사업에도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박 도련님.”장정범이 씩 웃었다.박씨 가문은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재력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면 장정범의 건실 그룹에는 엄청난 이득이 될 터였다.사업은 단순히 부동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분야를 섭렵해야 했다.그 분야에서 정상에 서려면 간단하게 돈을 때려 박으면 된다.이번에 장정범은 제약업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건실 그룹 자금을 전부 회연단에 투자했다.투자한 만큼 수익도 따라오기 때문이었다.“장정범 씨, 오늘 유씨 가문도 발표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박진용이 뜬금없이
“그래, 바로 우리 위층에서 연다고 해.”“아까 박 도련님이 가봤다는데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 네가 가서 유정 씨한테 간단히 위로라도 해주고 와.”장정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자 장우림은 즉시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다녀오죠.”장우림은 호탕하게 웃으며 부하 몇 명을 이끌고 위층으로 향했다.같은 시각, 유씨 가문의 발표회장은 여전히 한산했고 손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유정이 의외로 침착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이자 진서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때였다.“유정! 너희 유씨 가문도 오늘 발표회를 열 줄은 몰랐네.”장우림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웃으며 들어왔다.장우림을 본 유정의 표정이 불쾌해졌다.“아래층에 있으면 될 텐데 여기엔 왜 왔어?”“당연히 너희 인원수라도 좀 채워주려고 온 거지. 여기 현장이 이렇게 한산한데 내가 손님 몇 명 데려와서 분위기라도 살려줄까?”장우림이 비아냥댔다.“필요 없어.”유정이 냉랭하게 대답했다.“유정,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희 유씨 가문은 회연단도 없이 도대체 뭘 발표하겠다는 거지?”장우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장씨 가문이 이미 중요한 자료를 전부 빼돌렸는데 무슨 발표회를 연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렇게 망신당하고 싶은 건가?“네가 알 필요 없어.”유정이 담담하게 말자 장우림은 콧방귀를 꼈다.“그래, 나야 알 필요 없겠지. 대신 오늘이 지나면 유씨 가문은 금도의 웃음거리가 되겠군.”“누가 웃음거리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유정이 물러서지 않고 야무지게 맞받아쳤다.“그럼 두고 보자고.”말을 마친 장우림은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다.장우림이 떠나자 유정은 서두르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몇 곳에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세련된 차림의 여성들이 몇 명 들어왔다.“혹시 성 신의님이 여기 계시는가요?”“성 신의님께서 피부 미용에 좋은 약을 개발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한 여성이 물었다.“그럼요, 당연히
“너희들 들었어? 유씨 가문도 발표회를 열었대. 바로 위층에서 말이야. 듣자 하니 성 신의님 도움을 받아서 국색천향이라는 보약을 출시했대. 효과가 장씨 가문 회연단보다 더 무시무시하대.”“진짜야? 회연단도 이미 대박인데 그보다 더 강력한 보약이 있다고?”“당연히 진짜지. 내 친구가 바로 위층에 있어. 나도 곧 올라갈 생각이야.”“좋아, 나도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진짜인지 아닌지.”소식은 빠르게 퍼졌다.발표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몇몇 사람들은 아예 인사도 없이 바로 떠나버렸다.지금은 좋은 시간대도 아니었기에 회연단의 발표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이 상태로 가다가는 발표회가 시작될 때쯤엔 아예 현장이 텅 비게 될지도 모른다.“도대체 무슨 일인지 빨리 알아봐! 왜 사람들이 다 떠나는 거야?”장정범은 즉시 집사를 호출해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그때 박진용이 다가왔다.“장정범 씨, 이게 무슨 일이죠? 왜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드는 거죠?” 박진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겠어요, 아마 다들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나 마시려고 그러나 봐요. 내가 이미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고 있어요.”장정범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곧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나간 사람들 전부 위층으로 갔습니다!”“뭐? 위층으로 갔다고?”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장정범과 박진용은 모두 깜짝 놀랐다.유씨 가문의 발표회는 바로 위층에서 열리고 있었다.박진용과 장우림이 아까 올라갔을 때 위층은 텅 비어 있었다.그런데 왜 지금 모든 사람이 위로 올라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또 다른 손님들이 위층으로 향했다.“올라갑시다. 우리가 가서 직접 상황을 확인해 봐야죠.”장정범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혹시 위층에 있는 보물이 장씨 가문이 발표하려는 회연단보다 더 대단한 보물인 걸까?그럴 리가 없었다.하지만 장정범 일행이 위층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조금
