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혜가 의문을 한 가득 품고 화장실로 향하는데 몸을 돌리자마자 그윽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윤해준은 안다혜의 입가에 남은 허연 자국을 보며 귀엽다는 듯 안다혜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윤해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안다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왜 그래요?”윤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더니 안다혜의 입가에 묻은 자국을 닦아냈다.“뭐가 묻었어.”안다혜가 한시름 놓으며 속으로 못난 자신을 욕했다.“씻고 나와. 밥 먹자. 준비 다 됐어.”윤해준이 낮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앞치마를 두른 그는 어딘가 성숙하면서도 가정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안다혜가 아무렇게나 대답하고는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로 세수하고 나서야 빨개진 얼굴이 살짝 진정되었다. 윤해준은 민망해하는 안다혜가 너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윤 여사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여기 더 남아있다가 잘 익은 새우처럼 빨개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윤해준이 얼른 거실로 나오며 친절하게 화장실 문까지 닫아줬다. 그제야 고개를 든 안다혜는 거울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안다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윤해준은 샌드위치와 우유를 안다혜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금방 만든 건데 따듯할 때 먹어. 우유 마시기 싫으면 죽도 끓였어.”“고마워요.”안다혜가 포크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크기를 보니 마침 안다혜가 다 먹을 수 있는 크기였다. 이에 안다혜는 그 메모장이 다시 떠올랐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섬세하다니까.’입맛이 없어진 안다혜가 대충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출근하러 가볼게요.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윤해준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내가 데려다줄게.”“아니요.”안다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일 봐요.”그러더니 윤해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멀어졌다. 윤해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일이 생각보다 복잡할 수도 있겠
안다혜는 서진우를 무시하려 했다. 쓰레기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지 너무 눈길을 주면 자기를 의식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안다혜는 서진우를 지나쳐 태안 그룹을 떠나려는데 이를 발견한 서진우는 어제 파티에서 겪은 수모가 떠올라 화가 치밀어올랐고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안다혜의 발목을 낚아채더니 곱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어머, 늙은 남자랑 붙어먹어서 그런가 다르긴 다르네. 도도한 척하는 꼴에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어. 너 이러는 거 그 기생오라비는 알아?”안다혜는 당장이라도 서진우를 쥐어패고 싶었지만 태안 그룹의 체면을 생각해 꾹 참았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용건 없으면 꺼져.”서진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여기서 나가게 될 사람은 너야. 얼마 남지 않았어.”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알려줘도 상관없지.”서진우가 의기양양해서 턱을 쳐들더니 우쭐거렸다.“나 여기서 안씨 가문 작은 아가씨 기다리는 중이다?”“아가씨와 연이 닿으면 태안 그룹에서 너 하나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안씨 가문의 작은 아가씨가 나를 태안 그룹에서 쫓아낸다고?”너무 황당한 말이라 안다혜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높아졌다. 그러자 서진우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우쭐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왜? 아직 안씨 가문의 작은 아가씨는 못 만나봤나 봐?”“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진우가 혼잣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하긴. 서민과 재벌은 계급 차이라는 게 있지. 이해해.”안다혜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더니 경멸에 찬 말투로 말했다.“안씨 가문의 작은 아가씨라면 누군지 알지.”서진우의 눈빛이 반짝 빛나더니 안다혜의 팔목을 낚아채며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래? 그러면 말해 봐봐. 안씨 가문 아가씨 어떻게 생겼어? 평소엔 언제 출근해? 오늘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나?”“이거 놔.”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진우에게 벗어나려 하자 서진우가
안다혜는 데스크에서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경고하는데 여기 태안 그룹이야.”“뭔가를 하기 전에 머리를 좀 써. 아가씨를 원한다면 적어도 태안 그룹에서 쪽팔릴 짓은 하지 말아야지.”안다혜가 이렇게 말하더니 서진우를 밀어내며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듯 역겨운 표정으로 서진우를 노려봤다. 심지어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서진우와 닿았던 부분을 열심히 닦기까지 하자 잔뜩 약이 오른 서진우가 씩씩거렸지만 안다혜가 한 말이 생각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딱 기다려. 아가씨 만나면 너부터 자르라고 할 거야.”서진우가 침을 뱉으며 말했다.“네까짓 게 뭐라고.”안다혜가 콧방귀를 뀌었다.“더 할 말 없어. 행운을 빌게.”안다혜가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태안 그룹을 떠났다. 한참 지나서야 반응이 온 서진우가 발악하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마침 안소현이 밖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안소현은 아이보리 니트에 같은 컬러의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잘록한 허리가 돋보였고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국화꽃처럼 단아한 아우라를 자아냈다.서진우는 안소현이 한 팔찌에 눈길이 갔다. 미우에서 올해 선보인 신상인데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어 관계를 타야만 손에 넣을 수 있었다.‘색상을 보면 진품인데.’옷차림은 점잖았지만 하고 온 액세서리는 격조가 돋보였다.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는 걸 봐서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였다.서진우가 앞으로 다가가 혹시 작은 아가씨를 보러 왔냐고 말을 걸려는데 데스크 직원이 안소현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하는 걸 보고 안소현이 말로만 듣던 안씨 가문의 작은 아가씨라고 생각해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아우라도 남다른데 데스크 직원이 굽신거리기까지 한다고? 