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은 즉시 입을 다물고 정안을 흘끗 바라보았다.“언니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정안이 덤덤하게 웃었다.“괜찮지 그럼.”할머니가 눈앞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이겨 낸 정안이었다.그녀가 M국에 돌아온 것은 단지 남하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남하준은 그녀가 돌아온 이유 중 하나였고 그녀는 가족을 찾아야 하고, 할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가문의 재산도 쟁탈해야 하고, M국 과학 연구 사업에도 참여해야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뱃속의 아이를 보호해 그가 무사히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이 모든 일이 전부 사랑보다 더 중요했다.정안은 지윤과 함께 묘지에 도착했다.할머니 무덤 앞에서 정안은 배를 만지며 눈물을 글썽이며 속삭였다.“할머니, 나 다녀왔어요. 앞으로 다시는 M국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시간 나면 할머니 보러 자주 올게요.”“그리고 나 임신했어요. 아기 건강하고 이미 5개월 차에요.”지윤은 화들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을 떡 벌리고 정안의 배를 바라보며 경악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정안은 고개를 돌려 지윤의 반응에 웃으며 놀렸다.“정말이야. 와서 만져 볼래?”지윤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정안의 배를 만져 보니 보기에는 작지만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지윤은 경악해서 물었다.“애 아빠는요?”정안은 침묵했다. 이미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말할 용기가 없었다....수도 안성.변경 지역에서 수도로 가는 헬기가 뉴빌리지의 개인 비행장에 멈췄다.이어 남하준이 멋진 검은색 무장 군복을 입고 나왔고 류청과 유미가 그의 곁을 따라갔다.세 사람은 성큼성큼 뉴빌리지로 향했다.“정통 어르신께서 왜 갑자기 급하게 오라고 부르신 거야? 무슨 중요한 일 있어?”유미가 호기심에 묻자 남하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몰라.”류청이 대답했다.“제가 알아보니 아주 중요한 분을 모셔야 하는데, M국 최고의 접대 예의를 갖춰 국가의 모든 중요 관리들이 참석해야 한대요.”“다른 나라 정상
정통 어르신은 정안을 데리고 한 사람씩 소개해줬다.참석한 사람들은 과학자 정안에 대해 익히 들었지만 그녀가 M국 갑부의 손녀일 줄은 몰랐다.정안은 매 국가지도자 한 명 한 명과 예의를 갖추어 악수하며 인사했다.남하준이 앞에 왔을 때, 정통 어르신의 웃음은 유난히 밝았고 눈가에 장난기가 깃들었다.“이분은 내가 소개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죠?”정안은 남하준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온화한 눈빛은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평온했다. “잘 알죠. 남 장군님. 오랜만이에요.”남하준의 뜨거운 마음은 그녀가 남 장군이라고 부르는 순간 완전히 부서졌다.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목을 가다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안 돌아가는 거야?”정안이 덤덤하게 말했다.“이미 M국으로 귀화했어요.”남하준은 정안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녀의 배에 시선이 멈추었다.정안이 떠난 지 5개월이 좀 지났으니 만약 임신했다면 아마 배가 산만하고 온몸이 부었을 것이다.현재의 그녀는 배가 나온 기미가 전혀 없었고 세련된 메이크업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었다.남하준이 호기심에 물었다.“어떻게 돌아왔어?”정안이 웃는 듯 마는 듯 대답했다.“Z국을 배신하고 도망쳤어요.”남하준은 심장이 조여오더니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예전에는 그가 아무리 붙잡아도 정안은 Z국을 배신하려 하지 않았다.이제 보니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안이 Z국을 배신하게 할 만큼 남하준이 중요하지 않았다.남하준의 말투가 약간 가라앉은 듯하더니 계속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정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남 장군님. 여기서 그런 얘기는 좀 적절하지 않죠?”정통 어르신이 얼른 끼어들었다.“그래요. 앞으로 두 사람 얘기할 시간이 차고 넘쳐요. 정안은 군전 그룹의 과학연구팀에 합류하니 앞으로 남 장군 자네가 정안의 상급자가 되는 거네.”정안은 웃으며 손을 내밀어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정안이 정통 어르신과 이야기하면서 돌아가자 남하준이 급히 물었다.“완아. 언제 입사해?”정통 어르신이 고개를 돌려 남하준을 보았지만 정안은 여전히 그를 등지고 몇 초 동안 생각하다가 덤덤하게 말했다.