“설마 우리 발표회 때문에 너희 귀빈들이 전부 이쪽으로 온 건 아니겠지?”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장정범의 가슴을 찔렀다.‘이년, 말하는 거 진짜 독하네.’“유정, 너희 가문은 성 신의를 앞세워 가짜 약을 내놓고 있는데, 성 신의가 이 사실을 알면 너희 가문과 관계를 끊겠다고 하지 않겠어?”장정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성동석이라는 이름은 장정범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명성이 자자한 명의였는데 서남 최고의 유씨 가문이라 해도 그런 인물을 함부로 불러들일 수 없을 것이다.“무슨 말이야? 저기 앉아 계신 분이 바로 성 신의님이야.”유정은 자신만만하게 무대 위의 성동석을 가리켰다.성동석의 얼굴을 확인한 장정범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못 믿겠으면 가서 직접 인사라도 해봐.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유정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제아무리 성 신의라 해도 고작 사흘 만에 회연단보다 더 나은 보약을 만들 수 있을 리 없어.”장정범이 이를 악물었다.“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 자리의 손님들이 아니겠어?”유정이 여유롭게 웃었다.바로 이때, 유명 인사 한 명이 다가왔다.“유정 씨, 유씨 가문의 국색천향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몇 년 동안 없애지 못한 다크서클이 한 알 먹고 싹 사라졌어요. 피부 미용뿐만 아니라 신장 강화에도 효과가 있대요. 저는 지금 무릎도 안 아프고 허리도 안 뻐근해 계단 열 층도 단숨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래층의 회연단이랑 비교하면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죠. 어라? 장정범 씨, 여기 계셨네요?”이 사람은 장정범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달아났다.장정범의 면전에서 이 정도로 회연단을 까는 건 솔직히 좀 심했다.무엇보다 장정범은 본래 지하 세계 출신이었다.괜히 장정범을 기분 나쁘게 했다가는 이후의 삶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장정범, 사람들의 반응을 똑똑히 들었어?”유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아니면 직접 한 알 먹어볼래?”“필요 없어.”장
주최자로서 유정은 국색천향을 먹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다가갔다.“당신 말대로라면 당신 아버지가 우리 약을 먹고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요?” 유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연하지!”청년은 유정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는데 딱 봐도 감정이 격앙된 모습이었다.“너희 가문에서 불량 약품을 팔아서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거잖아!”“일단 진정하세요.”유정이 달래듯 말했다.“우리 약은 각 부서의 검사를 거쳤기 때문에 절대 문제가 있을 리 없습니다.”이 말은 현장에 모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만약 사람들이 청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면 이번 발표회는 완전한 실패로 끝날 게 뻔했고 그렇게 되면 제일 기뻐할 사람은 장씨 가문일 것이다.“헛소리 마! 어쩌면 너희도 그 부패 관리들과 한패일지도 모르지.”청년은 전혀 믿지 않는 태도로 소리쳤다.“정말 약에 문제가 없다면 우리 아버지가 왜 죽었겠어?”“정말 숨이 끊어진 게 맞는지는 좀 더 확인해 봐야겠네요.”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다.아무리 독약이라고 해도 독이 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고작 몇 분 만에 노인이 숨을 거둘 수 있을까?“우리 아버지는 이미 숨도 쉬지 않아. 이래도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 혹시라도 불에 태워서 뼛가루로 만들어야 죽었다고 인정할 거야?”청년이 분노에 차서 고래고래 소리쳤다.“여러분! 절대 이 집 약을 사지 마세요. 정말 사람 죽이는 약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매일 8층까지 가쁜 숨도 안 쉬고 오르내리셨는데, 그런 건강한 몸도 이 약에 중독돼 돌아가셨어요. 난 지금 딱 하나만 묻고 싶어. 도대체 너희들이 파는 게 보약이야? 아니면 독약이야?”손님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졌다.“이거 가짜처럼 보이지 않는데? 설마 진짜 약에 문제가 있는 거야?”“내가 듣기로는 장씨 가문에서 발표한 회연단이 본래 유씨 가문 거였대. 그런데 장씨 가문이 훔쳐 가서 유씨 가문이 급하게 새로운 약을 만들어서 내놓은 거래.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보면 되잖아.”진서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못 살려내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지. 그리고 직접 외쳐줄게. 이 약은 독약이라고 말이야.”이 소동은 결국 성동석까지 불러들이게 했다.성동석이 급히 달려와 진서준에게 물었다.“김평안 씨, 무슨 일이죠?”“별일 아니에요. 이 사람 아버지가 국색천향을 먹고 중독돼 죽었다고 주장하더라고요.”진서준이 간단하게 설명했다.“말도 안 돼!”성동석은 단번에 부정했다.“국색천향은 나도 직접 먹어봤고 연구도 했어. 이 약의 성분은 대부분 온화한 약재라서 절대 독성이 있을 리가 없어.”“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너희 약을 먹고 죽었어. 팩트 앞에서는 변명이 통하지 않아!”청년은 국색천향 때문이라는 주장에 집착했다.청년의 흥분한 모습을 본 성동석은 아무 말 없이 앉아 노인의 맥을 짚었다.약 30초 후, 성동석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맥상으로 보면... 확실히 살 가망이 없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맙소사! 성 신의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 노인은 정말 국색천향을 먹고 죽은 게 틀림없어.”“망했다... 나도 방금 한 알 먹었는데 이제 나도 죽는 거 아냐?”