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진화연 곁으로 가서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저 여자는 정말 서다인이 아니에요. 방금 잡혀간 사람이 바로 진짜 다인이에요. 아주머니 친딸도 못 알아보시는 건 아니죠?”“간첩이 어떻게 내 딸이야!”진화연은 통곡하며 괴로워했고 슬픈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여전히 아쉬워하며 정안을 바라보았다.“너야말로 내 딸이야. 다인아! 네가 내 딸 맞잖아!”지우는 진화연을 부축하고 떠났다. “울지 마세요. 아주머니 딸이 아니라 화가 지완이에요. 피아노도 칠 줄 알고 8개 국어도 구사할 수 있고 천문 지리에 밝고 화학 무기에도 정통해요. 아주머니 딸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우리 현실을 받아들여요.”진화연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는 가면서 정안을 바라보았다. 지난 3년간의 모녀 인연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하객들은 모두 소씨 가문의 안배로 천천히 떠나갔고 여은수는 구석 소파에 앉아 축 늘어진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 보였다.정안은 지윤과 함께 천천히 여은수 곁으로 걸어갔다.“할머니.”정안이 조심스럽게 인사했다.여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반짝이며 여전히 슬픔 가득한 눈이었다.하지만 이 감정들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잡혀간 간첩 때문이었다.심지어 여은수의 눈에서 정안이 그녀의 손녀를 해쳤다는 분노가 가득해 보였는데 정안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정안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그녀의 무릎을 만지고 그녀의 눈가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나야말로 할머니 손녀잖아요. 나 성형한 적 없고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자세히 한번 봐봐요. 어릴 때랑 많이 닮았죠? 엄마랑 많이 닮았죠?”여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안의 손을 멀리 밀어내고 일어서더니 차갑게 돌아서 천천히 떠났다.지윤은 고집불통인 이 할머니를 보며 화가 나서 이가 근질근질하여 욕이 나갈 뻔했다.정안은 부랴부랴 일어나 떠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
남하준은 씁쓸하게 웃더니 말이 없었고 기가 푹 죽었다.정안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남하준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보고 그녀도 슬펐지만 반드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하준 오빠.”정안은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 나른한 목소리에 고통스러운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나 집에 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상황을 잘 설명해 드리고 Z국으로 돌아갈 거예요.”남하준의 얼굴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웠다. 깊고 어두운 눈에는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호흡도 흐트러져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그저 가만히 정안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렇게 쥐 죽은 듯한 고요가 흘렀다.정안은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 가문 재산 다 포기했어요. 그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래 사시기를 바랄 뿐이에요. 앞으로 두 분 재산을 나라에 기부하든, 다른 사람에게 주든 난 다시 M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남하준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 숨을 쉬더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부모님은 안 찾아?”“찾아야죠. 아직 살아계신다면 아마 Z국에 있을 거예요.”“너...”남하준은 괴로운 듯 입을 열었지만 곧 목이 따갑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더 이상 그녀를 만류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가슴에서 북받치는 고통이 순간 밀려왔고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정안을 바라보며 남하준은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반짝였다.그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어 별이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았다.주위는 온통 시끄러운 소리였고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천장을 올려다보는 남하준은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밀려와 애써 눈물을 억누르고 걷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에 빠졌다.한참 후 하객이 다 떠나고 남은 종업원이 짐을 정리하고 있다.조용하고 텅 빈 식장, 지윤은 이미 멀리 물러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남하준은 뜨거운 입김을 내뿜더니 말했다.“완아. 서로 일 얘기는 하지 말고 아
