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싫어?”“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유승아는 웃으며 말이 없었다.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자 유승아는 딸기를 도우미에게 건네고 남서연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남서연은 바르고 단정하게 앉았지만 유승아는 집주인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여유롭게 말했다.“우리 아빠와 너희 작은 아빠는 아주 좋은 친구여서 난 어릴 때부터 이 집에 자주 놀러 왔었어.”“작은 아빠와 작은 엄마는 일 년 내내 거의 집에 없는데 어떻게 놀러 왔어요?”남서연이 의혹스러워 묻자 유승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건이가 데리고 왔지. 부모님의 통제를 못 이겨 답답하고 힘들 때 며칠씩 여기 숨어지냈으니까.”그러더니 그녀는 위층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저 방이 우리 둘만의 아지트였어.”남서연이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보았다.방을 아지트로 표현하다니. 성인이라면 곧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쓰라리고 괴로워하면서도 덤덤한 척 말했다.“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았네요.”유승아가 입구를 돌아보니 백건이 들어온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너와 진우석도 그런 사이 아니야? 진우석의 아빠가 네 아빠 전우이자 동료잖아. 너희 둘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사이가 좋잖아?”남서연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승아가 또 입을 열었다.“진우석도 너 좋아해.”남서연은 멍해졌다.‘이건 무슨 말이지?’남서연은 유승아 말의 논리와 뜻을 생각하고 있었다.‘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지? 왜 진우석도 라고 했을까?’그녀는 백건이 그녀의 뒤에서 어둡고 냉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그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더니 위층으로 올라가서 샤워만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다.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발소리를 들은 남서연은 그제야 그가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도우미가 깨끗이 씻은 딸기를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놓았다.유승아는 큰 딸기를 들어 남서연의 손에 쥐여주었다.“서연아. 먹어
그녀와 남자를 빼앗기에 남서연은 너무 여렸다.백건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기척이 커서 정안과 남하준이 방에서 나왔는데 마침 유승아를 보았다.유승아는 두 사람을 보자 점잖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아저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승아?”정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아빠가 딸기를 따서 갖다 드리라고 해서요.”정안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고마워.”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백건이 시무룩해서 걸어와 소파에 앉더니 쓸쓸히 눈을 감고 소파 등에 기댔다.그는 피곤해 보였다.이런 피곤함은 분명 몸의 피곤이 아니었다.“서연이는?”정안이 또 물었다.“서연이는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정안은 상황을 눈치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조카가 정상적으로 집에 돌아갔다면 분명 그들에게 인사하고 갔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절대 아무 말 없이 홀연히 가지 않았을 것이다.정안의 말투가 약간 차가워졌다.“편히 놀아.”말을 마친 그녀는 남하준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유승아는 승리의 감격을 느끼며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다.그녀는 백건을 위로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그녀가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백건은 옆에 있던 외투를 휙 걷어 올리고 성큼성큼 금원을 떠났다.“건아.”유승아가 긴장한 얼굴로 쫓아갔지만 백건은 차를 몰고 훌쩍 떠났다.유승아는 따라잡지도 못하고 몇 걸음 뛰더니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다음 날들은 평범했고 남서연은 여전히 행복하게 지냈다.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이 많았으니 남서연은 우울한 여자가 아니었다.그녀는 최대한 자신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가끔 백건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꿈도 꾸지만 그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거나 짝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여다혜는 회사에서 늘 그녀에게 물었다.“우리 오빠 어때? 두 사람 가능성 없어?”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집안의 몇몇 오빠들이 그녀가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할
차량은 남씨 본가로 들어섰다.남우영은 가서 차를 세우고 남서연이 먼저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현관을 지나 털 슬리퍼를 갈아 신었고 도우미가 다가와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아가씨.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아. 감사합니다.”남서연은 도우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손님이 누구인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들어갔다.그녀는 먼저 남창민과 서윤아, 그리고 그녀의 엄마 아빠와 두 큰아버지를 먼저 보았다.“저 돌아왔어요.”거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곧 손님도 얼굴을 돌렸다.남서연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얼굴의 웃음이 순간 굳어진 채 백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손님이 백건일 줄은 몰랐다.남씨 가문은 대가족으로, 남서연의 부모님은 단풍나무 숲에 살고, 다섯째 내외는 금원에 살고, 셋째 내외도 그들이 거처가 있었다. 몇몇 사촌 오빠들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모두 혼자 밖에서 살았다.오직 남서연만이 시끌벅적한 집안의 분위기를 좋아해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서연이 왔어?”“서연이 얼른 와서 앉아.”“서연아 누가 왔는지 봐봐. 와서 인사해.”남서연은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괜히 긴장한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서 남자의 눈을 마주쳤다.백건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남서연은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고민했다. 괜히 긴장되고 마음이 편치 않았고 무엇보다 어색했다.백건이라고 하면 가족들이 기분 나쁠 것 같고 삼촌이라고 부르면 백건이 싫어했다.남서연은 생각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지우가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왜 삼촌이라고 안 불러?”남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지우 옆에 앉으며 억울하게 말했다. “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거 싫어해요.”그러자 모두가 어리둥절해졌다.백건이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맞아요. 제 뜻이에요. 서연이 탓 아니에요.”지우와 남태준이 서로 마주 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남창민이 물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그냥 백건
