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연은 서다인을 바라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 딸이 참 많이 변했어. 우리 딸이 이렇게 바르게 자랄 줄이야. 정말 넌 엄마의 자랑이야.”서다인은 형식적인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테이블 위에 양손을 엎드린 채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데요?”진화연 역시 두 손을 포개고 서다인에게 다가갔다.“어렸을 때는 네 아빠를 닮아서 좀 못생겼어. 크면 성형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렇게 자연스럽고 예쁘게 변했을 줄이야. 얼굴이 동그란 것이 좀 귀엽기도 하고 어려 보이기도 하네.”서다인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진화연이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성격도 온순해졌어. 전에는 호랑이처럼 사납더니 지금은 온화하고 부드럽고 목소리까지 달콤해졌어.”“군전 그룹 수장이 반할 만 하단 말이야. 지금의 넌 너무 완벽해.”“전에는 만날 오빠랑 싸우고, 나랑 네 아빠랑 싸우더니 지금은 얼마나 유해졌어.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도 알고. 네 아빠 같은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이제 나한테 효도할 줄도 알고 예의 바르고 정말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엄마는 너 같은 딸을 낳아서 정말 자랑스럽단다.”서다인은 호기심에 물었다.“내가 다른 사람 같지는 않아요?”진화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경악해서 바라보았다.“넌 내 딸이다.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내 딸이라고!”서다인은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금 진화연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들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정체를 모를 것이다.진화연도 속고 있는 것이다.그럼 도대체 누가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걸까?식사를 마친 후, 서다인은 진화연에게 현금 40만 원을 주고 호텔 방으로 배웅한 후에야 떠났다.그녀는 남씨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택시를 타고 안성을 나와 몇 시간 동안 다른 도시로 가서 훔쳐 온 진화연의 혈액과 자신의 혈액으로 다시 유전자 검사를 했다.신원 정보를 등록할 때는 친구 지우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했다.특권이 없어서 결과가 나오는 데
미리 알리지 않아 남하준에게 걱정을 끼쳐 너무 미안했다.남자는 서다인에게 다가가 검고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안성을 나갔던 거야?”서다인은 움찔하여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남하준이 어떻게 알았을까?그녀에게 위치 추적기라도 달았을까?그녀는 병원에서 모두 현금으로 지급했기 때문에 행방이 누설되지 않았을 것이다.서다인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한 것을 본 남하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녀가 타고 온 차량을 가리켰다.“안성 택시 아니잖아. 도로 관리 정책 때문에 외지 번호판은 보통 안성에서 손님을 태우지 않아.”서다인은 멀어져 가는 차를 돌아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아, 맞아요.”“무슨 일로 나갔는지 말해주면 안 돼?’“아니요.”여자의 단호한 대답은 남하준의 가슴을 찔렀다.더 이상 캐묻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부부 사이에 100% 솔직하지 못하면 감정이 깊지 않은 것이다.서운한 마음에 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서다인은 그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집으로 들어갔다.남자의 손은 두껍고 따뜻했다. 서다인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달콤하며 약간의 행복감이 마음속에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너무 거짓말 같았다.평소 이 남자는 걸음이 매우 빠르지만 지금은 보폭도 작고 천천히 걸으며 짧은 거리를 몇 분이나 걸었다.위층으로 올라가 안방 입구 앞에 도착하자 남하준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의 손을 놓았다.새벽인데도 서다인은 아직 자고 싶지 않고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이 말은 오해받기 쉬우니 밤에 잘 때 하면 안 되었다.서다인은 아쉬운 듯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그녀는 돌아서서 문 옆에 기대어 문밖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윽하고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먼저 초대하지 않으니 그도 자진해서 들어가지 않았다.두 사람은 몇 초 동안 눈을 마주쳤고 찌릿한 기류가 감돌았다.“잘 자요.”서다인이
이 딥키스는 한 세기가 지난 것처럼 오래 지속 되었다.서다인은 입술과 혀가 저리고 아파 났고 숨이 가빴다.더 이상 그를 밀쳐내지 않으면 세상에서 처음으로 키스하다 죽게 된 여자가 될 것 같았다.서다인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짚고는 천천히 밀어냈다.남하준은 아쉬운 듯 그녀를 놓아주었고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의 공기마저 건조하고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는 눈을 늘어뜨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내일 회사 돌아가. 나랑 같이 가자.”서다인은 움찔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간다고?생각해보면 그는 그룹과 나랏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어떻게 집에만 있을 수 있겠는가?이런 남자가 하루 시간을 내는 것도 어쩌면 사치가 아닐까?시어머니는 남하준이 그녀와 결혼한 후에 집에 돌아오는 횟수가 많아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1년 반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서다인도 그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조사해야 하고 일주일 뒤 유전자 검사 보고서를 기다려야 했다.“나... 당분간 못 가요.”서다인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남하준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그녀를 내려놓았다.그녀는 발이 땅에 닿자 온몸이 나른해졌고 손은 여전히 그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오고 싶을 때 미리 전화해. 내가 사람 보낼게.”서다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욕망을 억누르고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나 내일 아침에 가.”“배웅할게요.”서다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괜찮아. 늦게까지 푹 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네.”서다인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벌써 아쉬움이 몰려왔다.남자는 뜨거운 눈동자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잘자.”서다인은 얼른 몸을 비켜 그가 문을 열게 했다.“잘 자