정안은 움찔하더니 그대로 몸이 굳었다.눈물이 그녀의 시선을 흐리게 했고 그녀의 마음은 쥐어짜는 듯 아팠다.알고 보니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가 바로 남하준이 오랫동안 찾던 사람이라는걸. 그건 정통 어르신이 그에게 준 중요한 임무였다.그런데도 왜 모른 척 했을까?정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다가 두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파묻고 흐느꼈다.“미안해요. 오빠.”남하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내가 얼마나 바란 줄 알아? 네가 나한테 호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득이한 상황 때문에 나 거절했길.”정안은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무아지경으로 통곡하고 있었다.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품에 안겼는지 몰랐다. 따스하고 편안한 그의 품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커다란 미련도 주었다.그녀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품에 평생 기대고 싶었다.지금까지 이토록 이 남자를 욕심냈던 적이 없었다.“도련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류청의 목소리가 들렸고 정안이 반응하기도 전에 남하준은 그녀를 놓아주고 결연히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났다.그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눈빛 하나 없이 이렇게 단호하게 그녀를 놓아주었다.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늠름하고 멋있었다.그러나 그는 자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정안은 넋을 잃고 있었다.눈이 빨갛게 붓고 약간 따끔거릴 정도로 울어 내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지윤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도중에 방해하지 않았다.백씨 저택에 돌아오니 집사와 도우미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할아버지의 명령 때문인지 뉴스의 힘인지 모르지만 이미 전 세계가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모두 그녀가 진짜 백씨 가문 손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만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여은수는 식음을 전폐하며 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었다.다음날,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방을 나서거나
“그건 할머니가 너무 자주 오셔서 확실히 공부에 방해됐단 말이에요.”“그게 할머니가 널 사랑하는 방식이었어. 근데 네 행동은 확실히 할머니에게 상처를 주었지.”정안은 여태껏 모르고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시자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백진이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사준 선물을 넌 뜯지도 않고 사물함에 넣어뒀어.”정안은 말이 없었다.그녀는 할머니가 주는 선물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선물에 관심이 없었다.그녀는 공부, 독서, 기구, 천문지리, 지식에 관한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할머니는 다양한 옷과 치마, 곰인형, 장신구, 보석, 가방, 신발, 사치품, 심지어 화장품까지 선물하셨다.“할머니가 너랑 얘기하면 몇 마디 하기도 전에 넌 인내심을 잃었어.”백진은 아내의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하지만 나랑은 밤새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지.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다. 할머니는 가방끈이 짧아 집안의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이웃의 가십거리만 얘기했지. 하지만 그게 할머니 세상이었어.”정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마음이 괴로웠다. 한 번도 자신의 그런 행동들이 할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그래도 할머니는 널 사랑했어. 널 너무 사랑해서 가짜 손녀가 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다.”“가짜 손녀는 더 이상 공부에 몰두하지 않고, 할머니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연구도 안 하고 또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하지 않으니까.”“말주변이 좋아 늘 할머니를 기쁘게 해줬어. 할머니가 입까지 가져다준 간식도 먹고,할머니가 사주신 선물도 잘 받고, 할머니가 말하는 가십거리도 잘 들어줬어. 할머니에게 달라붙어 뽀뽀하고 안아주고, 네가 지루하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같이 해줬거든. 그게 바로 네 할머니가 원하는 손녀였어.”“너를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커서 돌아온 손녀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자신을 싫어하는 손녀를 말이야.”정안은 고개를 들어 두 손으로 눈물
10년 만이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계산하면 정확히 10년이었다.그녀는 남하준을 10년 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녀를 10년 동안 사랑했고 기다렸다.비록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도 계속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정안은 더 이상 밥이 넘어가지 않아 휴대폰을 들고 일어났다.“할아버지 천천히 드세요. 저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날게요.”“그래.”정안은 휴대전화를 들고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고 침대 가장자리에 가서 앉았다.남하준의 번호를 눌렀지만 주저하며 보고 있었고 손가락은 다이얼 버튼에 굳어 있었다.그가 보고 싶었다.고작 이틀 보지 못했지만 너무 보고 싶고, 목소리도 듣고 싶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늘 이성적인 그녀는 여태껏 감정에 얽매인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갈등을 느끼면서도 손가락은 말을 듣지 않고 다이얼을 눌렀다. 연결음이 울리자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신경이 곤두서 손바닥에 땀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연결음이 몇 번 울리더니 남하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완아, 무슨 일 있어?”정안은 그의 말에 좀 언짢아졌다.