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혜야. 내 말 좀 들어볼래? 내게도 기회를 줘.”인내심을 잃은 안다혜가 소리를 질렀다.“이거 놔요.”“더럽지도 않아요? 설마 언니가 있다는 거 잊은 건 아니죠?”안소현이 나오자 허종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술기운을 빌려 막무가내로 안다혜를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처음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땐 우리 두 사람이었잖아.”“다혜야. 사실 나도 너 좋아해...”이 말에 안다혜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힘껏 발버둥 쳤지만 체급 차이도 있고 허종혁이 만취 상태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형부, 언니가 알면 형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다혜가 빨개진 허종혁의 얼굴을 보며 위가 뒤틀리듯 역겨웠다.“형부 언니랑 약혼한 사이에요. 둘이 약혼한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안하지도 않아요?”허종혁이 움찔했지만 손에 들어간 힘은 여전했다.“다혜야, 소현이 얘기 그만하면 안 될까...”인사불성이 된 허종혁은 모든 신경을 안다혜의 몸에 집중했다. 향기롭고 말캉한 안다혜는 안고 있으면 은은한 장미 향기가 풍겼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게다가 안다혜는 성격이 만만치 않아도 외모와 몸매는 허종혁의 마음에 쏙 들었다.“다혜야, 한 번만 기회를 줘. 너만 좋다면 우리 다시 만나도 돼.”허종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나는 너 다시 받아줄 생각이 있어.”허종혁이 이렇게 말하며 더 힘껏 끌어안았고 안다혜가 뭐라 하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던 안다혜가 허종혁의 발을 꽉 밟았다. 허종혁은 너무 아팠지만 안다혜의 허락을 받기 위해 고통을 꾹 참았다.“다혜야, 나 지금 진지해...”“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이내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움이 섞인 말투는 이내 분노로 뒤바뀌고 말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안소현이 김미진과 함께 현관에 서 있었다. 소리를 낸 사람은 김미진이었고 안소현의 눈시울은 이미 빨개진 상태였다. 안소현은 김미진 옆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해자라도 된 것처럼
안소현이 울자 김미진은 마음이 아팠다. 동생과 약혼자가 부둥켜안고 있는 걸 보고도 김미진을 다독이는 안소현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허종혁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소현아, 다 내 잘못이야.”이 말에 세 여자의 시선이 일제히 허종혁에게로 향했다. 안다혜도 허종혁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허종혁을 바라봤다.‘뭐야. 무슨 짓을 했는지 인정하려는 건가?’안소현이 울먹이며 말했다.“당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김미진도 안다혜를 오해한 게 아닌지 의심하며 언짢을 표정을 짓는데 허종혁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셨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서 소파에 누워 있었어.”이 말을 들은 안다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허종혁이 덧붙인 말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근데 다혜가 소파 옆으로 다가오더니 이런저런 실없는 말을 꺼내면서 언니가 약혼자를 뺏은 걸 원망하더라고.”고개를 들자 보이는 허종혁의 빨개진 눈시울이 참으로 억울해 보였다.“어머님,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저를 주체하지 못한 건 맞지만 소현이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에요. 다혜가 없었어도 나는 소현이를 선택했을 거예요.”“종혁 씨...”감동한 안소현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허종혁을 바라봤고 허종혁도 진지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마치 안다혜가 세컨드라도 되는 것처럼 흘러가기 시작했고 안다혜의 표정이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역시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사실대로 말할 거라고 기대한 내가 바보지.’“형부, 지금 한 말 다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안다혜가 차가운 눈빛으로 허종혁을 쏘아보자 허종혁이 안다혜의 시선을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당연하지. 나랑 너희 언니는 쭉 안정적이었는데 내가 왜 너희 언니를 버리고 너를 만나겠니.”“게다가 네가 서진우를 3년이나 쫓아다닌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왜?”김미진은 이 말이 살짝 불편하게 느껴졌다. 안다혜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딸인 건 변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건
허종혁이 안소현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관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소현아, 너 괜찮아?”“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울면 어떡해. 네가 우니까 나도 마음이 아프잖아.”허종혁이 다시 한번 약속했다.“걱정하지 마. 나 안다혜랑 아무 일도 없었어. 나도 너를 생각해서 그저 동생으로만 여겼던 거야.”김미진도 안소현 옆에 서서 안소현의 몸을 챙겼다. 극명한 차이에 안다혜는 순간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악녀가 된 것 같았고 순간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 원래는 그들을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들은 마치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떼거지로 몰려와 안다혜의 신경을 긁어댔다.“그래요. 허종혁 씨.”안다혜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경멸에 찬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직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봐서는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소현이 이렇게 된 거 안 보여? 넌 왜 항상 그렇게 막무가내야?”이 말에 김미진도 언짢은 표정으로 안다혜를 바라봤다. 안소현과 비기면 안다혜가 막무가내인 건 사실이었다.“됐어. 이제 와서 뭘 더 말해.”안다혜가 핸드폰을 꺼내 들며 태연하게 웃었다.“엄마, 내가 뭘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히 사건의 진상이 뭔지 보여주려는 거죠.”이 말에 허종혁이 당황하더니 안다혜의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설마...’안다혜가 허종혁의 눈빛에서 당황한 기색을 읽어내고는 느긋하게 말했다.“맞아요. 허종혁 씨 지금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어요.”“안다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안다혜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다 허종혁 씨가 자초한 일이잖아요. 나를 사지로 몰아넣은 건 형부예요. 내가 기회를 줬는데.”안소현은 안다혜가 핸드폰을 꺼냈을 뿐인데 몹시 당황해하는 허종혁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뭔가를 알아채고는 눈빛이 흔들렸다.‘설마 거짓말한 거야?’김미진도 허종혁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보아냈다.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녹음 파일을
