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차를 몰아 가장 가까운 약국으로 향했다.약국에 도착한 그는 소염, 살균 효과가 있는 약이란 약은 죄다 사서 차 트렁크에 가득 채웠다.민초연의 집에 도착하니 안다혜는 소파에 앉아 냉수를 마시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윤해준은 안다혜 앞으로 다가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뺨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무슨 일이야? 누가 그랬어? 많이 아파?”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갑고 단호한 모습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웠다.갑작스러운 윤해준의 관심에 안다혜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별거 아니라고?! 이게 별거 아니야?!”옆에 있던 민초연이 흥분하며 소리쳤다.“얼굴이 이렇게 부었는데! 완전 찐빵 같잖아! 내가 얼음찜질해 준 덕분에 이 정도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윤해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많이 아파? 어디 봐.”안다혜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부담스러워 몸을 피했다.“진짜 괜찮아요. 호들갑 떨지 말아요.”“뭐가 괜찮아! 얼굴이 이렇게 부었는데!”윤해준의 말투에는 안다혜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가벼운 꾸중이 담겨 있었다.민초연은 윤해준에게 물었다.“오빠, 약은요? 갖고 왔어요?”“차에 있어. 네가 가져와!”민초연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트렁크 안은 온통 약으로 가득 차 있었다.각종 연고, 스프레이, 약, 심지어 포비돈 요오드와 거즈까지...민초연은 놀란 눈으로 윤해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오빠는... 약국을 털어온 건가?”민초연은 약산에서 흔히 쓰는 붓기 빼는 약 몇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약 발라줄게.”윤해준은 안다혜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우고 붉게 부어오른 뺨에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주었다.마치 귀중한 도자기를 다루듯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세심했다.윤해준의 다정한 행동에 안다혜는 당황했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기
안다혜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고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괜찮아요. 조금 다쳤을 뿐이에요.”“조금 다쳤다고?”윤해준의 목소리에는 화가 섞여 있었다.“얼굴이 이렇게 부었는데 조금 다쳤다고? 무슨 일인지 말해 봐.”안다혜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윤해준에게 모두 털어놓았다.윤해준은 안다혜의 이야기를 듣고는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그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훈이라는 사람을 조사해.”평소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단호했다. 안다혜는 착잡한 심정으로 윤해준을 바라보았다.“해준 오빠...”안다혜는 윤해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나도 별로 손해 본 것도 없고.”안다혜는 윤해준이 자신 때문에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안다혜의 뜻을 존중하여 이훈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남은 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약상자에 넣었다.“아직도 아파?”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붉게 부어오른 뺨을 살살 쓸어주었다.안다혜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많이 나아졌어요. 고마워요.”윤해준은 손을 거두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안다혜는 거절하려 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네.”윤해준은 안다혜를 데리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갔다.그는 익숙한 듯 몇 가지 담백한 요리를 주문하고 안다혜에게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여기 자주 오나 봐요?”안다혜가 물었다.윤해준은 미소를 지었다.“응. 예전에 여기서 미팅을 자주 했었거든.”음식이 금방 나왔다. 안다혜는 젓가락을 들었지만 별로 식욕이 없었다.그 모습을 본 윤해준은 안다혜의 그릇에 생선 살을 발라 얹어 주었다
레스토랑 밖.서진우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안다혜를 훑어보았다.그는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말아 올린 채 한 손으로는 심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라이터를 빙글빙글 돌렸다.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그의 시선이 안다혜의 맞은편 남자에게 닿았을 때,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언뜻 스쳐 지나가는 묘한 호기심이 그 눈동자에 번뜩였던 것이다.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넓은 등만 눈에 들어왔다.하지만 훤칠한 체격과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기운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심서아 역시 서진우의 시선을 따라 안다혜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는 서진우에게서는 물론, 지금껏 만나본 누구와도 다른, 묘하게 강렬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그건 오랜 시간 권력을 쥐고 있던 자만의 말 없이 사람을 압도하는 아우라였다.침착하고 단정한 모습 이면에 숨겨진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기묘하게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진우야, 저기 안다혜 아니야? 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도 올 수 있나?”심서아는 레스토랑 안의 안다혜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똑같이 생긴 그 잘생긴 제비가 데려왔겠지. 안다혜, 정말 대단하다. 가자, 우리도 들어가 보자.”심서아는 거만하게 레스토랑 입구로 걸어가 문을 열려고 했다.그러나 키가 큰 종업원이 그녀를 막아섰다.“죄송하지만 오늘은 레스토랑 전체가 예약되었습니다.”서진우는 눈썹을 치켜뜨며 직원을 멸시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예약? 내가 누군지 알아? 서진우라고!”그는 손에 든 차 키를 흔들었다. 차 키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표범 장식이 달려 있었고 불빛에 반짝였다.직원은 표정 변화 없이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손님, 죄송합니다. 어떤 분이시든 오늘은 입장이 불가능합니다.”심서아는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했다.“어머, 안다혜가 돈 많은 남자를 잡았나 보네. 이렇게 비싼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
