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아침은 좀 쌀쌀했다.하늘이 희끗희끗해지자 베란다의 거즈 커튼이 은은한 빛을 비추었다.커다란 침대에 누운 상의를 벗은 남자가 얇은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있었다. 완벽한 근육질 몸매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저세상 사람 같았다.찬 바람이 불어오자 거즈 커튼이 천천히 펄럭였다.서늘함을 느낀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옆을 만졌다.문득 그는 눈을 뜨고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며 순간 마음이 가라앉았다.당장 일어나 침대 밑에 있는 옷을 주워 재빨리 입었다.그는 긴장한 기색으로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다급히 외쳤다.“서연아!”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발코니, 거실, 주방, 서재를 뒤지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고 무거운 호흡을 하며 이마를 짚고 침대 위의 검붉은 혈흔을 응시했다. 가슴은 마치 돌에 짓눌린 듯 숨이 막히고 답답한 고통이 느껴졌다.“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으니...”그는 쓸쓸히 침대에 걸터앉아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였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온몸을 뒤덮었다.그는 다시 번호를 눌렀다.휴대전화 저쪽에서 육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안녕하세요.”“남서연은 어딨죠?”“아침에 서연 씨가 이쪽 일이 다 끝났냐고 제게 와서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끝났다고 하니 돌아갔어요.”“어디로 돌아갔죠?”“M국으로 돌아갔습니다.”“내가 언제 귀국해도 된다고 허락했죠?”노기를 띤 말투에 육나리는 바짝 긴장했다.“저도 서연 씨에게 대표님 동의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지만 제 말을 듣지 않고...”그는 더 이상 설명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고 휴대전화를 휙 집어 던지고는 뒤로 넘어졌다.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울한 기분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커튼이 천천히 나부끼고 방은 조용했다.오직 그의 고통스러운 호흡만이 남아 있었고 굳어버린 심장은 여전히 힘겹게 뛰고 있었다.남자는 침대에 가로누워 눈을 감은 채 우울하고 괴로워했다. 그는 힘없이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남서연, 너한
진명수는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싱글벙글 말했다.“백건 도련님도 이제 27살이니 결혼할 나이가 되셨죠.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 나이도 많으시니 아마 손자 보기가 급하실 겁니다.”남서연이 망연자실한 듯 고개를 숙이자 눈 밑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몰래 눈물을 닦고 있었다.저녁의 따스한 태양이 그녀를 비추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더없이 차가웠다.그녀는 지금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죽도록 원망하고 있었다.개인적인 욕망으로 백건과 설명할 수 없는 성관계를 했으니 그녀는 유승아에게 너무 미안했다.짝사랑은 짝사랑답게 몰래 사랑하고 마음속 깊이 묻어두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며 그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지금 그녀는 드라마에 나오는 나쁜 여자가 되었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진명수는 남서연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남서연은 얼른 눈물을 지우고 굳은 웃음을 짜내었다.“저 괜찮아요.”그리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고 으리으리한 거실에 들어섰다.“서연아!”정안의 부드럽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서연은 헤벌쭉 웃으며 성큼성큼 달려가 정안의 곁에 앉더니 사랑스럽게 팔짱을 꼈다.“작은 엄마, 너무 오랜만이에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정안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거의 2년 만이네? 우리 서연이 점점 예뻐지고 있어.”“콜록.”남하준은 일부러 기침을 한 번 했다.힌트를 받은 남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며 달콤하게 외쳤다.“작은 아빠.”남하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사랑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서연이 눈에는 작은 엄마만 보이고 난 안 보이는 줄 알았지.”“에이. 그럴 리가요. 이렇게 늠름하고 당당한 아우라를 풍기는 작은 아빠는 어디서든 사람의 이목을 끄는데 제가 왜 못 보겠어요?”“말도 점점 더 예쁘게 하네.”남하준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욱 찬란해졌고 눈 밑에는 감출 수
그때 남우영이 들어왔다.그는 단정하고 공손하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빠, 엄마. 오셨어요?”정안이 부드럽게 대답했다.“우리 우영이 왔어? 얼른 엄마 옆에 와서 앉아. 우리 우영이 너무 오랜만이다.”남우영은 정안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모자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남하준 얼굴의 미소가 서서히 가시더니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우영이 요즘 뭐 하고 지내?”“요즘 외삼촌을 따라 사업을 배우고 있어요.”남우영이 진지한 태도로 답하자 남하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일을 인정했다.백건을 언급하니 남서연은 괜히 긴장했다.그때 남우영이 갑자기 물었다.“서연아, 너 삼촌이랑 출장 갔었잖아? 왜 돌아왔어? 삼촌은?”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긴장해서 답했다.“몰라요. 난 내 일이 끝나서 먼저 돌아왔어요.”“그래.”정안은 남서연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남우영에게 물었다.“우영아, 네 삼촌 언제부터 연애했어? 왜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는 거야? 어느 댁 아가씨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마음이 답답했다.끝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이 가슴이 먹먹했다.“두 분도 아는 사람이죠. 아빠 절친 유동진 아저씨의 딸 유승아요.”“동진이 딸?”남하준은 경악했고 정안은 안색이 확 굳어져 남하준을 돌아보았다.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남하준은 망연한 표정이었다.남우영은 부모님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해지자 황급히 말했다.“삼촌과 승아 누나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어요. 서로 친구이자 동창이죠. 대학교 때부터 서로 만났으니 몇 년 됐죠. 아마 삼촌의 첫사랑인 것 같아요.”“우리는 별로 만난 적이 없어. 승아 어떤 사람이야?”정안이 호기심에 묻자 남우영은 몇 초간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괜찮은 편이죠. 지적이고, 대범하고, 온화하고 어질고 밝은 사람이에요. 삼촌처럼 음울하고 차가운 남자랑 잘 어울려요.”정안은 감히 유미의 조카를 칭찬할 수 없
