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 정유진, 그리고 최의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강지아는 없었고 온유한만 마스크를 쓴 채 구조를 돕고 있었다.“지아는 서원준 씨와 이미 갔대요.”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한 정유진이 한마디 하자 최의현이 입꼬리를 올렸다.“지아를 구한 사람은 유한인데 서원준이 데려간 거네?”강지찬이 최의현을 힐끗 바라봤다.최의현도 이런 상황에 웃어야 할지 아니면 온유한에게 동정을 표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한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온유한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안 됐네.”강지아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강지찬과 정유진은 자리를 떴다.온유한은 화재 현장에서 밤새 바쁘게 돌아다녔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큰불이 모두 진압되었다. 그리고 갇혔던 사람들이 모두 구조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지친 얼굴로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그를 인터뷰하려던 기자는 그의 피곤한 모습을 보고 한마디 했다.“저 사람, 낯이 익네요.”그러자 다른 기자가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저 사람! 태안 그룹 대표이사 온유한 아니에요? 지난번에 태안 그룹 근로자들이 난리를 피울 때 나도 현장에 있었어요.”그때 카메라에 많은 사진을 남겨뒀던 기자는 순간 눈이 반짝 빛났다.“정말 온유한이에요?”“아마도요. 그런데 오늘은 많이 못 찍었어요.”서울 명성 빌딩 화재는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화재를 일으킨 용의자와 그의 전 여자친구 모두 죽었고 사상자들도 아주 많았다.사람들이 화재에 주목함과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도 실검에 올랐다.온유한.“온유한이 옥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구조에 나섰어요. 의사로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줬어요.”“온유한이 밤새 쉬지 않고 계속해서 화상 환자의 응급 치료를 도왔어요.”“온유한이 구조하느라 여자친구에게도 신경 안 썼어요. 정말 대단해요.”“온유한의 여자친구가 헬리콥터를 한 모녀에게 양보했어요. 우리 이웃들이 옥상에서 다 봤어요.”‘온유한’이라는 세 글자가 다시 한번 대중의 시야에 들어오면서 태안 병원도 같이 언급되었다.“태안 병원이 비록 요금은 터무니없게
강씨 본가.드레스와 액세서리가 끊임없이 집안에 들어왔다. 강지아의 임무는 드레스를 입어보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을 하는 것이었다.정유진은 출근도 하지 않고 매일 결혼식을 챙기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강지찬 또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결혼이라 최대한 성대하게 치르려 했다.“고모, 이 귀걸이 예쁘지 않아? 마음에 안 들어?”아홉 살이 넘은 정연우는 귀걸이를 들고 자신의 귀에 대보며 말했다. 예쁜 장신구를 보자 녀석의 눈이 반짝였다.강지아는 목걸이를 녀석의 손에 몇 번 감아주며 팔찌로 하라고 선물했다.“마음에 들어?”“응, 마음에 들어.”정연우는 고모의 표정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모,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야?”강지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또 들켰네?”정연우가 말했다.“결혼하기 싫은 거 다 티나.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게 아주 무섭다고 하던데... 무서워서 그러지?”강지아가 피식 웃었다.“그럼 네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고 널 낳을 때 무서웠을까?”“아니.”정연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아빠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도 아빠를 사랑하잖아!”정연우는 애어른처럼 한숨을 쉬었다.“사실 지금 고모부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저번에 형원이 그 녀석과 두 시간 내내 그림을 그렸어. 정말 대단해!”정연우는 강지아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고모, 진짜 유한 삼촌 버릴 거야?”강지아는 녀석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어린이들은 함부로 어른들 일에 참견하면 안 돼.”“그럼 우리 일에도 어른들이 끼어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 오늘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았는데 엄마에게 말하면 안 돼.”서원준이 도착했을 때 강지아는 방금 도착한 웨딩드레스를 보며 멍해 있었다.“신상 모델인데 마음에 안 들어?”강지아가 웨딩드레스를 보며 말했다.“입어 봤어. 맞는 것 같아.”서원준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맞는 것 같다고? 마음에는 안 들고?”“마음에 들어. 그냥 이걸로 할게. 다른 것은 안 입어 봐도 돼.”서원준
강지아는 서원준이 프러포즈 할 때 줬던 반지를 찾으러 명성 빌딩에 갔다.아래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고 작업자들 또한 외벽을 청소하거나 수리하고 있었다.“강지아 씨, 왜 이제야 돌아온 거예요?”돌아서 보니 하얀 티셔츠에 밀크티 한 잔을 든 낯익은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누구...”“저는 저기...”남자가 아침 식사 가게 위치를 가리켰다.“종업원이에요. 제 이름은 서준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강지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오늘 스타일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어요. 죄송해요.”“아니에요.”서준은 수다쟁이였다.“왜 혼자예요? 남자친구와는 같이 오지 않았나요?”“남자친구는 여기에 살지 않아요.”그러자 서준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아닌데... 남자친구가 계속 여기에 살았잖아요. 전에 해외에 간 후에도 여기 자주 와서 머물렀어요. 우리 가게에 와서 아침도 먹었어요. 강지아 씨가 우리 가게의 죽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 후로 강지아 씨가 여기에 올 때마다 매일 아침 밥을 사 갔어요.”그 말을 들은 강지아는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서원준이 이쪽에 산다고?그녀가 해외에 간 후에도 여기에 와서 아침을 먹었다고?“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요?”강지아가 웃으며 말했다.“제 남자친구는 여기에 살지 않아요. 의사도 아니고요.”서준은 밀크티를 마시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온유한 씨가 남자친구가 아니에요?”“네?”강지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누구라고요?”“온유한 씨요. 화재 당일 밤에 같이 있었잖아요. 그날 여기서 구조하느라 밤새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지금 여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강지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그럼 조금 전 여기에 살면서 매일 아침 식사를 사 간 사람이 온유한이라고요?”“네.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에요. 명성 빌딩에 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서준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지아 씨, 설마 남자친구가 온유한이 아니에요?”그러