레스토랑 안, 안다혜와 윤해준의 저녁 식사는 바깥의 소란에 방해받지 않았다.“풍산 온천 리조트 프로젝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윤해준은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썰면서 물었다.안다혜는 포크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대답했다.“풍산 그룹은 건강, 휴식, 오락을 결합한 고급 온천 리조트를 만들려고 하잖아요. 저는 현대적인 건축 양식과 자연 경관을 조화시켜 현대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을 구상했어요.”윤해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 자세히 얘기해 봐.”안다혜는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디자인 도안을 보여 주면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윤해준은 도안을 보면서 안다혜의 설명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감탄하는 빛이 어렸다.안다혜의 디자인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사업성도 뛰어났다.“아이디어도 좋고 시장 전망도 밝아보이는데.”윤해준은 안다혜에게 태블릿 PC를 돌려주며 칭찬했다.“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을 좀 더 보완하면 좋을 것 같아. 예를 들어, 온천 구역의 테마 디자인을 다양화하고 고객 참여형 체험 프로그램을 추가하면 재미를 더할 수 있을 거야. 스파 구역에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입점시켜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고 레스토랑에는 지역 특색을 살린 메뉴를 개발하고 숙박 시설에는 스마트 기능을 추가해서 고객 경험을 향상시키는 것도 좋겠지.”안다혜는 윤해준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화면 가장자리를 무심코 문지르며 멍하니 있었다.“근데... 갑자기 왜 조언을 해 주는 거예요?”안다혜는 윤해준을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리고 풍산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윤해준은 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와인 잔을 돌리며 레스토랑의 은은한 조명이 반사되는 깊은 눈으로 안다혜를 바라보았다. “그냥 조언 좀 해 준 것뿐이야.”그는 가볍게 입을 열었고 그의 말투에서는 무심함이 느껴졌다.“풍산 프로젝트는 쉽게 따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만약 네가 이 프로젝트로
안다혜는 안전벨트를 풀고 손을 뻗어 차 문을 열었다.도시의 소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차 안의 고요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안다혜는 강한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며 차에서 내렸다. 하이힐이 땅에 닿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안다혜는 멈춰 서서 윤해준을 돌아보았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날리며 하얗고 가는 목덜미가 드러났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고마워요.”윤해준은 깊은 눈으로 안다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안다혜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윤해준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그리고 나서야 검은색 마이바흐를 다시 출발시켜 차량 흐름에 합류했다.안다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로비의 시원한 냉기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살짝 정돈하고 김미진의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선 안다혜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김미진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안다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이 가득했다.김미진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안다혜를 바라보는 김미진의 눈빛은 복잡했다.의아함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안다혜는 주눅 들지 않고 김미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단호하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지금 당장 태안에서 정식으로 일할 수는 없지만 풍산 그룹 온천 리조트 프로젝트에는 참여하게 해주세요. 자리라도 하나 마련해 주세요.”김미진은 서류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안다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어두웠다.“자리는 마련해 주겠다만 프로젝트를 따낼 자신은 있어?”“네.”안다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확신으로 빛났다.“쉽지 않은 프로젝트라는 건 알지만, 한번 해 보고 싶어요. 설사 실패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김미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혜는 온천 지역의 혁신적인 변화를 제안했다. 기존의 일식 온천에서 벗어나 동남아의 이국적인 정취와 북유럽의 간결한 디자인을 접목시킨 새로운 컨셉이 눈길을 끌었다. ‘별빛 온천’, ‘숲 온천’, ‘꽃밭 온천’처럼 각 구역마다 독특한 테마를 부여하고 온천 요가나 워터파크 같은 체험 요소를 추가한 점도 매력적이었다.또한 국내 브랜드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인 SPA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고급스럽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 그리고 지역 특색을 반영한 다채로운 메뉴 구성으로 미식 경험까지 고려한 점이 돋보였다. 객실에 스마트 시스템을 도입하여 고객 편의성을 강화한 점도 인상적이었다.안다혜의 설명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정교한 효과도와 어우러져 기획안의 장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회의실은 고요했고 모두의 시선은 안다혜의 기획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찬사가 담겨 있었다.프로젝트팀장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였다.“안다혜 씨, 이 기획안 정말 창의적이고 시장 경쟁력도 뛰어나네요. 꼼꼼하게 잘 만들었어요.”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누군가 물었다.“이런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해낸 거예요?”안다혜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이전에 시장 조사를 좀 했고 해외 성공 사례도 참고했어요. 풍산 그룹의 상황에 맞춰 수정도 좀 했고요.”회의가 끝난 후, 프로젝트팀장은 안다혜에게 다가와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안... 안다혜 씨, 기획안 아주 좋네요. 기대할게요.”안다혜는 공손하게 답했다.“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그 시각, 허름한 자취방에서는 이훈이 담배를 쥔 손에 힘을 주어 재떨이에 비벼 껐다. 턱에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이 손바닥에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그는 초조함에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치 새 둥지처럼 엉켜있던 머리카락은 더욱 엉망진창이 되었다.오전에 있었던 일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안다혜의 차가운 눈빛, 깔끔한 어깨 넘기기, 주변 동
