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연은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이제 기분 좋아? 오늘 내 망신당하는 모습 보려고 돌아온 거야?”윤하경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한 번 흘끗 보더니 가볍게 말했다.“생각보다 눈치는 있네.”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울분을 터뜨렸다.“윤하경, 왜 그래? 왜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야? 난 아이를 잃었어... 너 이제 만족해?”윤하경은 그녀를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비웃듯이 말했다.“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야지. 여기서 개처럼 짖지 말고.”그녀의 차가운 조소에 윤하연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손이 덜덜 떨렸다.그 순간, 마치 이성을 잃은 듯한 윤하연이 갑자기 달려들어 윤하경의 목을 조르려 했다.“윤하경! 내 아이를 돌려줘! 내 아이를 돌려달라고!”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놀라, 잠시 멍해졌다.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윤하연을 바라보았다.몸이 쇠약해진 윤하연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윤하경이 가볍게 밀어내자 그대로 침대 위로 나가떨어졌다.윤하경은 침대 위를 내려다보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이제 이 침대 시트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그녀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 내 방에서 나가. 안 그러면 네가 더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거야.”윤하연은 굳게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의 눈빛엔 아직도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임수연이 들어왔다.임수연은 윤하연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하연아,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그러면서 윤하경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따졌다.“넌 도대체 하연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윤하경은 피곤하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쉬며 눈을 굴렸다.“제발 둘 다 피해망상 좀 그만해요. 하연이가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얼굴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꼴 보기 싫어
강현우는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경 쓰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한 변화였다.[우리 주인님과 데이트할 시간은 언제든지 있죠.]강현우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윤하경이 이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떠올렸다.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조용히 입술을 다물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오후, 윤하경이 집을 나서려던 순간, 서재에서 윤미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한테 돈이 어디 있어? 몇 년 동안 형님도 내 가게들 다 장사 안되는 거 너도 알잖아. 네 적자가 이렇게 큰데 내가 어디서 돈을 구해?”윤하경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다. 윤수철이 친척들에게 손을 벌릴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건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사실, 윤씨 가문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수철이 정말 벼랑 끝까지 몰리지 않는 한, 절대로 자신의 해결책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웃은 뒤, 집을 나섰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작은 아파트로 향했다. 오늘 밤 강현우를 만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신경 써서 옷을 골랐다. 안에는 레이스 장식이 있는 고급스러운 속옷을 입고 그 위에 몸에 딱 맞는 슬림한 원피스를 걸쳤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웨이브 진 머리는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거울을 보며 한번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윤하경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보다 너무 과하게 꾸민 것 같았다. 옷을 벗으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자, 소지연이 여러 개의 맥주 캔을 들고 서 있었다. 윤하경의 옷차림을 본 소지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뭐야? 데이트 가는 거야
“그 사람이 돌아왔어.”소지연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결혼 준비하러 왔다더라.”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결혼 준비?”소지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나한테 청첩장까지 보냈어.”윤하경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진짜 미쳤나? 결혼하는 건 자기 마음인데 굳이 너한테 청첩장을 보내는 건 무슨 의도야?”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욕이 튀어나왔다.“진짜 돌았네.”윤하경은 그 사람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소지연과 그 남자는 그녀가 중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였고 그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계였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망쳐놓은 걸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툴툴거렸다.“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소지연은 윤하경이 화를 내는 걸 보고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괜찮아. 사실 나도 이제 끝내려고 했어. 그래서 이번엔 가볼까 해.”윤하경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갈 거야?”소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왜 안 가? 내 첫사랑인데 끝을 봐야지.”그녀의 목소리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결심한 듯 말했다.“좋아, 나도 같이 갈게. 너 혼자 가면 마음도 무겁고 아무래도 나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소지연은 가볍게 웃으며 맥주 캔을 들어 윤하경과 부딪쳤다.“좋아. 그럼 같이 끝을 보자.”그녀의 말에 윤하경은 조용히 맥주를 몇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지나면서 소지연은 점점 취해갔고 윤하경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차를 불러 보내는 대신, 자신의 방에서 재우기로 했다.소지연을 침대에 눕힌 뒤, 윤하경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맞다, 나 오늘 강현우랑 약속 있었지...!’급하게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30분.강현우는 시간 엄수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늦으면 기분이 상할 게 뻔했다.윤
