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잠시 시력을 잃었을 때 자신을 몇 번이고 다독여 주던 그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때 지진이 일어났을 때, 서진우는 그녀를 구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위로하며 구조를 기다렸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오랫동안 좋아했었다.하지만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던 남자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냉정할 줄은 몰랐다.“안다혜 씨, 여자는 자기 자신을 아껴야 해요. 이렇게 매달리는 건 그쪽한테도 좋지 않아요.”심서아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마치 남자 친구에게 끈질기게 매달리는 전 여자 친구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안다혜가 오해를 풀려는 순간, 누군가 매니저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매니저의 안색이 변하더니 서진우를 바라보았다.“죄송합니다, 서진우 씨. 사장님께서 서진우 씨의 회원 자격을 취소하셨습니다. 더 이상 저희 레스토랑의 회원이 아니니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취소?’이 레스토랑은 꽤 유명했고 사장은 신비주의로 베일에 싸여 있었다.서진우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꾹 참고 물었다.“사장님이 무슨 의도로 이러시는 거죠?”“죄송합니다.”매니저는 정중하게 손짓했다.“사장님의 뜻입니다. 두 분 모두 나가 주셔야겠습니다.”안다혜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서진우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서진우는 안다혜를 쏘아보고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소란을 피우지 않고 심서아를 데리고 나갔다.레스토랑을 나선 심서아는 안다혜의 모습을 떠올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진우야, 방금 그 일은 안다혜 씨가 한 짓일까?”“말도 안 돼.”서진우는 얼굴이 어두워지고 짜증스럽게 말했다.“다혜가 무슨 힘이 있다고?”“이 레스토랑 사장님 엄청 부자라던데. 안다혜 씨가 너한테 원한이 있어서 일부러 사장님한테 접근한 거 아닐까? 안다혜 씨 뭔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진우는 오늘 밤 안다혜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안다혜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분위기까지 강해졌다.“꿈 깨.”
윤해준이 민초연을 언급하자 안다혜는 입가를 씰룩거렸다.그녀가 정말 윤해준과 혼인 신고를 하면 민초연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하지만 윤해준의 얼굴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리고 싫어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과 결혼해야 했기에 윤해준은 최고의 선택이었다.안다혜는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해준 오빠, 거절할 이유가 없네요.”“그럼 내일 오전 10시에 구청에서 봐.”윤해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안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윤해준은 다른 볼일이 있는 듯 돌아서서 가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서진우는...”“이미 끝났어요.”안다혜는 고개를 숙이고 서진우의 얼굴을 떠올렸다.“걱정 마세요. 저는 다시 만나는 스타일 아니에요.”그제야 남자는 돌아서서 떠났다.안다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멍한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윤해준과 혼인 신고를 하게 될 줄이야....안다혜는 김미진에게 결혼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았다.윤해준은 원래 조용하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으며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결혼은 집안 어른들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사실 그녀와 윤해준의 접점은 그날 밤의 일과 짧았던 짝사랑을 제외하면 대부분 민초연의 사촌 오빠로서 만났을 때였다.다음 날,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마치고 구청에서 나왔다.손에 혼인 관계 증명서를 들고 나서야 안다혜는 결혼했다는 실감이 났다.“이제 혼인 신고도 했으니 우리 신혼집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다혜는 경험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실 그녀는 윤해준을 잘 몰랐다.윤씨 가문이 엄청난 부자라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는지는 몰랐다.하지만 그들 같은 집안은 신혼집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 당연했다.우리라는 말에 윤해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스쳤다 사라졌다.“당연하지.”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신혼집 열쇠고 그리고...”그는 그녀에게 열쇠 꾸러미와 작은 상자를 건넸
거침없는 키스였다. 깊고 진했다.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그의 숨결은 그녀의 입안으로 밀려들었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키스한 후, 윤해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몸을 가지려면 윤 여사의 실력으로는 아직 부족해.”안다혜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그의 목젖에 입을 맞췄다.남자의 몸이 굳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반걸음 물러서서 나른하게 웃으며 도발했다.“오빠도 별거 아니네요.”윤해준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안다혜는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었다.그녀는 윤해준과 연락처를 교환한 후 그의 신혼집으로 이사했다.윤해준의 신혼집은 위치가 매우 좋았다. 이사하기 전, 안다혜는 어머니에게 혼인 신고 사실을 알렸다.다만 윤해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김미진은 그녀가 이렇게 빨리 혼인 신고를 했다는 것에 놀랐지만 차갑게 말했다.“안씨 가문에는 이혼이라는 건 없어. 네가 선택한 사람이니 네가 책임져야 해. 결혼했으니 이제 회사 일에 집중해.”안다혜는 뭐라고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김미진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큰 틀에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안다혜의 선택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안다혜는 잠깐 스쳐 간 서운함을 애써 감추고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기 전에 김미진은 다시 말했다.“시간 날 때 남편 데리고 집에 와.”오후에 안다혜는 태안에 입사했다.김미진은 그녀의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안다혜가 태안의 업무에 빨리 적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그래서 팀장은 안다혜한테 엄청 잘해 줬다.“다혜 씨, 이번 달에 우리가 따내야 할 프로젝트입니다. 풍산에서 온천 휴양 단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저희 태안 말고도 다른 회사들이 입찰에 참여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따내면 저희 태안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안다혜는 팀장이 준 서류를 받았다.그녀는 온천 휴양 단지 사업 계획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풍산은 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몇 년 전에
