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서다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어떻게 이런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니.그녀는 증거가 없었고 백하린은 걸핏하면 울고 있으니 가장 억울한 사람은 바로 그녀인 것 같았다.서다인이 백하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할 때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백하린이 울부짖었다.모두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고 서다인도 고개를 돌렸다.남하준은 검은색 슈트를 입고 위엄 있고 차가운 모습이며 손에는 어린 국화 두 포기가 들려 있었다.그는 회사 일을 끝낸 후, 집안의 아내가 백하린과 몇몇 형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쉴 새 없이 서둘러 돌아왔다.그가 알고 있는 몇 번의 모함 외에도 백하린이 서다인에게 이렇게 많은 도 넘은 짓을 했을 줄은 정말 몰랐다.남하준은 서다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손에 쥔 꽃을 건네주었다.남자는 말이 없었다.서다인은 그가 건네준 꽃을 보고 한참을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감동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서다인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그녀는 손에 든 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꽃은 어디서 났어요?”“언덕에서 뽑았어.”남하준이 조용히 대답했다.서다인은 입꼬리를 올려 옅은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국화꽃을 내려다보았다.“어제는 어디 갔었어요?”“회사.”“아.”서다인은 손에 든 꽃을 보며 수줍게 대답했다.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엄마, 아빠, 우리 먼저 방으로 갈게요.”남창민은 서둘러 대답했다.“응, 그래. 얼른 쉬어.”노인의 눈에 백하린과 서다인이 다투지 않기만 하면 가화만사성인 셈이다.허윤미는 어수룩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준아, 앞으로 아내한테 꽃을 선물하려면 국화꽃이 아니라 장미나 백합 혹은 안개꽃도 좋아.”남하준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백하린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긴장된 표정으로 남창민과 허윤미를 바라보았다.“아저씨, 아줌마. 저...”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노인은 냉담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방으로 갔다.다른 사람들도 냉담하고 경멸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어이가 없네. 수십 년을 살고도 여우 년을 구별할 수 없다니.”“당신뿐이겠어? 나도 속았어.”이런 자잘한 소리들은 일부러 백하린에게 들려준 것이다.남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으니 아무리 뻔뻔해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거실 전체에 그녀 혼자만 남았다. 그녀는 이를 갈며 눈에서는 당장 불이라도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방에 돌아가서 짐을 챙겨 떠났다.남씨 가문에서 나온 백하린은 생각할수록 불쾌해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서다인 씨 아버지세요? 당신 딸 부잣집에 시집갔어요.”...방안.서다인은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작은 국화를 심고 물을 주며 꽃을 감상했다. 아무리 봐도 귀엽고 예뻤다.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미풍이 건조하지 않고 따뜻한 햇볕이 베란다에 쏟아져 붉어진 서다인의 뺨에 떨어지자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작은 국화를 만졌다.다시 고개를 들자, 집 안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그녀는 남하준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들어갔다.방에 들어가 보니 남하준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침대에 올라가 두 손으로 상반신을 짚고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기울여 그가 정말로 잠들었는지 훔쳐보았다.그녀는 몇 분 동안 조용히 보았다.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고르게 쉬며 깊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아주 완벽했다. 짙고 검은 눈썹, 오뚝한 콧날, 얇은 입술은 차갑지만 매우 섹시했다.이 남자는 잘생겼지만 말이 없을 때는 정말 차갑고 엄숙해서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주었다.이전에 서다인은 자신이 남하준의 아내가 되고 그에게서 꽃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그는 어린 시절의 백하린을 떠올렸다. 공부로 가득 찬 소녀. 세상에서 책이 가장 친한 친구이며 책은 그녀에게 지식을 가져다주는 외에 그녀의 정신적 풍요로움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요즘은 전자책도 편리하고 공짜도 많아서 좋아요.”서다인은 그가 기분 나쁜 줄 알고 약간 긴장해서 말했다.“방해 안 할 테니까 어서 자요.”남하준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고 마음속에는 모순된 고통이 가득했다.그는 분명히 서다인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옛날의 백하린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두 사람이 겹쳐 보였다.그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눈을 감았다.서다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뒤적거렸다.조용한 방에서 남하준은 쉬고 있었고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치 세월이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서다인은 가끔 잠든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는데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듯해졌다.아주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남하준이 네 시간을 자고 일어났을 때 서다인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보더니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서다인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린 뒤 몸을 돌려 침대에 놓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그는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침대를 받치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부드럽게 만졌다.눈에는 애틋함이 흘러넘쳤다.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잠시 후 방을 나섰다.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남하준은 소리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서다인의 부모님과 친오빠가 거실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우리 다인이 불러주세요. 감히 부모 허락도 없이 결혼해? 우리를 뭐로 보는 거야?”서대홍은 노기등등해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서지석은 별장 주변을 훑어보며 다리를 꼬고 눈을 반짝였다.“아빠, 다인이가 정말 시집을 잘 갔나 봐요. 딱 봐도 부잣집인데 이 별장만 해도 수백억이겠죠?”서대홍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할아버지처럼 두 손을 폈다.“흥, 시집 잘 가면