남서연은 질문을 듣자 긴장한 손에 땀이 났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백건을 감히 보지도 못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백건은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고 몇 초간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승아는 제 여자친구가 아니에요.”“뭐?”다들 어리둥절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남서연도 경악하여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백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반응이 너무 커서 백건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남서연의 반응이 너무 귀여웠지만 꾹 참았다.그때 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백건은 남태준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전에 엄마가 저더러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강요하셨거든요. 그래서 급한 마음에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 연인인 척 연기했어요. 그렇게 연기하다 보니 다들 우리가 연인인 줄 알더라고요.”“근데 지금은 왜 이 사실을 밝히는 거야?”“엄마가 이미 아셨거든요.”“어쩐지.”남서연은 어리둥절해져서 입을 살짝 벌리고 의아하면서도 놀라웠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늘 가슴속에 품고 있던 죄책감을 덜어내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고 보니, 그와 유승아는 연인이 아니었다.그럼 그녀가 백건과 잤던 일은 도덕적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다.그럼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도 유부남이 아니라는 뜻이다.“삼촌...”남우영이 들어오자 백건이 고개를 들어 보았다.그는 환하게 웃으며 백건의 곁에 앉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외할머니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라고요. 난 심지어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예요. 불쌍한 우리 삼촌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 손아귀에서 자랐으니.”허윤미가 불쾌하게 노려보며 타일렀다.“우영아, 그게 무슨 말 버릇이니?”남우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개탄했다.“전부 사실이에요.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는 어렸을 때 동년이 없었대요. 줄곧 공부만 했대요. 다행히 엄마는 지능이 높아서 너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과학자가 되었지만 우리 삼촌은 좀 비참하죠. 삼촌...”남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서연은 황급히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살짝 꼬며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백건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쉬운 듯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도우미가 저녁 식사가 이미 준비되었다고 말하자 모두 저녁 식사하러 갔다.남서연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밥을 먹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백건은 정말 그녀의 가족이 그의 결혼 예물을 예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특별히 설명하러 온 것이 맞을까 생각했다.‘그 말들이 전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승아 언니는 왜 나 오해하게 했지? 아니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인 걸까?’남서연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고 난무하는 추측을 떨쳐버리고 조용히 잠을 잤다.이튿날 아침.단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기분이 꽤 좋았다.갑자기 백건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남서연 너를 원해.”갑자기 이 말이 생각난 그녀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멍하니 있었다.그때 백건이 그녀를 원한다고 했던 말은 그녀를 내연녀로 삼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남서연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깨끗이 씻고 예쁜 치마로 갈아입은 후 가방을 메고 출근했다.오늘도 남우영이 그녀의 출근길을 책임졌다.마침 가는 길이라는 이유였다.남우영도 ND에 다니고 있고 고위직에 있지만 출근 카드를 찍어야 했다.차 안에서 남우영이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우리 엄마가 너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하셨어.”“왜 갑자기 날 지켜보라는 거예요?”“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널 잘 보라고 했어.”남서연은 싱긋 웃으며 말이 없었다.“그리고 승아 누나를 조심하라고 했어.”남서연이 경악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작은 엄마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응.”남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서연이 웃으며 물었다.“그러니까 승아 언니가 대체 뭘 했기에 오빠더러 조심하라고 한 거예요?”“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계속 승아 누나를 별로 안 좋아했어. 가식적이잖아. 딱 봐도 여우야.”남우영이 느릿느릿 말하자 남서연은 피