“무슨 일 없으면 전화하면 안 돼요?”남하준은 침묵했다.전화기 너머로 남하준은 멍해 있었다. 그녀는 늘 무슨 일이 있어야만 그에게 전화했는데 이번엔 그저 그와 대화하고 싶었던 걸까?그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번졌다.“당연히 되지.”정안은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다. 긴장하고 부끄러운 듯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고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 못했고 그녀도 마땅한 화제를 찾지 못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남하준이 먼저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밥은?”“먹었어요.”“할아버지와 할머니랑은 잘 지내고?”“할머니랑은 아직 그래요.”“그래. 시간이 필요할 거야.”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대답했고 이 화제는 그렇게 끝이났다.남하준은 또 침묵 속에 빠졌다. 그제야 정안은 말주변이 없는 그가 계속
지윤과 함께 온 정안은 금원에 들어서자마자 유동진 남매를 만났다.그들에게 지윤을 간단히 소개하고 네 사람은 앉아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고 정안은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하준을 찾았다.유미가 그녀의 시선을 파악하고 느릿느릿 말했다.“하준이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고 있어요.”정안은 놀라서 물었다.“오빠가 직접요?”유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셰프들이 모두 해고됐고 마땅한 셰프를 구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하준이가 직접 해야죠.”정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제가 가서 도울게요.”유미가 즉시 일어나 그녀를 잡아당기며 시큰둥한 말투로 말했다.“그냥 앉아 있어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부잣집 아가씨가 가면 괜히 방해만 될 거예요.”옆에서 이 말을 들은 지윤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이마를 찡그리고 유미를 보며 그녀의 질투를 느낄 수 있었다.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꾹 참고 앉았다.그때, 진중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정안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큰 쟁반을 들고 걸어 나오는 남하준은 뜨겁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안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정안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오빠.”남하준은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하고 음식을 내려놓고 주스 한 잔을 정안 앞에 놓았다.“네가 좋아하는 생과일주스.”정안은 약간 감동되고 수줍기도 했다.“고마워요, 오빠.”유미, 유동진, 지윤 세 사람은 모두 남하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탄산음료와 맥주를 마시지만 정안은 갓 짜낸 생과일주스를 마실 수 있었다.이건 명백한 차별대우였다.남하준은 쉬지 않고 화로를 돌려 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유동진이 말했다.“하준아, 네 부하한테 구우라고 하고 넌 이리 와서 앉아.”“내 부하들은 나라를 위해 일하지 내 머슴이 아니야.”그의 말에 유동진은 말문이 막혔다.정안은 그런 남하준의 생각과 일 처리 방식이 맘에 들었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하준 곁으로 가 말했다.“내가 뭐 좀 도울까요?”남하준은
정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괜찮은 척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나 신경 안 써.”지윤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정말요?”정안은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모습을 한번 쳐다보더니 마음이 무거워졌다.“사실 저 두 사람 잘 어울려. 집안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또 모두 M국 지도자이니까 공동한 화제와 꿈을 갖고 있겠지.”지윤은 그녀의 말에 담긴 질투를 알아채고 이것이 그녀의 진심임을 알아챘다.“언니, 다시 고민해봐요.”지윤의 말을 들은 유동진이 물었다.“지금 누구 얘기해요? 뭘 고민해요?”정안이 엷게 웃었다.“별 것 아니에요.”지윤은 맥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내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동진이 정안에게 다가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이제 어떻게 불러야 하죠? 백하린? 백완자?”“그냥 완자라고 불러주세요. 백하린이란 신분은 이미 10년 전에 사라졌어요.”“왜요?”“Z국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거든요.”“백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데 왜 국적을 옮겼어요?”유동진은 궁금증이 더해져 긴장한 말투로 또 물었다.“그럼 앞으로 Z국에 정착할 생각이에요?”정안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주스를 들고 유유히 마셨다.유동진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화제를 바꾸었다.“하준이랑은 정말 인연이 있는 거네요. 기억을 잃은 후에도 결혼했으니 말이에요.”정안은 엷게 웃으며 여전히 침묵했다.“듣자 하니 하준이가 전에 그쪽을 엄청 좋아했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동진 오빠, 우리 다른 얘기 할까요?”유동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그러죠 그럼.”그때 남하준이 구워진 해산물과 고기를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유미도 따라와 앉았다.“나랑 하준이 솜씨 한 번 맛봐요.”지윤은 망설임 없이 집어서 먹더니 예의 바르게 칭찬했다.“맛있네요.”남하준은 새우 두 마리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고는 정안의 접시에 놓았다.“방금 네가 구운 거야. 먹어봐.”
