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혜는 리스트에 적힌 내용을 따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2022년 11월 8일, 고열에 시달리는 남자 친구 간호, 간호비 시세 12만원. 11월 23일, 남자 친구에게 급한 서류 전달, 왕복 세 번, 거리 12km, 총 6만 원.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남자 친구에게 3년 동안 직접 만든 도시락과 영양탕 제공. 총 1660만 원...”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머릿속에는 그 황당했던 3년이 스쳐 지나갔다.값어치 없는 남자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었다.심지어 그를 위해 요리와 국 끓이는 법을 배웠고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과 국을 배달했었다.결국, 두 사람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서진우는 처음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안다혜가 하나하나 낱낱이 계산을 끝내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얼굴이 굳어졌다.‘안다혜가 언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했었던가?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과거 일을 들추는 건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깨닫고 마음을 돌리길 바라는 속셈인가? 이 여자, 정말 꿍꿍이속이 깊군!’“그만!”서진우는 차갑게 안다혜의 말을 끊었다.“다혜야, 이렇게 계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 모든 게 네가 좋다고 한 일 아니었어? 결국 네가 내놓기 싫은 건 내가 전에 사준 선물들이겠지! 헤어졌는데도 내 선물들을 갖고 싶어 하다니, 너는 역시 뼛속까지 속물이야!”“맞아요. 안다혜 씨. 이 모든 건 진우를 기쁘게 하려고 그쪽이 자진해서 한 일이잖아요.”심서아는 마치 사랑에 휘둘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보듯 안쓰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진해서?”안다혜는 ‘자진해서'라는 네 글자를 곱씹으며 비웃듯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진우가 나에게 선물한 것들도 자진해서 준 거죠. 제가 먼저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그 선물들은 서진우가 자신을 달래기 위해 준 것에 불과했다.그녀는 확실히 눈앞의 남자를
서진우는 이를 악물고 안다혜를 노려봤다.옆에 있던 심서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레스토랑에 구경꾼들이 점점 몰려들자 서진우는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카카오페이!”안다혜는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서진우가 QR 코드를 스캔하도록 했다.돈이 들어오자 안다혜는 입꼬리를 올리고 나지막이 웃었다.“고마워, 전 남친.”‘괜찮네. 3년 사이에 2200만은 벌었으니까.’서진우는 험악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고 심서아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황급히 뒤따라 나갔다.깔끔한 레스토랑에서 윤해준의 시선은 저 멀리 안다혜에게 머물렀고 옆에 있던 사업 파트너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곧이어, 그의 흥미로운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다혜에게 향했다.“여자 친구예요?”“아니요.”윤해준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제 아내입니다.”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남자는 놀랍다는 듯 윤해준을 바라보았지만 윤해준의 눈 속에 떠올랐던 부드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이성적이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스미스 씨, 방금 제시한 조건은 저의 최종 제안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협상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습니다.”...안다혜는 윤해준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서진우가 떠난 후, 안다혜는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때 윤해준의 비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말했다. “안다혜, 저는 윤해준 씨의 비서입니다. 대표님께서 곧 미팅이 끝나시니 차에서 기다려주시면 좋겠습니다.”‘윤해준도 여기에 있다고?’안다혜는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 윤해준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은 적당한 온도였고 안다혜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깨어나는 순간, 그녀는 강한 소유욕과 과도한 부드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느꼈다.눈을 뜨자 윤해준의 따뜻하고 깊은 눈빛과 마주쳤다.“깼어?”안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윤해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피곤해? 안 피곤하면
윤해준이 멈칫하더니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안다혜의 허리를 감싸안은 윤해준이 허리를 숙이더니 느긋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정아. 나는 누군가를 쫓아다닌 적이 없어. 미색에 현혹됐다고 해도 좋고 이런데 무뎌서 이제 알아챘다고 해도 좋은데 우리 한번 제대로 만나보는 건 어때?”다정은 안다혜의 애칭이었고 어릴 적에 가족들이 즐겨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윤해준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빠가 어떻게 알았지?’안다혜는 가슴이 철렁해 윤해준을 빤히 올려다보며 빨간 입술을 뻐끔거렸지만 거절할 수가 없어 눈꺼풀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요.”...한편.레스토랑에서 나온 서진우가 어두운 표정으로 심서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든 상태라 안다혜가 추궁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람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영상은 인터넷에 올라왔다.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화가 잔뜩 치밀어오른 서진우가 안다혜에게 선물을 가져다준 진이한을 찾아내 화풀이했다.“미쳤어? 그 돈 아껴서 뭐 하려고 짝퉁을 선물한 거야?”진이한이 코를 매만지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님,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랑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비싼 선물을 해서 뭐하게요? 안다혜는 어디 내놓기도 민망한 그런 여자라고요.”서진우는 너무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래도 나는 짝퉁은 안 사줘. 너 때문에 내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나도 안다혜가 그렇게 따지는 사람인 줄 몰랐죠. 형님도 애초에 그 돈을 주지 말았어야 했어요. 3년 인건비가 2200만 원이라니, 돈에 미친 거 아니에요?”이 말에 서진우는 안다혜가 말한 비용이 생각나 기분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그동안 그렇게나 많은 돈을 썼다고?’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X 같은 년. 남자면 보면 다 퍼주지 못해 할짝대는 게 안다혜잖아. 서아랑은 비교할 게 못 되지. 아무