허종혁은 안다혜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안소현을 바라보며 설명하려 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것보다도 안소현을 달래는 게 제일 중요했다.“소현아, 내 말 좀 들어봐.”안소현이 애써 유지했던 불쌍하고 연약한 이미지를 제쳐두고 허종혁의 손을 홱 뿌리쳤다.“녹음까지 들어놓고 무슨 할 말이 남았다고 그래요?”안소현의 눈동자에 남은 건 원망과 의문밖에 없었다.“설마 아까 들은 녹음이 본인 목소리가 아니라고 할 건 아니죠?”“나는...”허종혁의 눈빛이 반짝 빛나더니 안다혜가 짜깁기한 거라고 얘기하려는데 안다혜가 한발 빨랐다.“형부, 녹음 시간 보여줄게요. 방금 녹음한 거예요.”안다혜가 예쁜 눈으로 활짝 웃었지만 그 웃음은 마치 가시가 달린 장미처럼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걱정하지 마요. 손댈 시간 없었어요. 게다가 그 입으로 직접 한 말이잖아요.”말문이 막힌 허종혁은 반박할 힘을 잃었고 안소현의 안색도 점점 어두워졌다. 오늘 허종혁이 저지른 짓은 안소현의 따귀를 후려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미진 앞에서 약혼한 일로 이간질까지 한 걸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허종혁이 안소현을 보며 뭔가 말하려다 말고 손을 내밀며 더 해명하려 했지만 안소현은 그런 허종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앞으로 성큼 다가가 안다혜와 김미진을 향해 사과했다.“미안해. 엄마, 그리고 다혜야, 내가 오해했어... 이제 엄마랑 너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김미진이 그런 안소현을 보며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소현아, 너도 몰랐잖아.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안다혜는 화목한 두 사람을 보며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허종혁과 안다혜 중에 허종혁을 고르더니 안소현이 사과하자마자 자책할 필요가 없다며 위로했다. 이로써 김미진의 마음속에 누가 더 순위가 높은지 알 수 있었다.김미진은 곁눈질로 안다혜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안다혜가 한 말을 떠올렸다.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평소에 늘 안다혜를 엄격하게 대했던 김미진이었기에 바로 변하긴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김미진은 늘 강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태안 그룹 회장으로서, 그것도 여자로서 하이에나 같은 주주들을 이기려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지만 김미진은 한 번도 이런 말을 안다혜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제일 자주 하는 말은 빨리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게 성장하라는 말이었다.기억 속의 김미진은 늘 엄격하면서도 강압적이었고 무슨 일을 하든 완벽함을 추구했기에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다.김미진은 한참 지나도 안다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긴 속눈썹으로 애써 실망한 티를 감추려 했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까는 확실히 처사가 너무 과했다.‘왜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종혁이 편을 들었지? 다혜야말로 내 친딸인데 오히려 다른 사람 편에 섰네.’김미진은 그제야 안다혜에게 쌓인 오해가 많다는 걸 알아챘다.“한 번도 탓해본 적 없어요.”안다혜가 김미진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엄마, 난 엄마가 늘 수고하는 거 알아요.”“혼자 이 자리까지 오려고 많은 일을 겪었다는 거 알아요. 한 번도 엄마 탓해본 적 없고 엄마가 나 엄격하게 대해도 다 이해해요.”김미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다혜를 바라봤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은 김미진과 많이 닮아 있었다. 특히 강압적이고 매서운 모습을 보일 때면 김미진이 사업할 때 보이는 과감한 모습과 똑닮아 있어 자기도 모르게 어릴 때의 모습이 겹치며 눈물이 차올랐다. 김미진이 안다혜에게로 다가가자 안다혜가 한걸음 먼저 다가와 의아한 눈빛으로 김미진을 바라보는데 김미진이 안다혜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안다혜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그래.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엄마를 이해해 준다니 뿌듯하네.”안다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미진과 이렇게 친근한 행동을 한 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혼자 임무를 완성하면 김미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전부였다. 김미진과의 스킨십은 안다혜가 크고 나서 극히 드물었다.안다혜는 김미
안다혜가 수락하자 김미진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다릴게.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하고.”안다혜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윤해준이 시간이 되는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첫사랑 곁에 있어 줘야 할 텐데.’“아참, 엄마.”안다혜가 입을 열자 김미진이 계속 말해보라는 사인으로 눈썹을 추켜세웠다.“언니랑 허종혁 씨는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안다혜는 원래도 형부라는 호칭이 입에 잘 맞지 않았기에 아예 호칭을 바꿔버렸다. 그런 남자는 형부라고 부르기 아까웠다.허종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김미진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다시 커리어우먼 이미지로 돌아갔다.“이 일은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처리할게.”김미진이 멈칫하더니 결국 참짐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아까 너희 언니도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잖니.”“너희 언니가 알아서 잘할 거야. 믿어줘. 소현이도 까맣게 속았으니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안소현이 억울하게 당했다는 생각에 김미진이 마음 아파했다. 그 눈빛을 읽어낸 안다혜는 김미진이 그래도 안소현을 편애한다는 걸 알아챘다. 비록 안소현이 안다혜가 약혼자를 뺏긴 게 아쉬워 일부러 꾸민 짓이라고 모함해도, 김미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질타를 받아도 변하는 건 없었기에 안다혜는 다시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오늘 이 녹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네, 알겠어요.”김미진은 안다혜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자 한마디 덧붙이려는데 안다혜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엄마,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볼게요.”“엄마도 일찍 쉬세요. 다음엔 그이와 함께 올게요.”김미진이 떠나는 안다혜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 일을 떠올리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차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지만 안다혜의 머릿속은 온통 아까 저택에서 일어난 일로 가득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안소현이 무슨 핑계로 무마할지 궁금했다.‘허종혁은 아마도 사람을 잘못 봤다는 핑계로 다시 돌아오겠지?’이렇게 생각한 안다혜는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안소현, 나