명성 빌딩에서 나온 강지아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차에 앉아 한창 쉬고 있을 때 온미정이 차를 마시자고 연락이 왔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미정은 이미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명성 빌딩에 갔다고?”온미정이 묻자 강지아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어떻게 아셨어요?”온미정이 말했다.“유한이가 알려줬어. 유한이가 명성 빌딩에 있어. 네가 놀랄까 봐 나더러 만나보라고 했어.”알고 보니 온유한은 집에 있었다.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괜찮아요.”강지아의 말에 온미정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청첩장은 잘 받았어. 꼭 갈게.”온미정은 강지아의 얼굴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시간이 정말 빠르네. 우리 지아가 시집갈 때가 다 되고 말이야. 우리가 가족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이니까.”강지아는 웃을 수 없었다.‘고마워요’라는 말도 목구멍에 걸려 한참 후에야 내뱉을 수 있었다.온미정이 강지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결혼식 준비 때문에 힘든 거야?”“조금요.”온미정의 말뜻을 강지아도 알아들었다.강지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온미정이 화제를 돌렸다.“너와 네 오빠 덕분에 온씨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강지아는 마음이 착잡했다.“별말씀을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온유한이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은 또다시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온미정도 이내 눈치를 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저녁에 서원준을 만났다.서원준은 그녀가 결혼 때문에 긴장해 할까 봐 밥을 먹은 뒤 영화까지 봤다.“오후에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던데. 형수님에게 물어 보니까 네가 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하더라고.”결혼 날짜가 확정된 이후로 서원준은 자연스럽게 강지찬과 정유진의 호칭을 불렀다. 강 대표님, 정 대표님 보다 훨씬 부드러웠다.서원준은 강지아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강지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요? 무슨 뜻이에요?”“온유한이 지아 씨의 말만 듣는다는 뜻이에요.”임유희의 말에 강지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아를 조용히 바라보는 임유희는 애원하는 눈치였지만 슬픈 기색은 별로 없었다.“강지아 씨가 온유한에게 우리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부탁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빠와 오빠도 약속했어요. 이번 한 번만 봐주면 계속 태안 그룹과 협력하고 두 번 다시 배신하지 않겠다고요.”임유희도 이 말을 하는 자신이 우스운 모양이었다.용서해 주면 계속 협력하겠다고?역시 뻔뻔한 임씨 가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온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하니 말이다.욕심을 부리지 않고 임유희를 온유한에게 기필코 시집보내겠다고 애를 쓰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런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임유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우습죠? 엄마와 오빠가 가라고 강요를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온 거예요. 엄마가 이틀 동안 밥도 안 먹었거든요. 내가 지아 씨를 만나러 오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몰라요.”강지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난 임유희 씨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굳이 사람 목숨으로 날 설득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온유한을 찾으러 가는 일 절대 없을 테니까.”“괜찮아요.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요.”“그럼 왜...”“그냥 혹시나 해서 온 거예요.”임유희는 강지아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서원준과 같이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온유한, 그 사람은 너무 무서운 사람이에요.”임유희는 강지아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전에 쓸데없는 망상을 하면서 두 사람의 감정에 끼어든 일,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죄송해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강지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돌아섰다.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었고 지금 사과하는 것도 너무 늦었다.이틀 뒤 임유희가 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들은 말에 의하면 계속 공부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다고 했다. 아마 엉망진창이 된 임씨 가문
강지아와 서원준의 결혼식 날, 날씨가 흐렸고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다.강지아에게 화장을 해주러 온 송민욱은 들어오자마자 불평했다.“강 대표, 정말 날은 기가 막히게 잡았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오면 어떻게 헤. 우리 예비 신부의 미모에 영향을 주잖아.”그러다가 강지아의 얼굴을 보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맙소사! 설마 어젯밤에 또 한숨도 못 잔 거야?”강지아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어이없는 듯 말했다.“어떡하죠?”송민욱이 하인에게 말했다.“저기 누구야, 계란을 몇 개 삶아서 아가씨 얼굴에 문질러줘. 시간이 얼마 없어서 나도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아.”강지아는 요 며칠 머리카락부터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관리했다. 피부가 희고 매끈해 손과 발 모두 뽀송뽀송했지만 잠을 못 자는 바람에 얼굴이 초췌했다.송민욱은 안달이 났다.“안 되겠어. 네 얼굴 화장 못 할 것 같아. 내 명성마저 나락 가게 생겼어.”겉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두 손으로 강지아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연구했다.“정말 화가 나. 이렇게 좋은 미모를 소중히 여기지 않다니! 