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는 화가 나서 몸을 부르르 떨며 주먹을 불끈 쥐고 꾹 참았다.“그 여자는 백완자가 될 수 없어.”남하준은 가볍게 말했다.“나에게 여자는 백완자밖에 없어.”정안은 고개를 숙이고 복잡한 심경으로 손가락을 문질렀다.지금의 그녀는 무척 감동했지만 마음이 아팠다.유미는 차갑게 웃더니 질투 섞인 어조로 조롱했다.“너 내가 아는 남하준 맞아?”남하준은 술잔을 들고 손을 뻗어 유미의 술잔과 부딪치며 그녀를 실망하게 했다는 의미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유미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말했다.“넌 백완자를 선택했지만 백완자는 너 선택하지 않을 거야.”“그러니까...”남하준은 그 말을 인정하며 씁쓸하게 대답했다.“이 문제는 언급할 가치도 없지.”정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 일어나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 화장실 다녀올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떴고 남하준은 이글거리고 애틋한 눈빛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유동진이 웃으며 말했다.“에이, 이게 뭔 벌칙이야? 하준이 고백 타임이지. 하준이 여자 마음 홀리는 능력이 점점 더 좋아지는데? 이런 거짓말도 하고.”남하준은 시선을 거두고 유동진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웠다.“나 어릴 때부터 꿈이 의사였어.”이 말에 현장에 있던 세 사람은 모두 멍한 눈으로 그를 놀라서 쳐다보았다.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남하준은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하고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말을 이었다.“태준이 형 꿈은 나라를 빛내는 군인이 되는 거였어. 늘 직위가 높을수록 권력이 높고 능력이 강할수록 책임이 커진다고 했어. 그렇게 하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유용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며 위대한 꿈을 갖고 있었지.”유미가 궁금해서 물었다.“두 사람 꿈 모두 위대해. 근데 넌 왜 의사가 아니라 태준 오빠가 원하는 군인이 된건데?”남하준은 눈을 늘어뜨리고 말했다.“완자는 어릴 때부터 태준 형을 좋아하고 숭배하고 우러러봤어. 태준 형이 아마 완자 우상이었을 거야.”지윤은 완전히 멍해졌다
지윤은 남하준이 너무 괴로워 계속 술로 마음을 달래는 걸 알았다.유미는 시무룩하게 식탁을 떠나 별장으로 향했고 마침 안에서 나오던 정안과 마주쳤다.유미는 그녀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얘기 좀 해요.”정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차분하게 바라보며 그녀가 말하길 기다렸다.유미는 마음을 가다듬더니 말했다.“나 하준이 좋아해요.”정안은 비록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고 나니 조금 괴로웠다.“알아요.”유미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니 그녀는 경국지색이라 할 수 없지만, 앳되고 둥근 얼굴을 하고 있어 귀엽고, 몸매도 좋은 편이고 성격도 좋고 목소리도 달콤했다.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재능도 있고 갑부의 손녀이기도 한데, 이런 여자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게다가 남하준은 어릴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고, 십여 년간의 정은 이미 뿌리 깊고 뼈에 사무쳤다.유미는 자신이 그녀와 겨룰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물었다.“하준이 사랑해요?”정안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몇 초 기다려도 여전히 답을 듣지 못하자 유미가 또 물었다.“앞으로 Z국에 가서 살아요?”“맞아요.”정안이 답하자 유미는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내 눈에 태준 오빠는 하준이랑 비교가 안 돼요. 어느 방면으로 봐도 하준이가 한 수 위죠. 어쩌면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도 모르겠네요.”정안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왜 갑자기 남태준을 언급하고 또 남하준과 비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그쪽은 좋아하는 남자가 있고, 돌아가고 싶은 나라도 있고 자기 사업과 인생이 있으니 여기에 속하지 않고 하준에게도 속하지 않죠.”유미는 거의 애원에 가까운 말투로 말했다.“그러니까 제발 하준이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말아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정안이 주먹을 천천히 쥐자 눈시울이 흠뻑 젖고 가슴 끝이 살살 아팠다.유미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확고하게 말했다.“하준이가 그쪽을 얼마나 사랑하든 그쪽이 떠나기만 하면 난 하준이가 그쪽을 잊게 할 자신 있어요. 1년이 걸리든, 1
