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작전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일부 인원을 대한민국 서북, 서남, 동북 세 곳에 파견하겠어.”역천신이 천천히 계획을 밝혔다.“자원하는 사람이 있어?”역천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두 중년 남성이 앞으로 나섰다.“천신님, 저희 둘이 서북으로 가겠습니다.”이어서 세 명의 인물이 서남으로 향하겠다고 나섰다.그러나 동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천신은 손가락으로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너희 둘이 가. 남은 사람들은 모레 나와 함께 크루즈를 타고 보해로 이동할 거야. 대한민국 국안부가 우리 존재로 벌벌 떨게 만들어야 해, 알겠어?”...진서준과 국안부 인원들은 멸용 조직이 이미 세 갈래로 병력을 나누어 파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래서 그날 밤 진서준과 신용수 세 사람은 또다시 허탕을 치고 말았다.올림푸스 신전의 인물들이 밤새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오늘 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다려 보자. 만약 이번에도 오지 않는다면 난 보해로 떠나야겠어.”신용수는 보해 쪽 상황이 내심 걱정되었다.보해는 수도와 너무 가까워서 무슨 일이 생기면 큰 문제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신전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저 역시 여길 떠나겠습니다.”진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보탰다.진서준이 떠날 예정이라 하자 신용수가 물었다.“어디로 가려는 건가?”“보해로 갈 겁니다.”그 말에 신용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곳은 별로 추천하지 않아...”멸용 조직이 공격을 감행할 때 보해는 최대의 전장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 국안부의 호국장군이 전부 그곳에 집결할 것이고 팔급 이하의 대종사가 그곳에 가는 건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굳이 가겠다고 한다면 아무도 널 막을 수는 없을 거야.”신용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바이올렛은 중간에 차에서 내렸다.“옷을 좀 사러 갈게.”바이올렛은 차에서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어느새 바이올렛이 준비한 옷을 이미 다 입었기 때문이다.결
도시 외곽의 버려진 공장에 도착하자 차 문이 열리며 바이올렛이 밖으로 내동댕이쳤다.타닥, 타닥...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바이올렛의 귀에 들려왔다.바이올렛은 목에 막혀있던 핏덩이를 뱉어낸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봤다.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순간, 바이올렛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너였구나.”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연비였다.그리고 유연비 옆에는 바이올렛을 납치한 유씨 가문의 4대 금강이라고 불리는 대머리 괴한 네 명이 함께 서 있었다.최근 며칠간 유경풍은 유연비에게 틈만 나면 진서준을 처리하라고 다그쳐왔다.아무래도 유경풍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단, 신용수가 보는 앞에서만 아니면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마침 바이올렛이 혼자 나와 있는 걸 포착한 유연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걱정 마, 우린 널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단, 네가 좀 협조해 줘야 할 것 같아.”유연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유연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이런 미소를 지으면 분명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내가 뭘 하면 되는데?”유연비의 의도를 대충 짐작한 바이올렛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김평안을 불러, 네 목숨을 대가로 그놈 목숨을 받는 거야.”유연비는 바이올렛의 턱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웃었다.이처럼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보니 유연비가 얼마나 음침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바이올렛은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김평안에게 전화는 해볼게. 하지만 김평안이 올지는 장담 못 해. 이유도 단순해, 난 김평안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거든. 오히려 우리 사이엔 네가 생각지 못한 큰 갈등이 있어.”바이올렛은 진서준이 자기를 구하러 올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요즘 진서준은 해외 이족들의 자세한 침략 계획에 대해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바이올렛이 죽건 말건, 진서준에게는