강현우는 추성운을 흘끗 쳐다보며 짧게 말했다.“가서 술이나 마셔.”추성운은 낄낄 웃으며 문틀에 기대어 섰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표정이었다.강현우는 그런 그를 한 번 흘깃 쳐다본 뒤,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윤하경은 높은 힐을 신고 있어서 걸음이 늦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추성운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하경 씨, 지금 강현우랑 정식으로 사귀는 거야?”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질문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고민했다.사실 그녀와 강현우는 함께 잠자리를 했지만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강현우 같은 사람이 자신에게 공식적인 연인의 자리를 줄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만큼 그녀도 강현우에게 확실한 관계를 기대하지 않았다.윤하경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추성운에게 답했다.“그게 궁금하면 직접 대표님한테 물어보세요.”“대표님?”추성운은 그녀의 말을 반복하며 곱씹듯 되물었다.그녀와 강현우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때, 멀리서 강현우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와.”윤하경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고 강현우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같이 가자고요.”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그 순간 그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진 듯했다.아무 말 없이 윤하경이 팔짱을 낀 채 걷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때 뒤에서 추성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이게 진짜 강현우 맞아? 사람 변했네?”그때, 배지훈이 뒤에서 다가오며 추성운의 팔을 툭 쳤다.“무슨 일인데?”추성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윤하경이랑 강현우, 벌써 두 번이나 우리 모임에 같이 나온 거 너도 봤지?”배지훈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거 보면 강
유호천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잘 왔어. 마침 고기가 딱 알맞게 익었어.”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다이어트 중이라 됐어.”그녀는 강현우의 팔을 자연스럽게 놓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맥주 한 병을 집어 들었다.“뭐야? 형한테 화난 거야?”강현우는 황당하다는 듯 유호천을 흘깃 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네 생각엔 그녀가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아?”유호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럼 뭐야?”윤하경은 이 자리에서 딱히 친한 사람도 없었기에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소지연에게 메시지를 보내 유호천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려다, 결국 전송하지 않고 지워버렸다.괜히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때, 추성운과 배지훈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술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자, 오늘 유호천이 돌아온 걸 축하하면서 한잔해야지!”그제야 윤하경은 이 자리가 유호천을 위한 환영회라는 사실을 알았다.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아, 강현우가 미리 말했으면 안 왔을 텐데.’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자리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뭐야? 기분 나빠?”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쳐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기분 나쁠 리가요. 완전 좋죠.”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확실해?”윤하경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이런 쓰레기의 환영회인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마침 그때, 유호천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그는 윤하경과 술잔을 부딪치려 했지만 윤하경은 재빠르게 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나 술 끊었어.”강현우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불과 몇 초 전까지도 맥주를 잘만 마시던 사람이 이제 와서 술을 끊었다고?이렇게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건 처음 보는 듯했다.윤하경은 대놓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딱 봐