서다인은 그녀의 이혼을 지지하지만 그녀에게 집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그녀에게 나가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더 강해지라고 권했다.진화연은 아무런 이득도 챙기지 못하자 결국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갔다.일주일 뒤. 서다인은 DNA 검사 보고서를 얻었다.비록 그녀는 감히 확신할 수 없었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지만, 결과를 보는 순간 그녀는 여전히 무너졌다. 병원 입구에서 입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혈연관계가 없는 몇 개의 붉은 글씨체를 흐릿하게 바라보았다.이 보고서는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불합리함을 증명했다.그녀는 서다인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누구일까?그녀는 누구이고, 그녀의 가족과 친구는 또 어디에 있을까?왜 사람들이 고의로 각종 증거와 허상을 날조하여 그녀를 꼭 서다인으로 위장해야 했을까?그 속의 음모는 또 무엇일까?서다인은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 줄곧 이런 문제들을 생각했다.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괴로웠다. 서다인은 이 모든 걸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고 문득 남하준이 보고 싶었다.차창 밖은 햇살이 내리쬐고 길은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차들이 멈춰 서자 그녀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용기를 내어 휴대전화를 꺼내 남하준의 번호를 찾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긴장된 숨을 크게 내쉬며 용기를 내어 다이얼을 돌렸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그 순간 서다인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다인아.”남하준의 아주 묵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선 네트워크 너머로 들려왔다.서다인은 심장이 떨렸다.이 남자는 일주일 동안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더없이 부드럽고 애틋한 것 같았다.그녀의 착각일까?“바빠요?”서다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그와 대화를 하게 되면 늘 쩔쩔매고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아니.”“아.”서다인은 고개를 떨구고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그를 백 퍼센트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무슨 일 있어?”그가
서다인은 고개를 떨구고 미소를 머금었다.“좋아요.”남하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쉽지만 회의는 계속 진행해야 했다.“다인아, 별일 없으면 나 먼저 끊을게.”서다인은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통화한 지 2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 끊으려 하다니.다른 장거리 연애 커플은 어떻게 전화 통화를 몇 시간, 심지어 한나절이나 할 수 있을까?‘됐어. 그건 다른 사람 연애지.’남하준은 그녀에게 감정이 없으니 연애에 ‘연’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 바쁘지 않더라고 그녀와 이야기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요.”서다인은 약간 실망한 말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먼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채 차창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서글픔이 일순간에 감돌았다.내일 남하준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려갈까?서다인은 마음속에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다음 날.서다인은 일찌감치 일어나 머리를 빗고 단장을 하고 물건을 챙기고는 기쁨에 겨워 집에서 남하준의 전화를 기다렸다.이따금 베란다 밖으로 뛰쳐나와 군전 그룹 차량이 마중 나오는지 확인했다.그녀는 정오까지 계속 기다렸다.점심 식사 후 남하준이 아닌 백하린과 백인호 두 사람이 선물 뭉치를 들고 방문했다.백인호가 있어서 남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리 백하린을 싫어해도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서다인은 이 두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 정원 밖 수영장 옆에 숨어서 앉아 조용히 군전 그룹의 사람들을 기다렸다.시간은 1분 1초가 흘러갔다.서다인은 지쳐서 다시 일어나 수영장 주변을 서성거리며 기대에 부풀었다.“내가 너한테 한 방 먹을 줄이야.”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서다인의 뒤에서 들려왔다.서다인은 돌아서서 백하린이 가슴에 손을 얹고 거만한 걸음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백하린의 그 날카로운 눈빛에는 악독한 한이 가득했다.서다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백하린은 그녀와 반 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와 입술을 삐죽거렸다.“나약한 줄로만 알았는데 꽤 교활