남서연은 하루 휴가를 냈고 주말이 다가왔다.그녀는 3일 동안 계속 방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잠자는 것 외에는 노래를 듣거나 아무 생각 없이 베란다 바깥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비웠다.그때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발신 번호를 보니 동료 여다혜에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 다혜 씨.”남서연은 핸즈프리를 켜놓고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서연아, 영화 보러 가자.”여다혜가 긴장해서 말했지만 남서연은 흥미가 돋지 않았다.“싫어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9시면 끝나. 나와. 내가 멋진 남자 소개해줄게.”남서연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또 다혜 씨 큰 오빠요?”“맞아. 너 계속 연애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22살인데 아직 연애도 못 해보고. 우리 큰 오빠 만나봐.”“우리 어울리지 않아요.”남서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혜 씨 큰오빠 아주 잘생긴 건 알지만 우린 안 맞아요.”가문 계급이 어울리지 않으면 그녀의 가족도 혼사를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여다혜는 그녀의 가정 형편은 모르고 항상 자신의 큰 오빠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여다혜가 반문하자 남서연의 머릿속에는 백건이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그녀와 백건은 평생 불가능할 운명인데, 굳이 자신을 괴롭히면서 불가능한 남자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남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주소 보내줘요.”그러자 여다혜는 흥분해서 말했다.“좋아. 바로 보내줄 테니까 꼭 나와야 해.”남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30분 후, 타임스퀘어 4층 영화관 입구.남서연은 멀리서부터 여다혜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와 함께 서서 반갑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남서연은 방
남서연은 당황해서 황급히 설명했다. “아니에요. 동료 오빠예요. 방금 알았어요.”여민찬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유승아는 피식 웃더니 화제를 돌려 물었다.“영화 어느 타임이야?”“7시, 2번 홀이에요.”여민찬이 대답하자 유승아가 아쉬워했다.“아쉽네요. 우리는 6시 45분, 6번 홀인데.”남서연은 웃음을 짜내어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그러게요. 아쉽네요.”그때 여다혜가 팝콘이랑 음료수를 들고 와서 여민찬에게 건네주고 유승아를 보았다.유승아는 그들이 확실히 세 사람인 걸 확인하고 급한 척 자리를 피했다.“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건이가 걱정할 거야. 나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유승아는 돌아서서 떠났다.백건과 유승아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고?남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이 차갑고 답답하고 괴로웠다.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잔잔한 감상이 밀려왔다.그녀는 슬픈 동시에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느꼈다.백건이 약혼녀와 같이 데이트하고 영화 보는 건 정상이 아닌가?외부인인 그녀가 왜 질투를 하고 슬퍼할까?그녀는 전혀 자격이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서연아, 가자. 10분 후면 시작이니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여민찬이 물건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유승아는 영화관에 들어서자 고모 유미에게 콜라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밖에서 남서연을 만났어요. 동료와 그 동료 오빠랑 셋이서 2번 홀에서 영화를 본대요.”유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며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느릿느릿 말했다.“이럴 땐 백건에게 전화라도 해야 했던 거 아니야?”“왜요?”유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보야, 전에 네가 말했잖아. 백건이 남서연을 좋아한다고. 두 사람이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서연이가 너의 가장 큰 연적이라고. 모르겠어?”유승아는 유미의 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리며 영화