현우가 뒤에 있는 이상, 유호천은 강하게 나올 수 없었다.어릴 때부터 이 사촌 형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곤 했으니 강하게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래, 나중에 시간 될 때 따로 보자.”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유호천을 힐끗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를 한바탕 쏘아붙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좀 바람 쐬고 올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세상의 때와는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윤하경은 천천히 정원의 한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시내와 그리 멀지 않지만 주변에 건물이 많지 않아 조용했다.나무가 울창하고 공기가 상쾌했으며 무엇보다 밤하늘의 별이 무척이나 선명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예 옥상으로 올라가 앉아 달을 보기로 했다. 마침 보름달이 떠서 유난히 둥글고 밝았다.달을 바라보며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리고 소지연도 사람을 잘못 만난 걸로 따지면 비슷한 처지였다.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도 내가 싫어?”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윤호천을 바라보았다.그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윤하경과 유호천은 대학교 시절 꽤 친한 사이였다. 유호천은 그녀보다 한 학년 선배였고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녀를 잘 챙겨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지연과도 가까워졌고 결국 연인이 되었다.처음엔 둘이 정말 잘 맞았고 연애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을 정도로 달달했지만 슬픈 결말을 맞이했다.윤하경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알면서도 왜 날 찾아왔어?”유호천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그녀 옆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소지연... 잘 지내?”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까도 말했잖아. 잘 지내든 못 지내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유호천, 이미 결혼할 거면 그냥 조용히 살아. 지연이 인생
하지만 그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윤하경이 가려는 순간, 오히려 한 손으로 윤하경을 잡고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너 못 가. 제대로 말해 봐. 내가 호천의 약혼녀라는 걸 몰라?”“좀 예쁘다고 그 얼굴로 사람들 만나면서 다 꼬시려는 거야?”윤하경은 짜증을 내며 그녀를 쳐다봤다.“저기요, 정신 좀 차리세요.”그렇게 말하고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유호천을 쳐다봤다.“왜 아무 말도 안 해?”유호천은 그제야 반응하고 나가서 윤하경과 자신의 약혼녀를 떼어놓으려 했다.“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야.”“그럼 뭔데?”유호천의 설명이 그 여자에게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녀는 더욱 고집을 부리며 윤하경을 놓지 않았고 바닥이 미끄러워서 결국 둘이 함께 넘어졌다.윤하경은 팔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더니 바로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안았다.입에서 나가려던 욕은 입안에 그대로 멈췄다.“형.”유호천은 잠깐 멈칫하다가 자신의 약혼녀를 바로 일으켰다. 강현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호천을 한 번 쳐다본 후, 그의 품에 안긴 윤하경을 다시 한번 살폈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끌어안고 자리를 떠났다.누구나 봐도 강현우가 화난 게 분명했다.유호천은 이마를 찡그리며, 불쾌한 듯 자기 품에 안고 있던 약혼녀를 밀어냈다.“좀 똑똑하게 행동할 수 없냐? 윤하경은 현우 형의 여자 친구야.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그녀도 해외에 있었던 탓에 강현우와는 잘 알지 못했지만 방금 강현우의 눈빛을 보자 이 사람은 절대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특히 첫 번째로 유호천의 가족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일을 벌여서 더 당황스러웠다.“왜 네가 말을 안 해줘서 이렇게 된 거잖아?”유호천은 이를 악물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됐어, 너 먼저 돌아가.”안현주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었다.“그럼, 현우 씨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괜찮아, 먼저 가. 나머지는
하지만 강현우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작은 확실히 조금 부드러웠고 윤하경은 귀찮아서 더 이상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누가 알겠어요? 유호천 여자 친구가 이렇게 미친 여자였을 줄은. 와서 바로 손부터 대고.”강현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랬어? 너희가 뭔가 잘못한 거 아니야? 사람들 오해할 만한 일을 했거나.”그의 말은 마치 무심코 던지는 질문 같았지만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강현우와 몇 달간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윤하경은 이때 강현우가 화가 난 게 분명하다는 걸 직감했다.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언제나 냉정해 보이지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분명히 화가 난 상태일 것이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하고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때 CCTV라도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아요? 이렇게 억울하게 나를 누명 씌우지 말고요.”그녀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며 살짝 섭섭함이 묻어났다.강현우는 윤하경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녀의 상처를 눌렀다.윤하경은 순간 놀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유호천하고 친해?”윤하경은 이때가 강현우에게 농담을 던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현우는 성격이 예민하고 그가 불쾌해지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꽤 친해요. 대학교 때 같은 학교였거든요.”“알아.”“내가 모르는 얘기 좀 해봐.”그의 말투는 다소 단호했고 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전에 유호천이랑 소지연이 사귀었었는데 잘 지내다가 유호천이 갑자기 해외로 갔어요. 그때 소지연한테 헤어진다고 말도 안 하고 그냥 떠났죠. 이번에 돌아와서는 바로 결혼 발표하고 소지연에게 청첩장도 보냈어요.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얘기를 하면서 윤하경은 참을 수 없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보기에 사람 잘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큰 쓰레기 남자예요.”강현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상처를 계속 치료했다.“그러니까, 네가 친구 대신에 복수하려고 하는 건가?”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런