‘선물을 돌려 달라고?’안다혜는 서진우의 치졸함에 어이가 없었다.전에는 그냥 좀 별로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쪼잔하고 구두쇠일 줄은 몰랐다.그런 남자와 사귀었다는 것이 창피했다.신혼집으로 돌아온 안다혜는 서진우가 준 선물을 전부 찾아내려고 했다. 그때 윤해준이 돌아왔다.“뭘 찾아?”그는 안다혜를 보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안다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헤어진 남자 친구가 선물 돌려 달라고 해서 찾고 있어요. 헤어지고 선물 돌려 달라는 남자는 처음 봐요. 진짜 웃겨.”그녀는 분하고 억울해서 아름다운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바로 이때 휴대폰에 4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그리고 문자에는 '자발적 증여'라고 적혀 있었다.윤해준은 바닥에 널린 싸구려 선물들을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 쓰레기는 다 버려.”안다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윤 여사, 난 내 마누라가 다른 남자의 물건을 갖고 있는 건 싫어.”곧 그녀는 자신의 한심한 연애사가 이미 소문났다는 것을 깨달았다.윤해준은 아마 그녀가 옛 남자를 못 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걱정 마세요.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죠.”안다혜는 손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흔들며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리고 전 이미 제일 마음에 드는 게 있어요.”그녀는 정말로 이 다이아몬드 반지가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결혼까지 했으니 그의 아내로서 윤해준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윤해준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안다혜는 입금된 금액을 보고 머뭇거리며 말했다.“오빠, 이 돈은 돌려드릴게요.”윤해준에게는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괜찮아.”윤해준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천천히 말했다.“내가 헤어지고 나서 돈 돌려 달라고 할 사람은 아니야. 윤 여사 용돈이라고 생각해.”안다혜는 예전에도 윤해준에게 용돈을 받았었다.그녀는 민초연과 친했으니까.어렸을 때 민초연은 항상 어른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귀염을 받았
안다혜는 민초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던 윤해준의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안다혜는 친구의 외침에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특히 남자의 쇄골에 시선이 머물자 귀가 붉어졌다. 섹시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무슨 일이세요?”“시간이 늦었는데 아직 안 자는 것 같아서.”윤해준은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초연이랑 통화했어?”“네, 그냥 잠깐 수다 떨었어요.”안다혜는 얼버무렸다.윤해준은 그녀의 붉어진 귀를 보더니 불쑥 말했다.“초연이가 널 새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자신이 민초연의 올케가 되었다는 생각에 안다혜는 헛기침을 했다.관계가 꽤나 복잡해졌다.윤해준은 웃으며 몸을 숙여 안다혜의 턱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불러도 괜찮아. 하지만 윤 여사, 이제 자야지...”그가 안다혜에게 다가오자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고 안다혜는 간지러움을 느꼈다.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윤해준의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 전에 키스해 줄래?”안다혜는 눈을 깜빡였다.윤해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녀는 윤해준의 목을 끌어당겨 도발하듯 그의 목젖에 입을 맞췄다.“잘 자요.”안다혜는 헛기침을 하고 태연한 척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윤해준 눈빛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잘 자.”윤해준이 나가고 나서야 안다혜는 마음을 놓았다.솔직히 그녀는 윤해준에게 호감이 있었다. 잘생기고 돈 많은 오빠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갑작스러운 결혼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다만 아직 윤해준을 진짜 남편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특히 잠자리에서의 일은 더 그랬다.술김에 분위기에 휩쓸린 것과 부부 관계는 달랐다.침실 문이 닫혔다.곧 민초연의 문자가 폭탄처럼 쏟아졌다.[으아아아! 너랑 우리 오빠 도대체 무슨 일이야?!][사촌 오빠가 너랑 왜 같이 있어? 누가 누굴 꼬신 거야?][난 너를 베프로 생
“됐어.”안다혜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 그런 자리 안 좋아해.”안다혜는 진심이었다.윤해준은 워낙 도도한 사람이라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안소현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안다혜가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다.하지만 혼인 신고도 조용히 한 걸 보면 안다혜의 남편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아쉽네.”안소현은 아쉬운 듯 농담했다.“네 형부가 네 결혼 소식을 듣고 인사하고 싶어 하던데.”“엄마는 결혼은 안씨 가문의 규칙이라고 하셨잖아요.”안다혜는 김미진을 보고 차분하게 말했다.“그리고 내 남편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안씨 가문 때문에 그 사람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김미진은 인상을 쓰며 차갑게 말했다.“네 언니도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나중에 보면 되지.”안다혜는 무표정했다.그녀는 확실히 안씨 가문 일 때문에 윤해준이 불편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그녀를 엄격하게 키웠고 몸이 약한 언니 대신 안씨 가문의 책임을 짊어지도록 교육했다. 그래서 그녀는 인생에서 두 번 크게 반항했다. 한 번은 서진우를 만났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윤해준과 결혼했을 때였다.그녀는 안씨 가문의 책임을 질 수 있었다.하지만 윤해준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회의실을 나섰다. 이때 서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비웃으며 말했다.“다혜야, 내가 준 물건 어딨어? 설마 갖고 있으려는 건 아니겠지? 너 진짜 웃기네.”안다혜는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그 싸구려 선물들을 떠올리자 예전에 자신이 그런 싸구려 선물들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 한심했다. 정말 과거로 돌아가 연애 감성에 취한 자신을 확 깨우고 싶다.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물건은 돌려줄 수 있어. 근데 할 얘기 있으니까 직접 만나서 얘기해.”서진우는 비웃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는 것은 결국 자신을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는가.하지만 그는 빨리 관계를