정안과 유미는 앞뒤로 걸어서 자리로 돌아갔다.유동진은 진작 종이뭉치를 준비해놓고 다음 게임을 준비했다.“계속하죠.”정안은 남은 주스를 다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 나서 저 먼저 가볼게요. 재밌게 노세요.”지윤은 멍해져서 정안을 바라보다가 따라 일어섰다.정안이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고 돌아섰을 때 남하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정안은 멈칫했다. 앉아서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남하준은 손을 놓기 아쉬웠다.모두의 시선이 남하준의 손에 고정되었고 그의 얼굴은 잿빛이 되어 자제하고 침묵했지만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정안은 그의 손바닥 온기를 느끼고 가슴이 떨리고 은은한 통증이 밀려왔다.“오빠, 나 가봐야 해요. 할머니가 찾으세요.”정안은 핑계를 대고 천천히 손을 밀었지만 남자의 손바닥이 두툼하고 힘이 세서 그녀는 전혀 밀어낼 수 없었다.술을 마신 남하준의 고통은 알코올에 의해 100배 증폭되고 절제된 감정은 거센 파도처럼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다.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허탈한 표정으로 식탁 위의 빈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손가락은 조금씩 정안의 손목을 놓아주었다.그저 간단한 손 놓는 동작이었지만 남하준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숨을 쉬는 것조차 칼을 삼키는 아픔을 느꼈다.그의 손이 다 풀려 힘없이 흘러내리자 정안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인사했다.“나랑 지윤이 먼저 갈게요. 다음에 봐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바람을 맞으며 하나둘 가로등을 지나니 정안의 눈물이 후광에 비친 것처럼 맑고 투명하게 눈앞에서 뒹굴었다.정원의 식탁 앞에서 유동진은 정안의 뒷모습이 금원의 정원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남하준을 바라보니 그는 넋을 잃은 듯 산송장처럼 묵묵히 앉아 정안이 마신 빈 잔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조명이 어둡고 노랗게 변해도 남하준의 눈동자가 붉고 촉촉한 것을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유동진이 다
남하준은 술을 마시며 유미가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을 들으며 저릴 정도로 아파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하준아, 유미 말이 맞는 것 같아. 유미 말 들어.”유미가 일어나 남하준이 들고 있던 술을 덥석 빼앗았다.“그만 마셔.”남하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젖은 눈을 천천히 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자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유동진이 조용히 술을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불쌍한 우리 하준이. 완자 얼굴 한번 보려고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거잖아. 사람이 많으면 완자가 덜 불편해할 것 같아서. 근데 주스 한 잔 마시고 새우 한 입 먹고 가버렸네.”유미는 남하준의 옆에 앉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하준아, 넌 더 좋은 여자 만나야 해.”“그래. 유미 말이 맞아.”한참 후 남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울먹였다.“완자한테 내가 많이 부족해.”유동진은 깜짝 놀랐고 유미는 분해서 눈물을 쏟으며 울먹였다.“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가 뭐 그렇게 대단해?”“부족한 사람은 그 여자지. 안목도 없고 소중함도 모르고.”“하준아, 그 여자는 너 좋아한 적 없어. 기억을 잃은 후에 너랑 결혼하긴 했지만 그건 그저 당시 신분이 미천하고 생활이 어려워 의지할 곳이 필요했을 뿐이야.”“기억을 회복하고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는 삶과 좋아하는 직업도 있고 꿈의 나라도 있고. 그 여자는 너 눈곱만큼도 생각 안 해.”남하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유미야, 앞으로 다시는 완자 그렇게 말하지 마.”유미는 불쾌해서 말했다.“내 말이 틀렸니?”남하준이 일어나서 비틀대자 유미가 급히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그는 유미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나 머리 아파서 먼저 방에 가서 쉴게. 너희들 계속 먹어.”“내가 부축해 줄게.”유미가 또 부축했지만 남하준이 다시 밀어내고 차갑게 말했다.“됐어.”남하준이 비틀비