엘리베이터 문은 디자인팀 사무실 층에서 멈추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남우영이 말했다.“서연아 도착했어.”남서연은 바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마주 보며 남우영을 향해 미소 짓고 손짓했지만 부드러운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백건에게 떨어졌다백건은 그윽한 눈빛으로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눈이 서로 마주치자 서로 회피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가 차단되었다.남서연은 가볍게 심장을 가리고 왠지 모를 긴장과 설렘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이제 백건을 당당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남몰래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남의 남자친구를 훔치는 죄책감도 없게 되었다.다만 아직 백건이 솔로인지 100% 확실하지 않았다. 유승아와 사귀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일단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남서연은 즐겁게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싱글벙글 웃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디자인 팀 사무실로 들어섰다.디자인 팀의 업무는 남서연에게 매우 충실하고 성취감이 있었다.그녀는 패션디자인을 매우 좋아해서 한번 일에 몰두하면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겨울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선별하는 중인데 남서연이 제출한 몇몇 제품들이 탈락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여다혜는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싸안고 책상에 머리를 쿡쿡 박았다.초조해하는 여다혜를 본 남서연은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여다혜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슬퍼하며 말했다.“서연아, 내 디자인 모두 떨어졌어.”남서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내 것도 마찬가지야.”“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번 구조조정에서 감원대상이 될 거야.”남서연은 경악했다.“또 감원해?”여다혜는 고개를 들고 슬픈 얼굴,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너 그거 알아? 새로 부임한 대표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원래 대표보다 훨씬
“이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인사팀장을 찾든지 아니면 바로 삼촌을 찾아가.”남서연은 한바탕 생각에 잠겼다.백건을 찾아가라?이것은 마치 그에게 접근하는 핑계 같았다. 다만 이 핑계가 좀 구차하고 미미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일이 바로 해결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했다.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방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남우영이 열심히 차를 몰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넣고 한 번 눌렀다.“여보세요. 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그를 올려다보며 괜히 마음이 긴장됐다.휴대전화 저쪽에서 백건이 말했다.“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한 번 다녀가.”“하 비서 시켜서 보내세요. 나 지금 서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있어서 못 가요.”“아주 중요한 거야. 다른 사람 손에 넣을 수 없어.”‘아주 중요하다고? 하 비서도 못 믿을 만큼?’남우영은 너무 궁금했다.그때 남서연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집에 늦게 가도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더니 바로 백건에게 말했다.“좋아요. 지금 당장 갈게요.”남우영은 방향을 틀었다.30분 후, 차량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남서연은 낯설고 궁금해서 물었다.“오빠 여긴 어디예요?”“삼촌이 사는 곳.”남서연은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백씨 가문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남우영도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걸으며 말했다.“삼촌 이제 나와서 혼자 살아.”남서연이 그의 귀를 따라가며 경악해서 물었다.“왜요?”“외할머니가 통제욕이 너무 강하고 또 삼촌더러 승아 누나와 결혼하라고 협박하잖아.삼촌이 지금까지는 계속 참으며 살았는데 이제 한계를 건드려서 못 참고 외할머니와 크게 싸우고 혼자 살고 있어.”“외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워요?”남우영은 벨을 누르고 고개를 돌려 답했다.“삼촌은 사생활이 전혀 없었어. 일기장도 외할머니가 떳떳하게 꺼내 보는데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어?”그때
남서연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러자 백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급히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저녁 먹고 가.”남우영은 고민하며 백건을 바라보았다.그가 식탁 쪽을 가리키자 도우미가 마침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날이 저물었어. 지금 집에 돌아가면 너무 배고프잖아. 여기서 먹고 가.”남우영이 남서연을 보자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난 다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었다. 그는 백건의 외로움을 마음속으로 동정하며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럼 오늘은 삼촌 집에서 저녁 먹자.”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남우영과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니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낸 남서연이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걸음을 떼는 순간 백건과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긴장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백건은 은근 고조된 기분을 감추고 차가운 외모에 비해 뜨거운 눈동자로 부드럽게 속삭였다.“요리사에게 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족발이랑 새우 만두 준비하라고 했어.”남서연은 살짝 넋이 나가 한참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이 음식들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분명 방금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았을까?“고마워요.”남서연은 말랑말랑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백건은 그녀가 지나가도록 서둘러 자리를 옮겼고 남서연은 그의 곁을 넘어 식탁으로 향했다.그리고 백건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식탁에 앉고 보니 여섯 가지 요리와 국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남우영은 국자로 국을 떠주며 나무랐다.“삼촌,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모두 서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잖아요.”백건은 말없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남서연은 볼이 약간 뜨거워지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떴다. 남우영이 건넨 국을 받아 조용히 마셨다.남우영은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없이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백건은 식사 예절이 아주 우아하고 규범적이었는데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