안소현의 성격도 억울한 걸 참는 성격은 아니었다. 허종혁은 본인도 안소현을 퍽 만족스러워했고 가문의 어르신들도 안소현을 자주 칭찬했기에 화들짝 놀랐다. 더 중요한 건 안소현이 민성에서는 있는 집 아가씨로 알려져 데리고 다니면 허종혁의 어깨가 올라갔다. 그런데 만약 안소현과 헤어진다면 허종혁도 아쉬울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허종혁은 안소현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다독였다.“소현아, 안다혜가 먼저 작업 건 거라니까. 내가 사랑한 사람은 늘 너뿐이었어.”“그러니까 그런 말은 빈말이라도 하지 마. 우리 이미 약혼했고 난 평생 너랑 함께 살 거야. 내 마음속엔 너밖에 없어.”허종혁은 꽤 잘생긴 편이었는데 특히 눈동자가 그윽했다. 거기에 입에 발린 말까지 더해지자 안소현은 그 말을 믿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말했다.“그래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요. 엄마한테는 뭐라고 할 거예요?”“다혜가 녹음까지 재생해서 쉽게 넘어가진 못할 것 같은데.”허종혁은 우쭐거리던 안다혜의 얼굴을 떠올리며 표정이 음침해졌다.“걱정하지 마. 어머님은 내가 잘 설득할게.”“우리가 힘을 합치면 어머님도 뭐라 하지는 않으실 거야.”안소현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뭐라 덧붙이지 않았다.“레스토랑 예약했는데 오늘은 나랑 같이 나가서 먹자.”허종혁이 웃으며 말하자 안소현이 촉촉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허종혁이 눈물을 닦아줬다.“됐다. 더 울면 나 마음 아파.”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화해했다....안다혜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방안이 어두컴컴했다.‘아직 안 돌아온 건가?’안다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는데 차라리 잘됐네.’오는 길에 안다혜는 이 일로 고민 또 고민했는데 윤해준이 집에 없으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안다혜가 아무 부담 없이 불을 켰는데 윤해준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집에 있으면서 왜 불도 안 켜고 그래요?”윤해준이 대꾸하지 않았다. 오뚝한 코가 얼굴에 작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요새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랬어요.”안다혜는 윤해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얼른 이렇게 말했다.“이거 놔요. 샤워하러 갈래요.”윤해준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안다혜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안다혜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이 일은 안다혜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윤해준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윤해준은 두 사람 사이가 딱딱해지는 게 싫어 더 캐물으려 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안다혜가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다정아, 나는 우리 둘 사이에 오해 같은 거 없었으면 좋겠어.”윤해준이 안다혜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얘기해.”윤해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첼로의 저음처럼 사람의 심금을 울려 안다혜의 마음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날 윤해준이 바로 자리를 비운 게 생각나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묻는다고 서로 원하는 것만 취하는 번개 결혼의 목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정말 뭐 없어요.”안다혜가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윤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가 언제 한번 밥 먹으러 오래요.”“불편하면 내가 거절할게요.”윤해준이 바로 대답했다.“당연히 가야지.”“장모님이 밥 사준다는 데 당연히 가야지.”장모님이라는 말이 윤해준의 입에서 나오자 안다혜는 귀가 후끈 달아올랐다.“그래요. 언제 시간 되면 말해요.”두 사람이 교묘하게 전에 나누던 대화를 스킵했다. 안다혜는 이 관계의 민낯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굳이 낱낱이 까밝히기보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샤워를 마친 안다혜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윤해준도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가 안다혜를 꼭 끌어안는데 안다혜의 몸이 굳는 게 느껴져 눈빛이 어두워지고 표정이 굳었다.안다혜는 윤해준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가 그저 손을 안다혜의 몸에 올려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자 몰래 한시름 놓았다.첫사랑의 존재를 안 뒤로 안다혜는 ‘부부의 결실
윤해준이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오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태안 그룹 지하 주차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찾아봐. 안다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해.”오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켜고는 위치추적기로 안다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몇 분 후, 오정우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찾았어요. 누군가가 안다혜 씨를 납치해서...”“서쪽 창고로 데려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오 비서도 서쪽 창고로 와.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윤해준은 엄숙한 어조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정우는 윤해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동안 윤해준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독한 남자였다.오정우는 안다혜를 납치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해준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그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서쪽 창고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려도 멈추지 않고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대를 잡고는 생각에 잠겼다.‘다정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한편, 서쪽 창고.안다혜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훈은 임유정의 옆에 서서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서진우는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는 악마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훈한테 안다혜를 괴롭히는 영상을 잘 찍어서 전송하라고 지시했었다.건달은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다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건달을 노려보았다.“나한테 손대지 마!”안다혜는 저도 모르게 윤해준을 떠올리면서 울먹였다. 그가 곁에 있어 주면 늘 든든했고 하늘이 준 선물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윤해준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바랐다.“성격도 화끈하니까 가지고 놀 맛이 있네.”“반항해도 소용없어. 소리 지르지 말고 우리랑 재밌게 놀자.”이훈이 옆에 서서 다급