윤하경은 자료를 검토하던 중이었다.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윤수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누가 너더러 경찰에 신고하랬어?”윤수철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묻잖아. 누가 너보고 멋대로 신고하래?”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웃었다.“제가 했어요.”“회사의 재무랑 인사를 제가 관리하고 있는데 장부에 이상이 있으면 당연히 신고해야죠. 뭐가 문제죠?”윤수철이 씩씩거리는 사이, 그녀는 말끔한 표정 그대로 침착하게 받아쳤다.그 태도에 윤수철은 더 화가 났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가리켰다.“넌 지금 이 회사에 누가 주인인지 잊은 거야?”윤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죠. 아버지요.”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하지만 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 것도, 거의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간 것도 아버지셨죠. 이 회사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잖아요.”“아직도 임수연이랑 윤하연 두 사람한테 미련이 있으세요?”윤수철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그들 때문일 것이다.전에 회계 내역을 조사하려 했을 때도 막아섰던 윤수철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때는 그냥 눈 감고 넘기려 했던 거였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고조되자 사무실 밖 직원들까지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그러자 윤수철이 홱 돌아서며 유리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다 꺼져! 볼 일 없는 사람 다 나가!”직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고 누구 하나 눈 마주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윤하경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고소, 취하해.”윤하경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죄송하지만 형법에 저촉되는 건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
오건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젯밤처럼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사건이 공개라도 됐다면 그저 단순한 상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정말 그렇게 됐다면 오 대표님 지금쯤 이 정도 상처로 끝났을 리 없죠.”윤하경의 말에 오건우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책을 내려놓고 윤하경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은은한 노란빛을 띠었다.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이 오히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그 눈빛마저 이렇게 차갑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른다.윤하경은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 꿋꿋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고 오건우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하는 줄은 몰랐네요. 윤 대표님 같은 사람도 있는 걸 보니 한빛 그룹 딸들이 다 무능한 건 아닌가 봅니다.”윤하경은 순간 미간이 살짝 움직였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그 말에서 오건우가 윤하연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윤하연은 자신보다 훨씬 일찍부터 회사에서 일해 왔고 오건우는 한빛 그룹의 핵심 거래처이니 분명 그녀가 먼저 접촉했을 것이다.다만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그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윤하경은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이제, 한빛 그룹 부대표인 제가 대표님과의 협력에 대해 다시 이야기 나눠볼 수 있겠네요?”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를 한 번 훑었다.“그럼 하나 묻죠. 어젯밤, 왜 저를 거절한 겁니까?”“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윤하경은 눈을 깜빡였다.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어젯밤 그 상황이 떠올랐다.그가 말하는 건, 그녀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일이었다.입술을 다문 윤하경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일하러 온 거지 몸을 팔러 온 건 아니에요.”그는 윤하경의 붉은 입술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강현우 때문입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슬기는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대표님.”그녀는 다가오며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선물 상자를 들어 보였다.“이 정도면 괜찮을까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오건우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자, 입술을 살짝 눌렀다.“그 사람, 아예 우리 얼굴조차 보기 싫을 수도 있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앞에 도착했지만 곧장 길이 막혔다.오건우의 경호원이 앞을 가로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으로 제지했다.그 표정은 ‘낯선 사람 출입 금지’라는 말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듯했다.우슬기가 재빨리 다가가 공손하게 설명했다.“안녕하세요. 이분은 저희 한빛 그룹 부대표 윤하경 님이십니다. 오늘 오건우 대표님을 정중히 뵈러 온 자리입니다.”그러나 경호원은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합니다.”마치 누군가에게 돈이라도 떼인 듯한 싸늘한 표정이었지만 우슬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정말 잠시만이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대표님께 한번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어렵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고 윤하경은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이건 오건우가 직접 자기를 들이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이다.어젯밤 상황은 서로에게 꽤 민망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했다.그렇게 자존심 높은 사람이, 그 망가진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니 굳이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나를 보기만 해도 그 순간이 떠오를 테고 그러니 아예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겠지.’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윤하경은 이내 익숙한, 완벽하게 가다듬은 미소를 얼굴에 띠고 고개를 들었다.“저기요, 경호원님. 안에 계신 오건우 대표님께 꼭 전해주세요. 어젯밤 그 일, 절대밖에 말하지 않겠다고요.”말은 경호원에게 했지만 실제로는 병실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오건우가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젯밤 일