바이올렛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당당한 용란 백작이 이런 곳에서 죽게 될 줄은 바이올렛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곳에서 죽으면 자기 시신을 거둬줄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반 시간이 흘렀다.길 위엔 몇 대의 차만 지나갔을 뿐, 어느 차도 멈추지 않았다.유연비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문을 열었다.“이제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어. 마지막 10분이야. 남길 말이라도 있어?”바이올렛은 천천히 눈을 뜨고 유연비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게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무슨 비밀?”“사실 저 사람 이름은 김평안이 아니야.”바이올렛이 신비로운 말투로 말했다.약간 피곤해 보이던 유연비는 순간 흥미를 보이며 질문을 퍼부었다.“무슨 뜻이야? 김평안이 아니라니? 그럼 그놈이 누군데?”“그 녀석은 김평안이라는 이름도 가짜 이름이고 지금의 얼굴 역시 진짜 모습이 아니야.”죽을 각오를 다 한 바이올렛은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다.“사실 그 녀석의 진짜 이름은 진서준이야. 20대 초반의 청년이지.”진서준이라니, 유연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그놈 이름이 진서준이라고?”“그래, 혹시 그 녀석을 알아?”유연비의 반응이 이렇게 큰 것을 보자 바이올렛도 조금 놀랐다.“알지, 당연히 잘 알지!”유연비는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어딜 찾아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돌아서면 뒤에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김평안 그놈 건방진 모습이 진서준이랑 똑같다 했더니만,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네. 이제 안성에 발을 들인 이상, 그놈은 살아서 나가긴 글렀어.”바이올렛 역시 미소를 지었다.“진서준, 네 원수가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구나.”“저 여자 당장 죽여. 그리고 이 소식을 얼른 아빠한테 전해.”유연비는 가볍게 웃으며 4대 금강에 지시했다.대머리 금강이 바이올렛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쉭...그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유연비는 진서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진서준에게 있어 가족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유연비는 진서준의 여동생 진서라의 목숨을 쥐고 있었기에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엄두도 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구지범이 이미 진서준을 만났고 진서준 또한 구지범이 자기와 같은 스승을 모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유연비가 알 수 없었다.진서라를 구할 방법을 진서준은 이미 완전히 터득했다.아홉 가지 약재 중 현재 세 가지를 모았고 이제 여섯 가지만 더 모으면 진서라의 체내 독은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저놈 당장 죽여! 절대 살려두지 마!”피바다에 쓰러져 있는 유연비는 분노에 차서 외쳤다.유연비의 날카로운 두 눈은 핏물에 젖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유연비의 명령을 듣자 4대 금강이 진서준을 포위해 도망갈 길을 차단했다.육급 절정의 횡련 종사를 한꺼번에 상대하게 된 진서준은 긴장한 눈빛을 보였다.이 네 사람은 이전에 진서준이 임해에서 마주했던 해외 이족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이 금강들을 쓰러뜨리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울 것이다.“진서준, 왜 날 구하러 온 거야?”바이올렛은 진서준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바이올렛은 진서준이 자기를 구하러 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의 바이올렛은 진서준에게 큰 도움도 되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포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4대 금강을 힐끗 쳐다본 후 바이올렛에게 시선을 돌렸다.“개를 패더라도 주인을 봐야 하지 않겠어? 하물며 지금 넌 내 하인이잖아.”진서준의 말에 바이올렛은 기가 차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고작 이런 허무맹랑한 이유로 자기를 구하러 왔다니 기막힐 노릇이었다.바이올렛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진서준을 보며 말했다.“진서준, 난 네가 정말 싫지만 오늘 네가 한 일을 보고 너에 대한 인상이 조금 달라지긴 했어.”“다들 뭐 해? 멍하니 서서 헛소리나 듣지 말고 얼른 움직여!”유연비는 4대 금강이 진서준과 바이올렛의 대화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는 모습
“저 여자도 같이 죽여!”유연비는 바이올렛이 전장에 참여하자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유연비가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다른 금강이 이미 바이올렛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 금강 두 명이 바이올렛을 동시에 공격해 왔다.육급 절정 횡련 대종사 두 명의 공격에 맞서는 건 바이올렛에게 벅찬 일이었다.쿵쿵!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땅바닥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생겨났다.진서준은 유씨 가문 금강들과 계속 싸우며 지나치게 많은 영기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밤에는 북오런 사람들과도 한 판 겨루어야 했다.만약 지금 힘을 너무 많이 소비하면 오늘 밤 전투는 더욱 힘들어질 터였다.진서준은 금강의 주먹을 빌려 몸을 뒤로 밀쳐내며 순식간에 백 미터가량 떨어졌다.“가자.”