“유미야!”유동진이 외쳤지만 유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떠났다.유동진은 할 수 없이 혼자 술을 마시고 바비큐를 먹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백씨 저택.정안은 작은 박스를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인기척을 들은 여은수는 얼른 젓가락을 놓고 허둥지둥 방으로 향했다.정안은 할머니가 계란후라이를 먹다가 그녀가 돌아온 걸 보고 당황한 기색으로 숨는 걸 보고 잽싸게 달려가 여은수 앞을 막았다.여은수는 당황하고 어색한 눈빛으로 침을 삼키고는 애써 도도한 척 고개를 젖히고 정안을 보았다. 그 으스대는 모습은 마치 ‘난 절대 사과 못 해. 어쩔 셈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정안이 오만한 할머니를 바라보니 마치 잘못한 아이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습이었다.정안은 피식 웃었다.“할머니, 왜 자꾸 나 피해요?”여은수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지 않자 장안이 다시 그녀 앞으로 돌아가 손에 박스를 보이며 부드럽게 달랬다.“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 사 왔어요.”여은수가 차갑게 말했다.“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손녀가 할머니 좋아하는 디저트 사 왔는데 왜 못 받아요?”여은수는 차갑게 웃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하게 말했다.“나한테 잘해주는 척하지마.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아니까.”정안은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제가 무슨 생각하는데요?”여은수는 다시 피하더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투덜댔다.“그래. 내가 바보다. 내가 눈이 멀어서 자기 친손녀를 못 알아봤어. 그래서 무례하게 돈 가지고 너 모욕하고 욕하고 또...”여은수는 말하면 할수록 괴로웠다. 마음속의 억울함이 죄책감으로 변해 목이 메어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런 사람이야. 교양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사람 귀찮게 하지. 난 원래 이런 사람이고 변하지 않아. 네가 나 미워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어.”정안은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는 분명 화가 나 있으면서도 전부 죄책감 가득한 말만 하고 있었다.정
정안은 애교 부리는 투로 말했다.“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전에 가짜 손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셔서 내가 얼마나 질투한 줄 알아요? 그때 내가 할머니 손녀라고 얼마나 말씀드리고 싶었다고요?”여은수는 입술을 깨물며 소리 없이 울고 몸이 떨렸다.“그때는 가짜 백하린을 통해 엄마 아빠 생사를 조사하려고 계속 꾹꾹 참았어요. 내가 미안해요 할머니. 잘못했어요.”정안이 말하면서 여은수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자 여은수는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정안은 어렸을 때부터 안고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는데 여섯 살 이후로 이렇게 붙어 있은 적이 없었다.“할머니, 나 용서해 줄 거죠?”장안은 부드럽게 여은수의 손을 흔들며 계속 애교 부렸다.“할머니. 이번 한 번만. 네?”여은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흐느끼고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사과할 사람은 이 할미야.”정안은 활짝 웃더니 한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할머니 잘못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난...”여은수가 고개를 들어 정안을 보니 두 눈은 이미 붉고 촉촉해 있었다.정안은 마음이 아파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달랬다.“나랑 같이 거실에 가서 앉아 있어요. 할머니 좋아하는 디저트 사 왔는데 우리 같이 먹어요. 네?”여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긴장하여 고개를 가로저었다.“할머니 화 안 났어. 평소에도 바빠서 힘들 텐데 방에 돌아가 쉬어. 난... 혼자 먹으면 돼.”정안은 할머니가 여전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눈물을 반짝이며 여은수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가서 지윤이 건넨 디저트를 열며 말했다.“싫어요. 난 할머니랑 같이 있고 싶어요.”여은수는 놀라서 정안을 바라보았고 정안은 디저트를 여은수의 입가에 갖다 댔다.“할머니. 아~”여은수는 깜짝 놀라 디저트를 보더니 곧바로 입을 벌려 먹고 다시 정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긴장해서 물었다.“설마... 너도 가짜 손녀 아니냐?”