[하경아, 나 혼자 있고 싶어. 찾지 말아줘.]윤하경은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고 곧 짧게 한 줄만 답장을 보냈다.[조심해.]소지연의 어머니 유해는 당분간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였다.윤하경은 법적 가족이 아니라서 직접 처리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눈빛에는 서서히 차가운 기운이 맺혔다.“안현주.”윤하경은 이를 살짝 깨물며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그 순간, 진동이 울리며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자, 화면엔 ‘우슬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윤 대표님, 오늘 아침에 오건우 대표님 만나시기로 하셨죠? 지금 병원으로 갈까요?”그제야 윤하경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병원에서 바로 봐.”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오건우가 있는 병원도 지금 있는 곳과는 달랐다.우슬기는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윤하경은 병원 건물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엉망이었던 어젯밤의 흔적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눈에 띄게 빠진 장식품들이 공간을 어색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계단 끝에서 윤수철과 마주쳤다.윤수철은 막 잠에서 깬 듯했다. 평소 단정하게 손질하던 머리는 엉망이었고 그의 얼굴은 단 하루 만에 열 살은 늙은 듯 보였다.임수연의 실종이 꽤 큰 충격이었나 보다 생각하며 윤하경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저런 표정조차 본 적 없는데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화가 났다.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윤하경을 보고 윤수철은 곧장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제 네가 나 대신 오건우 대표 파티에 참석했다더라?”입을 열자마자 술과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그 냄새에 윤하경은 속이 울렁거렸다.“네.”그녀는 담담히 대답하고 곧장 발걸음을 돌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다.하지만 윤수철은 또다시 말을 걸었다.“내가 들은 바로는, 또 계약 망
윤하경은 소지연을 한 번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조용히 돌아섰다.지금의 소지연에게는 누군가의 위로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이힐 소리를 남기며 병실을 나가던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문까지 닫아주었다.바로 그 순간, 병실 안에서는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소지연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그 소리에 윤하경의 가슴도 미어졌고 어느새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고 조용히 병실 옆 의자에 앉아 소지연이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윤하경은 조심스레 도시락 상자를 들고 병실 문을 열었다.소지연은 지쳐버린 듯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움직임 하나 없이 굳은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느껴졌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다가가 도시락을 그녀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일단 뭐라도 먹자.”소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고 멍한 눈으로 벽만 바라봤다.윤하경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런 네 모습, 이모님이 보셨다면 얼마나 속상하셨겠어. 하늘에서도 마음 아프실 거야.”여전히 반응 없는 소지연을 보자 윤하경은 이를 꽉 물고 이불을 걷어 올렸다.그제야 소지연이 몸을 움찔하며 눈길을 그녀에게로 돌렸다.“지금 이 상태... 안현주가 바랐던 게 이거 아니야? 내가 너라면 똑똑히 살아남아 안현주한테 반드시 갚아 줄 거야. 이렇게 무너져 있으면 너를 아끼는 사람만 아프고 원수들은 웃고 난리야.”그 말에 소지연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윤하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그 순간, 소지연이 갑자기 침대 머리맡에 있던 과일칼을 움켜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맞아. 네 말이 맞아. 내가 죽여야 해. 우리 엄마를 죽인 그 여자, 내가 끝장낼 거야!”윤하경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그 말 그런 뜻 아니야!”하지만 지금의 소지연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날뛰며 몸부림쳤고 윤하경은 말한 걸 후회했다. 살아갈 힘을 주고 싶었던 말이, 오히려 그녀를 자극한
손에 깁스를 한 채, 소지연은 수술실 문 앞 한구석에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지연아, 괜찮아?”윤하경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소지연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벌떡 일어나 윤하경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하경아... 으흑... 하경아...”윤하경은 그녀가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리는 걸 느끼며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천천히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지연은 한참을 흐느끼다가, 겨우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엔 말로 다 못 할 깊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어젯밤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고 소지연은 옆에서 조용히 어머니와 함께 잠이 들었다.그런데 한밤중,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고 소지연의 어머니가 위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다.