“진우 씨, 저는 정말 그 계집애가 그럴 줄은...”이훈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그녀는 이제 회사에 처음 왔을 때랑 완전히 달라졌어요!”“달라졌다고? 어떻게 달라졌는데? 제대로 말해 봐!”서진우는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잘라내며 경멸스럽게 말했다.“전에 안다혜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고작 계집애 하나도 처리 못 하면 널 뭐하러 써야 하지?”이훈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덜덜 떨며 해명했다.“진우 씨, 안다혜는... 이제 아주 강해졌어요. 저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그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과장되게 묘사하며 안다혜가 얼마나 쉽게 자신을 어깨 넘기기하고 사무실에서 망신을 주었는지 강조했다.“어깨 넘기기?”서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덩치 큰 남자가 여자에게 어깨 넘기기를 당했다고?”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비웃었다.“정말 한심한 놈이군!”이훈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가 뒤엉켜 마치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저... 저는...”그는 말을 더듬으며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닥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진우가 거칠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쓸모없는 놈! 그런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고!”그는 초조함에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발을 굴렀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서진우는 과거 자신 앞에서 순종적이던 안다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의 강인한 모습과 비교하자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솟구쳤다.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느꼈다.“갑자기 왜 저렇게 변했지? 설마 전부 다 연기였나?”서진우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야. 날 가지고 놀았던 거야!”생각할수록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안다혜라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수화기 너머의 이훈은 숨소리조
윤해준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피곤함 속에도 따뜻한 미소가 묻어나는 듯했다.안다혜는 손을 멈추고 컴퓨터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오늘 안 바빠요? 어떻게 데리러 올 생각을 했어요?”그녀는 마우스로 다른 문서를 열고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진작부터 계획했던 거지.”윤해준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요즘 세상이 워낙 험해서 혼자 밤길 가는 게 영 걱정되잖아.”안다혜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귓불을 만지작거렸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저 야근 좀 해야 해요. 기다려요. 이 기획안 내일 써야 하거든요.”“그럼 내가 올라갈게.”윤해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아니...”안다혜는 다급하게 말렸지만 이미 수화기에서는 뚜뚜 소리만 들려왔다.그녀는 휴대폰을 든 채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비록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몇몇 동료들은 자리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다.윤해준이 이 시간에 올라오면 분명 주목을 받을 터였다.곧 동료들이 보낼 놀라움과 묘한 시선을 떠올리자 안다혜의 귀가 살짝 달아올랐다.이런 사적인 감정이 동료들에게 드러나는 게 그녀는 늘 불편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곧 닥칠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빠르게 생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야 사무실의 유리문이 조용히 열렸다.윤해준의 큰 키가 문에 나타났다. 그는 짙은 회색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살짝 풀어져 쇄골이 드러나 보였다.손에는 커피와 빵 냄새가 나는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안다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사무실 조명과 석양이 어우러져 그의 잘생긴 옆얼굴에 비치며 완벽한 윤곽을 그려냈다.윤해준은 그녀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뭘 그렇게 열심히 해?” 그는 컴퓨터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순간, 따뜻한 숨결이 안다혜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
윤해준이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오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태안 그룹 지하 주차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찾아봐. 안다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해.”오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켜고는 위치추적기로 안다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몇 분 후, 오정우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찾았어요. 누군가가 안다혜 씨를 납치해서...”“서쪽 창고로 데려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오 비서도 서쪽 창고로 와.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윤해준은 엄숙한 어조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정우는 윤해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동안 윤해준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독한 남자였다.오정우는 안다혜를 납치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해준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그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서쪽 창고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려도 멈추지 않고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윤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대를 잡고는 생각에 잠겼다.‘다정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한편, 서쪽 창고.안다혜는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훈은 임유정의 옆에 서서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서진우는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는 악마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훈한테 안다혜를 괴롭히는 영상을 잘 찍어서 전송하라고 지시했었다.건달은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다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며 건달을 노려보았다.“나한테 손대지 마!”안다혜는 저도 모르게 윤해준을 떠올리면서 울먹였다. 그가 곁에 있어 주면 늘 든든했고 하늘이 준 선물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윤해준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바랐다.“성격도 화끈하니까 가지고 놀 맛이 있네.”“반항해도 소용없어. 소리 지르지 말고 우리랑 재밌게 놀자.”이훈이 옆에 서서 다급