안다혜는 리스트에 적힌 내용을 따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2022년 11월 8일, 고열에 시달리는 남자 친구 간호, 간호비 시세 12만원. 11월 23일, 남자 친구에게 급한 서류 전달, 왕복 세 번, 거리 12km, 총 6만 원.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남자 친구에게 3년 동안 직접 만든 도시락과 영양탕 제공. 총 1660만 원...”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머릿속에는 그 황당했던 3년이 스쳐 지나갔다.값어치 없는 남자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었다.심지어 그를 위해 요리와 국 끓이는 법을 배웠고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과 국을 배달했었다.결국, 두 사람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서진우는 처음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안다혜가 하나하나 낱낱이 계산을 끝내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얼굴이 굳어졌다.‘안다혜가 언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했었던가?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과거 일을 들추는 건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깨닫고 마음을 돌리길 바라는 속셈인가? 이 여자, 정말 꿍꿍이속이 깊군!’“그만!”서진우는 차갑게 안다혜의 말을 끊었다.“다혜야, 이렇게 계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 모든 게 네가 좋다고 한 일 아니었어? 결국 네가 내놓기 싫은 건 내가 전에 사준 선물들이겠지! 헤어졌는데도 내 선물들을 갖고 싶어 하다니, 너는 역시 뼛속까지 속물이야!”“맞아요. 안다혜 씨. 이 모든 건 진우를 기쁘게 하려고 그쪽이 자진해서 한 일이잖아요.”심서아는 마치 사랑에 휘둘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보듯 안쓰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진해서?”안다혜는 ‘자진해서'라는 네 글자를 곱씹으며 비웃듯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진우가 나에게 선물한 것들도 자진해서 준 거죠. 제가 먼저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그 선물들은 서진우가 자신을 달래기 위해 준 것에 불과했다.그녀는 확실히 눈앞의 남자를
서진우는 이를 악물고 안다혜를 노려봤다.옆에 있던 심서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레스토랑에 구경꾼들이 점점 몰려들자 서진우는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카카오페이!”안다혜는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서진우가 QR 코드를 스캔하도록 했다.돈이 들어오자 안다혜는 입꼬리를 올리고 나지막이 웃었다.“고마워, 전 남친.”‘괜찮네. 3년 사이에 2200만은 벌었으니까.’서진우는 험악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고 심서아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황급히 뒤따라 나갔다.깔끔한 레스토랑에서 윤해준의 시선은 저 멀리 안다혜에게 머물렀고 옆에 있던 사업 파트너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곧이어, 그의 흥미로운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다혜에게 향했다.“여자 친구예요?”“아니요.”윤해준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제 아내입니다.”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남자는 놀랍다는 듯 윤해준을 바라보았지만 윤해준의 눈 속에 떠올랐던 부드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이성적이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스미스 씨, 방금 제시한 조건은 저의 최종 제안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협상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습니다.”...안다혜는 윤해준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서진우가 떠난 후, 안다혜는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때 윤해준의 비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말했다. “안다혜, 저는 윤해준 씨의 비서입니다. 대표님께서 곧 미팅이 끝나시니 차에서 기다려주시면 좋겠습니다.”‘윤해준도 여기에 있다고?’안다혜는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 윤해준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은 적당한 온도였고 안다혜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깨어나는 순간, 그녀는 강한 소유욕과 과도한 부드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느꼈다.눈을 뜨자 윤해준의 따뜻하고 깊은 눈빛과 마주쳤다.“깼어?”안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윤해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피곤해? 안 피곤하면
윤해준이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오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태안 그룹 지하 주차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찾아봐. 안다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해.”오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켜고는 위치추적기로 안다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몇 분 후, 오정우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찾았어요. 누군가가 안다혜 씨를 납치해서...”“서쪽 창고로 데려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오 비서도 서쪽 창고로 와.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윤해준은 엄숙한 어조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정우는 윤해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동안 윤해준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독한 남자였다.오정우는 안다혜를 납치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해준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그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서쪽 창고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려도 멈추지 않고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대를 잡고는 생각에 잠겼다.‘다정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한편, 서쪽 창고.안다혜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훈은 임유정의 옆에 서서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서진우는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는 악마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훈한테 안다혜를 괴롭히는 영상을 잘 찍어서 전송하라고 지시했었다.건달은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다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건달을 노려보았다.“나한테 손대지 마!”안다혜는 저도 모르게 윤해준을 떠올리면서 울먹였다. 그가 곁에 있어 주면 늘 든든했고 하늘이 준 선물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윤해준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바랐다.“성격도 화끈하니까 가지고 놀 맛이 있네.”“반항해도 소용없어. 소리 지르지 말고 우리랑 재밌게 놀자.”이훈이 옆에 서서 다급