바로 이어진 진서준의 말이 바이올렛의 귀에 들렸다.바이올렛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진서준과 함께 멀리 도망쳤다.“놈들을 절대 놓치지 마!”바닥에 쓰러져 있던 유연비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유연비는 체내의 피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있는 데다, 진서준과 금강 네 명이 대량으로 발산하는 위압감에 시달려야 했다.유연비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이미 정신을 잃고 기절했을 것이다.진서준과 바이올렛은 실력으로는 4대 금강을 이길 수 없지만 속도를 따지고 볼 때 금강들을 절대적으로 압도했다.4대 금강은 30초 동안 두 사람을 쫓아가다가 결국 두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더는 추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4대 금강은 돌아가서 유연비를 얼른 데리고 가 치료하기로 했다.“가자.”그러나 유연비를 데려가려던 순간, 멀리서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푸른빛을 띤 검기가 유연비를 향해 날아들었다.4대 금강은 검광을 보자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했다.푸슉!또다시 한쪽 팔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이제 유연비는 완전히 불구가 되었고 극심한 고통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4대 금강은 표정이 굳어졌고 눈에는 분노의 기운이 어렸다.진서준이 그들 눈앞에서 유연비
나라를 지키는 호국장군을 문지기로 부려 먹는 사람은 아무래도 진서준이 유일할 것이다.진서준도 겸손하게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감사합니다, 진군님.”곧이어 진서준은 본인의 방으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진서준의 손바닥 위에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단약 한 알이 자리하고 있었다.단약을 응시하는 진서준의 눈에 유유한 감정이 서렸다.이 단약은 진서준이 성약당의 영약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진서준은 보해로 떠나기 전에 전투를 통해 경지를 한 단계 올리려 했으나, 최근 잦은 싸움 덕에 그의 실력이 급속도로 상승했다.오늘 유씨 가문의 4대 금강과 맞서 싸운 일은 진서준의 실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었다.지금이 바로 경지를 돌파하기에 최적의 순간이었다.단약을 삼키자 진서준의 단전 안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진서준은 즉시 장청결을 다루어 영기를 자신의 온몸으로 끌어들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준의 이마에는 콩알만 한 땀방울이 맺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진서준은 이러한 대경지의 돌파는 신체와 정신 모두에 큰 시련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이 고통을 버텨내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피가 몸속에서 솟구치고 영기가 요동치고 있었고 푸른빛과 붉은빛이 진서준의 몸을 둘러싸며 빛나기 시작했다.방 밖에서 이 강력한 기운을 느낀 신용수는 미소를 지었다.“대한민국에 천재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구나. 아쉽게도 이토록 번창한 시대를 옛 부주님께서는 보지 못했지...”...유씨 가문.딸이 두 팔이 없는 폐인 상태로 돌아온 모습을 본 유경풍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무슨 일이야? 연비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된 거야?”유경풍은 순간 놀라움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진서준이라는 자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금강 중 한 명이 대답했다.“뭐? 진서준이라고? 내가 죽이라고 한 사람은 진서준이 아니라 김평안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진서준이 튀어나온
오랜 침묵 끝에 신용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김평안은 지금 경지를 돌파 중이니, 돌파가 끝난 후 다시 여기로 와.”과연 유경풍의 예상대로 진서준이 경지 돌파 중이었다.유경풍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병든 김에 목숨까지 빼앗겠다는 각오로 진서준을 습격하려 했으나 문제는 바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신용수였다.신용수를 무시하고 강제로 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진군님,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딸이 처참하게 당한 모습을 보셨다면 진군님도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제 자식들은 많지만 제게 효도하고 말 잘 듣는 건 연비뿐입니다. 연비의 아버지로서 딸의 원수를 갚아주지 못한다면 제가 무슨 면목으로 연비를 보겠습니까?”유경풍의 말에는 억울함과 당당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신용수는 유경풍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미소가 정작 유경풍의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떨리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유경풍은 이 사람이 호국장군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경성의 4대 가문조차 감히 이런 말투로 호국장군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하물며 서북의 왕이라는 서경풍이 이런 태도로 호국장군을 대하다니, 사실 이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나는 호국장군으로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 조금 전에 나는 김평안의 수련을 돕기 위해 문지기를 서겠다고 약속했으니 김평안이 폐관 수련을 마칠 때까지 너희는 절대 들어갈 수 없어. 