안다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납치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납치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안다혜가 밉보인 사람은 그 몇 명뿐이었던 것이다.이훈이 당당하게 걸어오자 안다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는 안다혜의 턱을 거칠게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눈 깔지 못해?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어? 얼른 대답해 봐.”안다혜는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떼어달라고 눈짓했다. 임유정이 테이프를 뜯으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회의실에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납치당해 보니 기분이 어때? 정말 짜릿하지 않아? 울면서 나한테 빌면 기분이 좋아서 너를 풀어줄 수도 있어.”임유정은 안다혜의 볼을 매만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혜가 침을 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납치해도 태안 그룹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안다혜가 이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이훈은 안다혜가 협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혜의 몸매를 훑어보면서 침을 삼켰다.이훈과 눈이 마주친 안다혜는 속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를 탓할 게 아니라 너를 원망해.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납치당한 거야.”안다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훈은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이때 건달이 4명 정도 들어오자 안다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정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어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개 같은 년, 내가 기회를 주었을 때 나한테 빌었어야지. 지금 후회해도 소용없어.”건달들은 의자에 묶인 안다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과 굴곡진 몸매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마침 서진우도 안다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훈은 서진우의 힘을 빌려서 안다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그는 울고 있는 임유정을 달래주고는 창가로 가서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유정은 눈물을 그치고 이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이훈이 회사에서 거만하게 굴었던 건 안씨 가문 첫째 아가씨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도련님이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가 서진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안다혜를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한편,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훈의 이름만 보면 그동안 안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찾느라고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카운터에서 마주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능한 이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서진우가 전화를 받고는 차갑게 말했다.“쓰레기 같은 놈,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안다혜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랬더니 풍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어. 내 일을 망치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감시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내쫓기다니...”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서진우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진우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다른 방법을 토론해 보려고 연락한 거예요.”“다른 방법이라니?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거야?”서진우는 지난번에 연회에서 안다혜한테 한 방 먹은 후로 갖은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보내서 안다혜한테 복수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주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제일 믿었던 이훈마저 회사에서 해임당했기에 점점 화가 났다. 이훈이 임유정한테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제안했다.“서진우 도련님, 이번이야말로 안다혜한테 복수할 기회예요. 임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가 괴롭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서진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네 여자 친
경비원들이 임유정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카운터 직원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태안 그룹에서 사원을 내쫓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이때 한 경비원이 임유정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던지면서 말했다.“앞으로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신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경비원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뒤돌아 갔다. 그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임유정의 물건을 전부 상자에 넣어서 던졌다.임유정은 팀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임유정을 힐끗 쳐다보면서 깔깔 웃어댔다.임유정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당한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몇 배로 갚아줄 테니 두고 봐.’카운터 여직원이 임유정을 쳐다보면서 다른 직원을 향해 말했다.“회사에서 내쫓긴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봐요.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어요?”