그 소리에 잠에서 깬 지연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 그저 멍하니 창가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소지연은 창백한 얼굴로 윤하경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엄마가... 수술 들어간 지 벌써 두세 시간은 됐어. 근데 벌써 여러 번... 위독하다고...”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빛엔 극심한 두려움이 가득했다.“하경아, 나 무서워... 정말 무서워...”소지연에게 엄마는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둘이 의지하며 살아왔고 믿고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지낸 세월이었다.그런 그녀가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윤하경뿐이었다.윤하경은 이를 꽉 물며 소지연을 껴안았다.“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모님, 분명 괜찮으실 거야.”하지만 마치 하늘이 장난이라도 치는 듯,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술실 문이 덜컥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왔고 마스크를 벗으며 무거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소지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의사를 향해 달려갔고 눈에는 마지막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의사 선생님, 엄마는요? 위험한 고비 넘긴 거죠?”의사는
하지만 지금 윤하경은 그 아침의 고요한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그저 멍하니 서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나가요?”강현우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어젯밤 꽤 피곤해 보이던데 운전할 힘도 없을까 봐.”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강현우는 늘 그렇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듣는 사람의 속을 뒤흔드는 말을 툭 내뱉는다.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이른 아침, 밤과 낮이 교차하는 이 시간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하늘 끝자락엔 금빛이 아련하게 스며들고 있었지만 윤하경의 마음속엔 오로지 하나, 병원에 빨리 도착해 소지연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소지연에게서 온 메시지는 단 세 글자였다.[빨리 와.]소지연은 일이 클수록 말을 아끼는 성격이다.이렇게 단답형으로 연락이 왔다는 건, 분명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불안한 마음으로 가슴이 자꾸 조여오는 가운데 옆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오건우 만나려는 거, 계약 때문이지?”윤하경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네.”강현우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요즘 한빛 그룹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굳이 오건우한테 매달릴 필요까진 없지.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잖아.”그 말투는 무심한 듯 평온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뻔했다.그녀는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힘으로 해보고 싶어요.”강현우는 분명 비즈니스맨이다. 지금까지 그녀를 도와준 적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신세도 졌다.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무언가를 줄 땐, 언제나 대가를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그리고 지난번 그가 내건 조건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지금 그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가 요구할 조건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다.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그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고 그 진리를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심지어 점점 더 과해지고 있었다.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윤하경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강현우의 팔을 꼭 붙잡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그러더니 휴대전화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설마... 사모님?’윤하경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강현우를 바라봤다.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더 심한 장난을 칠까 봐 간신히 참았다.‘이 타이밍에 친엄마 전화를 받는다고?’강현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장난스럽게 그녀의 민감한 곳을 손끝으로 살살 건드렸다.“...”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강현우의 팔을 깨물었다.그렇게 해야만 입에서 새어 나올 뻔한 신음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강현우는 이 장면이 흥미로운 듯 감상하며 전화를 이어받았다.“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연회가 끝나면 소희 데리고 저녁 약속 잡으라고 했잖아?”“그런데 소희가 다쳐서 병원에 갔다던데, 무슨 일이야?”강현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귀찮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저, 걔랑 안 친해요.”“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끊을게요.”사모님은 그의 재수 없는 태도에 바로 언성을 높였다.“네가 알아서 친해지려 해야지?”“너 30분 안에 당장 병원으로 가봐.”“시간 없어요.”강현우는 짧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여전히 자기 팔을 물고 있는 윤하경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개띠야?”그제야 그녀는 힘을 빼고 그의 팔에서 입을 뗐다.그러고는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사모님이 급한 일로 찾으신 거면 가봐야 하시는 거 아니...”그러나 윤하경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픽 웃고는 몸을 숙였다.강현우의 몸에서만 나는 특유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너나 신경 써.”그 말은 마치 협박처럼 들리겠지만 윤하경은 그것이 협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