안다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치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납치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안다혜가 밉보인 사람은 그 몇 명뿐이었던 것이다.이훈이 당당하게 걸어오자 안다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는 안다혜의 턱을 거칠게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눈 깔지 못해?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어? 얼른 대답해 봐.”안다혜는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떼어달라고 눈짓했다. 임유정이 테이프를 뜯으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회의실에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납치당해 보니 기분이 어때? 정말 짜릿하지 않아? 울면서 나한테 빌면 기분이 좋아서 너를 풀어줄 수도 있어.”임유정은 안다혜의 볼을 매만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혜가 침을 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납치해도 태안 그룹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안다혜가 이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이훈은 안다혜가 협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혜의 몸매를 훑어보면서 침을 삼켰다.이훈과 눈이 마주친 안다혜는 속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를 탓할 게 아니라 너를 원망해.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납치당한 거야.”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훈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이때 건달이 4명 정도 들어오자 안다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정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어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개 같은 년, 내가 기회를 주었을 때 나한테 빌었어야지.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건달들은 의자에 묶인 안다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과 굴곡진 몸매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마침 서진우도 안다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훈은 서진우의 힘을 빌려서 안다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그는 울고 있는 임유정을 달래주고는 창가로 가서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유정은 눈물을 그치고 이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이훈이 회사에서 거만하게 굴었던 건 안씨 가문 첫째 아가씨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도련님이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가 서진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안다혜를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한편,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훈의 이름만 보면 그동안 안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찾느라고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카운터에서 마주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능한 이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서진우가 전화를 받고는 차갑게 말했다.“쓰레기 같은 놈,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다혜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랬더니 풍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어. 내 일을 망치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감시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쫓기다니...”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진우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진우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다른 방법을 토론해 보려고 연락한 거예요.”“다른 방법이라니?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서진우는 지난번에 연회에서 안다혜한테 한 방 먹은 후로 갖은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보내서 안다혜한테 복수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주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제일 믿었던 이훈마저 회사에서 해임당했기에 점점 화가 났다. 이훈이 임유정한테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제안했다.“서진우 도련님, 이번이야말로 안다혜한테 복수할 기회예요. 임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가 괴롭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서진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네 여자 친
경비원들이 임유정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카운터 직원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태안 그룹에서 사원을 내쫓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이때 한 경비원이 임유정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던지면서 말했다.“앞으로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신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경비원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뒤돌아 갔다. 그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임유정의 물건을 전부 상자에 넣어서 던졌다.임유정은 팀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임유정을 힐끗 쳐다보면서 깔깔 웃어댔다.임유정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당한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몇 배로 갚아줄 테니 두고 봐.’