저녁을 먹고 나니 8시가 넘었고 남서연은 과일도 조금 먹었다.이렇게 큰 집에 그녀와 백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긴장되고 어색했다.그녀는 시간을 보고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저 갈게요.”백건은 부랴부랴 일어나 다급하게 남서연의 손목을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남서연이 그를 뒤돌아보니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조금만 더 앉아 있어. 조금만. 아직 9시도 안 됐으니 조급해하지 마.”남서연은 거절하기 미안하고 또 좋아하는 남자가 붙잡으니 다소 마음이 약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래요.”백건은 그녀가 심심할까 봐 물었다.“TV 볼래? 아니면 영화?”남서연은 2초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애니메이션 영화 봐도 돼요?”백건은 2초간 어리둥절하더니 말했다.“그래. 어떤 애니메이션 보고 싶어?”남서연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너무 귀엽고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도 함께 볼 수 있었다.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남서연은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무거나요.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 아무거나 골라봐요.”백건은 그런 것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그는 평소에도 TV와 영화를 보지 않고 애니메이션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그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자신이 잘 못 골라서 남서연이 지루해할까 봐 휴대전화를 꺼내 하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당장 재미있는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 보내줘. 꼭 재밌어야 해.”잠시 후 하현우가 영화 링크를 그의 휴대전화로 보내주며 꼭 이어폰을 끼고 보라고 일러줬다.백건은 별생각 없이 거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휴대전화의 링크를 TV에 띄웠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영화가 시작되면서 남서연은 서서히 몰입했다.영화의 질감은 아름다운데 여주인공의 몸매가 너무 화끈하고 옷차림도 살짝 드러났다.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남녀주인공을 둘러싼 짝
사장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했다.“감사합니다. 곧 보내드릴게요.”백건은 남서연을 끌고 나가 한적한 시장 거리에 서서 화가 난 채로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남서연은 어렴풋이 백건의 화를 느끼며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화를 꾹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남서연, 마지막으로 알려두는데 난 남우영의 삼촌이지 네 삼촌이 아니야. 난 네 부모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알아들어?”남서연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거듭 사과했다.“미안해요.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요.”백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고 남서연도 그를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치자 눈빛 사이에 조금 다른 감정이 흘렀다.남서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오빠, 진짜 승아 누나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아니야.”남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또 물었다.“그럼 여자친구는 있어요?”“없어.”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자신이 웃지 못하도록 입술을 오므리고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아!”마음을 진정한 백건이 말했다.“가자. 화분이 배달되면 어떻게 놓을지 네가 봐줘.”남서연은 바짝 긴장했다.“오빠 집에까지 가자고요?”백건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그녀가 싫어하는 줄 알고 급히 설명했다.“그냥 화분 놓을 위치만 봐줘. 끝나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네.”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운 미소를 숨겼다.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에 남서연은 그에게 그때 무슨 마음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너무 묻고 싶었다.하지만 너무 어색해 결국 묻지 못했다.남자와 여자는 달랐으니 말이다.어떤 남자들은 사랑을 떠나 그저 외롭고 욕망이 끓어오르면 아무 여자나 찾아 생리적 수요를 해결하면 되었으니.산 중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그들이 막 집에 도착했을 때, 화분을 운반하는 차도 도착했고 일꾼들은 화분을 운반하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배달했다.남서연은 화분의 위치
“오빠. 우리 둘뿐이에요?”“응.”“그래요.”남서연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문을 닫은 백건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떠났다.석양이 서쪽으로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소 답답하고 억압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졌다.남서연은 그 정적을 깨려고 화제를 찾으려 했지만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그때 백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영이는 네가 나와 꽃 사러 가는 거 알아?”“몰라요. 다혜랑 쇼핑 간다고 말했어요.”백건의 안색이 굳어지며 마음이 좀 언짢았다.꽃을 사러 시장에 가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왜 그의 존재를 숨겼을까? 그와 쇼핑하러 가는 것도 가족을 속여야 하는 일일까?새가 지저귀고 꽃이 향기로운 꽃 시장에 간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모두 처음 와서 이 시장이 6시부터 문을 닫는 것을 몰랐다.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두세 군데 가게에 그래도 녹색 식물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화분 필요하세요?”마감 정리를 하던 사장이 반갑게 인사했다.남서연은 백건과 나란히 가게로 걸어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백건은 남서연의 곁에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뭐가 맘에 들어?”남서연은 그제야 모든 녹색 식물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대나무 같은 녹색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예쁘네요.”그러자 백건이 사장에게 말했다.“이 친구가 좋아하는 거 다 포장해 주세요.”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많은 희한한 녹색 식물이 정교하고 예쁘게 생겼다. 처음 본 남서연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것도 예쁘네요.”“이건 무슨 꽃이에요? 실내에서 키울 수 있어요?”“태양이 조금 필요한 베란다에 심을 수 있어요.”“그것도 사죠.”백건이 말했다.남서연은 구석에 있는 이상한 식물을 보고 얼른 백건의 팔을 잡아끌었다.“오빠. 저것 좀