“몇 달 후에요.”남하준의 말투가 더욱 강해졌다.“안돼. 그건 너무 늦어. 내일 입사해. 나랑 비행기 타고 같이 그룹으로 가.”정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랫입술을 천천히 깨물며 참다가 괜히 눈시울이 젖었다.그녀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알려주고 싶었다.“오빠, 나 임신해서 태교에 전념해야 해요. 변경 지역으로 가서 아이 낳고 싶지 않아요. 가서 오빠랑 유미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요.”하지만 지금은 남하준이 그녀의 상급이라 어쩔 수 없이 그의 뜻에 따라야 했다.게다가 겨울 코트를 입고 임신 사실을 모두에게 숨겼으니 거절할 핑계도 없어 담담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내일 혼자 비행기 타고 가면 돼요. 장군님 귀찮게 할 필요 없어요.”정통 어르신은 어리둥절했다.감히 상급자에게 등을 돌리고 말하고 또 이렇게 싸늘한 태도로 일관하다니.정통 어르신은 속으로 감탄하며 계속 의식을 거행했다.30분 후, 리셉션이 끝났고 정상들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나갔다.대문의 복도 밖에는 소파와 의자가 늘어서 있었고 정상급 보좌관들과 비서들이 모두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유미와 류청이 일어났지만 남하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유미가 걱정스러운 듯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준이 왜 아직도 안 나오지?”“아마 정통 어르신과 얘기 중이시겠죠.”유미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내가 가봐야겠어.”류청이 다급하게 뒤쫓아갔다.“유미 씨, 그건 좀 곤란하죠!”응접실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는데 유미가 두 번째 문으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낯익은 그림자가 세 번째 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녀가 주의 깊게 보니 여자였다. 게다가 뒷모습이 약간 백완자와 닮았다.유미가 사색에 잠겨 있는데 남하준이 부리나케 걸어 나오며 주위를
남하준은 휴대전화를 들고 앞으로 나가며 명령했다.“따라오지 마.”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왜 그렇게 서둘러? 또 지윤 씨는 왜 찾아?”남하준이 뒤돌아보며 나지막이 쏘아붙였다.“따라오지 마.”유미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하게 말했다.“너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얘 데려가.”남하준이 류청을 가리키며 말하자 류청이 즉시 앞으로 가서 유미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유미가 몸부림치려 고함을 질렀다.“뭐 하는 거야? 하준이 지금 급해 하는 거 못 봤어? 분명 무슨 일 생겼다고. 내가 가서 해결해야 해.”류청이 어쩔 수 없어 하며 말했다.“도련님은 지금 그쪽 친구가 아니라 상급자예요.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유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멀리서 전화하는 남하준을 바라보며 긴장해서 물었다.“사적인 일?”“지윤이를 찾는 건 분명 사적인 일 때문이겠죠. 설마 업무적인 일로 찾겠어요?”“그렇다면 내가 더욱 도와야지.”류청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제발... 좀 그만 하세요. 도련님 걱정하는 것도 알고 좋아하는 것도 알겠는데 어떤 일은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면 안 돼요.”유미는 화가 나서 이가 근질근질했고 남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지윤 씨를 찾는 건 분명 백완자 때문일 거야. 그 여자는 이미 떠난 지 반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하준이 곁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녀?”류청은 침묵했다.강한 소유욕과 편집증을 보이는 유미를 보며 어쩔 수 없었다.만약 남하준과 유미가 서로 사랑했다면 남하준은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곁에 있으니 아마 매일매일을 평안하게 보냈을 것이다.전화 연결음이 울리고 남하준의 심장은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윤은 전화를 받자마자 쏘아댔다.“이 사람아. 나 지금 운전 중이야. 어지간한 일은 음성으로 보낼 수 없어?”남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나 남하준이에요.”지윤은 순간 당황했다.“죄... 죄
