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는 구지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나...”“하경 씨, 신중히 생각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결혼은 중요한 일이니까요.”강현우가 옆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말은 명백한 경고였다.구지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참고 또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 대표님, 오늘은 제가 하경이와 행복한 순간을 함께하는 날입니다. 목격자가 되실 생각이면 환영이지만 다른 의도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떠나 주시죠.”그의 말투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인내심의 끝자락이 묻어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미 주먹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그러나 강현우는 구지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윤하경만 바라보고 있었다.윤하경은 그 시선을 피해, 짜증스럽게 강현우를 노려보았다.‘도대체 이 남자는 뭘 하려는 걸까? 단순한 소유욕인가?’강현우는 원래 감정 따위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억지 미소를 지었다.“강 대표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구지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결혼하자.”그러자 구지호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는, 승리한 남자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흘깃 바라볼 뿐이었다.구지호는 만족한 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강 대표님, 우리 사랑을 직접 목격하셨으니 축하주 한잔하고 가시죠?”강현우는 무표정하게 술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그의 강렬한 턱선이 한층 도드라졌다.그러더니, 얇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사양하겠습니다.”그 말만 남긴 채, 그는 바로 뒤돌아서 나가버렸다. 그 순간, 윤하경의 손끝이 살짝 움츠러들었다.구지호가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하경아, 강현우랑 너무 얽히지 마. 나는 그 사람이
“뭐 하는 거야?”순간, 윤하경은 술기운이 절반쯤 가시면서 화가 난 눈빛으로 구지호를 노려보았다.자신의 반응이 너무 날카로웠다는 걸 깨닫고 그녀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만해, 장난치지 마.”이미 구지호와의 이 위선적인 관계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신체적인 접촉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더군다나, 이 남자는 윤하연과도 엮였던 놈이어서 그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구지호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오늘 내 생일이잖아. 아무것도 선물해 줄 생각 없어?”그녀는 한숨을 삼켰다.“장난하지 마. 내일 출근해야 해.”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짜증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구지호의 손길은 이 순간을 기다린 듯 더욱 거칠어졌다.“이미 내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잖아. 이건 시간문제 아닌가?”그는 그녀의 귓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하경아, 거절하지 마. 내 마음 아프게 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상처받은 남자의 것처럼 들렸지만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음을 참았다.‘윤하연과 잘 때는, 내가 상처받을 거란 생각은 했을까?’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 옆에 떨어졌다.“구지호, 강요하지 마. 아직 서두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그러나 그는 그녀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경아, 넌 너무 완벽해. 그래서 두려워. 누군가 네가 내 것이라는 걸 모르게 될까 봐.”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특히, 강현우.”윤하경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혹시, 구지호가 무언가 눈치챈 걸까?그러나 곧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구지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알았다면 이미 난리를 쳤을 테니까.지금 하는 말은, 그저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수작일 뿐이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구지호를 밀어내기로 결심했다.그녀는 갑자기 힘을 주어
구지호: “어떻게 왔어?”윤하연: “나... 나는 그냥 오빠가 여기서 생일을 보낸다고 해서 보러 왔어.”밖은 잠시 조용해지더니 윤하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지호 오빠, 미안해. 내가 오빠랑 언니 방해한 거지? 진작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윤하경은 속으로 코웃음 치며 윤하연의 가식적인 모습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하지만 구지호는 이런 수법에 잘 넘어가는 타입이라 우울했던 얼굴이 좀 풀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상관없어.”윤하경은 듣고만 있으려니 아쉬워 아예 돌아서서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마침 윤하연이 구지호에게 다가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언니는 성격이 안 좋아. 그러니 언니한테 화내지 마.”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것은 그 눈이었는데 사람을 볼 때 애처로워 보였다.그래서 구지호는 결국 넘어갔다. 윤하연이 알아서 굴러들어왔으니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곧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키스했다.곧 문밖에서 낯뜨거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정신없이 키스하다가 구지호는 아예 윤하연을 안아 들고 아까 그 스위트룸으로 갔다.“안 나가고 뭐 해? 현장 잡으러 안 가?”“아니, 아직 때가 일러요.”윤하경은 무심코 작게 대답하고는 흠칫했다.그리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구지호에게 복수할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하물며 그녀는 강현우와 친하지도 않았다.그녀는 약간 짜증스럽게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예전엔 왜 그가 이렇게 말이 많은 걸 몰랐을까?남자의 아래로 드리워진 눈매는 깊고 날카로워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윤하경은 괜히 불편해져서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하지만 그녀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곧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았던 것이다.“난 말로만 하는 감사는 별로 안 좋아해. 감사하려면 좀 성의를 보여야지.”윤하경은 남자가 말하는 성의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우는 구지