안다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치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납치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안다혜가 밉보인 사람은 그 몇 명뿐이었던 것이다.이훈이 당당하게 걸어오자 안다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는 안다혜의 턱을 거칠게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눈 깔지 못해?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어? 얼른 대답해 봐.”안다혜는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떼어달라고 눈짓했다. 임유정이 테이프를 뜯으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회의실에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납치당해 보니 기분이 어때? 정말 짜릿하지 않아? 울면서 나한테 빌면 기분이 좋아서 너를 풀어줄 수도 있어.”임유정은 안다혜의 볼을 매만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혜가 침을 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납치해도 태안 그룹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안다혜가 이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이훈은 안다혜가 협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혜의 몸매를 훑어보면서 침을 삼켰다.이훈과 눈이 마주친 안다혜는 속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를 탓할 게 아니라 너를 원망해.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납치당한 거야.”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훈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이때 건달이 4명 정도 들어오자 안다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정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어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개 같은 년, 내가 기회를 주었을 때 나한테 빌었어야지.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건달들은 의자에 묶인 안다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과 굴곡진 몸매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마침 서진우도 안다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훈은 서진우의 힘을 빌려서 안다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그는 울고 있는 임유정을 달래주고는 창가로 가서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유정은 눈물을 그치고 이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이훈이 회사에서 거만하게 굴었던 건 안씨 가문 첫째 아가씨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도련님이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가 서진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안다혜를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한편,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훈의 이름만 보면 그동안 안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찾느라고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카운터에서 마주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능한 이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서진우가 전화를 받고는 차갑게 말했다.“쓰레기 같은 놈,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다혜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랬더니 풍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어. 내 일을 망치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감시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쫓기다니...”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진우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진우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다른 방법을 토론해 보려고 연락한 거예요.”“다른 방법이라니?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서진우는 지난번에 연회에서 안다혜한테 한 방 먹은 후로 갖은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보내서 안다혜한테 복수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주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제일 믿었던 이훈마저 회사에서 해임당했기에 점점 화가 났다. 이훈이 임유정한테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제안했다.“서진우 도련님, 이번이야말로 안다혜한테 복수할 기회예요. 임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가 괴롭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서진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네 여자 친
경비원들이 임유정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카운터 직원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태안 그룹에서 사원을 내쫓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이때 한 경비원이 임유정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던지면서 말했다.“앞으로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신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경비원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뒤돌아 갔다. 그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임유정의 물건을 전부 상자에 넣어서 던졌다.임유정은 팀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임유정을 힐끗 쳐다보면서 깔깔 웃어댔다.임유정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당한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몇 배로 갚아줄 테니 두고 봐.’