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는 심호흡을 하고 이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총을 거두고 낮은 소리로 백인호를 욕했다.“여자에 눈먼 자식! 지난번에도 이 총의 위력을 봤으면서 이번에도 들고 들어오게 하다니. 쓸모없는 놈!”그러자 정호는 돌아서 나가면서 명령했다.“시체 치우고 저 두 사람 나눠서 가둬.”“감히 여색을 탐한다면 나한테 거시기 잘릴 줄 알아. 들었어?”정호가 고함을 치자 부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네. 형님!”이윽고 건장한 사내들이 정안을 밀고 방을 나갔다.정안은 걸으면서 정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의사 좀 불러줘. 지윤이 내상 입었어. 제발 의사 좀 불러 달라고!”정호는 못 들은 척 점점 멀어져갔다.정안은 어쩔 수 없이 지윤과 다시 헤어지고 방에 갇혔지만 계속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내 말 들려? 의사 좀 불러줘! 내상 지혈약이라도 갖다 달라고. 제발 부탁이야!”반대편 방 지윤 역시 눈물이 핑 돌며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약간 울먹였다.“언니, 나 괜찮아요.”...어느새 밤이 되었다.정안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허기가 질 정도로 배가 고파서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안전을 걱정했고 지윤, 남태준과 지우를 걱정했다.문득 천둥소리가 났다.“우르릉!”“악!”정안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귀를 막고 다리를 오므렸다.그녀는 천둥을 무서워했다. 기억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천둥 치는 비 오는 날이 무서웠다.부모가 살해된 날, 그녀가 습격당했을 때, 비가 왔었다.물속에서 익사할 것 같은 느낌에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잠시 후 밖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정안은 이불을 잡아당겨 온몸을 덮고 다리를 조이며 이불 속에서 가늘게 떨었다.얼마나 지났는지 천둥도 멎고 비도 그쳤다.‘펑’작은 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미약했지만 정안은 똑똑히 들었다.정안이 이불을 젖히고 보니 방이 깜깜했다.설
정안은 손을 뻗어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잡아당기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따로 감금되었어요.”“정호는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보호하고 수사를 피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그게 무슨 말이죠?”“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어. 이 집에 없어.”정안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가슴이 꽉 막혀서 깊은 슬픔에 빠졌다.일전에는 그녀의 부모님, 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빼돌렸다.‘빌어먹을 백인호, 천 번 만 번 죽여도 모자랄 놈!’“그럼 다른 사람들은요?”남하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급해 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정안은 남하준을 100% 믿었다.그녀는 경계를 늦추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1분 1초가 지나고 정안은 코안에 남하준의 익숙하고 좋은 향기가 가득 찬 것을 느꼈다.그의 뜨거운 호흡이 그녀의 뺨에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고 그의 건장한 몸은 그녀의 지척에 떨어져 있었다.온몸에서 강한 남성호르몬이 뿜어져 나오는 그의 카리스마는 강렬하고 위압적이어서 사람의 핏줄을 팽창하게 했다.정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고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빠, 나 좀 놔주면 안 돼요?”남하준은 흠칫 놀랐다. 즉각 반응하고는 그녀의 몸을 풀어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두 사람의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으며 어두운 밤이라 서로의 안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정안은 조금 어색하여 그의 곁을 지나쳐 어둠을 더듬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너 태준이 형 Z국에 데려가려 했어?”남하준의 극심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데리고 가서 치료하려고요.”남하준이 침묵했다.정안은 그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또 입을 열었다.“오빠 부모님도 동의하셨어요.”남하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다면 나 절대 태준 오빠 포기할 생각 없어요.”남하준이 차디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바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정안은 문
“류청,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남하준이 명령하자 류청은 대답하는 시간까지 아껴서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지윤을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정안이 그 뒤를 따라 뛰쳐나갔다.그녀가 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남하준을 바라보며 긴장했다. “태준 오빠와 다른 사람들도 다른 방에 갇혔어요. 반드시 구해줘요.”남하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장이 은은히 아팠다.말을 마친 정안은 더 이상 누구도 돌볼 겨를이 없이 류청의 뒷모습을 쫓아 달려갔다.방에서 나온 남하준은 난간에 두 손을 얹은 채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 한가운데에 묶여 있는 악당들을 내려다보았다.다른 방에서는 폭탄 전문가들이 계속해서 폭탄을 찾고 있다.남하준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1층 방문이 열리고 지우가 남태준을 밀고 나왔다.남하준은 그윽한 눈빛으로 남태준을 바라보았다.“형.”남하준이 다가가 인사하자 남태준은 덤덤하게 말했다.“벌써 왔어? 소식 하나는 빠르네.”“완자가 제때 구조 요청을 보냈어요.”남하준이 지우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떼라고 손짓하자 지우는 손을 놓고 몇 걸음 물러났다.