남하준은 세 사람의 맞은편에 앉으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거실 전체가 얼음굴에 빠진 듯 온도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서지석은 남하준이 익숙하다고 느껴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어디서 봤는지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서대홍은 건방지게 물었다.“뭐야? 장인 장모를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진짜 우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거야?”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서다인과 혼인신고를 하기 전부터 남하준은 이미 명확하게 조사했다.서다인이 가족과 왕래하지 않는 것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니 남하준은 사적으로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남하준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용건부터 얘기하세요.”서대홍은 눈을 부릅뜨고 불쾌한 표정으로 악연해 하며 남하준을 가리켰다.“젠장, 난 네 마누라 아빠야. 그러니까 네 장인어른 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태도야?”남하준은 차갑게 말했다.“용건 없다면 돌아가시죠.”서대홍은 강한 성격의 남하준을 보고는 더이상 권세를 부릴 수 없었다.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딸이랑 결혼할 때 예물을 줬나? 고작 몇억도 안 된다면 내 딸은 욕심도 내지 마.”남하준은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대답했다.“줬어요.”“누구한테?”“다인이한테요.”“얼마나?”“제 재산의 절반.”세 사람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고 두 눈은 금빛으로 빛났다.서대홍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여자 쪽 부모님께 주는 것 아닌가? 왜 내 딸에게 줬나?”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손으로 턱을 괴고는 느릿느릿 말했다.“다인이는 내 모든 재산을 지배할 권리가 있어요. 다인이가 얼마를 원하든 그건 다인이 마음이니 난 간섭하지 않아요. 만약 다인이가 받지 않겠다고 하면 나도 억지로 줄 수는 없죠.”서대홍은 코웃음을 쳤다.“흥,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년이 감히 안 받아? 그럼 내가 죽여버릴 거야.”눈살을 찌푸린 남하준은 차갑게 말했다.“다인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일 다시
진화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대홍을 나무랐다.“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왜 정신이 왔다 갔다 해? 얼른 나가자고!”서대홍은 진화연과 서지석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가긴 어딜 가! 내가 여기 있는데 뭐가 두려워?”남하준은 머리가 아팠다.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우게 되면 서다인이 깨날까 봐 두려웠다.이런 가족이 있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서대홍은 거실에서 2분 동안 소란을 피웠다.류청이 위풍당당한 병사 몇 명을 데리고 들어올 때까지.그들은 소총을 들고 냉혹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서대홍에게 다가왔다.순간 서대홍은 정신을 차렸고 두 발이 나른해지더니 갑자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긴장된 동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두 손이 떨리고 목소리까지 떨렸다.“죄... 죄송합니다. 형... 형님들... 저는...”서지석도 놀라서 두 발에 힘이 빠져 급히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아빠, 어른 가요.”“나... 좀 부축해 줘... 다리에 힘이 없어.”진화연은 서대홍을 흘겨보며 불쾌하게 부축하고 떠났다.남하준은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소파 등에 기대어 세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서다인을 걱정했다.이런 가족이 있으면 서다인은 예전에 분명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류청은 총을 든 병사들을 데리고 세 사람의 뒤를 따라 직접 남씨 저택을 떠나보냈다.남씨 저택 대문 밖.서대홍은 심호흡하고 주눅이 들어 뒤에 있는 큰 별장을 돌아보았다.아무도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이 확실하자 그는 숨을 돌린 뒤 다시 능청을 떨었다.“내 사위가 정말 군전 그룹 수장일 줄이야. 그 총 봤어? 손에 총을 가지고 있었어.”진화연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무랐다“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왜 허세를 부리냐고? 이게 뭐야? 분명 잘 지낼 수 있었는데 당신이 우습게 굴어서 사위랑 사이가 틀어졌잖아!”서대홍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가
“다인아, 엄마 지금 너희 집 앞이야.”“우리 집 앞이요?”“응. 남씨네 가문 별장. 네가 우리 몰래 혼인신고 한 거 알고 찾아왔거든.”“네 아빠가 방금 집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네 남편 부하들이 총을 들이밀어서 나왔어.”“그래서 너무 화나서 너희 집 앞에서 날 때린 거야. 흑흑. 엄마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플까? 네 오빠는 한 번도 엄마를 도와준 적이 없어. 정말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앞으로는 절대 저 배은망덕한 두 인간에게 기대지 않을 거야. 다인아, 엄마는 너밖에 없다.”서다인은 그녀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그동안 기억이 없어서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일천했는데 자신이 서다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감정이 더 옅어졌다.“잠깐만 기다려요. 바로 나갈게요.”서다인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고 방을 나갔다.