카운터 여직원이 임유정을 쳐다보면서 다른 직원을 향해 말했다.“회사에서 내쫓긴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봐요.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어요?”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아도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회사 단톡방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 동료의 기획안을 표절했대요. 그리고 이훈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했어요.”“회사에서 내쫓을 만하네요.”두 사람은 임유정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임유정은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원이 아니기에 카운터 직원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손가락질해도 임유정은 반격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유정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안다혜한테 몇백 배 돌려줄 거야.’임유정은 택시를 타고 이훈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이훈은 해임당한 뒤로 취직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가끔 서진우와 연락하면서 안다혜를
“안다혜 씨,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요?”안다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유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임유정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을 수도 있었다.안다혜가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이었다면 임유정한테 당해도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다혜는 차가운 두 눈으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 임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안다혜 씨,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하라는 대로 하고 죽은 듯이 지낼게요.”임유정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모두 멀리하고 싶어 했다.이지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아까 안다혜가 나서지 말라고 할 때 속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안다혜가 현명하게 처리해서 임유정의 만행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안다혜는 임유정의 손을 내치고는 팀장을 향해 말했다.“임유정 씨가 제대로 반성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임유정이 기뻐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사에서 내보내고 이 업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임유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기에 해임당하면 이 업계에서 취직할 수 없을 것이다.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에요. 안다혜 씨 말대로 해요.”안다혜는 임유정을 스쳐 지나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임유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다혜의 얼굴을 잡아 뜯으려고 덤볐다.“안다혜, 이 개 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해!”안다혜가 재빨리 옆으로 비키자 임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임유정이 씩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보여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안다혜는 임유정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PPT를 한 장씩 넘겼다. 임유정이 발표한 것과 완전히 다른 기획안이 눈앞에 나타났다.이미 협업할 연예인을 섭외했고 구체적인 대안을 정리해서 적어두었다.안다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임유정 씨가 발표한 기획안은 저의 초안이에요.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건 최근에 완성한 기획안이에요. 온천 휴양지는 럭셔리한 이미지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지금 보시는 화면은 초안의 단점을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내용이에요. 유명한 브랜드 회사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어요. 저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요.”그 자리에 있던 사원들이 전부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조금 전에 임유정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훌륭했다.안다혜는 사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기획안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유능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유정이 안다혜의 기획안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임유정 씨가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익을 챙기려고 했네요.”“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곧 해임당하지 않을까요? 오늘 밤에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할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놓고 보면 위험한 인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다혜를 향해 말했다.“안다혜 씨,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표절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애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팀장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처음부터 진행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거든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찾아냈고요. 임유정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다혜는 임유정을 내팽개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닦았다. 임유정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안다혜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다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안다혜,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당장 무릎 꿇고 나한테 빌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짓도 벌일 수 있어.”임유정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다혜의 기획안을 훔쳐서 발표한 사람은 임유정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처럼 굴었다.