그런데 마침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아직 완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윽...”그녀는 머리를 문지르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고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하경은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약간 고소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이마에 붉은 자국이 생겨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미간을 찌푸리며 간단히 세수를 한 뒤, 그녀는 옷을 입은 후 욕실을 나왔다.강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도 그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가방을 들고 문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다시 멈춰 서서 문구멍으로 밖을 살짝 봤다.“약혼자와 마주칠까 봐 두려워? 아니면 약혼자가 네가 다른 남자 방에서 나오는 거 볼까 봐?”강현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그는 항상 그랬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괜찮은데 입만 열면 꼭 밉상이었다.윤하경은 그냥 무시하고 밖에 아무도 없나 확인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문 앞까지 나갔다가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강현우를 돌아봤다.“강 대표님, 우리 약속했던 시간 끝났어요.”지난번에 말했던 한 달의 시간이 이미 지났기에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일깨워주었다. 강현우는 진짜 미친놈 같아서 그녀는 그를 건드린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한 달의 시간이 드디어 끝나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강현우가 무슨 짓을 벌여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까 봐 정말 걱정했을 것이다.그녀는 강현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갔다.결국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에 타려는 순간, 건물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나오는 걸 보았다.그 모습에 윤하경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못 본 척 잽싸게 차에 올라탔다.액셀을 밟고 출발하는 순간, 윤하
“하경아, 드디어 강한 측에서 프로젝트 승인했다는 연락을 받았어. 우리 업무도 이제 완료된 거야. 앞으로는 실행만 남았어.”소지연은 그녀의 책상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아직 자리에 앉지도 못한 윤하경은 소지연의 말에 놀라 멍해졌다.“언제 연락받았어?”“오전에.”소지연은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게 최종본인데, 문제없으면 바로 실행에 착수하도록 지시할게.”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래.”클럽에서 나온 뒤로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하지만 강현우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연락도 없었다.강현우는 역시 깔끔하게 끝내는 스타일이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기쁜 일인데, 왜 자꾸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느껴지는 걸까?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소지연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윤 대표, 이제 프로젝트도 성사됐는데 우리 축하 파티해야지? 너도 알다시피 최근 직원들도 계획 수정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잖아...”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회식해. 영수증은 재무팀에 제출하고.”소지연은 눈을 깜빡였다.“넌 안가?”윤하경은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나는 안 갈게. 내가 없어야 더 편하게 놀 수 있을 거잖아.”소지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자신의 사무실을 나갔다.윤하경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강현우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온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경은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져서 술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온지우는 술친구로 제격이었다.온지우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며칠 전 그가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연락했기 때문이었다.그러니 겸사겸사 그 얘기도 할 수 있었다.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온지우는 다른 사람들이랑 별장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었다.그녀를 보자 온지우가 손을 흔들었다.“하경아, 이리 와.”윤하경은 대꾸도 안 하고 술상에 가서 술 한 병을 집어 들고 온지우한테 갔다.“오늘 왜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노 코멘트.”결국 만취한 그녀를 온지우는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별장 대문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고 온지우는 재빨리 그녀를 잡아주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됐어, 나 혼자 올라갈 수 있어. 늦었으니까 가 봐.”온지우는 혀를 차며 농담조로 말했다.“쓰고 버리기냐?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고.”그는 원래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술에 잔뜩 취한 윤하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았다.온지우도 차를 타고 떠났다.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 순간, 한 렌즈가 온지우가 윤하경을 부축하는 모습을 조용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을.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윤하경은 늦게 일어났지만 누군가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누가 침대에 물을 부은 것이다. 