저 여자가 틀림없겠어.’서진우가 간단하게 옷깃을 정리하더니 안소현 앞으로 다가가 나름 제일 잘생긴 각도를 보여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안녕하세요. 혹시 안씨 가문의 작은 아가씨인가요?”서진우는 많은 여자를 만나봤기에 여자들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아가씨는 왜 찾는데요?”안소현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자 서진우가 속으로 좋아했다.‘역시 여자들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니까. 내 매력을 마다할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다들 아가씨가 절세미인이라고 하면서 아우라도 능력도 뛰어나다길래 친구라도 사귀고 싶어서요.”서진우가 이렇게 말하며 안소현에게 윙크하자 안소현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그냥 친구 사귀러 온 거예요?”서진우의 눈빛이 얍삽해졌다.“천천히 알아가면서 만나봐도 좋죠.”안소현은 이 사람과 더 대화를 나누다간 아이큐가 떨어질 것 같아 눈살을 찌푸렸다.‘우습네. 여기서 이렇게 기다린 게 안다혜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그러면 안다혜랑 만났던 3년은 도대체 뭐야?’안소현은 이 상황이 정말 너무 우스웠다.“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데 눈도 별로여서 왜 그런가 했더니 친구 사귀기 좋아해서 그런 거네요.”안소현이 의미심장하게 말하더니 서진우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서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소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풉.”데스크 직원이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왜 웃어요?”서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아까 그 말 무슨 뜻이에요?”데스크 직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거야 저도 모르죠.”직원이 이렇게 말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다른쪽으로 돌렸다. 서진우는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여기 더 있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일단 태안 그룹을 나섰다.한편, 서진우가 태안 그룹을 떠난 후 안소현이 김미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자 김미진은 고개도 들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안으로 들어온 안소현을 보고는 살짝 풀린 표정으로 말했다.“소현아, 네가 어쩐 일이야?”“엄마 요즘 너무 피곤한 것 같아서 삼계탕 좀 끓여왔어요.”안소현이 이렇게 말하더니 손에 든 도시락을 김미진에게 흔들어 보이며 웃자 김미진이 동작을 멈추고는 이렇게 말했다.“아이고, 마음씨도 고와라.”“엄마, 왜 딸이랑 내외하
이 말에 김미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전에 서진우를 만난 것만 해도 이미 민성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건가?’김미진은 그런 안다혜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소현에게 당부했다.“소현아, 너 착한 거 아는데 이 일은 관여하지 마.”“다혜도 이제 어른인데 모든 일에 후과가 따른다는 걸 알고 움직여야지. 늘 우리에게 기댈 수는 없잖아.”안소현이 한마디 덧붙이려다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겠어요. 엄마 말대로 할게요. 다혜가 빨리 철들어서 엄마 속 좀 그만 썩였으면 좋겠네요.”안소현의 말에서 김미진을 향한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김미진은 착하고 얌전한 안소현을 보며 정반대인 안다혜가 생각나 짜증이 치밀어올랐지만 티 나지 않게 얼른 감췄다. 그래도 안소현은 그 정서를 잽싸게 캐치했다. ‘안다혜. 태안 그룹으로 들어오면 뭐 해. 엄마가 내 편인데.’...한편.안다혜가 차에 시동을 걸려는데 프로젝트팀장이 파일을 하나 보내와 시장 상황에 근거해 서류를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 자료를 간단히 훑어본 안다혜는 이 파일을 조사하고 서류를 작성한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다만 이 자료는 전에 안씨 저택에 다녀오면서 방에 흘리고 나온 것 같았다.한숨을 푹 내쉰 안다혜는 다시 정리하기 싫어 안씨 저택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보니 아직 김미진이 들어가기 전이었기에 서류만 챙기고 빨리 사라질 생각이었다.안다혜가 노련하게 차를 고급 별장 차고에 세우고는 차에서 내렸다. 햇살이 비춘 별장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이상하다, 안소현 오늘 집에 없나? 그럴 리가 없는데. 몸이 허약해서 맨날 집에서 쉬잖아.’안다혜가 의문을 안고 대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형부 허종혁이 소파에 대자로 뻗어있었는데 취기가 올라와 몽롱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서류를 가지러 왔지만 허종혁의 몰골을 보자마자 흥미를 잃어버렸고 당장이라도 별장을 나
“다혜야. 내 말 좀 들어볼래? 내게도 기회를 줘.”인내심을 잃은 안다혜가 소리를 질렀다.“이거 놔요.”“더럽지도 않아요? 설마 언니가 있다는 거 잊은 건 아니죠?”안소현이 나오자 허종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술기운을 빌려 막무가내로 안다혜를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처음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땐 우리 두 사람이었잖아.”“다혜야. 사실 나도 너 좋아해...”이 말에 안다혜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힘껏 발버둥 쳤지만 체급 차이도 있고 허종혁이 만취 상태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형부, 언니가 알면 형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다혜가 빨개진 허종혁의 얼굴을 보며 위가 뒤틀리듯 역겨웠다.“형부 언니랑 약혼한 사이에요. 둘이 약혼한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안하지도 않아요?”허종혁이 움찔했지만 손에 들어간 힘은 여전했다.“다혜야, 소현이 얘기 그만하면 안 될까...”인사불성이 된 허종혁은 모든 신경을 안다혜의 몸에 집중했다. 향기롭고 말캉한 안다혜는 안고 있으면 은은한 장미 향기가 풍겼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게다가 안다혜는 성격이 만만치 않아도 외모와 몸매는 허종혁의 마음에 쏙 들었다.“다혜야, 한 번만 기회를 줘. 너만 좋다면 우리 다시 만나도 돼.”허종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나는 너 다시 받아줄 생각이 있어.”허종혁이 이렇게 말하며 더 힘껏 끌어안았고 안다혜가 뭐라 하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던 안다혜가 허종혁의 발을 꽉 밟았다. 허종혁은 너무 아팠지만 안다혜의 허락을 받기 위해 고통을 꾹 참았다.“다혜야, 나 지금 진지해...”“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이내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움이 섞인 말투는 이내 분노로 뒤바뀌고 말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안소현이 김미진과 함께 현관에 서 있었다. 소리를 낸 사람은 김미진이었고 안소현의 눈시울은 이미 빨개진 상태였다. 안소현은 김미진 옆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해자라도 된 것처럼