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아도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회사 단톡방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 동료의 기획안을 표절했대요. 그리고 이훈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했어요.”“회사에서 내쫓을 만하네요.”두 사람은 임유정이 어떤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임유정은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원이 아니기에 카운터 직원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카운터 여직원들이 손가락질해도 임유정은 반격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유정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녀는 상자를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안다혜한테 몇백 배 돌려줄 거야.’임유정은 택시를 타고 이훈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이훈은 해임당한 뒤로 취직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가끔 서진우와 연락하면서 안다혜를
“안다혜 씨,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요?”안다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유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임유정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을 수도 있었다.안다혜가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이었다면 임유정한테 당해도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안다혜는 차가운 두 눈으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 임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안다혜 씨,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하라는 대로 하고 죽은 듯이 지낼게요.”임유정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모두 멀리하고 싶어 했다.이지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아까 안다혜가 나서지 말라고 할 때 속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안다혜가 현명하게 처리해서 임유정의 만행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안다혜는 임유정의 손을 내치고는 팀장을 향해 말했다.“임유정 씨가 제대로 반성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임유정이 기뻐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사에서 내보내고 이 업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안다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임유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기에 해임당하면 이 업계에서 취직할 수 없을 것이다.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에요. 안다혜 씨 말대로 해요.”안다혜는 임유정을 스쳐 지나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임유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다혜의 얼굴을 잡아 뜯으려고 덤볐다.“안다혜, 이 개 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해!”안다혜가 재빨리 옆으로 비키자 임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임유정이 씩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보여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안다혜는 임유정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PPT를 한 장씩 넘겼다. 임유정이 발표한 것과 완전히 다른 기획안이 눈앞에 나타났다.이미 협업할 연예인을 섭외했고 구체적인 대안을 정리해서 적어두었다.안다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임유정 씨가 발표한 기획안은 저의 초안이에요.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건 최근에 완성한 기획안이에요. 온천 휴양지는 럭셔리한 이미지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지금 보시는 화면은 초안의 단점을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내용이에요. 유명한 브랜드 회사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어요. 저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고요.”그 자리에 있던 사원들이 전부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조금 전에 임유정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훌륭했다.안다혜는 사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두 사람의 기획안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유능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유정이 안다혜의 기획안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임유정 씨가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익을 챙기려고 했네요.”“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곧 해임당하지 않을까요? 오늘 밤에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할지도 모르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놓고 보면 위험한 인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다혜를 향해 말했다.“안다혜 씨,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표절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무척 애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팀장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처음부터 진행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였거든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찾아냈고요. 임유정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다혜는 임유정을 내팽개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닦았다. 임유정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안다혜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다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안다혜,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당장 무릎 꿇고 나한테 빌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짓도 벌일 수 있어.”임유정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다혜의 기획안을 훔쳐서 발표한 사람은 임유정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처럼 굴었다.이때 팀장이 나서서 임유정을 말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임유정 씨, 동료끼리 싸우지 마세요. 