기다릴 수 없다면 뒤에 있는 네 명을 명령해 날 공격하라고 해. 다만, 그럴 경우 너희 유씨 가문이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용수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서서히 뿜어져 나왔다.쿵!복도에 놓인 유리병이 그 거대한 기운의 충격을 받고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그 유리 조각은 흩어지기도 전에 곧바로 가루로 부서져 사라졌다.유경풍의 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그의 뒤에 있던 4대 금강도 위협을 느끼며 불안해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4대
서울시 금영사에서 헤어진 후, 진서준은 배수정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반달 만에 두 사람은 이렇게 공교롭게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배수정도 진서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진서준을 보자마자 배수정의 평온하던 얼굴에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나 그 놀라움도 한순간일 뿐, 이내 얼굴에서 사라졌다.배수정은 옆에 있던 붉은 가사 입은 스님에게 말을 건넨 뒤, 진서준을 향해 걸어왔다.“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배수정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예전과는 달리, 진서준을 바라보는 배수정의 눈빛은 더욱 맑아졌고 눈 속에 깊이 배어 있던 감정의 흔적은 사라지고 대신 더 차분한 기운이 묻어났다.그 모습을 본 진서준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느꼈다.“그러게요.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네요.”진서준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런데... 소림에 가 있는 거 아니었나요?”“오늘 스승님을 따라 나온 거예요.”배수정은 아까 그 스님을 가리키며 대답했다.그때 스님은 현지의 돈 많고 명망 높은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다들 스님에게 아부하는 듯한 공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진서준은 심지어 그 스님에게서 은은히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배수정 씨 스승님이 보통 분이 아니네요...”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스승님은 사원의 부사주예요. 대한민국 무도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서북으로 오신 거예요.”배수정은 차분히 설명했다.사람들은 흔히 평화롭고 번화한 시대에서 도를 볼 수 없고 난세에서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중부의 소림은 정반대였다.25년 전 대한민국 무도가 대재난을 겪었을 때, 열여덟 나한이 절반이나 쓰러졌다.지금 부주지께서 대한민국 무도를 위해 직접 나섰다는 사실만 봐도 소림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진서준은 배수정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배수정 씨는 이제 무인이 되었나요?”“아니요.”배수정은 살짝
아침, 설표 특전대 기지.단잠에 빠져 있던 소정태와 고인권 등 사령관은 갑작스러운 군부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8대 특전대 사령관들은 즉시 회의실에 집합했다.“어젯밤, 묘강에서 폭동이 발생했어. 그러나 배논국 군부가 폭동을 단숨에 진압하며 묘강은 다시 배논국의 영토로 돌아갔어.”상부의 이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여덟 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소정태 일행은 서남 국경에서 묘강의 사수들과 적지 않게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다.다들 묘강의 사람들은 전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미친놈일 뿐만 아니라 주술과 독충술까지 능숙히 다루는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들은 자기들만의 군대와 탱크와 같은 대형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배논국 군부가 강제로 공격했다간 양측 모두 피바다가 될 게 뻔했다.그런데, 단 하룻밤 만에 묘강이 평정되다니 너무나 기묘한 일이었다.“혹시... 진 교관이 한 일이 아닐까?”고인권이 불쑥 입을 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여덟 사령관은 진서준이 묘강으로 갈 가능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었다.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어마어마한 소식이 터진 것이다.“설, 설마 그랬겠어? 진 교관님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묘강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잖아?”누군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맞아. 그건 너무 황당한 얘기야. 게다가 진 교관이 대체 어떻게 묘강에 갔단 말이야? 그곳은 철통같이 방어되어 있어서 전신전 병사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야.”“난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봐.”소정태가 갑자기 말했다.“너희들 기억하지? 예전에 너희가 설표 특전대가 최고 특전대로 올라설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지? 근데 진 교관님 덕분에 우리는 그 어려운 걸 해냈어, 그것도 한 달도 안 걸려서 말이야. 지금도 난 똑같이 믿어. 진 교관님은 묘강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소정태는 진서준에 대해 백 퍼센트 신뢰하고 있었다.소정태는 그야말로 진서준의 열렬한 팬이었다.“그럼, 진 교관님께 전화라도 걸어볼까