안다혜는 표정이 덤덤했지만 뿜어내는 아우라만큼은 매우 놀라웠고 전혀 대학생 같지 않았다. 이훈은 안다혜도 안씨라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안씨 가문과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아가씨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이훈은 이내 머릿속에 드는 의문을 훌훌 털어버리더니 차갑게 웃었다.“우리 태안 그룹은 안다혜처럼 월급만 축내는 사람 필요 없어요.”안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료를 챙겨 회사를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안다혜가 해고되었다는 공지가 떴고 이를 확인한 프로젝트팀 팀장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다른 사람이 안다혜의 신분을 모를 수는 있어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안다혜가 바로 안씨 가문 공주님이었기 때문이다.‘이훈 이 새끼 미친 거 아니야?’팀장이 이를 악물고 이훈을 찾아갔다.“이훈 씨, 안다혜가 누군지 알아요? 도대체 왜 해고한 거예요? 태안 그룹에서 쫓겨나고 싶어요?”“별 볼 일 없는 일반 대학생인데요 뭐.”이훈이 웃음을 터트렸다.“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세요? 해고하면 하는 거지. 안씨라고 다 같은 안씨인 줄 아세요?”팀장이 한마디 덧붙이려는데 이훈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 여대생이랑 무슨 특별한 관계인 줄 알겠어요.”팀장은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고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힘 빼며 설명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공주님이 성질을 부려도 팀장이 망하는 건 아니었다.팀장이 떠나고 이훈이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우 씨, 안다혜는 이미 태안 그룹을 떠났습니다.”...안다혜는 해고당하자마자 김미진의 전화를 받고 저택으로 불려 갔다. 김미진은 안다혜의 편을 드는 대신 차갑게 쏘아붙였다.“밑에서부터 배우라고 보냈더니 해고를 당해? 안다혜. 정말 실망이야.”김미진의 눈빛은 아무런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안다혜는 김미진의 공정한 태도에 놀라진 않았지만 마음이 시린 건 어쩔 수 없었다.옆에 있던 안소
저녁에 민초연이 다음날 태안으로 입고 갈 드레스를 골라달라며 안다혜를 불러냈다. 그렇게 쇼핑하던 두 사람은 심서아, 그리고 서우진과 마주치게 되었다.심서아는 안다혜를 보자마자 가볍게 웃었다.“다혜 씨 컨디션 괜찮은가 보네요? 회사 잘리고도 쇼핑할 생각하는 거 보면?”옆에 있던 민초연이 귀신이라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 안씨 그룹 작은 아가씨가 태안 그룹에서 잘렸다고?’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우진을 힐끔 쳐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네가 꾸민 짓이야?”“비천한 신분일수록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해.”서우진이 역겹다는 듯 말했다.“안다혜. 나는 너 괴롭힐 생각 없었는데 네가 자꾸 질척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민초연은 안다혜의 친한 친구였기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미친 거 아니야?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은. 그런다고 다혜가 너 신경 쓸 거 같아?”“아니라고?”서진우가 차갑게 웃었다.“레스토랑까지 따라와서 우연히 마주친 척하더니 일부러 사람들 보는 앞에서 난동이나 부리고. 하필 직장을 찾아도 태안 그룹이야. 태안 그룹에 입사했다는 핑계로 내 관심을 끌려는 거 아니야? 안다혜. 넌 정말 보면 볼수록 가관이다. 싫다는 사람한테 그렇게 들러붙고...”서진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다혜가 서진우를 걷어차서 쓰러트리더니 서진우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뚜드려 팼다. 몸을 한껏 숙인 안다혜는 서진우의 멱살을 잡고는 차갑게 비웃었다.“나 정말 오래 참았다.”옆에 있던 민초연이 헤벌쭉 웃었다.“역시 우리 다혜 격투 기술은 여전하다니까.”얌전한 척하다 보니 안다혜는 산타와 태권도를 배웠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수틀리면 바로 주먹부터 나가는 게 안다혜의 개성에 더 맞았다.서진우가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얼굴에 멍이 들어 처참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안다혜.”서진우가 안다혜의 뺨을 후려치려는데 한 남자가 서진우의 팔목을 으스러지게
매혹적인 윤해준의 목소리에 안다혜의 심장도 따라서 철렁했다.“오빠...”안다혜가 눈을 깜빡이며 윤해준의 목을 휘감았다.“약속했잖아요. 내가 원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기로.”그날 다락방에서는 분위기가 너무 좋아 안다혜도 거절하지 못했다. 게다가 윤해준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다혜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달랬다.윤해준이 웃으며 안다혜의 턱을 들어 올리더니 차갑지만 매혹적인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싫어?”윤해준의 뜨거운 숨결이 안다혜의 귓가에 닿자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나른해졌고 마음은 깃털이 스쳐 지난 듯 간질거렸다. 몸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반응에 안다혜는 이를 악물었다.‘도도하긴. 완전 꾼이야, 꾼.”얼마 지나지 않아 안다혜가 두 팔로 윤해준의 목을 휘감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가끔 너무 오글거리는 거 알아?”윤해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안다혜의 입술에 키스했다. 소파와 윤해준 사이에 갇힌 안다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게다가 윤해준의 기술은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한쪽으로 부드럽게 안다혜의 입술에 키스하며 한쪽으로 안다혜와 깍지를 꼭 끼자 안다혜는 이내 정신이 혼미해졌고 윤해준의 뜨거운 숨결만 느낄 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저항을 포기한 안다혜는 끈적이는 소리와 함께 몸이 점점 나른해지는데 갑자기 다급한 벨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안다혜는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전화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보니 민초연이 걸려 온 전화였다. 안다혜는 자기도 모르게 윤해준을 밀어냈지만 윤해준의 힘을 이길 재간은 없었다. 척추에 올려진 윤해준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더 깊은 곳을 탐색하려는데 민초연이 눈치 없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윤해준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안다혜의 귓가에 갖다 대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끊어버려.”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벨 소리가 안다혜의 신경을 계속 자극했다. 윤해준의 키스가 쇄골에 전해지자 뜨거운 숨결이 안다혜의 한껏 예민해진 피부에 닿았고 이는