안다혜 씨가 이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팀장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안다혜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아요. 임유정 씨는 저의 기획안을 표절했어요.”“웃기는 소리! 내가 언제 표절했다고 그래? 내 기획안이 욕심나서 일부러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유정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언성을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네가 팀장의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너를 감싸고 돌 리가 없잖아.”“임유정 씨의 말을 들어보니 문뜩 궁금해지네요.”안다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훈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아주 특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요.”“뭐, 뭐라고?”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다혜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임유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팀장과 안다혜가 아니라 임유정과 이훈이 특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안다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임유정 씨가 이 기획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다시 설명해 볼래요?”안다혜의 말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이지영이 피식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다혜 씨의 말대로라면 임유정이
“임유정 씨의 기획안을 제출하면 회사의 명예에 먹칠하게 될 거예요.”안다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 단상에 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임유정을 지켜보다가 더는 들어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이다.임유정이 주먹을 꽉 쥔 채 반문했다.“안다혜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임유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설마 제가 안다혜 씨보다 먼저 승진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가요? 안다혜 씨는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이었네요. 동료를 시기 질투할 시간에 더 노력하지 그래요?”임유정은 안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불안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안다혜의 컴퓨터에 있던 파일을 전부 복사한 뒤에 삭제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안다혜가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임유정이 먼저 발표했기에 이 기획안은 임유정의 것이 되었다.팀장이 안다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안다혜 씨, 설마 이 기획안을...”“팀장님!”임유정이 팀장의 말을 끊으면서 소리를 질렀다.“안다혜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동료를 모함하고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왜 안다혜 씨의 편을 드는 건가요? 설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겠죠? 어쩐지 저번부터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았어요.”임유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두 팀장과 안다혜를 번갈아 보면서 귓속말했다.팀장은 임유정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임유정 씨,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모두 조용히 하세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팀장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안다혜와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팀장이 아무리 부정해도 임유정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안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다혜는 피식 웃더니 임유정 쪽으로 다가가서 노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안다혜와 달리 임유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임유정과 안다혜가 나란히 서 있으니 비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을 한 임유정은 안
안다혜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임유정을 쳐다보았다.안다혜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유정은 화가 솟구쳐 올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멍청한 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 있다가 너를 처참히 짓밟아줄 테니 기다려. 언제까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이 기획안이 나의 것이 되면 너는 팀장한테 버림받겠지.’임유정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안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임유정은 USB를 컴퓨터에 꽂고는 준비한 기획안 파일을 클릭했다. 안다혜가 예상했던 대로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임유정이었다.임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도발했지만 안다혜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모습을 본 임유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안다혜, 내가 준비한 기획안을 보고도 웃음이 나와? 곧 울면서 나한테 빌겠지.’임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발표할게요. 풍산 그룹의 고급 온천 프로젝트는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하는 게 좋아요. 혹은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을 홍보대사로 초빙하면 더 좋고요. 그리고 풍산 그룹의 온천 휴양지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거예요.”임유정이 스크린에 PPT를 띄워놓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귀담아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발표가 끝난 후, 팀원들은 임유정이 이토록 훌륭한 기획안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팀장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임유정 씨, 정말 혼자 생각해 낸 기획안인가요?”임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팀장님,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팀장님이 저를 미덥지 않아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오로지 저의 힘으로 완성한 거라고요.”팀장은 조금 전에 임유정이 자신만만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