레이더 화면에 수많은 적기가 포착됐고 곧이어 포탄이 몇 발 날아왔다.조종사들은 반응할 틈도 없이 폭격을 정면으로 맞았다.쾅!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거대한 불꽃이 튕기며 대낮처럼 환해졌다.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오스프리 전투기 두 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문기는 도망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유문기가 두려워하는 건 오스프리 전투기가 아니라 바로 그 괴물 같은 존재, 진서준이었다.묘왕은 자기 비장 카드인 오스프리 전투기가 파괴된 것을 보며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누가 한 짓이야? 어떤 미친놈이 감히 내 전투기를 부쉈어?”그 순간, 배논국 군대 로고가 새겨진 전투기 수십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이 광경에 묘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아까 상황 좀 더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할 걸...’전투기 편대가 먼저 도착하고 이어 대규모 부대가 들이닥쳤다.지도자를 잃은 묘강은 머리를 잃은 파리 떼처럼 혼란에 빠졌다.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진서준은 더 이상 이들과 놀아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진서준은 참선검을 손에 잡고 단 일격으로 묘왕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눈을 뜬 채 죽은 묘왕의 눈에는 끝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묘왕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을 수 없었다.“날 죽여.”이때의 유기철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은 마치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유기철이 본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진서준이 살려주지 않을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넌 네 친조카까지 해쳤어. 널 만 번 죽여도 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거야.”진서준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난 널 죽이지 않겠어. 대신 널 평생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살게 해주지.”그 말과 함께 진서준은 손바닥으로 유기철의 가슴을 내리쳤다.유기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유기철은 진서준이 자기를 죽이는 건 두렵지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진서준을 보자 유문기 일행은 순간 얼어붙었다.유문기와 묘왕은 내부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진서준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었다.진서준이 살아있다면 그들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유문기와 묘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묘왕과 유기철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두 사람의 몸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고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너 폭탄에 맞아 죽은 줄 알았는데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유문기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방금 폭탄이 터진 후, 묘왕 혼자만 폭발의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유문기는 진서준이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유문기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유문기의 예측은 현실을 완전히 빗나갔다.“네 생각에 그 포탄 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네 눈엔 내가 저 늙은 영감탱이만도 못해 보이나?”영감탱이는 당연히 묘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진서준, 네가 묘왕을 죽여준다면 내가 묘강의 재산 절반을 네게 주마. 어때?”진서준과 맞설 수 없음을 깨달은 유문기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바로 진서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진서준을 자기편으로 영입하면 진서준이 자기를 건드릴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묘강의 재산은 거의 배논국의 절반과 맞먹는 수준이었다.배논국은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국가였기에 그 재산은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였다.하지만 진서준에게 이 돈은 전혀 필요 없었다.진서준이 이번에 온 이유는 단 두 개, 유문기를 죽이고 묘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진서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더군다나 묘강의 돈은 대부분 불법적인 경로에서 온 더러운 돈이었다.그런 돈은 진서준이 원하지 않았다.유문기가 진서준을 설득하려는 걸 본 묘왕은 즉시 눈을 굴리며 외쳤다.“이봐 청년, 네가 저놈을 죽인다면 내가 묘왕의 자리를 네게 물려주겠어. 사실 너와 나 사이엔 그렇게 큰 원한도 없어. 유씨
