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는 늘 냉정하고 말이 적었다.윤하경은 잠깐의 대치 끝에 결국 힘없이 손을 들면서 항복했다. 대항할 의지도 체력도 바닥났고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해 버렸다.그 순간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차갑게 눈을 마주쳤다.“집중하든가 아니면 나가든가.”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어쩌다가 이런 재앙을 불러들였지...’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를 상대해야 했다.모든 일이 끝난 뒤, 강현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만 둘러매고 그녀를 내려다봤다.조명이 어두워 그의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의 눈빛을 애써 알고 싶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버텨야 할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아직 20일이나 남았어. 참아야지.’강현우가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이 순간적으로 순진한 표정을 담고 반짝였다.“강 대표님, 협력 건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강현우는 가볍게 손을 빼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계속 진행하라고 지시할 거야.”그제야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며 한숨 돌렸다.하지만 그녀는 강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힐끗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것을 보지 못했다.잠시 후, 강현우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윤하경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지만 그녀는 방금 강현우 때문에 너무 피곤한 탓에 여전히 움직일 힘이 없었다.그런데도 강현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네?”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현우 씨는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에요?”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녀는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강현우의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는 그녀를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오래 있을 이유도 없으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어차피 여긴 금방 떠날 거니까.’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강현우는 값비싸 보이는 실크 잠옷을 입고 소파에
한선아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작은아버지 댁 딸이 해외에서 돌아왔대. 둘이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그 말속에 담긴 의도는 너무도 뻔했다. 결혼을 재촉하는 말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강현우 같은 완벽한 남자도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결국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다들 비슷한 처지네.’강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윤하경이 숨은 쪽을 힐끗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한선아는 얼굴을 굳히다가도 이내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현우야, 엄마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잖니. 진해리는 정말 괜찮은 아가씨야. 해외 유학 박사인 데다 예쁘고 성격도 반듯한 아이야. 네 주변에 그런 이상한 여자들보다는 훨씬 낫잖아. 너 빨리 결혼하면 나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텐데.”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그런 이상한 여자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얘기겠지?’그녀는 더 이상 이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우가 피곤하다며 적당히 핑계를 대고 한선아를 돌려보내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윤하경은 커튼 뒤에서 조용히 나왔고 그녀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그녀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운전기사를 불렀다.“데려다줘.”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윤하경은 차에 올라타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걸 느끼며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평소에 담배를 자주 피우지 않았지만 요즘은 손이 자주 갔다.강현우와 얽히게 된 것도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그 후로는 모든 일이 그녀의 통제 밖에서 흘러갔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아까 한선아가 했던 말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집 근처 100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윤하경은 기사에게 말했다.“여기서 내려주세요.”윤하경은 자신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빠는 구지호랑 윤하연이 아무 관계 없다는 걸 침대 밑에 숨어서 직접 들으셨나 보죠?”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평소에도 그녀가 독설을 잘 날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날이 선 말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그 틈을 타 윤하경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수철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런 불효녀가 따로 없네. 정말 버릇없는 년!”그 순간 윤하연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였다.“아빠, 죄송해요. 앞으로는 지호 오빠를 만나지 않을게요. 언니가 오해하지 않도록요.”그녀는 흐느끼며 덧붙였다.“하지만 정말이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언니가 저를 오해한 거예요.”윤수철은 딸의 눈물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빠는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알아. 언니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내가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1층은 훈훈한 부녀의 장면으로 가득했지만 2층의 윤하경은 정반대였다.방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고 드레스를 벗으려던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췄다.목과 어깨, 몸 곳곳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은 강현우와의 격렬했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진짜 늑대를 건드렸어. 그것도 아주 위험한 늑대를 말이야.’지금의 강현우는 그녀 눈에 완벽한 포식자였다.더 답답한 건 그녀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윤하경은 따뜻한 욕조 물에 몸을 담그며 휴대폰을 들어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프로젝트팀에 말해서 강씨 가문 프로젝트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전해줘. 필요하면 야근도 하라고.”소지연은 약간 놀란 듯 물었다.“강한 그룹 쪽 문제는 해결됐어?”“응.”윤하경은 간단히 대답했다.“
윤수철은 윤하경이 드물게 온화한 목소리로 부르자 잠시 의아해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침 먹고 나랑 같이 나가자.”윤하경은 자리에 앉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어딜 가는데요?”윤수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가보면 알 거야.”윤하경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다 마주 앉은 윤하연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즐거움도 잠시였고 차가 병원 앞에 도착하자 그녀의 미소는 금세 굳어졌다.“아빠,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죠?”병원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봤다.그들이 도착한 곳은 구지호가 입원했던 병원이었고 그녀가 구지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했던 곳이었다.물론 두려운 게 아니라 단지 그의 존재 자체가 불쾌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아버지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다니 당황스러움을 넘어 짜증이 치밀었다.아까 아버지가 운전기사에게 꽃다발을 사 오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윤수철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철이 없는 거야? 구지호가 이렇게 오래 병원에 있었는데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오늘 퇴원하는 날이니 당연히 와야지.”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병원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주미나와 마주쳤다.주미나는 윤하경 부녀를 보자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하경아, 왔구나!”그녀는 윤수철에게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오신다기에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잘 오셨어요.”주미나는 윤하경의 손을 잡아 병실 쪽으로 이끌며 덧붙였다.“지호 병실로 가자. 기다리고 있을 거야.”윤하경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미나 앞에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병실로 가는 길에 주미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물었다.“하경아, 아직 지호한테 화난 거야?”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주미나는 한숨을 쉬며 윤하경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괜찮아. 집에 가면 내가
그들이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강현우가 낯선 여자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여자는 밝게 웃으며 강현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옆으로 비키려 했지만 곧 스스로를 비웃었다.‘내가 왜 피해야 하지? 괜히 졸지 말자.’강현우 역시 윤하경을 알아봤고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치자 차가웠던 시선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주미나는 강현우를 보자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어머, 현우 씨도 오셨네요.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여유롭고 세련된 태도였다. 반면 구지호는 윤하경의 손을 슬쩍 잡아챘다.그녀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구지호는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며 놓아주지 않았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지호 씨, 퇴원했나 보네요.”구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덕분에 살았죠. 죽이지 않고 살려줘서 고마워요.”윤수철은 강현우와 친분을 쌓아볼 생각이었지만 강현우가 사고의 당사자라는 걸 듣고 한쪽에 서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우는 구지호의 비꼬는 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주미나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유증 같은 게 남았다면 바로 연락하세요. 제 책임이니까요.”주미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그럼 다행이네요.”강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옆에 있던 여자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그럼 우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주미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윤하경과 윤수철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끝내 말을 삼켰다.윤하경은 구지호에게 손을 잡힌 채 답답함이 점점 커졌다.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구지호는 바짝 다가와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하경아, 요즘 뭐 했어?