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보던 남하준은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서다인은 다소 어색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게요.”남하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 부모님이랑 오빠가 방금 왔었어.”“알아요.”“그래.”남하준은 깊고 뜨거운 눈동자로 온화하게 물었다.“근데 어디 가? 같이 가줄까?”서다인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괜찮아요.”남하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긴장한 기색을 보았다.“어디 가는지 말해줄 수 없어?”상대방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막연한 걱정일 뿐이었다.서다인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밖을 가리켰다.“엄마가 밖에서 기다려요.”남하준은 멍하니 있다가 서다인의 말투에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걸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들어오시라고 할까?”“괜찮아요.”서다인은 무뢰한 행세를 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남씨네 집안에 폐를 끼칠까 봐 걱정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었다.친밀함과 서먹서먹함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남하준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천천히 넣
입구에 이르자 서다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며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다.그녀의 환하고 달콤한 미소가 더해져 미치도록 귀여웠다.갑작스러운 하트 폭격에 가슴이 뭉클해진 남하준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뺨이 뜨거워지며 입술을 오므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서다인이 집을 나가자 그의 마음은 완전히 공허해졌다.이렇게 큰 거실이 쓸쓸하고 고독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고 좀 지루하고 걱정스러웠고 마음이 쓸쓸했다.남하준은 그 자리에서 몇 걸음 서성거리다가 서재로 향했다.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었다....서다인은 집 앞에서 멍이 들고 얼굴이 부은 진화연을 보았다.같은 여자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든 서다인은 차를 불러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병원에서 서다인은 진화연에게 전면 검사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진화연은 자신의 돈을 쓰지 않고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당연히 동의했다.다만 검사 과정에서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다.간호사는 채혈한 진화연의 혈액 샘플 몇 개에서 갑자기 한 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다시 한번 채혈했다.검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가져왔다.진화연의 몸은 간단한 피부 외상을 제외하고 아주 건강했다.호텔 뷔페.진화연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을 가득 챙겨 마음껏 먹고 있었다.서다인은 입맛이 없어 아주 적게 먹고는 조용히 앞에 있는 중년 여자를 바라보았다.이 여자를 동정하지만 동정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게으르고 도박 중독에, 반평생을 가정폭력 성향의 알코올 중독 남자에게 기대어 살았고 딸을 낳고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아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박꾼이 되고 빚까지 지고 도망갔다.딸도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하며 몸을 팔아 돈을 벌고 머리에 든 것이 없지만 진취적이지 않았다.진짜 서다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진화연은 지금 딸이 돈 많고 권세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진화연은 서다인을 바라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 딸이 참 많이 변했어. 우리 딸이 이렇게 바르게 자랄 줄이야. 정말 넌 엄마의 자랑이야.”서다인은 형식적인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테이블 위에 양손을 엎드린 채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데요?”진화연 역시 두 손을 포개고 서다인에게 다가갔다.“어렸을 때는 네 아빠를 닮아서 좀 못생겼어. 크면 성형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렇게 자연스럽고 예쁘게 변했을 줄이야. 얼굴이 동그란 것이 좀 귀엽기도 하고 어려 보이기도 하네.”서다인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진화연이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성격도 온순해졌어. 전에는 호랑이처럼 사납더니 지금은 온화하고 부드럽고 목소리까지 달콤해졌어.”“군전 그룹 수장이 반할 만 하단 말이야. 지금의 넌 너무 완벽해.”“전에는 만날 오빠랑 싸우고, 나랑 네 아빠랑 싸우더니 지금은 얼마나 유해졌어.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도 알고. 네 아빠 같은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이제 나한테 효도할 줄도 알고 예의 바르고 정말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엄마는 너 같은 딸을 낳아서 정말 자랑스럽단다.”서다인은 호기심에 물었다.“내가 다른 사람 같지는 않아요?”진화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경악해서 바라보았다.“넌 내 딸이다.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내 딸이라고!”서다인은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금 진화연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들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정체를 모를 것이다.진화연도 속고 있는 것이다.그럼 도대체 누가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걸까?식사를 마친 후, 서다인은 진화연에게 현금 40만 원을 주고 호텔 방으로 배웅한 후에야 떠났다.그녀는 남씨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택시를 타고 안성을 나와 몇 시간 동안 다른 도시로 가서 훔쳐 온 진화연의 혈액과 자신의 혈액으로 다시 유전자 검사를 했다.신원 정보를 등록할 때는 친구 지우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했다.특권이 없어서 결과가 나오는 데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