묘왕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옷은 다 찢어졌으며 고약한 타는 냄새가 났다.그 냄새는 묘왕의 옷 속에 숨어 있던 독충들이 조금 전의 고온에 의해 증발한 냄새였다.지금의 묘왕은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 같았고 누구든지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유문기는 유기철에게 소리쳤다.“아버지, 저놈을 죽여요! 저놈을 죽이면 우리는 묘강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유기철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내가 묘왕을 공격하라고?”유기철의 단전도 파괴되어 공격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제 단전도 저 진서준이란 자에게 쥐어박혀서 망가졌어요. 제가 공격할 수 있다면 왜 굳이 아버지를 시키겠어요?”유문기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문기도 직접 전장에 나서서 묘왕을 죽이고 싶었다.그동안 유문기는 묘왕에게 개처럼 부려지며 살아왔다.때때로 독을 시험하는 일도 겪었는데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몇 년째 묘왕을 죽이고 싶었던 유문기는 드디어 적절한 기회를 잡았지만 아쉽게도 방금 진서준에게 단전이 파괴되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내 단전도 파괴된 거 잊었어?”유기철의 말에 유문기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이걸 드시면 일시적으로 예전의 힘을 조금 되찾을 수 있습니다.”유기철은 약을 받아 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이거 부작용 없겠지?”부작용이 없다면 유문기는 자기가 먼저 먹었을 것이다.“부작용 있습니다. 먹으면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폐인이 됩니다.”유문기는 솔직하게 부작용을 실토했다.“아버지. 지금 이게 우리 유일한 기회예요. 저놈을 죽이고 제가 묘왕이 되면 뼈가 다 부서져도 제가 아버지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저놈 손에 죽을 겁니다.”유문기의 분석을 듣자 유미철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묘왕의 손에 죽거나 이 기회에 한 번 싸워보고 나중에라도 누군가 그를 돌봐 줄 수 있는 것,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기철은 더 이상 망설이
묘왕의 허락을 받은 후, 두 명의 오스프리 전투기 조종사는 망설이지 않고 진서준을 조준 후 즉시 발포 버튼을 눌렀다.요란한 소리와 함께 끔찍한 불빛 두 개가 오스프리 전투기의 하단에서 솟아올랐고 미사일은 직선으로 진서준을 향해 날아갔다.“정말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야?”진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묘왕을 쳐다보았다.“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겠지!”묘왕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처럼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모두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이 시점에서 물러나면 상대방이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미사일에 맞아 죽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주먹에 죽게 될 것이다.미사일이 당장 떨어져 폭발할 것 같은 시점에서도 두 사람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스승님!”유문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묘왕을 불렀다.“도망쳐! 멍하니 뭐 하고 있어?”유기철은 유문기를 끌고 급히 먼 곳으로 도망쳤다.쾅!미사일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 무시무시한 힘이 주위 수백 미터를 순식간에 덮쳤다.유기철과 유문기는 이미 가장자리까지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기폭에 휘말려 바닥에 사정없이 쓰러졌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흐르며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유문기가 폭발 중심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걸 확인했다.유문기 부자가 가장자리에서 이렇게 심하게 다쳤으니 폭발 중심에 있던 진서준과 묘왕은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저놈이 죽었어, 드디어 죽었어!”유문기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유문기가 입에 담은 저놈은 묘왕을 가리키는 건지, 진서준을 가리키는 건지 유기철은 분간할 수 없었다.“문기야, 얼른 떠나자.”유기철은 정신을 차리고 유문기를 잡아끌며 떠나려고 했다.“안 돼요. 난 이날을 정말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유문기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에 끔찍한 미소를 떠올렸다.“늙다리가 오늘에 와서야 끝내 죽었네! 내가 널 이렇게 오래 모신 이유가 바로 네가 죽는 오늘을 위해서였어!”유문기는 거리낌 없이 호탕하