얼굴이 뜨거워진 정안은 시선을 옮겼다.“진실게임.”유동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이상형이 뭐야?”지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이것도 물음이라고 물어? 뻔한 거 아닌가?’“기회 낭비했네요.”지윤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고 유미는 기대에 차서 바라보았다.남하준은 정안을 한 번 쳐다본 뒤 덤덤하게 말했다.“백완자 같은 여자.”유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뒤늦게 반응한 유동진은 그제야 자신이 기회를 낭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여기서 누가 남하준이 백완자를 좋아하는 걸 모를까?정안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후끈후끈해 어색하게 주스를 마셨다.유동진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아니야. 이 질문은 무효야. 네가 완자 씨 좋아하는 거 누가 몰라? 내가 다시 질문할게.”남하준은 보기 드물게 여유롭고 느슨해 보였다.“물어봐.”유동진이 막 입을 벌리려는데 유미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그녀는 다급하고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일과 사랑 중에 뭐 선택할 거야?”그녀의 물음에 남하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지윤과 유동진도 멍하니 놀라서 유미를 바라보다가 안색이 안 좋은 남하준을 바라보았다.그야말로 독한 질문이었다.급해 난 지윤이 나서서 말했다.“무슨 질문이 그래요?”유미는 불쾌한 듯 지윤을 흘겨보았다.“진실게임은 뭐든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당신...”지윤이 화가 나서 말을 잇지 못하고 정안을 올려다보니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남하준은 심호흡을 하고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가슴이 답답했다.유동진이 급히 어색함을 달래려 했다.“질문 바꿔. 바꿔.”하지만 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안 바꿔. 하준아. 둘 중에 골라봐. 일이야, 사랑이야?”정안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연히 일이죠.”유미는 화가 나서 정안을 노려보았다.“난 하준이한테 물었어요!”정안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게 오빠 답이에요.”“그쪽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준이 뇌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어요?”정안은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지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백건을 바라보았다.백건은 긴장하며 침을 삼키고 지우가 청혼서를 돌려줄까 봐 두려웠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슬쩍 바지를 만졌다.지우가 청혼서를 들더니 말했다.“건아, 사실은...”지우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백건은 긴장감에 허리를 굽혔다.“제가 아주머니보다 더 서연이를 아껴줄게요. 부디 허락해주세요.”지우는 어리둥절했고 남태준은 싱긋 웃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건이가 아주 놀랐나봐.”지우는 서둘러 해명했다.“난 이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던 거야. 우리 가족들은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백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어서 앉아.”지우는 자리에 앉아 손을 뻗어 백건도 앉으라고 했다.자리에 앉은 백건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눈에 띄게 긴장한 백건의 모습에 집안 어른들은 모두 기뻐했다.특히 몇몇 큰아버지들은 집안에서 가장 아끼는 공주님이 M국의 갑부와 결혼할 수 있고, 심지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남자라고 생각하니 더욱 만족스러웠다.모두들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남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와. 웬 선물이 이렇게 많아요? 이거...”말을 반쯤 마친 그녀는 이미 남우영을 따라 거실로 갔다.백건을 보자마자 그녀는 얌전하게 변했다. 장난기 많고 발랄하던 모습의 그녀는 곧 부끄러움에 휩싸여 긴장한 채 백건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눈빛은 뜨거웠다.“이거 건이가 가져온 예물이야.”허윤미가 말했다.예물이라는 말을 들은 남서연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더욱 부끄럽고 긴장했다.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지우는 딸의 반응을 보고 또 백건을 보더니 아무래도 두 사람이 연인 사이 같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수줍음이 감돌고 있었는데 마치 썸을 타는 시기 같았다.허윤미가 또 입을 열었다.“서연아, 며칠 후에 너도 선물을 갖고 정식으로 건이 부모님께 인사드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양쪽 가족