육나리에게 지금 당장 일을 핑계로 여다혜를 불러내라고 했다.15분 후.여다혜는 부랴부랴 영화관을 나서며 투덜댔다.“젠장. 주말인데 웬 PPT를 급하게 만들라고 지랄이야. 내일 써야 한다면서 사람을들들 볶아?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주든가! 지금이 몇 시야? 젠장...”여다혜는 폭언을 퍼부으며 빠른 걸음으로 유승아의 곁을 지나쳐 영화관을 빠져나갔다.곧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두 시간 후, 남서연은 여민찬과 나란히 영화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내가 데려다줄게요.”여민찬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자 남서연이 엷게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건 위험하죠.”“정말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심장 박자가 엇나가며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차량을 바라보았다.고급 차량의 운전석에는 백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남서연과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백건의 안색은 극도로 음산했으며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며 온몸에는 음울하고 무서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남서연은 백건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다.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불안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난처하고 긴장하고 수치스러우며 손바닥에 땀이 났다. 감히 그와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서서히 시선을 내리뜨렸다.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태연하게 백건과 유승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승아가 안에서 나와 남서연의 옆을 지나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건이가 벌써 차를 몰고 왔네. 나 먼저 갈게 서연아.”남서연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유승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 언니.”“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백건의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백건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가 왜 앉아?”유승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고모가 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갔어. 가는 길에 나 좀 태워다 줘.”기분이 최악인 백건은 차가운 말투로 명령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택시 기사는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외쳤다.남서연은 사색에서 깨어나 황급히 눈물을 닦고 현금을 꺼내어 지불했다.“감사합니다.”남서연은 결제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내렸다.문이 닫히자 택시가 천천히 떠났다.남서연은 고개를 들어 불빛이 환한 별장을 올려다보며 침울한 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그녀가 막 철문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쫓아오더니 번개처럼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어느새 옆의 벽에 눌렸다.“악!”남서연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에 눌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앞에 확대된 얼굴을 보았다. 어렴풋이 백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발버둥 쳤다.“음!”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욱 그녀를 짓눌러 숨도 쉴 수 없게 했고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눌렀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건장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촘촘히 짓눌려 있었다.남자의 키스는 마치 폭풍우가 습격하듯 사나웠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아플 정도로 빨아들여 그녀는 산소 부족을 느꼈다. 당장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포악한 분위기와 광야적인 기세를 풍겼다.남서연은 사나워진 남자의 키스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마치 백건에게 잡아 먹힐 듯 했고 여태껏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키스로 인해 산소가 부족하고, 입술이 부풀어 올라 아프고, 몸은 눌려 숨이 막히고, 등에는 땀이 나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결국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뺨 위로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목구멍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남자는 눈물의 짠맛을 맛보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그녀의 이마를 맞대고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서연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가볍게
남서연은 당황했다.이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남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도 흘러내리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백건은 그녀의 억울하고 멍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났다.“내 말 알아들었어?”남서연은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서연이 한마디 던졌다.“알아들었어요. 나 책임질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 귀찮게 매달리지 않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가슴팍이 아팠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숙여 심장 깊숙한 곳의 통증을 완화했다.순간,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제 네가 나를 책임져야겠어.”남서연은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책임져요?”백건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남서연은 굳어버렸고 머리가 흐리멍덩했다.분명 먼저 잠자리를 원한 건 이 남자였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더라고 피동적인 입장이었고 과정은 너무 아팠다. 전혀 즐기지 못했으니 아무리 봐도 손해 본 쪽은 남서연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더러 책임을 지라니?무엇보다 이 남자에게는 약혼녀도 있는데 어떻게 책임지라는 걸까?설마 백건은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관계를 유지하고 그녀더러 빛을 못 보는 내연녀가 되라는 걸까?그건 때려죽여도 원하지 않았다.당황한 남서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싫어요.”