묘왕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체내의 선천강기를 돌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동시에 묘왕은 자기 몸에 숨겨둔 독충들을 풀어 진서준의 얼굴로 날려 보냈다.이 독충들이 가진 독은 전부 강력한 부식성을 지니고 있어 육급 이하의 선천 대종사 강기조차 이 독충들의 독성을 막아낼 수 없었다.독충과 진서준 사이의 거리가 반 미터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진서준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곧이어 그 불꽃이 하늘로 솟구치며 독충 무리를 덮쳤다.치지직...순간 고기를 구울 때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독충들은 진서준이 내보낸 영화에 의해 몰살당했다.순식간에 가루로 변한 독충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빗물에 씻겨 사라졌다.이를 본 묘왕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그러나 묘왕은 지금 독충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었다.진서준의 양주먹이 이미 묘왕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고 있기 때문이었다.묘왕 역시 자기 양 주먹을 내밀어 진서준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펑!두 사람의 주먹이 맞부딪히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발밑의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사방으로 갈라져 퍼져 나갔다.무시무시한 충격파에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물조차 접근하지 못했다.이를 꽉 악물고 있는 묘왕의 얼굴이 철판처럼 굳어졌다.묘왕은 산을 뒤엎는 듯한 공포스러운 힘이 주먹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지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게다가 묘왕의 주먹 끝 강기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의 상태도 묘왕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았다.백 년 가까이 살아온 묘왕의 내공과 실력은 역시나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우르릉!하늘에서 갑작스러운 천둥소리가 울렸다.번개의 섬광이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어 잠깐의 백광을 드러냈다.곧이어 하늘에서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가 들려왔다.묘왕과 정면으로 겨루고 있던 진서준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헬리콥터 두 대가 빠르게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묘왕과 속
비는 점점 거세졌고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빗물로 흠뻑 젖은 바닥에 쓰러진 유문기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단 한 방에 자기가 완전히 폐인이 되다니, 이 녀석의 실력이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진서준은 유문기를 멍청이를 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너 같은 비겁한 수작질이나 하는 녀석이 감히 나랑 정면으로 겨룬다고? 널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아서 봐주는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너도 방금 그 탱크처럼 새까만 시체로 변했을 거야.”탱크조차 진서준의 일격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겨우 종사 경지에 불과한 유문기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지금 진서준에게 유문기를 죽이는 건 손바닥 뒤집는 일과도 같았다.하지만 그냥 죽이는 건 유문기에게 너무 가벼운 벌을 내리는 것과 같았다.진서준은 유문기의 뼈를 하나하나 산산이 부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왜 굳이 짐승이 되려고 해?”짐승이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너... 너 대체 누구야?”유문기의 눈알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같은 20대 청년인데 왜 이 녀석의 실력은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는 거지?“너희 집 큰 짐승이 안 알려줬어?”진서준이 유기철을 가리켰다.“누굴 짐승이라는 거야? 너야말로 짐승이야!”유기철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분노에 차 욕을 내뱉었다.“유기명 삼촌이 네 목숨을 살려줬을 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사람을 시켜 유정을 독살하려고 시도해? 네가 짐승이 아니면 뭔데? 짐승조차도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알아. 넌 인간의 뇌를 가진 고등 동물인 주제에 자각도 없는 거야?”진서준은 유기철을 바라보며 섬뜩한 살기를 내뿜었다.“그건 그 여자가 죽어 마땅했기 때문이야!”유기철은 일말의 자책도 없이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다들 입 다물어!”묘왕이 분노의 외침을 터뜨리더니 곧이어 원한에 가득 찬 시선으로 진서준을 노려봤다.“이봐, 오늘 네가 무슨 이