“아니. 난 안 변했어. 그대로야.”정안은 무신경한 태도를 보였다.“그래요?”남하준은 심호흡을 하고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참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어디야? 내가 갈게. 얘기 좀 해.”정안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평온했다.“내일 변경으로 떠나는 데다 지금 본가에 가서 태준 오빠랑 지우 보러 가야 해요. 남 장군님이랑 만날 시간 없어요.”남하준이 싸늘하게 웃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또 남태준.그녀가 영원히 잊지 못하는 남자는 항상 그의 넷째 형 남태준이었다.“그래.”남하준은 괴로워 숨을 못 쉬고 입으로 입김을 내쉬며 여전히 다정하게 말했다.“너 시간 날 때 만나자.”“그럼 이만 끊을게요.”정안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남하준은 손을 천천히 내리고 발끝에 쌓인 눈을 내려다보았다.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풀이 죽어 고목 아래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의 심장이 날씨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남하준의 통화가 끝나자 유미가 지체 없이 그에게 달려갔다. “하준아! 대체 무슨 일이야?”...같은 시각, 차 안.전화를 끊은 정안은 시들어가는 꽃처럼 차창가에 맥없이 기대어 눈시울이 촉촉하고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그들의 통화를 들은 지윤이 궁금해서 물었다.“왜 도련님 안 만나요?”정안이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말했다.“내일 그룹에 가서 입사할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만나는 게 좋아. 아니면 괜히 시끄러워질지도 몰라.”“뭐가 두려운 거예요? 제가 있잖아요.”정안은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너처럼 대단한 무술 실력이 없는 내가 배 속의 아기를 잘 보호하려면 유일한 방법은 아무런 사건사고에도 휘말리지 않는 거야.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돼. 내 맘 알겠어?”지윤이 그녀의 뜻을 깨닫고 긴장하며 물었다.“유미 만났어요?”정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목이 메어 한마디만 더 하면 울컥할 것 같았다.그녀는 유미를 만났다.그 여자는 남하준의 앞에 서서 그의 머리와 어깨의 눈송이를 부드럽
지윤은 이해가 가지 않아 오래 참았지만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언니 지금 도련님 아이도 임신했고 도련님도 아직 언니에게 미련이 남았는데 왜 쟁취하지 않는 거예요?”“언니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도련님은 바로 넘어올 거예요.”정안은 진지한 얼굴로 지윤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하준 오빠는 유미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아.”“그게 왜요?”정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윤의 둔한 머리를 두드렸다.“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일한다는 건, 그 사람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예비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지윤은 어느 정도 알아들은 셈이었다.유미가 남하준의 곁에 있는 한 정안은 그 혼잡한 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언니 앞으로 그룹에서 일하게 되면 도련님과 자주 마주칠 거고 계속 피할 수만은 없어요. 그리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어떻게 숨길래요?”정안은 불룩한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비행기가 착륙한 후 정안은 지윤과 함께 택시를 타고 군전 그룹으로 갔다.두 사람은 아무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행동했고, 출입문 경비원에게 증명서를 제출하고, 신원 정보를 입력하고, 지문 등을 확인했다.마지막으로 보안 검사를 통과하고 군전 그룹에 들어갔다.정안은 많이 와봐서 이곳에 익숙했다.그녀는 일부러 남하준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기숙사 아파트를 골라 입주했다.지윤이 짐을 챙겨주고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자 정안이 책을 내려놓고 문을 열러 갔다.“지윤아 나 신경 쓰지 마. 남은 건 내가 정리...”문이 반쯤 열리고 말도 다 하지 못했는데 정안은 문 앞에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굳어버렸다.남하준이 벌써 그녀가 온 걸 알았을까?정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지만 짐짓 덤덤하게 물었다.“도련님, 무슨 일이시죠?”남하준은 그