안소현이 울자 김미진은 마음이 아팠다. 동생과 약혼자가 부둥켜안고 있는 걸 보고도 김미진을 다독이는 안소현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허종혁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소현아, 다 내 잘못이야.”이 말에 세 여자의 시선이 일제히 허종혁에게로 향했다. 안다혜도 허종혁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허종혁을 바라봤다.‘뭐야. 무슨 짓을 했는지 인정하려는 건가?’안소현이 울먹이며 말했다.“당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김미진도 안다혜를 오해한 게 아닌지 의심하며 언짢을 표정을 짓는데 허종혁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셨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서 소파에 누워 있었어.”이 말을 들은 안다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허종혁이 덧붙인 말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근데 다혜가 소파 옆으로 다가오더니 이런저런 실없는 말을 꺼내면서 언니가 약혼자를 뺏은 걸 원망하더라고.”고개를 들자 보이는 허종혁의 빨개진 눈시울이 참으로 억울해 보였다.“어머님,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저를 주체하지 못한 건 맞지만 소현이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에요. 다혜가 없었어도 나는 소현이를 선택했을 거예요.”“종혁 씨...”감동한 안소현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허종혁을 바라봤고 허종혁도 진지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마치 안다혜가 세컨드라도 되는 것처럼 흘러가기 시작했고 안다혜의 표정이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역시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사실대로 말할 거라고 기대한 내가 바보지.’“형부, 지금 한 말 다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안다혜가 차가운 눈빛으로 허종혁을 쏘아보자 허종혁이 안다혜의 시선을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당연하지. 나랑 너희 언니는 쭉 안정적이었는데 내가 왜 너희 언니를 버리고 너를 만나겠니.”“게다가 네가 서진우를 3년이나 쫓아다닌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왜?”김미진은 이 말이 살짝 불편하게 느껴졌다. 안다혜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딸인 건 변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건
허종혁이 안소현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관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소현아, 너 괜찮아?”“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울면 어떡해. 네가 우니까 나도 마음이 아프잖아.”허종혁이 다시 한번 약속했다.“걱정하지 마. 나 안다혜랑 아무 일도 없었어. 나도 너를 생각해서 그저 동생으로만 여겼던 거야.”김미진도 안소현 옆에 서서 안소현의 몸을 챙겼다. 극명한 차이에 안다혜는 순간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악녀가 된 것 같았고 순간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 원래는 그들을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들은 마치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떼거지로 몰려와 안다혜의 신경을 긁어댔다.“그래요. 허종혁 씨.”안다혜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경멸에 찬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직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봐서는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소현이 이렇게 된 거 안 보여? 넌 왜 항상 그렇게 막무가내야?”이 말에 김미진도 언짢은 표정으로 안다혜를 바라봤다. 안소현과 비기면 안다혜가 막무가내인 건 사실이었다.“됐어. 이제 와서 뭘 더 말해.”안다혜가 핸드폰을 꺼내 들며 태연하게 웃었다.“엄마, 내가 뭘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히 사건의 진상이 뭔지 보여주려는 거죠.”이 말에 허종혁이 당황하더니 안다혜의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설마...’안다혜가 허종혁의 눈빛에서 당황한 기색을 읽어내고는 느긋하게 말했다.“맞아요. 허종혁 씨 지금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어요.”“안다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안다혜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다 허종혁 씨가 자초한 일이잖아요. 나를 사지로 몰아넣은 건 형부예요. 내가 기회를 줬는데.”안소현은 안다혜가 핸드폰을 꺼냈을 뿐인데 몹시 당황해하는 허종혁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뭔가를 알아채고는 눈빛이 흔들렸다.‘설마 거짓말한 거야?’김미진도 허종혁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보아냈다.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녹음 파일을
윤해준이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오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태안 그룹 지하 주차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찾아봐. 안다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해.”오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켜고는 위치추적기로 안다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몇 분 후, 오정우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찾았어요. 누군가가 안다혜 씨를 납치해서...”“서쪽 창고로 데려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오 비서도 서쪽 창고로 와.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윤해준은 엄숙한 어조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정우는 윤해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동안 윤해준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독한 남자였다.오정우는 안다혜를 납치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해준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그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서쪽 창고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려도 멈추지 않고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대를 잡고는 생각에 잠겼다.‘다정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한편, 서쪽 창고.안다혜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훈은 임유정의 옆에 서서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서진우는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는 악마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훈한테 안다혜를 괴롭히는 영상을 잘 찍어서 전송하라고 지시했었다.건달은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다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건달을 노려보았다.“나한테 손대지 마!”안다혜는 저도 모르게 윤해준을 떠올리면서 울먹였다. 그가 곁에 있어 주면 늘 든든했고 하늘이 준 선물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윤해준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바랐다.“성격도 화끈하니까 가지고 놀 맛이 있네.”“반항해도 소용없어. 소리 지르지 말고 우리랑 재밌게 놀자.”이훈이 옆에 서서 다급