“스승님, 지금 어떡해야 하죠?”유문기가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묘왕은 곧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했다.“당황하지 마. 우리에게는 아직 숨겨둔 비장의 카드가 있어. 오늘 저 녀석이 설령 지선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여기서 끝장날 거야. 게다가 방금 그 일격으로 꽤 체력을 소모했을 게 분명해. 오늘은 묘강의 모든 주민을 동원해서라도 저놈을 기어이 지치게 만들어야 해.”묘강에는 무려 3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있었고 그중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만 10만 명이 넘었다.이런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상대하려면 지선도 버거울 게 뻔했다.죽이지는 못해도 적어도 지쳐서 움직일 수 없게 할 수는 있었다.이게 바로 묘왕이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그러나 진서준은 묘왕 일행에게 비장의 카드를 꺼낼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방금 참선검을 휘두르며 진서준은 곁눈질로 유기철을 발견했다.진서준이 발끝에 힘을 주고 허공에 뛰어오르자 그의 모습이 귀신처럼 제자리에서 사라졌다.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진서준은 이미 묘왕 일행 앞에 나타나 있었다.“너였구나!”유기철은 진서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변했다.“저 녀석을 알아?”묘왕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묘왕님, 이 사람이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진서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녀석이 예전에 우리의 계획을 망쳤습니다.”유기철이 서둘러 진서준을 소개했다.눈앞의 청년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묘왕은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네놈이 내 오랜 계획을 그렇게 망쳐놓고 감히 혼자서 우리 묘강에 쳐들어와? 우리 묘강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묘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서준을 노려보며 버럭 화를 냈다.하지만 진서준은 묘왕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신 유기철을 차갑게 바라보며 은은한 살기를 드러냈다.유기철은 그 시선에 수만 마리 개미가 자기 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았다.“유기철, 자기 친조카에게 독을 퍼뜨리는 네놈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짐승이야.”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탱크는 현대 전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 중 하나였고 말 그대로 전쟁 기계라 불릴 만했다.완전히 무장한 병사들이 대전차 무기가 없이 탱크를 마주하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무도를 익힌 무인이라 해도 이런 존재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올기는 체내의 영기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묘강에 들어왔을 때 탱크를 만났다면 한 번 싸워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모든 희망을 진서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진서준은 아래를 쓱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이제 넌 그만 물러나.”“알겠습니다!”올기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곧바로 몸을 줄여 진서준의 어깨 위로 돌아왔다.진서준은 몸을 천천히 놀려 기러기처럼 부드럽게 지면에 내려왔다.지면에 있는 사람들이 진서준의 움직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세상에, 저 용 머리 위에 사람이 서 있었어!”“어머나, 그럼 아까 그 괴수가 주인이 있었단 말이야? 그럼 그 주인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일까?”“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쩌겠어? 우리에겐 탱크가 있잖아. 게다가 전투기들도 곧 도착할 거라고.”놀라 두려워하는 사람도, 오만하게 웃는 사람도 있었다.한편, 묘왕과 유문기 두 사람은 여전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보아하니 저 녀석이 바로 그 짐승의 주인인가 보구나.”묘왕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저놈을 당장 죽여! 묘강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줘!”진서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손바닥을 살짝 떨었다.그러자 참선검이 허공에 떠올라 진서준의 손으로 들어왔다.낯선 대한민국 청년을 보자 탱크 안에 있던 병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그들을 전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자가 겨우 스무 살 남짓의 청년이라고?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노인이라면 차라리 납득이라도 했을 것이다.“포격! 포격해!”지휘관의 목소리가 작전 통신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펑! 펑! 펑!포탄 세 발이 진서준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동시에 발사되었다.포탄이 터지며 대지가 흔들리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