이때 팀장이 나서서 임유정을 말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임유정 씨, 동료끼리 싸우지 마세요. 안다혜 씨가 이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팀장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안다혜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임유정 씨는 저의 기획안을 표절했어요.”“웃기는 소리! 내가 언제 표절했다고 그래? 내 기획안이 욕심나서 일부러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유정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언성을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네가 팀장의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너를 감싸고 돌 리가 없잖아.”“임유정 씨의 말을 들어보니 문뜩 궁금해지네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훈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아주 특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요.”“뭐, 뭐라고?”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다혜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임유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팀장과 안다혜가 아니라 임유정과 이훈이 특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안다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임유정 씨가 이 기획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다시 설명해 볼래요?”안다혜의 말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이지영이 피식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다혜 씨의 말대로라면 임유정이
“임유정 씨의 기획안을 제출하면 회사의 명예에 먹칠하게 될 거예요.”안다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단상에 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임유정을 지켜보다가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이다.임유정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문했다.“안다혜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임유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설마 제가 안다혜 씨보다 먼저 승진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가요? 안다혜 씨는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이었네요. 동료를 시기 질투할 시간에 더 노력하지 그래요?”임유정은 안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안다혜의 컴퓨터에 있던 파일을 전부 복사한 뒤에 삭제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안다혜가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임유정이 먼저 발표했기에 이 기획안은 임유정의 것이 되었다.팀장이 안다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안다혜 씨, 설마 이 기획안을...”“팀장님!”임유정이 팀장의 말을 끊으면서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동료를 모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왜 안다혜 씨의 편을 드는 건가요? 설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겠죠? 어쩐지 저번부터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았어요.”임유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두 팀장과 안다혜를 번갈아 보면서 귓속말했다.팀장은 임유정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임유정 씨,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모두 조용히 하세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팀장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안다혜와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팀장이 아무리 부정해도 임유정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안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다혜는 피식 웃더니 임유정 쪽으로 다가가서 노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안다혜와 달리 임유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임유정과 안다혜가 나란히 서 있으니 비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을 한 임유정은 안
안다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안다혜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유정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멍청한 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 있다가 너를 처참히 짓밟아줄 테니 기다려. 언제까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이 기획안이 나의 것이 되면 너는 팀장한테 버림받겠지.’임유정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안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임유정은 USB를 컴퓨터에 꽂고는 준비한 기획안 파일을 클릭했다. 안다혜가 예상했던 대로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임유정이었다.임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도발했지만 안다혜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모습을 본 임유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안다혜, 내가 준비한 기획안을 보고도 웃음이 나와? 곧 울면서 나한테 빌겠지.’임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발표할게요. 풍산 그룹의 고급 온천 프로젝트는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하는 게 좋아요. 혹은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을 홍보대사로 초빙하면 더 좋고요. 그리고 풍산 그룹의 온천 휴양지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거예요.”임유정이 스크린에 PPT를 띄워놓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귀담아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발표가 끝난 후, 팀원들은 임유정이 이토록 훌륭한 기획안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팀장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정말 혼자 생각해 낸 기획안인가요?”임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팀장님,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팀장님이 저를 미덥지 않아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오로지 저의 힘으로 완성한 거라고요.”팀장은 조금 전에 임유정이 자신만만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