안다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치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납치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안다혜가 밉보인 사람은 그 몇 명뿐이었던 것이다.이훈이 당당하게 걸어오자 안다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는 안다혜의 턱을 거칠게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눈 깔지 못해?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어? 얼른 대답해 봐.”안다혜는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떼어달라고 눈짓했다. 임유정이 테이프를 뜯으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회의실에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납치당해 보니 기분이 어때? 정말 짜릿하지 않아? 울면서 나한테 빌면 기분이 좋아서 너를 풀어줄 수도 있어.”임유정은 안다혜의 볼을 매만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혜가 침을 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납치해도 태안 그룹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안다혜가 이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이훈은 안다혜가 협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혜의 몸매를 훑어보면서 침을 삼켰다.이훈과 눈이 마주친 안다혜는 속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를 탓할 게 아니라 너를 원망해.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납치당한 거야.”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훈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이때 건달이 4명 정도 들어오자 안다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정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어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개 같은 년, 내가 기회를 주었을 때 나한테 빌었어야지.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건달들은 의자에 묶인 안다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과 굴곡진 몸매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마침 서진우도 안다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훈은 서진우의 힘을 빌려서 안다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그는 울고 있는 임유정을 달래주고는 창가로 가서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유정은 눈물을 그치고 이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이훈이 회사에서 거만하게 굴었던 건 안씨 가문 첫째 아가씨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도련님이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가 서진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안다혜를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한편,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훈의 이름만 보면 그동안 안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찾느라고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카운터에서 마주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능한 이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서진우가 전화를 받고는 차갑게 말했다.“쓰레기 같은 놈,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다혜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랬더니 풍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어. 내 일을 망치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감시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쫓기다니...”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진우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진우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다른 방법을 토론해 보려고 연락한 거예요.”“다른 방법이라니?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서진우는 지난번에 연회에서 안다혜한테 한 방 먹은 후로 갖은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보내서 안다혜한테 복수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주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제일 믿었던 이훈마저 회사에서 해임당했기에 점점 화가 났다. 이훈이 임유정한테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제안했다.“서진우 도련님, 이번이야말로 안다혜한테 복수할 기회예요. 임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가 괴롭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서진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네 여자 친
경비원들이 임유정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카운터 직원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태안 그룹에서 사원을 내쫓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이때 한 경비원이 임유정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던지면서 말했다.“앞으로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신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경비원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뒤돌아 갔다. 그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임유정의 물건을 전부 상자에 넣어서 던졌다.임유정은 팀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임유정을 힐끗 쳐다보면서 깔깔 웃어댔다.임유정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당한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몇 배로 갚아줄 테니 두고 봐.’카운터 여직원이 임유정을 쳐다보면서 다른 직원을 향해 말했다.“회사에서 내쫓긴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봐요.