서다인은 익사할 것 같다.온몸이 끝없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여 물속에서 벌벌 떨었고 물에 잠겨 숨을 쉴 수 없다.그 순간 죽음이 지척에 다가왔고 그녀의 머릿속에 남하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죽음의 문턱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아쉬운 사람은 남하준 한 사람뿐이었다.백하린은 갑자기 그녀를 놓아버렸고 물에 빠진 척 허우적대며 소리쳤다.“살려줘요!”서다인은 백하린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이어 두 번 쾅 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서다인은 의식이 희미하고 두려움이 에워싸는 마지막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물속을 떠다녔다.그녀가 물 위로 떠 올라 흐릿한 눈을 떴을 때, 남하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더니 그는 백하린을 안고 수영장 옆으로 헤엄쳐 갔다.환각일까?남하준은 왜 여기에 나타났을까? 그가 백하린을 구했다고?두려운 무중력감이 서다인에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남하준은 아내와 첫사랑 사이에서 수영할 줄 아는 첫사랑을 선택하고 수영할 줄 모르는 아내를 내버려 두었다.그 순간 서다인의 마음은 무너졌다.그녀는 눈을 감고 몸부림을 완전히 포기했다.몸이 한 치 한 치 아래로 가라앉고 무서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으며 끔찍한 무중력감으로 그녀는 곧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떨었다.큰 손이 그녀를 안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고 순간 그녀의 머리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그녀는 의식이 없는 사이에 백인호가 긴장하여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정신 차려! 조금만 더 버텨!”그녀는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았다.죽는 것도 좋았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그녀는 미래를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몰랐다.손이 닿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서다인은 무중력하게 아래로 계속 떨어졌다.갑자기 움찔하더니 그녀는 넋이 나간 듯 놀라서 눈을 떴다.하얀 천장이 눈에 띄었고 그녀의 시선은 천천히 빗나가 병원 장식이 보였다.곧이어 보이는 것은 남하준의 깊고 무거운 눈동자와 그 옆에 있는 백인호였다.“다인아.”남하준은 긴장해
남하준이 병실을 나서자 백인호가 그 뒤를 따랐고 병실 문을 닫았다.백인호는 남하준의 서늘하고 어두운 뒷모습을 보고 음험한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준아, 사실 너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하린이 사랑하고 있지?”남하준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온몸에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하린이가 네 맘을 돌리려고 그동안 많은 잘못을 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모두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두 사람 이번에 함께 수영장에 빠진 건 단순 사고였을 거야.”“시간 날 때 하린이한테도 가 봐. 어렸을 때부터 부유 공포증이 있었으니 아마 많이 놀랐을 거야.”백인호가 한바탕 말을 늘어놓았지만 남하준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떠났다.남자의 성급한 발걸음을 보고 백인호의 눈에는 독기가 올랐다.사람을 죽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지금의 백인호는 미천한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완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완자의 목숨을 위협하다니!남하준은 병원 문을 나서 군전 그룹의 무장 차량에 올라탔다.류청과 정호는 걱정스러운 듯 뒷좌석의 남하준을 돌아보며 물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남하준은 지친 듯 눈을 감았고 무거운 어깨가 보이지 않는 좌절감에 눌려 숨이 가빴다.“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어.”“도련님, 무슨 일이든 저희한테 시키세요. 사모님은 지금 도련님이 필요합니다.”남하준의 찡그린 미간이 더욱 팽팽해졌고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석연치 않은 죄책감과 자책이 치밀어 올랐다.좋아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죽을 뻔했는데 그는 백하린을 구했다.서다인이 그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단지 그의 가슴 아래의 오장육부가 모두 시큰시큰하고 아파서 매우 괴로웠다.잠시 후,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영장 옆에 있는 CCTV 확인했어?”정호: “도련님, 남씨 별장의 모든 CCTV가 한 시간 전에 해킹당해서 모든 자료가 날아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때문에 깼어?”하루 종일 냉정함을 되찾고 마음을 다잡은 서다인은 지금 태연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다.서다인은 눈에는 냉랭한 기운이 스쳤다.“나 괜찮으니까 가서 쉬어요. 여기 있을 필요 없어요.”남하준은 오늘 일을 애써 해명했다.“난 네가 물속에 있는 거 못 봤어. 그리고 하린이 수영할 줄 몰라.”서다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이유는 약간 황당했다. 부잣집 아가씨가 어떻게 수영을 못 할 수 있을까?서다인은 화난 표정으로 남하준을 바라보며 말투도 거칠어졌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소용 없으니까.”남하준은 그녀의 말투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다인아, 그런 상황에서 난 하린이를 못 본 척 할 수 없어.”생사의 갈림길에서 사람의 진심을 아는 법이다.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은 혼란스럽고 오로지 마음의 본능으로 모든 판단을 내린다.남하준이 원래 백하린을 그렇게 사랑했으니 인제 와서 어떻게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하지만 서다인은 여전히 속상하고 슬펐다.못난 눈물이 핑 돌았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남하준을 바라보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준 씨, 백하린은 수영할 줄 알아요. 백하린이 날 수영장으로 밀었고 날 물 밑으로 눌렀어요. 내가 당신을 뺏었다고 생각해서 나 죽이려고 했었어요.”남하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침묵이 흘렀다.서다인은 손을 뻗어 뺨의 눈물을 닦았다. 마음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로인해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싶지 않았지만 여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잠시 마음을 추스른 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CCTV 영상 있어요?”남하준은 덤덤히 대답했다.“없어.”서다인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어이없는 냉소를 지었다.“그러니까, 증거가 없으니 난 지금 헛소리를 하는 거네요?”남하준은 지금 이 문제에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서다인은 가슴에서 한기가 피어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