백건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맑고 예쁜 여자의 눈을 주시하며 눈에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찼으며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남서연, 네가 나랑 잠자리에 든 순간,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남서연은 한 기류의 냉기가 발바닥에서 이마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당황했다.백건은 애초부터 그녀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계획이었을까?탈락한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고 해외 행사에도 데리고 가서 같은 방에 묵었다.알고 보니, 이는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기 위함이었고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육체관계를 유지하는 숨겨진 연인으로 삼으려는 의
정안은 탄식했다.“서연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일찍 포기해. 그렇다고 너무 자포자기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말고. 승아는 너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백건이 느릿느릿 말했다.“승아에게는 수단이 악랄한 고모가 있죠.”정안은 경악했다.“너도 알고 있었던 거야?”“네.”정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부했다.“그래. 난 이만 갈게.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점심에 금원에 와.”금원은 국가가 남하준에게 준 작은 별장이었고 금원 맞은편이 바로 유원, 유승아의 집이 있었다.“금원에는 왜요?”정안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일찍 와서 누나 좀 도와줘.”말을 마친 정안은 돌아서서 백건의 방을 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백건은 쓸쓸한 눈으로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익일 점심.남서연은 꽃무늬 원피스에 차양 트리밍 모자를 쓰고 손에 대나무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꽃바구니 안에는 온통 화초의 어린 모종들이 가득했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기뻐하는 무지개 나비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멀리 그녀는 정원 한가운데에 흰 셔츠를 입고 진흙탕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작은 엄마!”가까이 다가선 남서연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소리가 목구멍에 걸리고 시선은 눈앞의 남자에 고정되어 멍해졌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일어나 자신의 귀가 잘못 들린 줄 알고 돌아섰을 때,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자를 보자 그도 멍해지며 굳어버렸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남서연은 남자의 시선이 왠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자 당황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작은 엄마인 줄 알았어요. 묘목을 선물하려고 왔는데 내가...”“물 가지러 갔어.”백건은 처음에 정안이 왜 집안의 정원사를 놔두고 굳이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정원을 가꾸게 했는지 몰랐다.이제야 그는 이해했다.그는 손에 든 호미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고 두 걸음 앞으로 나가 남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한 번 또 한 번.백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쓸쓸한 눈동자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안의 소리로 바뀔 때까지.“건아. 나야.”정안은 비록 집에 있는 시간이 적지만 백건의 마음속에 누나는 따뜻하고 친절한 존재였다. 어머니에게서 얻을 수 없는 모든 정을 누나가 줬다.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걸어가서 그림을 한 방향으로 돌려 다시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정안은 어두운 안색으로 눈 밑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백건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무슨 일이에요?”백건이 묻자 정안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나 네 방에 들어가 좀 앉아도 돼?”백건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들어와요.”정안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방은 조명이 밝았지만 단조롭고 썰렁했다.커다란 침대 하나, 한 줄로 늘어선 캐비닛, 소파 의자 하나, 마치 그의 성격처럼 매우 차가운 색조였다.그가 남서연을 짝사랑하는 것도 당연했다.남서연은 아주 밝고 따뜻한 여자로 모든 악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정안은 소파에 가서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거꾸로 바닥에 놓인 그림에 시선이 꽂혔다.그녀는 빙긋 웃으며 옆자리를 토닥였다.“건아, 너도 앉아.”백건은 그녀 옆에 앉아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정안은 백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젊고, 준수하고, 부자이고, 남서연보다 다섯 살 많았다. 성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정직하고 착한 남자였고, 끈기와 책임감이 있어 어머니의 마귀 같은 가훈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버텼다.남서연이 그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백건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다음 달 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나와 하준 오빠 돌아왔어.”백건은 얼굴이 굳어지며 차갑게 말했다.“결혼식은 없어요.”“엄마는 이미 모든 지인에게 청첩장을 돌렸어.”백건은 잠자코 있자니 눈 밑의 냉기가 더욱 깊어졌다.“내 생각에 엄마는