남서연은 심장이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잡은 채 백건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으며 매 글자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지금 나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건가? 가야 하나?’남서연은 고민하다가 운전석의 남우영을 돌아보고 떠보듯 말했다.“오빠, 내일 퇴근 후에는 나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왜?”“그게...”야근한다고 하면 남우영이 곧바로 조사해서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테니 거짓말을 지어냈다.“친구랑 쇼핑하려고요.”“어느 친구? 어디서 쇼핑하는데?”남우영이 묻자 남서연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회사 동료 다혜랑요. 회사 근처에서 쇼핑할 거예요.”남우영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그래. 그럼 조심하고 일찍 집에 돌아와.”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남우영에게 기대어 애교스럽게 웃었다.“고마워요 오빠.”남우영은 어리둥절했다.“나한테 왜 고마워해? 재미있게 놀아.”이어 주머니에서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남서연에게 건넸다.“마음껏 사.”“괜찮아요. 나 돈 있어요. 충분해요.”남우영은 웃으며 카드를 남서연의 손에 쥐여주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넣어둬. 오빠 돈 써. 네 돈은 모아서 부자 돼야지.”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빙그레 웃었다.“고마워요.”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아직 백건에게 답장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채팅창에 입력 중이라고 떴는데 갑자기 취소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입력 중이라고 떴다.한참이나 메시지를 받지 못하자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을 했다.서재에 있는 백건은 휴대폰을 보고 또 보았다. 책상 위에 놓았다가 또 들고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그녀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왜 답장을 안 하지? 나와 함께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뚜뚜.백건은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고 열어보았다.[좋아요.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퇴근 후에 시간 있어요.]백건은 미간을 구부리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바로 답장했다.[그
화제가 끝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회사에서 힘든 점은 없어?”그는 애써 화제를 찾으며 둘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썼다.남서연은 갑자기 감원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물었다.“회사에서 감원해요?”남서연의 시선이 마침내 그에게 향하자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넌 제외대상이니까 걱정 마.”“여다혜라고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직원도 안 자르면 안 돼요?”“여다혜?”백건이 진지하게 묻자 남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이름 기억했어.”“고마워요.”말을 마친 남서연은 남자의 눈빛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서둘러 시선을 TV에 옮겼다.“서연아...”백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저번에 일은 우리...”그때 남우영이 걸어 나오자 백건의 소리가 뚝 그쳤다.남서연은 마음이 켕기고 또 긴장해서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었다.“지나간 일은 다시 꺼내지 말아요. 이미 지나갔어요.”그녀는 남우영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지만 백건의 귀에는 아주 차갑고 무정하게 들렸다.이제 보니 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여자아이가 몰래 금단의 열매를 시도한 충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다.감정도, 결혼도, 미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남우영은 두 사람 사이에 앉더니 남서연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말했다.“이 영화가 끝나면 우리 돌아가자. 너무 늦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 걱정하셔.’“네.”남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백건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백건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남우영과 남서연이 떠날 때는 직접 문 앞까지 배웅했다.그는 우뚝 서서 남서연이 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서연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곧 차량은 떠났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서 그의 눈앞에서 차량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그의 마음은 텅 비고 너무 허전했다.고개를 돌려 커다란 집을 돌아보니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남씨 가문 사람들은 남서연을 너무 잘 보호했다. 그녀의 출퇴근을