카운터 여직원이 임유정을 쳐다보면서 다른 직원을 향해 말했다.“회사에서 내쫓긴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봐요.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어요?”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아도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회사 단톡방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 동료의 기획안을 표절했대요. 그리고 이훈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했어요.”“회사에서 내쫓을 만하네요.”두 사람은 임유정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임유정은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원이 아니기에 카운터 직원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손가락질해도 임유정은 반격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유정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안다혜한테 몇백 배 돌려줄 거야.’임유정은 택시를 타고 이훈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이훈은 해임당한 뒤로 취직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가끔 서진우와 연락하면서 안다혜를
“안다혜 씨,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요?”안다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유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임유정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을 수도 있었다.안다혜가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이었다면 임유정한테 당해도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다혜는 차가운 두 눈으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 임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안다혜 씨,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하라는 대로 하고 죽은 듯이 지낼게요.”임유정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모두 멀리하고 싶어 했다.이지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아까 안다혜가 나서지 말라고 할 때 속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안다혜가 현명하게 처리해서 임유정의 만행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안다혜는 임유정의 손을 내치고는 팀장을 향해 말했다.“임유정 씨가 제대로 반성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임유정이 기뻐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사에서 내보내고 이 업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임유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기에 해임당하면 이 업계에서 취직할 수 없을 것이다.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에요. 안다혜 씨 말대로 해요.”안다혜는 임유정을 스쳐 지나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임유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다혜의 얼굴을 잡아 뜯으려고 덤볐다.“안다혜, 이 개 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해!”안다혜가 재빨리 옆으로 비키자 임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임유정이 씩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보여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안다혜는 임유정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PPT를 한 장씩 넘겼다. 임유정이 발표한 것과 완전히 다른 기획안이 눈앞에 나타났다.이미 협업할 연예인을 섭외했고 구체적인 대안을 정리해서 적어두었다.안다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임유정 씨가 발표한 기획안은 저의 초안이에요.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건 최근에 완성한 기획안이에요. 온천 휴양지는 럭셔리한 이미지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지금 보시는 화면은 초안의 단점을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내용이에요. 유명한 브랜드 회사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어요. 저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요.”그 자리에 있던 사원들이 전부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조금 전에 임유정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훌륭했다.안다혜는 사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기획안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유능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유정이 안다혜의 기획안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임유정 씨가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익을 챙기려고 했네요.”“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곧 해임당하지 않을까요? 오늘 밤에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할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놓고 보면 위험한 인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다혜를 향해 말했다.“안다혜 씨,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표절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애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팀장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처음부터 진행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거든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찾아냈고요. 임유정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다혜는 임유정을 내팽개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닦았다. 임유정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안다혜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다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안다혜,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당장 무릎 꿇고 나한테 빌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짓도 벌일 수 있어.”임유정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다혜의 기획안을 훔쳐서 발표한 사람은 임유정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처럼 굴었다.