서윤아는 화를 꾹 참고 또박또박 말했다.“넌 오랫동안 국경에서 일해서 건이가 얼마나 변태적인지 몰라. 서연이는 건이를 삼촌이라고 불러. 두 사람은 친척이야. 근데 건이는 어렸을 때부터 서연이를 몰래 좋아했어. 서연이의 고무줄, 물컵, 인형, 그리고 많은 잡다한 물건들을 훔치고 심지어 서연이가 버린 필통까지 주워 담으며 쓰던 볼펜 한 자루도 놓치지 않았어. 남씨 가문에 갈 때마다 서연이가 쓰던 물건들을 몰래 가지고 와서 숨겼어. 어느 집 남자가 일기를 쓰는데 그 안에 온통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뿐이겠어? 서연의 물건을 훔칠 뿐만 아니라 숨어서 몰래 서연이를 훔쳐보고 미행하고, 그림책은 전부 서연이의 초상화뿐이야. 내가 정말... 방법이 없어서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강요했더니 승아와 둘이 짜고 나를 속였어. 건이를 외국으로 보낸 것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정안은 화가 치밀어 말을 끊었다.“엄마, 왜 건이 일기를 훔쳐봤어요?”“다 건이를 위해서지.”서윤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정안은 아픈 머리를 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참 숨 막히는 모성애네요.”“내가 만약 일기를 훔쳐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자식 마음이 저렇게 깊은 줄 알았겠어? 내가 만약 그 변태적인 행동을 미리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몰라.”정안은 어이없기 짝이 없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엄마, 건이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성적이고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요. 한 여자 아이를 짝사랑하면 그 여자 물건을 훔치는 건 정상이죠. 미행한 건 어쩌면 보호하고 있었고 더 많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죠. 서연이가 목욕하는 걸 훔쳐본 것도 아니고 서연이 속옷을 훔친 것도 아닌데 왜 엄마는 그걸 변태라고 해요?”서윤아는 항상 보수적인 사상이 있어 정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서연이가 자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촌수가 어떤지 자기가 몰라? 이것도 변태가 아니면 꼭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패륜을 저질러야 변태라고 할 수 있는 거니?”정안은 그녀
남서연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남자의 미색과 육체에 대한 탐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바칠 정도일까?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니.그녀를 내연녀로 전락시키면 그녀의 집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 이 남자는 두렵지 않을까?이 남자는 양심이라곤 없을까?남서연은 제대로 화가 났다.“이거 놔!”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남서연은 아픈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단념하세요. 승아 언니와 결혼해서 절대 언니를 저버리지 말고 잘 살아요. 다시는 그딴 생각 말고.”말을 마친 남서연은 화가 나서 자리를 뜨더니 옆의 큰 철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녀는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백건을 욕했다.‘백건, 이 개자식.’‘네게 여자친구만 없었어도, 약혼녀만 없었어도, 아내만 없었어도 난 승낙했을 거야.평생 너와 육체적 관계만 유지하며 명분이 서지 않는 비밀 연인이 되더라도 난 기꺼이 원했을 거야.’‘하지만 승아 언니는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고 다음 달이면 결혼하잖아? 근데 지금 와서 나를 건드려?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백씨 가문 별장.백건이 피곤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서자 도우미가 마중 나왔다.“큰 도련님 오셨어요?”백건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하여 손에 들고 있던 양복 외투를 도우미의 손에 내동댕이치고 넥타이를 풀며 걸었다.거실을 지나갈 때 안에서 정안의 소리가 들렸다.“동생 돌아왔어?”정안이 외치자 백건은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그의 어머니와 누나였다.“저 돌아왔어요.”백건은 담담하게 인사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디 갔다 와?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정안이 묻자 서윤아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원망으로 가득 찼다. “수백억을 손해 봐도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는 녀석이야. 오직 그 여자만 네 동생을 저 몰골로 만들 수 있어.”“유승아를 말하는 거예요?”서윤아가 격분해서 말했다.“만약 승아였으
남서연은 당황했다.이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남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도 흘러내리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백건은 그녀의 억울하고 멍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났다.“내 말 알아들었어?”남서연은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서연이 한마디 던졌다.“알아들었어요. 나 책임질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 귀찮게 매달리지 않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가슴팍이 아팠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숙여 심장 깊숙한 곳의 통증을 완화했다.순간,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제 네가 나를 책임져야겠어.”남서연은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책임져요?”백건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남서연은 굳어버렸고 머리가 흐리멍덩했다.분명 먼저 잠자리를 원한 건 이 남자였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더라고 피동적인 입장이었고 과정은 너무 아팠다. 전혀 즐기지 못했으니 아무리 봐도 손해 본 쪽은 남서연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더러 책임을 지라니?무엇보다 이 남자에게는 약혼녀도 있는데 어떻게 책임지라는 걸까?설마 백건은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관계를 유지하고 그녀더러 빛을 못 보는 내연녀가 되라는 걸까?그건 때려죽여도 원하지 않았다.당황한 남서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싫어요.”백건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맑고 예쁜 여자의 눈을 주시하며 눈에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찼으며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남서연, 네가 나랑 잠자리에 든 순간,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남서연은 한 기류의 냉기가 발바닥에서 이마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당황했다.백건은 애초부터 그녀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계획이었을까?탈락한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고 해외 행사에도 데리고 가서 같은 방에 묵었다.알고 보니, 이는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기 위함이었고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육체관계를 유지하는 숨겨진 연인으로 삼으려는 의