그는 휠체어 손잡이를 받아 남태준을 밀고 문을 나섰다.두 사람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완자는?”남하준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왠지 모를 질투가 솟구쳤다.“두 사람 서로에 대한 걱정이 남다르네.”이 말을 들은 남태준은 흠칫 놀라더니 침묵했다.왠지 질투 섞인 말처럼 들렸다.남하준은 그가 대답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지윤 씨가 다쳐서 병원에 같이 갔어요.”“지윤이가 누군데?”“완자 옆에 있는 경호원.”“아.”“형 완자랑 함께 Z국에 가서 치료받는다면서요?”“난 가기 싫은데 억지로 떠밀려 가는 거야.”“가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야죠.”“그래.”남태준이 대답했다.문밖에서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남하준은 뒷좌석에 남태준을 앉히고 휠체어를 집어서 차 트렁크에 넣었다.차량은 빗물 세례를 받으며 떠나갔다.어두컴
남하준의 깊은 눈망울이 어두워졌다.“나에 대해 잘 아네.”정호가 냉소를 짓더니 말했다.“도련님 옆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니 그 정도는 알고 있죠.”“그런데도 감히 나를 배신해?”정호는 턱을 치켜든 채 독한 모습으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돈을 벌겠어요?”남하준은 서서히 일어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글쎄. 목숨이 붙어 있어야 그 돈을 쓸 텐데 말이야.”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소파에 앉았다.정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무표정하고 냉담해 보였지만 사실 그는 마음이 아팠다.다년간 함께했던 전우의 정.오늘날,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은 결코 그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다.군전 그룹의 대열은 질서정연하게 범인을 차에 태우고 찾은 폭탄도 하나둘씩 방폭차로 옮겼다....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하루의 구조 끝에 지윤은 위험에서 벗어났다.진도훈이 병원에 와서 기운이 없고 수심이 가득한 정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지윤이 잠자는 동안 정안은 진도훈과 함께 긴 복도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돌발상황이 또 우리 계획을 망쳤어.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정안은 두 손을 꼭 맞잡고 기분이 한껏 다운됐다.“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M국에 남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 있고 싶고 엄마 아빠도 찾고 싶고요. Z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완자야...”진도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연구소는 물론 나라에서도 동의하지 않을 거야.”정안이 쓸쓸하게 웃었다.“그러니까요. 전 어쩔 수 없이 돌아가 연구를 계속할 수밖에 없겠죠. 앞으로 평생 아쉬움을 안고 살겠죠.”“Z국은 네 가족을 찾아 줄 거야. 그건 걱정 마.”“그럼 그 사람은요?”진도훈이 의문스러워 물었다.“누구?”“내가 사랑하는 남자요.”“그건 간단하지. Z국에 데려가. 비록 네 직업이 특수하긴 하지만 매달 부부 방문 기간은 있어.”정안은 젖은 눈동자로 진도훈을 바라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선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남하준이에요.”진
정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가족은요? 가족도 보잘것없어요?”진도훈은 침묵했다.“난 내 일을 사랑하지만 내 조국도, 가족도, 그 남자도 너무 사랑해요.”“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위대한 과학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국적을 옮겼고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었어요.”정안이 감회에 젖어 물었다.“지금 내 선택이 정말 맞는 거예요?”진도훈은 고개를 들어 정안을 보았다.그녀의 울적한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촉촉한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었다.그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사실 돌아올 수 없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정안은 흠칫 놀라서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진도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했다.“이리 와봐.”정안이 즉시 얼굴을 갖다 댔다.진도훈은 손으로 그녀의 귓전을 가리며 머리를 숙이고 수군수군 이야기했다.그의 말을 들은 정안은 큰 눈을 깜박이며 눈동자가 더욱 맑아지고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진도훈이 말을 마치자 정안은 활짝 웃으며 감격해서 진도훈을 바라보았다.“선배, 고마워요.”“방법은 이미 알려줬어.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지만 한번 시도해봐.”정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시도해보고 싶어요.”“그 사람이 동의할까?”정안의 얼굴이 축 늘어지더니 순간 자신감을 잃었다.“분명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왜? 그 사람 너 사랑하잖아?”정안은 가볍게 탄식했다.“순애보에요. 조금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이죠.”진도훈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그럼 방법을 잘 생각해봐.”“네.”정안은 진지하게 응수하더니 이내 생각에 잠겨 이 계획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궁리했다.점심에 지윤이 깨어났고 정안이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류청은 붉은 장미 한 다발과 과일 한 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을 왔다.빨간 장미꽃을 본 정안과 지윤 모두 넋을 잃었다.병문안에 웬 빨간 장미?정안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남하준이 그녀에게 국화꽃을 선물하는 것보다 더 용감했다.