이때 팀장이 나서서 임유정을 말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임유정 씨, 동료끼리 싸우지 마세요. 안다혜 씨가 이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팀장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안다혜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임유정 씨는 저의 기획안을 표절했어요.”“웃기는 소리! 내가 언제 표절했다고 그래? 내 기획안이 욕심나서 일부러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유정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언성을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네가 팀장의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너를 감싸고 돌 리가 없잖아.”“임유정 씨의 말을 들어보니 문뜩 궁금해지네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훈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아주 특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요.”“뭐, 뭐라고?”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다혜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임유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팀장과 안다혜가 아니라 임유정과 이훈이 특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안다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임유정 씨가 이 기획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다시 설명해 볼래요?”안다혜의 말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이지영이 피식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다혜 씨의 말대로라면 임유정이
“임유정 씨의 기획안을 제출하면 회사의 명예에 먹칠하게 될 거예요.”안다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단상에 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임유정을 지켜보다가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이다.임유정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문했다.“안다혜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임유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설마 제가 안다혜 씨보다 먼저 승진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가요? 안다혜 씨는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이었네요. 동료를 시기 질투할 시간에 더 노력하지 그래요?”임유정은 안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안다혜의 컴퓨터에 있던 파일을 전부 복사한 뒤에 삭제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안다혜가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임유정이 먼저 발표했기에 이 기획안은 임유정의 것이 되었다.팀장이 안다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안다혜 씨, 설마 이 기획안을...”“팀장님!”임유정이 팀장의 말을 끊으면서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동료를 모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왜 안다혜 씨의 편을 드는 건가요? 설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겠죠? 어쩐지 저번부터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았어요.”임유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두 팀장과 안다혜를 번갈아 보면서 귓속말했다.팀장은 임유정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임유정 씨,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모두 조용히 하세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팀장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안다혜와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팀장이 아무리 부정해도 임유정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안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다혜는 피식 웃더니 임유정 쪽으로 다가가서 노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안다혜와 달리 임유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임유정과 안다혜가 나란히 서 있으니 비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을 한 임유정은 안
안다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안다혜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유정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멍청한 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 있다가 너를 처참히 짓밟아줄 테니 기다려. 언제까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이 기획안이 나의 것이 되면 너는 팀장한테 버림받겠지.’임유정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안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임유정은 USB를 컴퓨터에 꽂고는 준비한 기획안 파일을 클릭했다. 안다혜가 예상했던 대로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임유정이었다.임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도발했지만 안다혜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모습을 본 임유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안다혜, 내가 준비한 기획안을 보고도 웃음이 나와? 곧 울면서 나한테 빌겠지.’임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발표할게요. 풍산 그룹의 고급 온천 프로젝트는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하는 게 좋아요. 혹은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을 홍보대사로 초빙하면 더 좋고요. 그리고 풍산 그룹의 온천 휴양지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거예요.”임유정이 스크린에 PPT를 띄워놓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귀담아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발표가 끝난 후, 팀원들은 임유정이 이토록 훌륭한 기획안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팀장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정말 혼자 생각해 낸 기획안인가요?”임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팀장님,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팀장님이 저를 미덥지 않아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오로지 저의 힘으로 완성한 거라고요.”팀장은 조금 전에 임유정이 자신만만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