“손님 도착했습니다.”택시 기사는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외쳤다.남서연은 사색에서 깨어나 황급히 눈물을 닦고 현금을 꺼내어 지불했다.“감사합니다.”남서연은 결제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내렸다.문이 닫히자 택시가 천천히 떠났다.남서연은 고개를 들어 불빛이 환한 별장을 올려다보며 침울한 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그녀가 막 철문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쫓아오더니 번개처럼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어느새 옆의 벽에 눌렸다.“악!”남서연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에 눌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앞에 확대된 얼굴을 보았다. 어렴풋이 백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발버둥 쳤다.“음!”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욱 그녀를 짓눌러 숨도 쉴 수 없게 했고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눌렀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건장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촘촘히 짓눌려 있었다.남자의 키스는 마치 폭풍우가 습격하듯 사나웠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아플 정도로 빨아들여 그녀는 산소 부족을 느꼈다. 당장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포악한 분위기와 광야적인 기세를 풍겼다.남서연은 사나워진 남자의 키스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마치 백건에게 잡아 먹힐 듯 했고 여태껏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키스로 인해 산소가 부족하고, 입술이 부풀어 올라 아프고, 몸은 눌려 숨이 막히고, 등에는 땀이 나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결국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뺨 위로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목구멍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남자는 눈물의 짠맛을 맛보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그녀의 이마를 맞대고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서연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가볍게
육나리에게 지금 당장 일을 핑계로 여다혜를 불러내라고 했다.15분 후.여다혜는 부랴부랴 영화관을 나서며 투덜댔다.“젠장. 주말인데 웬 PPT를 급하게 만들라고 지랄이야. 내일 써야 한다면서 사람을들들 볶아?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주든가! 지금이 몇 시야? 젠장...”여다혜는 폭언을 퍼부으며 빠른 걸음으로 유승아의 곁을 지나쳐 영화관을 빠져나갔다.곧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두 시간 후, 남서연은 여민찬과 나란히 영화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내가 데려다줄게요.”여민찬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자 남서연이 엷게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건 위험하죠.”“정말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심장 박자가 엇나가며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차량을 바라보았다.고급 차량의 운전석에는 백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남서연과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백건의 안색은 극도로 음산했으며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며 온몸에는 음울하고 무서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남서연은 백건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다.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불안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난처하고 긴장하고 수치스러우며 손바닥에 땀이 났다. 감히 그와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서서히 시선을 내리뜨렸다.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태연하게 백건과 유승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승아가 안에서 나와 남서연의 옆을 지나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건이가 벌써 차를 몰고 왔네. 나 먼저 갈게 서연아.”남서연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유승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 언니.”“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백건의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백건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가 왜 앉아?”유승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고모가 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갔어. 가는 길에 나 좀 태워다 줘.”기분이 최악인 백건은 차가운 말투로 명령했다.