남서연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러자 백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급히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저녁 먹고 가.”남우영은 고민하며 백건을 바라보았다.그가 식탁 쪽을 가리키자 도우미가 마침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날이 저물었어. 지금 집에 돌아가면 너무 배고프잖아. 여기서 먹고 가.”남우영이 남서연을 보자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난 다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었다. 그는 백건의 외로움을 마음속으로 동정하며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럼 오늘은 삼촌 집에서 저녁 먹자.”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남우영과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니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낸 남서연이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걸음을 떼는 순간 백건과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긴장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백건은 은근 고조된 기분을 감추고 차가운 외모에 비해 뜨거운 눈동자로 부드럽게 속삭였다.“요리사에게 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족발이랑 새우 만두 준비하라고 했어.”남서연은 살짝 넋이 나가 한참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이 음식들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분명 방금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았을까?“고마워요.”남서연은 말랑말랑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백건은 그녀가 지나가도록 서둘러 자리를 옮겼고 남서연은 그의 곁을 넘어 식탁으로 향했다.그리고 백건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식탁에 앉고 보니 여섯 가지 요리와 국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남우영은 국자로 국을 떠주며 나무랐다.“삼촌,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모두 서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잖아요.”백건은 말없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남서연은 볼이 약간 뜨거워지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떴다. 남우영이 건넨 국을 받아 조용히 마셨다.남우영은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없이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백건은 식사 예절이 아주 우아하고 규범적이었는데
“이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인사팀장을 찾든지 아니면 바로 삼촌을 찾아가.”남서연은 한바탕 생각에 잠겼다.백건을 찾아가라?이것은 마치 그에게 접근하는 핑계 같았다. 다만 이 핑계가 좀 구차하고 미미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일이 바로 해결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했다.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방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남우영이 열심히 차를 몰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넣고 한 번 눌렀다.“여보세요. 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그를 올려다보며 괜히 마음이 긴장됐다.휴대전화 저쪽에서 백건이 말했다.“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한 번 다녀가.”“하 비서 시켜서 보내세요. 나 지금 서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있어서 못 가요.”“아주 중요한 거야. 다른 사람 손에 넣을 수 없어.”‘아주 중요하다고? 하 비서도 못 믿을 만큼?’남우영은 너무 궁금했다.그때 남서연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집에 늦게 가도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더니 바로 백건에게 말했다.“좋아요. 지금 당장 갈게요.”남우영은 방향을 틀었다.30분 후, 차량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남서연은 낯설고 궁금해서 물었다.“오빠 여긴 어디예요?”“삼촌이 사는 곳.”남서연은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백씨 가문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남우영도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걸으며 말했다.“삼촌 이제 나와서 혼자 살아.”남서연이 그의 귀를 따라가며 경악해서 물었다.“왜요?”“외할머니가 통제욕이 너무 강하고 또 삼촌더러 승아 누나와 결혼하라고 협박하잖아.삼촌이 지금까지는 계속 참으며 살았는데 이제 한계를 건드려서 못 참고 외할머니와 크게 싸우고 혼자 살고 있어.”“외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워요?”남우영은 벨을 누르고 고개를 돌려 답했다.“삼촌은 사생활이 전혀 없었어. 일기장도 외할머니가 떳떳하게 꺼내 보는데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어?”그때
엘리베이터 문은 디자인팀 사무실 층에서 멈추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남우영이 말했다.“서연아 도착했어.”남서연은 바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마주 보며 남우영을 향해 미소 짓고 손짓했지만 부드러운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백건에게 떨어졌다백건은 그윽한 눈빛으로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눈이 서로 마주치자 서로 회피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가 차단되었다.남서연은 가볍게 심장을 가리고 왠지 모를 긴장과 설렘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이제 백건을 당당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남몰래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남의 남자친구를 훔치는 죄책감도 없게 되었다.다만 아직 백건이 솔로인지 100% 확실하지 않았다. 유승아와 사귀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일단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남서연은 즐겁게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싱글벙글 웃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디자인 팀 사무실로 들어섰다.디자인 팀의 업무는 남서연에게 매우 충실하고 성취감이 있었다.그녀는 패션디자인을 매우 좋아해서 한번 일에 몰두하면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겨울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선별하는 중인데 남서연이 제출한 몇몇 제품들이 탈락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여다혜는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싸안고 책상에 머리를 쿡쿡 박았다.초조해하는 여다혜를 본 남서연은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여다혜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슬퍼하며 말했다.“서연아, 내 디자인 모두 떨어졌어.”남서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내 것도 마찬가지야.”“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번 구조조정에서 감원대상이 될 거야.”남서연은 경악했다.“또 감원해?”여다혜는 고개를 들고 슬픈 얼굴,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너 그거 알아? 새로 부임한 대표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원래 대표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