방금 전까지 수백억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꿈을 꾸고 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화가 나서 눈을 번쩍 뜨고 욕을 하려던 찰나, 윤수철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꾹 참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아빠, 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그녀는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는 윤수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허 참, 네가 감히 나한테 묻는 거냐?”윤수철은 냉소를 띠며 태블릿을 집어 들어 윤하경에게 던졌다.방금 잠에서 깬 윤하경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맞았다.“아...”이마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이게 뭔지 똑똑히 봐! 곧 약혼할 여자가 한밤중에 남자랑 붙어먹고 뉴스에까지 나오다니. 윤씨 가문의 체면 다 구겼잖아!”윤수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윤하경한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윤하경은 욕을 참고 태블릿을 보더니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화면엔 지난밤 온지우가 그녀를 데려다주는 사진과 영상이 담겨 있었다.그냥 부축해준 것뿐인데 영상에선 마치 둘이 귓속말이라도 하는 듯 애매하
윤하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딸을 팔아먹고도 저렇게 당당하다니, 윤수철도 참 대단했다. 뻔뻔함에 박수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그녀는 침대에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가정부에게 말했다.“침구 좀 갈아주세요.”“알겠습니다.”가정부가 대답했다.윤하경은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머리를 말리고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구지호가 소파에 앉아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리고 윤수철은 옆에서 굽실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예전에 자신이 구지호한테 아양 떨 때보다 더 심했다.윤하경은 속으로 생각했다.‘요즘 한빛의 경기가 안 좋나 보네. 안 그랬으면 아빠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지호랑 결혼하라고 할 리가 없는데. 그것도 저렇게 아부 떨면서 말이야.’윤하경이 다가가자 구지호가 쳐다보며 말했다.“하경아, 어젯밤 일, 설명 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그도 온지우를 알고 있었고 둘이 친한 것도 알지만 어젯밤 영상은 너무 애매했다.그래서 속으로 좀 불쾌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온지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사과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그녀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구지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뭘 어째. 기자들이 멋대로 쓴 건데. 믿고 싶으면 믿어.”그녀의 무관심한 태도에 구지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그때 윤수철이 나서서 윤하경에게 말했다.“지호에게 잘 설명해.”그러고는 구지호에게 아부하듯 웃으며 말했다.“지호야, 좋게좋게 얘기해. 하경이가 밖에서 함부로 할 애가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나갔다.거실에는 윤하경과 구지호만 남았다. 구지호는 화난 표정으로 그녀가 예전처럼 달래주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숙여 탁자 위의 사과를 집어 먹었다.그녀는 헐렁한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몸을 숙이자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구지호는 우연히 그녀의 아찔한
윤하경은 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가 해줄 수 있는 설명은 딱 하나, 지우랑 나 아무 사이 아니야.”다른 남자라면 다를 수 있겠지만.그녀는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최근에 누구랑 사이가 안 좋아졌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와 지우를 이용해서 기사를 쓴 건 널 망신 주려는 게 뻔하잖아?”윤하경은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경쟁사에서 벌인 일 아닐까? 이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시끄러운 거 보면 누가 뒤에서 조작한 게 분명해.”사실 발가락으로 생각해 봐도 이 일이 윤하연과 무관할 리 없었다.분명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고 구지호와 결혼하려는 속셈일 터였다. 그러니 구지호가 직접 조사해 윤하연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두 사람은 서로를 물어뜯게 될지도 모른다. 윤하연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곧 구지호와 구씨 가문의 체면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그렇게 생각하니 윤하경의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구지호는 쓰레기였지만 적어도 말귀는 알아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생각해 봐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윤하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나랑 지우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못 믿겠으면 조사해 보든가.”윤하경이 부드럽게 나오니 구지호의 화도 좀 풀렸다.그는 윤하경의 앞에 다가가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너희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제대로 말했어야지.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진 거야?”‘네가 하연과 키스하는 거 본 순간부터.’윤하경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구지호에게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랑 지우가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알면서 아침부터 와서 따지는 걸 보면 나를 못 믿는다는 거 아니겠어?”그녀의 빈정거리는 말에 구지호는 금방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예전에 그녀는 항상 구지호를 생각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줬었다.하지만 머리 좀 식히고 보니 구지호 같은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건 완전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는 만족해하며 커다란 손으로 좌석 아래쪽을 만지자 곧게 세워져 있던 의자가 뒤로 졎혀졌다.