남하준이 소파에 앉았고 정안이 옆 의자를 그의 맞은편으로 끌어당겨 앉았다.두 사람은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남자의 눈빛은 뜨거웠지만 정안의 잔잔한 물결 같은 태도로 인해 간극이 벌어졌다.남하준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돌아왔어?”정안은 움찔하더니 말했다.“우리 집안일에 대해 얘기한다면서요?”남하준이 불쾌해하며 물었다.“그러니까 지금 우리 관계는 이렇게 간단한 안부 인사조차 할 수 없다는 거야?”정안은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으로 외투의 단추를 만지며 침묵을 지켰다.남하준은 그녀의 눈매가 처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은근히 마음이 아팠지만 더 이상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꾸었다.“한이서가 네 할아버지의 모든 사업을 인수한 후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시가총액이 10조 원 이상 증가했어. 지난 반년 동안 한이서는 기업과 자산을 차근차근 해외로 이전했어.”“대부분 산업을 해외로 이전했지만, 그 자산들은 아직 한이서 명의로 되어 있지 않아 네 할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시면 전부 네 할아버지 소유로 돌아갈 거야.”“자산은 일단 통제 가능한 범위에 있어.”“그동안 백인호는 인간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어. 그래서 네 가족 소식도 전혀 없고.”말을 마친 남하준은 조용히 정안을 지켜보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정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얼굴색은 어두웠고 외투의 단추는 거의 헐렁해졌다.남하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마음이 초조했다.“내가 계속 추적하고...”남하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안이 끼어들어 그의 이전 질문에 답했다.“나 돌아온 지 일주일 됐어요.”남하준은 움찔하더니 그대로 굳어졌다.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그녀가 마침내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 기뻤지만 또 그녀가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아 슬펐다.정안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평온한 척 고개를 들어 남하준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웃음을 지
“그 여자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몰라.”“하지만 분명 내 마음을 알면서도 자꾸 들리는 헛소문만 믿고 내가 다른 여자와 잘 어울린다며 내 상처를 짓밟고 있어.”남하준은 불쾌한 감정을 단숨에 쏟아낸 뒤 한마디 더 보탰다.“내가 본 최악의 여자야.”말을 마친 그는 일어나서 굳은 얼굴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정안은 그의 꾸지람을 듣고 나니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고 서러운 마음이 풀렸다.적어도, 그는 유미와 사귀고 있지 않았다.그런데 그녀가 정말 나쁜 것일까?아니면 남하준이 선을 지키지 못하는 걸까?정안이 몸을 돌려 급히 물었다.“어디 가요?”남하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문고리를 잡은 손도 멈춰 2초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군무기 팀 회의가 있어.”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정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남하준이 떠나는 뒷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배를 만졌고 마음이 쓰라렸다.‘아가야, 네 아빠는 여전히 우리 거인가 봐. 아빠에게 네 존재를 알려야 할까? 만약 알려주면 유미 이모도 알게 될 텐데... 애초에 백하린처럼 독하게 나와 우리를 괴롭힐까 봐 걱정이야.’정안은 아기가 뱃속에서 두 번 걷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온화하고 자상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배를 문지르며 속삭였다.“착하지. 널 위해서라도 엄마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야. 일단 조용히 지켜보자. 응?”아기가 또 두 번 움직였고 정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튿날 아침.정안은 서류를 챙겨 입사하러 그룹 본사에 왔고 지윤이 그 뒤를 따랐다.건물 1층 로비에 막 발을 들여놓았는데 공교롭게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유미를 만났다.정안을 보는 순간 유미는 마치 혈 자리가 눌린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얼굴빛이 흐려지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안이 대범하게 걸어 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유 비서님.”유미는 화를 억누르고 입을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