“유씨 가문이 돈에 눈이 멀어서 반쯤 완성된 약을 내놓은 거야.”분노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퍼져갔다.현장에 있던 박진용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내 회연단... 이거 팔아야 해 말아야 해?’한편,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노인을 업고 떠나려 했다.그때였다.“거기 서, 아직 네 아버지를 살려내지 못했어.”진서준이 길을 막아섰다.“꺼져! 우리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 네가 뭐로 살린다는 거야?”청년은 다시 버럭 화를 냈다.‘이놈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데 아직도 신선인 척하면서 헛소리하네?’“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 곧 알게 될 거야.”진서준은 대꾸도 없이 청년의 어깨에서 노인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쾅!둔탁한 소리와 함께 뼈가 바닥에
“헐? 방금 저 노인 손이 움직인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나도 봤어. 그냥 눈이 피곤해 환각을 본 줄 알았는데?”“설마 저 녀석이 진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거야?”“말도 안 돼, 성 신의가 직접 확인하고 가망 없다고 했잖아.”순식간에 온갖 말들이 쏟아졌다.하지만 진서준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느긋하게 노인에게 속삭였다.“이봐, 영감, 숨 참는 기술은 꽤 쓸 만하네? 하지만 아쉽게도 넌 횡련 무인이 아니야. 조금만 더 참아봐. 이제부터는 더 아플 거거든.”진서준의 말에 노인의 눈꺼풀이 다시 한번 미세하게 떨렸다.진서준은 손바닥을 더욱 세게 휘둘러 따귀를 날리기 시작했다.찰싹! 찰싹!매서운 따귀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고 그 섬뜩한 소리에 구경꾼들의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였다.이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그냥 죽이는 거 아닌가?청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계속 이러다간 죽은 척 연기하는 아버지가 진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따귀를 날리던 진서준이 갑자기 손을 멈췄다.“생각보다 더 잘 버티는데?”“비켜! 이 미친놈아! 우리 아버지 시체를 이렇게 두들겨 놓고도 부족해?”청년이 분노하며 달려들었지만 진서준은 주먹 한 방으로 청년을 다시 바닥에 때려눕혔다.“뭐가 그렇게 급해? 따귀로 안 깨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진서준이 천천히 돌아서서 유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말했다.“톱 하나 가져와 봐. 사지를 잘라낸 다음 다시 조립하면 무조건 살릴 수 있어.”이 말이 떨어지자 구경꾼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사람을 잘라낸 후에 다시 조립한다고?대체 어느 미친놈이 그런 미친 짓을 한단 말인가?노인은 이미 바닥에서 식은땀을 쏟고 있었다.방금 따귀를 날리던 이놈 성격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오빠, 그건 제가 난생처음 듣는 치료법인데요?”유정이 의아해하며 묻자 진서준이 웃으며 되물었다.“정말 이 영감이 죽었다고 여기는 거야?”“네? 설마..
진지한 얼굴로 대꾸하는 진서준을 보자 노인은 그 순간 완전히 얼어붙었다.사실 노인은 무도 바닥에서 전해 내려오는 작은 속임수를 썼는데 그 속임수를 쓰면 심장 박동과 맥박은 물론 호흡도 완전히 멈출 수 있었다.30분 동안 숨을 죽이면 누구나 다 노인이 죽었다고 믿게 된다.이 속임수를 이용해서 노인과 아들은 꽤 많은 돈을 뜯어냈는데 이번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인 진서준을 잘못 건드린 것이었다.“지금부터 널 절단해서 다시 조립해야겠어.”진서준이 톱을 들고 휙휙 허공을 가르며 말하자 노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나 진짜 아무 병도 없어, 날 놔줘!”“아니야, 넌 병이 있다니까?”“진짜 없어! 방금 그건 전부 연기였어. 너희를 모함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이 말이 떨어지자 현장은 곧바로 발칵 뒤집혔다.“뭐? 국색천향을 모함하려고 그런 거라고? 저 영감 왜 그런 짓을 했지?”“이 늙다리가 내 선한 마음을 이용했다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이런 놈은 진짜 토막을 내야 돼. 그냥 놔주면 또 저런 꾐수로 돈을 뜯어낼 거야.”조금 전까지 동정하던 사람들도 다 등을 돌려 노인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노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노인은 단지 돈 받고 연기한 것뿐인데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 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자기 속임수를 간파당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얻어맞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누가 시켜서 우리를 모함하게 한 거야?”진서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추궁하자 노인은 잔뜩 쫄아서 말했다.“나도 몰라, 우린 그냥 돈 받고 한 거야.”진서준이 머리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자 청년 역시 기겁하며 바로 소리쳤다.“우린 진짜 몰라. 누가 시켰는지 모른다니까.”“도대체 모르는 거야? 아니면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는 거야?”진서준이 싸늘하게 웃으며 추측했다.“장씨 가문 가주 장정범이 너희를 보낸 게 맞아?”그 순간, 현장 사람들도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오늘은 마침 장씨 가문의 회연단 발표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