윤하경은 갑작스럽게 애매한 자세로 강현우의 품에 안겨졌다.‘강현우는 너무 잘 생겼어.’아래로부터 위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윤하경은 결국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현우 씨는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매너? 있어.”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강현우가 다시 몸을 숙였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자 목젖이 드러났다.윤하경의 코끝에는 남자에게서 나는 공격성을 띤 차가운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다.그녀가 처음으로 강현우와 엮일 때도 강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뭇거리다가 반항하기도 귀찮아 아예 손을 뻗어 강현우의 목을 끌어안고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쳐다봤는데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다.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두 몸뚱이가 이 좁은 공간에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다행히 강현우가 사는 이곳이 단독 별장이고 지하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윤하경은 점점 정신을 차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는데 뼈마디가 부서진 것처럼 시큰거리며 아파 났다.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러나 이때 강현우는 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영성용 원피스 한 벌을 작은 사이즈로 주차장에 가져와.”그녀를 놓아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현우는 벌써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변했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그가 방금 배신당한 것을 보고 그녀는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어쨌든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도운 적이 있으니 말이다.차가 차고를 벗어나자, 윤하경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에게 물었다.“어디 가요?”강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별장으로.”지난번에 자신이 갔던 그 별장을 말한다고 생각한 윤하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져 두 사람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차고에 도착해 차에 시동을 끈 그녀는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힐끗 돌아보았다.강현우는 이목구비가 훤칠했는데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 심지어 옆모습으로도 사춘기 소녀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얼굴이었다.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강현우와 조금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물론 감정적으로만 말이다.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주먹을 살며시 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그에게 충고했다.“현우 씨, 사실 배신 당한 것도 그냥 그래요. 저도 약혼자에게 배신당했잖아요? 사실 조금만 참으면 다 지나갈 수 있어요...”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그 한 마디가 전혀 위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강현우에게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려던 순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날 위로하는 거야?”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고 쳐요.”“헐!”강현우는 차갑게 웃으며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손을 들어 윤하경을 끌어당겼다. 윤하경이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었다.그녀의 이 차는 공간은 좁은 편은 아니었고 그녀의 체중도 가벼웠기에 강현우는 그녀를 쉽게 안아 매우 부끄러운 자세로 자
두 사람은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실랑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진해리와 배지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윤하경은 담뱃재를 털고 나서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구경했다.“무슨 말이야? 내가 강현우랑 결혼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윤하경의 귀에 들려왔다.배지훈은 손을 들어 콧등을 살짝 눌렀다.“진해리, 그만 소란 피워.”“내가 소란을 피운다고?”진해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배지훈, 남자라면 지금 당장 아버지께 나와 결혼하겠다고 해.”윤하경은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말이지?’진해리는 곧 강현우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해리가 배지훈과 함께 강현우를 배신한 거란 말인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맞은 후 강현우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았던 그녀는 사실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시동을 거는 것은 너무 티가 나니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진해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배지훈, 꼭 이렇게 매몰차게 굴어야 해?”진해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배지훈은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윤하경조차 그 무력감과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고 나서야 진해리에게 말했다.“진해리, 그만해,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 강현우는 좋은 사람이야. 너 강현우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거야.”진해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빛으로 배지훈을 바라보았다.“배지훈, 너를 만난 걸 정말 후회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밟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배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버려서야 바닥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