더는 들어줄 수 없었던 안다혜가 민초연의 말을 잘라버렸다.“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끊어.”그러더니 민초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초연이 한 말을 윤해준이 다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안다혜는 더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윤해준도 동작을 멈추고 활짝 웃으며 안다혜를 바라봤다. 안다혜는 차가운 물이라도 한잔 마시며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윤해준을 밀어내고는 소파에 앉아 헝클어진 옷을 정리하더니 아무 일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윤해준은 그런 안다혜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안다혜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안다혜와 눈높이를 맞췄다.“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안다혜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아 흔들리는 눈빛으로 윤해준의 시선을 피하더니 결국 테이블에 놓인 잡지를 집어 들었다.“방이 좀 덥네요. 채... 책 좀 봐야겠어요. 자기 전에 책을 보는 게 몸에 그렇게 좋다더라고요.”윤해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안다혜를 보며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했지만 더 다가가지 않고 느긋하게 옆에 놓인 소파에 앉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했다.조용해진 방안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안다혜가 윤해준을 몰래 훔쳐보는데 윤해준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열심히 일 처리했다. 조각 같은 옆모습이 불빛 아래 더 매혹적으로 다가와 안다혜는 민초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앞에 선 남자는 넓은 어깨에 탄탄한 허리, 그리고 긴 다리를 가졌는데 행동 하나하나에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돋보여 안다혜의 심장은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안다혜의 눈빛을 느낀 윤해준이 고개를 들었다가 안다혜의 당황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바짝 다가갔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자 잔잔한 연초 냄새가 풍겼다.“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윤해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매혹적이었고 어딘가 살짝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그 목소리를
넓은 어깨와 얇은 허리 그리고 탄탄한 근육까지, 슈트를 입고 있어도 몸매가 얼마나 좋은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안다혜는 문득 민초연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우리 오빠는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어느 하나 우월하지 않은 데가 없지.”지금 보니 민초연의 말은 과장된 것 없이 다 사실이었다.“무슨 생각해?”윤해준이 아침을 식탁에 올리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정신 차린 안다혜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얼른 먹어.”윤해준이 따듯한 우유 한잔을 안다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식겠다.”우유를 건네받은 안다혜가 고개를 숙이고 한 모금 마셨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이따금 윤해준을 힐끔 쳐다봤다.‘이 남자 보면 볼수록 매력덩어린데.’안다혜는 우유를 마시며 따듯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걸 느꼈지만 사색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했다.갑작스럽게 결혼한 것도 모자라 아침에 남자를 마주하고 앉아 점심을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 서진우와 3년을 만났다 해도 서진우네 집에서 밤을 보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안다혜도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윤해준이 만든 계란후라이는 먹기 좋게 노릇노릇, 바싹바싹 잘 구워져 있었다. 빵을 한입 베어 물어 보니 폭신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은은한 보리 냄새가 풍겼다.“맛있어?”윤해준이 그런 안다혜를 부드럽게 바라봤다.“네. 맛있어요.”안다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맛있으면 앞으로 자주 해줄게.”윤해준이 이렇게 말하며 티슈를 한 장 뽑아 안다혜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닦아냈다. 안다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아침을 먹고 윤해준이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안다혜가 소파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 경관을 바라봤다.“오늘은 뭐할 거야?”설거지를 마친 윤해준이 안다혜 옆으로 가서 앉았다.“잘 모르겠어요.”안다혜가 고개를 돌려 윤해준을 바라봤다.“오빠는요?”“나는 너 데리고 옷 사러 가고 싶은데. 새집에 들일 물건
윤해준이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오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태안 그룹 지하 주차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찾아봐. 안다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해.”오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켜고는 위치추적기로 안다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몇 분 후, 오정우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찾았어요. 누군가가 안다혜 씨를 납치해서...”“서쪽 창고로 데려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오 비서도 서쪽 창고로 와.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윤해준은 엄숙한 어조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정우는 윤해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동안 윤해준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독한 남자였다.오정우는 안다혜를 납치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해준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그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서쪽 창고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려도 멈추지 않고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대를 잡고는 생각에 잠겼다.‘다정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한편, 서쪽 창고.안다혜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훈은 임유정의 옆에 서서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서진우는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는 악마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훈한테 안다혜를 괴롭히는 영상을 잘 찍어서 전송하라고 지시했었다.건달은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다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건달을 노려보았다.“나한테 손대지 마!”안다혜는 저도 모르게 윤해준을 떠올리면서 울먹였다. 그가 곁에 있어 주면 늘 든든했고 하늘이 준 선물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윤해준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바랐다.“성격도 화끈하니까 가지고 놀 맛이 있네.”“반항해도 소용없어. 소리 지르지 말고 우리랑 재밌게 놀자.”이훈이 옆에 서서 다급