백건은 모든 예물을 갖고 차에 올라 별장을 떠났다.유승아는 서윤아를 부축한 채 별장 문에 서서 떠나가는 차를 보며 안색이 극히 어두웠다.서윤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유승아는 분노가 점점 끓어올랐지만 꾹 참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주머니, 서연이는 곱게 자란 공주님이고 건이와 어울리지 않지만 건이가 좋아하니 허락해주세요. 정말 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전 괜찮아요.”유승아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서윤아가 안쓰럽게 여겨 더욱 열심히 도울 줄 알았다.그런데 서윤아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우리 건이와 결혼하기에는 서연이가 아깝지.”유승아는 어리둥절해 하며 서윤아를 바라보았다.곧 서윤아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서연이는 온실에서 작은 화초라 백지장처럼 단순해. 내 아들이 아니라 자기처럼 단순한 남자를 만나야 해.”그 말인 즉, 백건에게는 단순하지 않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뜻인가?예를 들면 신분, 성격이나 능력 같은 것...유승아는 마침내 서윤아가 남서연을 좋아하지만 왜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아들을 내조할 수 있는 사업적 파트너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듣기 싫은 말로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자였다.유승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서윤아처럼 똑똑한 사람은 유승아가 단순하지 않고 수단이 있고 정치적 힘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그녀가 의심하고 있을 때, 서윤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너희 둘 결혼식을 책임질 테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유승아는 막막한 척 말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서윤아는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 미소는 또렷하게 말해주고 있었다.“넌 똑똑한 애니까 알고 있잖아.”서윤아는 말없이 천천히 별장을 떠났고 유승아가 서둘러 쫓아갔다.그녀는 당연히 이해했다.결혼식은 이미 준비되었고 그녀는 백건과 남서연의 혼사를 망치고 그들의 감정을 깨뜨리기만 하면 순조롭게 백건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유승
여자는 크면 집에 묶어둘 수 없는 법.남서연은 기쁨에 젖어 있었지만 가족들이 모두 자신의 혼사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왜냐하면 백건과 결혼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반드시 그의 부모님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으니....다음날 백건은 이미 푸짐한 예물을 준비했다.모두 직접 준비한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거실에서 하현우는 열심히 예물을 체크하고 있었다.그때 거실문이 열리고 유승아가 서윤아를 부축해 들어왔다.하현우는 들어온 사람을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사모님, 승아 씨 오셨어요?”서윤아는 온화하게 웃었다.“이거 승아에게 주는 예물인가?”하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백건이 빨리 나오기만을 기도했다.서윤아는 하현우 앞에 다가가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물었다.“내가 묻잖아?”하현우는 바짝 긴장해 대답했다.“서연 아가씨에게 주는 예물입니다.”유승아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그러나 서윤아는 피식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승아네 집에 갖다 주게.”“하지만...”하현우는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았다.서윤아는 소파에 앉아 차갑고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볼 필요 없어. 내가 갖다 주라면 갖다 주면 돼. 그 녀석 허락받을 필요 없어.”말을 마친 서윤아는 유승아에게 손을 내밀었다.“승아야, 앉아.”유승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윤아의 곁에 앉아 나지막이 말했다.“아주머니, 이건 건이가 남씨 가문에 주려고 준비한 예물이잖아요. 하 비서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건이와 결혼하는 여자는 너이니 당연히 이 예물도 네 것이지. 나도 서연이를 아주 좋아하지만 아직은 건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어.”“사업적으로 건이를 도울 수 없고 또 일상생활에서도 건이가 서연이를 돌봐줘야 해. 너만큼 성숙하지도, 능력이 강하지도 않아. 게다가 우리 두 가문은 친척 관계잖아.”백건은 방문을 나서서 양복의 커프스를 정리하면서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그의 싸늘한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워 뼛속을 파고들 것 같았다.“서연이는 나를 행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백건은 차에 올랐고 차량은 서서히 남씨 본가를 떠났다.뒷좌석에서 백건은 한마디 말도 없이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하현우도 기뻐하며 말했다.“축하합니다. 대표님.”“고마워.”한 번도 이렇게 대답한 적 없었는데 보아하니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하현우는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다.“대표님, 근데 사모님 고비는 어떻게 넘기실 거예요?”백건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리고 차 안은 말이 없었다....남씨 본가 거실.모든 사람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남태준과 지우는 딸이 가족들 앞에서 백건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듣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남서연은 가족에게 둘러싸여 불심 검문을 당했다.“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만났어? 진도가 왜 이렇게 빨라? 갑자기 결혼 얘기까지 나오다니?”이러한 문제에 대해 남서연은 모두 털어놓았다.