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어요?”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아도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회사 단톡방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 동료의 기획안을 표절했대요. 그리고 이훈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했어요.”“회사에서 내쫓을 만하네요.”두 사람은 임유정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임유정은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원이 아니기에 카운터 직원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손가락질해도 임유정은 반격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유정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안다혜한테 몇백 배 돌려줄 거야.’임유정은 택시를 타고 이훈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이훈은 해임당한 뒤로 취직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가끔 서진우와 연락하면서 안다혜를
“안다혜 씨,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요?”안다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유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임유정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을 수도 있었다.안다혜가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이었다면 임유정한테 당해도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다혜는 차가운 두 눈으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 임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안다혜 씨,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하라는 대로 하고 죽은 듯이 지낼게요.”임유정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모두 멀리하고 싶어 했다.이지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아까 안다혜가 나서지 말라고 할 때 속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안다혜가 현명하게 처리해서 임유정의 만행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안다혜는 임유정의 손을 내치고는 팀장을 향해 말했다.“임유정 씨가 제대로 반성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임유정이 기뻐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사에서 내보내고 이 업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임유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기에 해임당하면 이 업계에서 취직할 수 없을 것이다.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에요. 안다혜 씨 말대로 해요.”안다혜는 임유정을 스쳐 지나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임유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다혜의 얼굴을 잡아 뜯으려고 덤볐다.“안다혜, 이 개 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해!”안다혜가 재빨리 옆으로 비키자 임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임유정이 씩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보여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안다혜는 임유정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PPT를 한 장씩 넘겼다. 임유정이 발표한 것과 완전히 다른 기획안이 눈앞에 나타났다.이미 협업할 연예인을 섭외했고 구체적인 대안을 정리해서 적어두었다.안다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임유정 씨가 발표한 기획안은 저의 초안이에요.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건 최근에 완성한 기획안이에요. 온천 휴양지는 럭셔리한 이미지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지금 보시는 화면은 초안의 단점을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내용이에요. 유명한 브랜드 회사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어요. 저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요.”그 자리에 있던 사원들이 전부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조금 전에 임유정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훌륭했다.안다혜는 사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기획안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유능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유정이 안다혜의 기획안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임유정 씨가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익을 챙기려고 했네요.”“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곧 해임당하지 않을까요? 오늘 밤에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할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놓고 보면 위험한 인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다혜를 향해 말했다.“안다혜 씨,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표절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애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팀장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처음부터 진행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거든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찾아냈고요. 임유정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다혜는 임유정을 내팽개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닦았다. 임유정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안다혜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다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안다혜,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당장 무릎 꿇고 나한테 빌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짓도 벌일 수 있어.”임유정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다혜의 기획안을 훔쳐서 발표한 사람은 임유정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처럼 굴었다.이때 팀장이 나서서 임유정을 말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임유정 씨, 동료끼리 싸우지 마세요. 