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다름 아닌 강현우였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손을 내렸고 세수하던 것도 잊은 채 그를 쳐다봤다.“여기 웬일이에요?”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데이트 중 아니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뒤돌아 화장실 문을 닫더니, 한순간에 그녀를 세면대에 밀착시키고 거침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의 차가운 기운과 익숙한 향기가 동시에 밀려들며 윤하경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그를 밀쳐냈다.“여기서 이러지 마세요.”윤하경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사람들 다니잖아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화장실 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이 고급 레스토랑은 화장실마저 세련되고 칸마다 독립적으로 나뉘어 은밀하고 안전했다. 그는 그녀를 칸 문에 밀어붙이고 손으로 문을 단단히 닫았다.윤하경은 그제야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그러나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그래서 구지호랑 다시 잘해보기로 한 거야?”윤하경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에요.”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그의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고 등이 드러난 그녀의 드레스를 점점 더 파고 들어갔다. 차가운 손이 윤하경의 피부를 스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그녀는 깔끔하게 다림질된 그의 셔츠를 힘껏 움켜쥐었다.비록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강현우는 마치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을 다룰 줄 아는 사람처럼 그녀를 휘어잡았고 그녀가 저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그러나 그 순간 화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아, 너 거기 있어?”구지호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걸로 보아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강현우는 그런
강현우의 옆모습은 여전히 완벽했고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 없어요.”‘적어도 지금은...’윤하경은 자신이 이 남자 앞에서 왜 이렇게 늘 작아지는지 자책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고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은 뒤 화장실 칸을 나왔다.거울 앞에 서서 메이크업을 고치던 그녀는 거울 속에 약간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방 먹였지.’그녀는 강현우 셔츠 카라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떠올렸다.그 여자가 그걸 보면 어떤 반응일까? 그 생각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윤하경은 발걸음을 가볍게 화장실을 나섰다.강현우가 있는 방의 문을 지나치며 그녀는 무심한 듯 안쪽을 힐끗 들여다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여자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참 연기 잘하네.”윤하경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구지호의 아버지 구성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하경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구성수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하경이는 볼 때마다 점점 더 예뻐지네.”윤하경은 예의상 말했다.“아저씨도 여전히 젊어 보이세요.”그때 구지호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하경아, 어디 갔었어? 화장실 갔는데 안 보이던데.”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윤수철 옆에 자리를 잡았다.“잠깐 옆 슈퍼에 다녀왔어.”구지호는 안도한 듯 웃으며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고 구지호는 그녀에게 다정한 척 음식을 덜어주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남자 친구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덜어준 음식을 손도 대지 않았다.한편, 윤수철과 구성수는 사업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록 윤수철의 인품은 별로였지만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으로서 배울 게 나름 있었다.구씨 가문은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고 윤수철은 최근 그쪽에 손을 대보고 싶어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윤하경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어도 두 사람은
윤하경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윤수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좋아, 좋아. 하경이 오후에 시간 비어 있어.”두 가문의 어른들은 윤하경의 생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일사천리로 대화를 진행했다.윤하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윤수철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가며 은근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너랑 지호 이 결혼은 꼭 성사돼야 해.”그는 짧게 뜸을 들이더니 날카로운 한마디를 덧붙였다.“네 엄마가 남긴 물건이 아직 내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말고.”분명한 위협이었고 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윤수철은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의식한 듯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래는 척했다.“그리고 네가 지호를 그렇게 오래 좋아했잖아. 여자란 원래 좀 투덜대다가도 금방 풀리는 거야.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마.”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헛웃음이 터졌다.‘와. 이게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윤하연이 좋으면 하연이를 지호랑 결혼시키지 그러세요? 딱 어울리잖아요.”윤수철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더니 목소리가 살짝 다급해졌다.“헛소리하지 마! 하연이가 지호랑 결혼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이것 보라니깐.’윤수철도 구지호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윤하연은 안 되고 자신은 된다는 게 정말 우스웠다.윤하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지호를 좋아해서 결혼하라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호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아서 하연이는 안 된다는 건가요?”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윤수철은 순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났고 얼버무리듯 말했다.“지호는 괜찮은 아이야. 헛소리하지 마.”그는 그녀와 더 이상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구지호 앞으로 데려갔다.“지호야, 하경이는 너한테 맡길게. 얘가 좀 고집스러우니 잘 부탁해.”윤하경은 가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잠시 표정을 다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