“우리는 정식으로 만난 적 없어요. 제가 어릴 적부터 오빠를 짝사랑했어요.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그럼 건이는 어떤 생각인데?”“오빠도 저와 결혼하고 싶대요.”남태준은 주먹을 쥐며 격분했다.“넌 단순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야. 분명 백건 그 자식이 오랫동안 음모를 꾸민 게 틀림없어.”지우가 나서서 말렸다.“당신 화부터 내지 말아요. 건이가 음모를 꾸몄든 아니든 인품은 좋은 애잖아요. 가짜 약혼녀 유승아를 빼고 다른 스캔들도 없었고.”남태준은 딸이 아까워 격노하며 물었다.“건이는 차갑고 예민해서 말도 잘 안 하는데 어떻게 우리 서연이와 어울려?”지우가 답했다.“난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서연이는 어릴 때부터 단순하고 걱정 없이 잘 웃으니 예민하고 차가운 건이 성격과 딱 상보적이잖아요.”허윤미는 시무룩해서 말했다.“하지만 서연이는 아직 너무 어려. 이렇게 일찍 결혼할 필요 없어.”“맞아요. 저도 동의해요.”“맞아요. 너무 어려요. 결혼을 서두를 필요 없어요.”남우
남서연은 빠른 걸음으로 뛰어내려 계단 모퉁이에 서서 백건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오빠, 우리 결혼해요!”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또렷했다.떠들썩한 거실이 폭탄을 떨어뜨린 듯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입을 딱 벌린 채 남서연을 충격적으로 바라보았다.온 집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드러난 충격이 그에게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그는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돌아서서 남서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반달 눈을 한 채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세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백건이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면 남서연은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있었다.남서연은 다시 한번 외쳤다.“오빠, 우리 결혼해요.”백건은 눈가가 흠뻑 젖어 그녀를 향해 입술을 오므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소리로 대답했다.“좋아!”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남우영이 일어나서 말했다.“난 반대야. 내 삼촌이 내 사촌 동생과 결혼한다니. 이게 말이나 돼?”남창민이 남우영의 손을 덥석 잡아당겨 소파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넌 네 결혼이나 신경 써. 네 삼촌과 서연이 일은 걱정할 필요 없어.”남우영은 고민 끝에 남서연의 아래에 뛰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서연아, 지금 두 사람 농담하는 거지? 두 사람.. 두 사람 늘 차갑고 낯선 사이였잖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너 진우석이랑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백건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걸어가서 남우영의 목을 조르고 소파로 끌고 갔다.장면이 좀 난처하게 되었다.백건은 어른들께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오늘 급하게 왔어요.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다음에는 정식으로 혼수 예물을 갖고 찾아뵙겠습니다.”허윤미가 서둘러 말했다.“그래. 어서 돌아가. 우리도 서연이와 잘 얘기해볼게. 너무 오냐오냐 키
“왜 내 방에 들어왔어요?”남서연은 긴장해서 그를 내쫓으려 했다.“얼른 나가요. 오빠가 몰래 내 방에 들어온 거 가족들이 알면 큰일 나요.”백건은 이미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오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더라도 결과를 얻어야 했다.“가족들에게 우리 결혼에 대해 직접 말하겠다고 시간을 달라며?”백건은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눈 밑에 슬픔이 가득했다.“방금 네 할아버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눠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던데?”“그게...”남서연은 말문이 막혔다.백건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남서연의 피부에 뿜어져 나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백건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나와 결혼하기 싫어?”남서연은 거짓말이 언젠가 들통 날 것이니 사기 결혼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죄책감을 안고 말했다.“미안해요 오빠. 나 임신하지 않았어요.”백건은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남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미안해요. 일부러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요. 생리가 늦어져서 약국에 가서 유통기한이 지난 테스트기를 샀더니 이런 오해가 생겼어요.”“내가 임신하지 않았으니 오빠도 저 책임질 필요 없고 우리도 결혼할 필요 없어요.”남서연이 한마디 덧붙이자 백건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그녀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무력감은 그를 쓸쓸하기 짝이 없게 만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그는 씁쓸하게 냉소를 지었다.남서연은 축 늘어진 그의 머리를 보며 긴장한 채 물었다.“오빠, 왜 그래요?”“남서연, 천국에서 지옥까지 떨어진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아?”백건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남서연은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대체 얼마나 아이를 원했으면 이렇게 슬퍼할까?“미안해요.”남서연이 나지막이 사과했다.백건은 깊은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남서연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비분이 교차하는 눈빛에 남서연은 겁을 먹고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오빠, 너무 슬