남서연은 당황해서 황급히 설명했다. “아니에요. 동료 오빠예요. 방금 알았어요.”여민찬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유승아는 피식 웃더니 화제를 돌려 물었다.“영화 어느 타임이야?”“7시, 2번 홀이에요.”여민찬이 대답하자 유승아가 아쉬워했다.“아쉽네요. 우리는 6시 45분, 6번 홀인데.”남서연은 웃음을 짜내어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그러게요. 아쉽네요.”그때 여다혜가 팝콘이랑 음료수를 들고 와서 여민찬에게 건네주고 유승아를 보았다.유승아는 그들이 확실히 세 사람인 걸 확인하고 급한 척 자리를 피했다.“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건이가 걱정할 거야. 나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유승아는 돌아서서 떠났다.백건과 유승아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고?남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이 차갑고 답답하고 괴로웠다.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잔잔한 감상이 밀려왔다.그녀는 슬픈 동시에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느꼈다.백건이 약혼녀와 같이 데이트하고 영화 보는 건 정상이 아닌가?외부인인 그녀가 왜 질투를 하고 슬퍼할까?그녀는 전혀 자격이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서연아, 가자. 10분 후면 시작이니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여민찬이 물건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유승아는 영화관에 들어서자 고모 유미에게 콜라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밖에서 남서연을 만났어요. 동료와 그 동료 오빠랑 셋이서 2번 홀에서 영화를 본대요.”유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며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느릿느릿 말했다.“이럴 땐 백건에게 전화라도 해야 했던 거 아니야?”“왜요?”유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보야, 전에 네가 말했잖아. 백건이 남서연을 좋아한다고. 두 사람이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서연이가 너의 가장 큰 연적이라고. 모르겠어?”유승아는 유미의 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리며 영화
남서연은 하루 휴가를 냈고 주말이 다가왔다.그녀는 3일 동안 계속 방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잠자는 것 외에는 노래를 듣거나 아무 생각 없이 베란다 바깥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비웠다.그때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발신 번호를 보니 동료 여다혜에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 다혜 씨.”남서연은 핸즈프리를 켜놓고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서연아, 영화 보러 가자.”여다혜가 긴장해서 말했지만 남서연은 흥미가 돋지 않았다.“싫어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9시면 끝나. 나와. 내가 멋진 남자 소개해줄게.”남서연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또 다혜 씨 큰 오빠요?”“맞아. 너 계속 연애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22살인데 아직 연애도 못 해보고. 우리 큰 오빠 만나봐.”“우리 어울리지 않아요.”남서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혜 씨 큰오빠 아주 잘생긴 건 알지만 우린 안 맞아요.”가문 계급이 어울리지 않으면 그녀의 가족도 혼사를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여다혜는 그녀의 가정 형편은 모르고 항상 자신의 큰 오빠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여다혜가 반문하자 남서연의 머릿속에는 백건이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그녀와 백건은 평생 불가능할 운명인데, 굳이 자신을 괴롭히면서 불가능한 남자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남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주소 보내줘요.”그러자 여다혜는 흥분해서 말했다.“좋아. 바로 보내줄 테니까 꼭 나와야 해.”남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30분 후, 타임스퀘어 4층 영화관 입구.남서연은 멀리서부터 여다혜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와 함께 서서 반갑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남서연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