안다혜 씨가 이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팀장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안다혜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임유정 씨는 저의 기획안을 표절했어요.”“웃기는 소리! 내가 언제 표절했다고 그래? 내 기획안이 욕심나서 일부러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유정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언성을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네가 팀장의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너를 감싸고 돌 리가 없잖아.”“임유정 씨의 말을 들어보니 문뜩 궁금해지네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훈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아주 특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요.”“뭐, 뭐라고?”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다혜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임유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팀장과 안다혜가 아니라 임유정과 이훈이 특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안다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임유정 씨가 이 기획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다시 설명해 볼래요?”안다혜의 말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이지영이 피식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다혜 씨의 말대로라면 임유정이
“임유정 씨의 기획안을 제출하면 회사의 명예에 먹칠하게 될 거예요.”안다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단상에 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임유정을 지켜보다가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이다.임유정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문했다.“안다혜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임유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설마 제가 안다혜 씨보다 먼저 승진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가요? 안다혜 씨는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이었네요. 동료를 시기 질투할 시간에 더 노력하지 그래요?”임유정은 안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안다혜의 컴퓨터에 있던 파일을 전부 복사한 뒤에 삭제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안다혜가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임유정이 먼저 발표했기에 이 기획안은 임유정의 것이 되었다.팀장이 안다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안다혜 씨, 설마 이 기획안을...”“팀장님!”임유정이 팀장의 말을 끊으면서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동료를 모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왜 안다혜 씨의 편을 드는 건가요? 설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겠죠? 어쩐지 저번부터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았어요.”임유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두 팀장과 안다혜를 번갈아 보면서 귓속말했다.팀장은 임유정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임유정 씨,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모두 조용히 하세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팀장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안다혜와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팀장이 아무리 부정해도 임유정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안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다혜는 피식 웃더니 임유정 쪽으로 다가가서 노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안다혜와 달리 임유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임유정과 안다혜가 나란히 서 있으니 비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을 한 임유정은 안
안다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안다혜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유정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멍청한 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 있다가 너를 처참히 짓밟아줄 테니 기다려. 언제까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이 기획안이 나의 것이 되면 너는 팀장한테 버림받겠지.’임유정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안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임유정은 USB를 컴퓨터에 꽂고는 준비한 기획안 파일을 클릭했다. 안다혜가 예상했던 대로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임유정이었다.임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도발했지만 안다혜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모습을 본 임유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안다혜, 내가 준비한 기획안을 보고도 웃음이 나와? 곧 울면서 나한테 빌겠지.’임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발표할게요. 풍산 그룹의 고급 온천 프로젝트는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하는 게 좋아요. 혹은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을 홍보대사로 초빙하면 더 좋고요. 그리고 풍산 그룹의 온천 휴양지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거예요.”임유정이 스크린에 PPT를 띄워놓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귀담아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발표가 끝난 후, 팀원들은 임유정이 이토록 훌륭한 기획안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팀장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정말 혼자 생각해 낸 기획안인가요?”임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팀장님,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팀장님이 저를 미덥지 않아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오로지 저의 힘으로 완성한 거라고요.”팀장은 조금 전에 임유정이 자신만만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