안다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치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납치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안다혜가 밉보인 사람은 그 몇 명뿐이었던 것이다.이훈이 당당하게 걸어오자 안다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는 안다혜의 턱을 거칠게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눈 깔지 못해?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어? 얼른 대답해 봐.”안다혜는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떼어달라고 눈짓했다. 임유정이 테이프를 뜯으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회의실에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납치당해 보니 기분이 어때? 정말 짜릿하지 않아? 울면서 나한테 빌면 기분이 좋아서 너를 풀어줄 수도 있어.”임유정은 안다혜의 볼을 매만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혜가 침을 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납치해도 태안 그룹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안다혜가 이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이훈은 안다혜가 협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혜의 몸매를 훑어보면서 침을 삼켰다.이훈과 눈이 마주친 안다혜는 속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를 탓할 게 아니라 너를 원망해.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납치당한 거야.”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훈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이때 건달이 4명 정도 들어오자 안다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정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어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개 같은 년, 내가 기회를 주었을 때 나한테 빌었어야지.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건달들은 의자에 묶인 안다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과 굴곡진 몸매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마침 서진우도 안다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훈은 서진우의 힘을 빌려서 안다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그는 울고 있는 임유정을 달래주고는 창가로 가서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유정은 눈물을 그치고 이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이훈이 회사에서 거만하게 굴었던 건 안씨 가문 첫째 아가씨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도련님이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가 서진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안다혜를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한편,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훈의 이름만 보면 그동안 안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찾느라고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카운터에서 마주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능한 이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서진우가 전화를 받고는 차갑게 말했다.“쓰레기 같은 놈,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다혜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랬더니 풍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어. 내 일을 망치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감시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쫓기다니...”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진우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진우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다른 방법을 토론해 보려고 연락한 거예요.”“다른 방법이라니?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서진우는 지난번에 연회에서 안다혜한테 한 방 먹은 후로 갖은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보내서 안다혜한테 복수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주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제일 믿었던 이훈마저 회사에서 해임당했기에 점점 화가 났다. 이훈이 임유정한테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제안했다.“서진우 도련님, 이번이야말로 안다혜한테 복수할 기회예요. 임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가 괴롭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서진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네 여자 친
경비원들이 임유정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카운터 직원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태안 그룹에서 사원을 내쫓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이때 한 경비원이 임유정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던지면서 말했다.“앞으로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신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경비원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뒤돌아 갔다. 그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임유정의 물건을 전부 상자에 넣어서 던졌다.임유정은 팀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임유정을 힐끗 쳐다보면서 깔깔 웃어댔다.임유정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당한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몇 배로 갚아줄 테니 두고 봐.’카운터 여직원이 임유정을 쳐다보면서 다른 직원을 향해 말했다.