정안이 급히 해명했다.“나랑 하준 오빠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는데 헤어졌다니요?”“나 때문에 너희가 이혼했잖아?”“혼인신고는 다른 신분으로 했으니 그 결혼은 무효죠.”여은수는 여전히 자책했다.“너랑 하준이는 반년 넘게 부부로 지냈잖아?”정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저 유명무실한 부부였고 부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여은수는 경악하며 정안을 바라보았다.정안은 애써 괜찮은 척 디저트를 한 입 먹더니 여은수에게도 하나 건넸다.“나랑 하준 오빠는 불가능해요.”“왜 불가능해? 하준이도 너 좋아하고 너도 하준이 좋아하잖아? 서로 마음도 맞고 집안끼리도 오래 알고 지냈으니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 아니냐?”정안은 여은수의 손을 끌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속삭였다.“제가 앞으로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여은수가 엄숙하게 말했다.“반년이 지나도록 부부 일을 하지 못했으니 하준이 몸이 안 좋은 거 아니냐?”정안은 어이가 없었다.“그런 거 아니에요. 할머니. 함부로 넘겨짚지 마세요.”여은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노기에 차서 말했다.“그럼 마음이 변한 게 틀림없다. 내가 하준이랑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안 돼요. 할머니. 절대 찾아가시면 안 돼요.”정안이 황급히 달랬고 여은수는 묵묵히 어떻게 두 사람의 사이를 회복시킬까 생각했다....뉴빌리지, 정통 어르신의 저택.그는 손에 든 보고서를 보고 흥분하여 손가락을 약간 떨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잘됐네. 너무 잘됐네. 드디어 정안을 찾았어!”그는 고개를 들어 남하준을 올려다보며 흥분해서 말했다.“역시 남 장군이야. 드디어 정안을 찾았다니. 그런데 왜 사진이 없나?”남하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주 중요한 인물이라 사진을 넣으면 신분이 노출돼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정통 어르신은 군의 기밀을 이해했다. 어떤 것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그럼 앞으로 어떡할 건가? 정안이 우리 M국에 합류하도록 설득할 자신이 있나?”“정안은
“나도 알면 안 되나?”정통 어르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그래. 이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국가의 번영과 부강을 위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를 꼭 붙잡을 수 있기를 바라네.”...며칠 후.석양이 드리우고 따사로운 노란빛의 그림자가 흩뿌려져 온 대지를 감쌌다.백씨 저택 거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정안은 소파에 기대어 책 속의 복잡한 기구들을 골똘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완자야! 누가 왔게?”여은수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안은 생각을 중단하고 고개를 문 쪽을 돌렸다.여은수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뛰어 들어왔고 그녀의 뒤에는 남하준이 뒤따랐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여전히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넋을 잃은 정안은 책을 들고 일어섰고 심장이 마구 나대기 시작했다.순간 정안은 며칠 못 보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무엇인지 체감하게 되었다.계속 보고 싶었지만 만날 이유도 핑계도 없었다. 그런데 남하준이 먼저 찾아올 줄이야.“오빠.”정안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손에 책을 탁자 위에 놓았다.남하준이 그녀에게 다가가니 깊은 눈동자가 물처럼 부드러웠고 따스함이 뒤섞여 있었다.“바빠?”남하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정안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남하준이 탁자 위에 놓인 그녀의 책을 훑어보니 표지는 세계 최첨단 전투기 무기 그림으로 그가 처음 보는 글씨체였다.어느 나라의 무기 책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 심오한 정도는 가히 상상할 수 없었다.“나 할 얘기 있는데 같이 나갈래?”남하준이 묻자 정안이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두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는 이미 확실히 정리했는데 그녀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정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은수가 달려들어 정안을 남하준에게 휙 밀었다.“어서 같이 나가. 안 급하니까 천천히 얘기 나눠.”할머니에게 밀린 정안은 그대로 남하준의 품속으로 들어갔다.남하준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고 그의 따뜻하고 듬직한 품에 닿자 정안의 볼이 순간 뜨겁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