류청이 즉시 대답했다.“네. 그러세요.”정안이 병실을 나가자 류청과 지윤은 조용한 분위기에 빠져 잠시 눈을 마주치며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류청이 급히 화제를 찾았다.“과일 먹을래요? 제가 사과 깎아 올게요.”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류청은 몸이 뻣뻣해지고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는 것 같았고 왔다 갔다 두리번거리다가 사과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또 허둥지둥 칼을 찾다가 돌아보니 칼이 과일 옆에 있었다.그의 어색함에 지윤은 피식 웃었다.3일 후, 몸이 회복된 지윤이 퇴원하는 날 류청이 또 그들을 데리러 왔다.류청의 차에 탄 뒤 정안이 물었다.“하준 오빠 지금 안성에 있어요?”“네.”“많이 바빠요?”“그럼요.”류청은 사실대로 대답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우리 도련님 안 바쁠 때가 어디 있어?’“그래요. 괜찮아요. 어차피 많은 시간을 뺏을 필요도 없고.”류청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저희 도련님 만나시게요?”“류청 씨, 나 금원으로 데려다주고 지윤이는 우리 집에 데려다줘요.”“네.”지윤이 의문스러워 물었다.“언니, 금원엔 왜 가요?”정안이 지윤의 귓가에 다가가 손으로 막고는 속삭였다.“도둑질하러.”지윤은 믿기지 않는 듯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뭐 훔치려고요?”지윤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정안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아직은 그녀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지윤은 더욱 궁금해서 정안을 빤히 쳐다보았다.‘대체 남하준의 무슨 물건을 훔치려는 거지?’‘무슨 물건이기에 훔쳐야 할까?’...인기척이 없는 깊은 밤, 검은색 승용차가 천천히 금원으로 진입했다.기사가 차에서 내려 남하준의 문을 열어주었다.“도련님, 집에 도착했습니다.”서류를 보던 남하준은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덮고 한 손에는 옆에 있는 양복 외투를, 다른 손에는 서류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남하준은 큰 저택으로 들어가며 기사에게 말했다.“퇴근해.”기사가 공손히 대답했다.“네. 안녕히 주무십시오.”남하준이
정안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내가 안 반가워요?”“그런 뜻 아니란 거 알잖아?”정안은 두 손으로 뺨을 괴고 그의 엄숙한 표정을 살피며 느릿느릿 말했다.“보고 싶어서요.”남하준은 어리둥절했고 마음이 들끓기 시작했으며 이유 없이 긴장했다.보고 싶다니?어떤 의미의 보고 싶다 일까?부탁이 있어서? 아니면 진짜 그리워서?남하준은 목이 좀 마른 것 같아 침을 삼키고 배탕을 한 모금 마시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배탕은 아주 달았다.그는 다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고 말했다.“완아,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나 오해할 만한 말 하지 말고.”정안이 오랫동안 생각해 보니 훔치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었다.차라리 구걸하는 것이 나았다.남하준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계속 고민했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열어 중요한 정보가 빠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정안의 긴장된 손이 식탁 아래에서 손톱을 힘껏 꼬집고 있었고 가슴이 마구 벌렁거렸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볼이 이미 뜨거워지고 부끄러워 한마디 했다.“하준 오빠, 나랑 잘래요?”그녀의 말이 막 떨어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정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뻗어 기웃거렸고 남하준은 황급히 허리를 굽혀 휴대전화를 빠르게 집어 들었다.먼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또 휴대전화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 행동이 다소 혼란스럽고 부자연스러웠다.그는 그녀의 대담한 발언에 진심으로 놀랐다.정안이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오빠...”그녀가 남하준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의자의 반대편에서 일어나 목이 마르고 말투가 약간 거칠었다.“백완자. 나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다. 네 머리로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진 않았을 텐데?”정안은 얼굴이 빨개지고 서러워하며 말했다.“무슨 말인지 알아요. 오빠는 내가 Z국으로 돌아가서 미래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거로 생각해서 내 순결을 지켜주고 싶은 거잖아요.”“알았으면 몸가짐을 똑바로 해
정안은 속으로 안 좋은 생각이 들어 긴장하며 물었다.“오빠 설마 거기 부실해요?”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니 남자의 자존심을 제대로 꺾었다.그는 잠시 멈칫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러자 정안이 당황해서 물었다.“정말이에요?”남하준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나 자극할 생각하지 마. 소용없어.”정안은 얼굴이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운데 이 남자는 의외로 냉정했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나서 물었다.“나 좋아한다면서요? 어릴 적부터 짝사랑했다면서 설마 모두 거짓말이에요?”남하준은 손을 뒤로하고 그녀의 손을 떼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그의 안색이 극히 어두웠고 목소리도 차가워졌다.“맞아, 너 좋아하고 사랑해. 너랑 함께 있고 싶은데 넌? 넌 나 좋아해? 너도 나랑 함께 있고 싶어?”정안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며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좋아하죠!”남하준은 어렴풋이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분노가 차서 물었다.“어떤 의미로 좋아하는데? 침대에서 욕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 아니면 옆집 오빠정도?”정안은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그게 뭐가 달라요?”“날 위해 남을 수 있어? M국에 남아서 내 옆에 있을 수 있냐고.”정안은 마음이 심란했다.또 이 질문이었다.그녀는 이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이 남하준에게 너무 잔인했다.만약 성공한다면 그녀는 아이와 함께 M국으로 돌아올 것이고, 실패하면 그녀와 아이는 Z국에 있고 그는 M국에서 홀로 견뎌야 할 것이다.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혈육과 생이별을 겪는 꼴이었다.정안은 양손으로 천천히 남하준의 팔을 잡고 그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오빠, 나도 M국에 남고 싶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돌아가야만 해요.”“그만해.”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허탈하게 돌아서서 서재로 향했다.정안이 급하게 뒤쫓아가서 두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