“회사에서 내쫓긴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봐요.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어요?”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아도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회사 단톡방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 동료의 기획안을 표절했대요. 그리고 이훈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했어요.”“회사에서 내쫓을 만하네요.”두 사람은 임유정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임유정은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원이 아니기에 카운터 직원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손가락질해도 임유정은 반격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유정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안다혜한테 몇백 배 돌려줄 거야.’임유정은 택시를 타고 이훈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이훈은 해임당한 뒤로 취직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가끔 서진우와 연락하면서 안다혜를
“안다혜 씨,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요?”안다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유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임유정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을 수도 있었다.안다혜가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이었다면 임유정한테 당해도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다혜는 차가운 두 눈으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 임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안다혜 씨,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하라는 대로 하고 죽은 듯이 지낼게요.”임유정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모두 멀리하고 싶어 했다.이지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아까 안다혜가 나서지 말라고 할 때 속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안다혜가 현명하게 처리해서 임유정의 만행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안다혜는 임유정의 손을 내치고는 팀장을 향해 말했다.“임유정 씨가 제대로 반성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임유정이 기뻐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사에서 내보내고 이 업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임유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기에 해임당하면 이 업계에서 취직할 수 없을 것이다.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에요. 안다혜 씨 말대로 해요.”안다혜는 임유정을 스쳐 지나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임유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다혜의 얼굴을 잡아 뜯으려고 덤볐다.“안다혜, 이 개 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해!”안다혜가 재빨리 옆으로 비키자 임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임유정이 씩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보여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안다혜는 임유정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PPT를 한 장씩 넘겼다. 임유정이 발표한 것과 완전히 다른 기획안이 눈앞에 나타났다.이미 협업할 연예인을 섭외했고 구체적인 대안을 정리해서 적어두었다.안다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임유정 씨가 발표한 기획안은 저의 초안이에요.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건 최근에 완성한 기획안이에요. 온천 휴양지는 럭셔리한 이미지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지금 보시는 화면은 초안의 단점을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내용이에요. 유명한 브랜드 회사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어요. 저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요.”그 자리에 있던 사원들이 전부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조금 전에 임유정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훌륭했다.안다혜는 사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기획안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유능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유정이 안다혜의 기획안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임유정 씨가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익을 챙기려고 했네요.”“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곧 해임당하지 않을까요? 오늘 밤에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할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놓고 보면 위험한 인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다혜를 향해 말했다.“안다혜 씨,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표절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애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팀장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처음부터 진행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거든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찾아냈고요. 임유정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다혜는 임유정을 내팽개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닦았다. 임유정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안다혜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다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안다혜,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당장 무릎 꿇고 나한테 빌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짓도 벌일 수 있어.”임유정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다혜의 기획안을 훔쳐서 발표한 사람은 임유정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처럼 굴었다.이때 팀장이 나서서 임유정을 말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임유정 씨, 동료끼리 싸우지 마세요. 