[나 기다리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말씀드릴게.][싫어요. 안 돼요. 그냥 제가 말할게요.]사흘째 되던 날, 남서연이 어렵게 용기를 내어 가족에게 고백하려고 했을 때 피가 흘렀다.그녀는 유산인 줄 알고 놀라서 혼자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다.근데 알고 보니 생리였다.의사는 테스트기가 틀릴 가능성도 있으니 임신을 확정하려면 반드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오해였다.그녀가 임신하지 않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녀는 한없이 서글프고 괴로웠다.슬프게도 백건에게 시집가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아이를 빌미로 그와 결혼할 가망이 없어졌다.그녀는 백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백건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일주일 뒤.기업 디자인 부서에서.하현우는 직접 디자인 부서에 와서 남서연을 찾았고 공손히 말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미안해요. 집에 일이 좀 생겨서 시간이 없다고 전해주세요.”남서연은 가방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그녀는 아직 백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하지 못했다.백건을 속이고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한 후에 그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했다.그런데 가짜 임신으로 속여서 결혼해야 백건에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다....대표 사무실.백건은 인터넷에서 임신 기간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임산부를 보살피는지, 산전 검사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간호해야 하는지 등등...그때 하현우가 노크했다.남서연인 줄 알았던 백건은 순간 마음이 가라앉아 혼자 온 하현우를 보며 물었다.“서연이는?”“아가씨는 먼저 집에 돌아가셨어요.”백건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고는 마음의 답답함을 달랬다.남서연은 대체 무슨 뜻일까?이미 일주일 동안 그를 피했다.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대표님, 어디 가세요?”백건은 성
유승아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짓더니 남서연이 가장자리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는 것을 보고 즉시 화제를 돌렸다. “서연아, 촌수로 따지면 네가 건이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만나게 되면 양쪽 어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 작은 엄마가 어떻게 그런 복잡한 관계를 처리하겠어?”남서연은 멍해졌다.그녀가 설명하기도 전에 백건이 버럭 화를 냈다.“지금 내 앞에서 시비를 거는 거야?”유승아는 서둘러 해명했다.“네 친구로서 서연이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을 뿐인데 왜 시비를 건다고 말해?”“이건 나와 서연이 일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너 할 말 끝났으면 돌아가.”유승아는 얼굴의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태도가 진지해졌다. “백건, 비록 우리 연인 사이는 가짜였지만 오랜 우정은 가짜 아니지?”“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친구로서 충고 한마디 하고 싶어. 너와 서연이는 절대 불가능해. 양쪽 어른들께서 동의하지 않을 거야. 괜히 어린 서연이 상처 주지 마.”백건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유승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나 할 말 끝났으니까 돌아갈게. 두 사람 잘 생각해봐.”두 사람 모두 일어나서 유승아를 배웅하지 않았다.문이 심하게 닫혔고 거실이 조용해졌다.남서연과 백건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어색한 듯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승아 언니 말이 맞아요. 양쪽 집안에서 쉽게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겠다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동의하면 돼.”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침묵을 삼키더니 물었다.“서연아, 키스해도 돼?”남서연은 이런 문제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머리가 텅 비었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멍해 있을 때, 남자는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키스를 했다.기습적인 키스에 남서연은 당황스러웠다.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나눴다.저녁 무렵.집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