안다혜 씨가 이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팀장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안다혜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임유정 씨는 저의 기획안을 표절했어요.”“웃기는 소리! 내가 언제 표절했다고 그래? 내 기획안이 욕심나서 일부러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유정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언성을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네가 팀장의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너를 감싸고 돌 리가 없잖아.”“임유정 씨의 말을 들어보니 문뜩 궁금해지네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훈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아주 특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요.”“뭐, 뭐라고?”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다혜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임유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팀장과 안다혜가 아니라 임유정과 이훈이 특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안다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임유정 씨가 이 기획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다시 설명해 볼래요?”안다혜의 말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이지영이 피식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다혜 씨의 말대로라면 임유정이
“임유정 씨의 기획안을 제출하면 회사의 명예에 먹칠하게 될 거예요.”안다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단상에 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임유정을 지켜보다가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이다.임유정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문했다.“안다혜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임유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설마 제가 안다혜 씨보다 먼저 승진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가요? 안다혜 씨는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이었네요. 동료를 시기 질투할 시간에 더 노력하지 그래요?”임유정은 안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안다혜의 컴퓨터에 있던 파일을 전부 복사한 뒤에 삭제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안다혜가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임유정이 먼저 발표했기에 이 기획안은 임유정의 것이 되었다.팀장이 안다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안다혜 씨, 설마 이 기획안을...”“팀장님!”임유정이 팀장의 말을 끊으면서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동료를 모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왜 안다혜 씨의 편을 드는 건가요? 설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겠죠? 어쩐지 저번부터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았어요.”임유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두 팀장과 안다혜를 번갈아 보면서 귓속말했다.팀장은 임유정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임유정 씨,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모두 조용히 하세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팀장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안다혜와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팀장이 아무리 부정해도 임유정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안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다혜는 피식 웃더니 임유정 쪽으로 다가가서 노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안다혜와 달리 임유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임유정과 안다혜가 나란히 서 있으니 비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을 한 임유정은 안
안다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안다혜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유정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멍청한 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 있다가 너를 처참히 짓밟아줄 테니 기다려. 언제까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이 기획안이 나의 것이 되면 너는 팀장한테 버림받겠지.’임유정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안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임유정은 USB를 컴퓨터에 꽂고는 준비한 기획안 파일을 클릭했다. 안다혜가 예상했던 대로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임유정이었다.임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도발했지만 안다혜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모습을 본 임유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안다혜, 내가 준비한 기획안을 보고도 웃음이 나와? 곧 울면서 나한테 빌겠지.’임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발표할게요. 풍산 그룹의 고급 온천 프로젝트는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하는 게 좋아요. 혹은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을 홍보대사로 초빙하면 더 좋고요. 그리고 풍산 그룹의 온천 휴양지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거예요.”임유정이 스크린에 PPT를 띄워놓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귀담아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발표가 끝난 후, 팀원들은 임유정이 이토록 훌륭한 기획안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팀장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정말 혼자 생각해 낸 기획안인가요?”임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팀장님,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팀장님이 저를 미덥지 않아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오로지 저의 힘으로 완성한 거라고요.”팀장은 조금 전에 임유정이 자신만만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