너무해!”꼬박 세 시간이 지났고 강지아는 드디어 모든 스타일링을 완성했다.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 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늘 꿈꾸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었지만 마음은 전혀 들뜨지 않았다.강지찬과 정유진, 서원준이 계속하여 들어오는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서원준은 친척이 없기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 동료와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결혼식은 강씨 가문에서 주관하게 되었다.누군가 서원준에게 명문가에 시집가는 데 성공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서원준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강지아가 그녀와 함께하기로 선택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서원준은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마음대로 놀려, 난 상관없으니까.”서원준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다들 편히 있어. 난 신부 좀 보고 올게.”하지만 친구들이 가려는 서원준을 막았다.“보긴
화령이 녀석을 데리고 나가자 신부 대기실에는 강지아만 남게 되었다.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자 강지아는 화령이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직감적으로 고개를 돌린 강지아는 문 앞에 온유한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이 사람은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이지?강지아를 본 온유한은 넋이 나간 듯했다.제일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입고 곧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지아야, 정말 예쁘네.”강지아는 엉겁결에 몸을 뒤로 젖혔다.“왜... 여기에 온 거야?”온유한이 너무 화려하게 꾸며 하객으로 온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온 것 같았다.그는 양복 가슴 주머니에 빨간 장미 한 송이까지 꽂았다.“네가 여기에 있으니까 온 것이지.”온유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강지아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처음부터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였기에 뒤로 갈 자리가 없었고 이내 소파에 그대로 넘어졌다.바로 그때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온유한이 두 팔로 그녀를 소파 위에 가두었다.“지아야, 서원준과 결혼하지 마. 분명 후회할 거야.”너무 가까이 다가온 온유한에 강지아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온몸을 떨었다.“내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강지아가 이를 악물었다.“저리 가!”하지만 그럴수록 온유한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아니, 상관이 있어.”온유한은 강지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너는 꼭 나와 결혼해야 해.”“미쳤어?”강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유한을 쳐다보자 온유한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지아야, 잊었어? 유한 오빠의 신부가 되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이 말을 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그녀가 아플 때였다.당시 온유한과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던 강지아는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는 아름다운 장면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가 되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신랑은 반드시 온유한이어야 한다고 했다.“기억났어?”
강지아는 온유한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들을수록 익숙한 협박, 아마도 화령이 말썽꾸러기 아이를 혼내던 걸 엿들은 것 같다.“함부로 굴지 마. 우리는 이미 끝났어. 결혼할 리도 없어.”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에 땀이 차오른 강지아는 온유한을 노려보며 말했다.“더 이상 강요하지 마.”온유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자 강지아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향했다.온유한은 선이 선명한 입술로 그렇게 얇지 않은 편이었다. 오히려 강지찬 같은 입술이야말로 냉정하고 무정해 보였다.하지만 지금 온몸으로 풍기는 위험한 기운 때문에 강지아는 소름이 끼쳤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강지아는 등이 소파에 달라붙을 정도로 최대한 몸을 뒤로 젖혔다.심장은 격하게 뛰었고 손발은 점점 힘이 빠져갔다.서원준과 함께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널 가만히 내버려 두면? 다른 남자에게 가는 걸 지켜보라고? 그거야말로 날 죽이는 일이야.”말을 마친 온유한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이때 밖에서 서원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준비 다 됐어? 나 들어가도 돼?”서원준이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강지아는 온유한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지아야...”온유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좀 이따 서원준이 내 입술의 상처를 보면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래.”강지아는 어이가 없었다.“저리 가.”온유한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강지아의 입술을 살짝 닦았다.“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문밖에 있던 서원준이 문을 두드렸다.“지아야, 안에 있니? 문 열어줘, 지아야.”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서원준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강지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제야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든 서원준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갈 거야.”이
“유한 오빠, 소꿉놀이해요.”열여섯 살의 강지아는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모든 인형을 꺼내 거실에 가득 채워놓았다. 그 옆에 온유한이 한자리를 차지해 앉았고 자리가 없는 강지찬과 최의현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강지찬이 준 서류를 보던 온유한은 강지아의 말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래. 내가 뭘 하면 될까?”“오빠는 아빠이고 난 엄마야. 여기 있는 인형들은 우리 아이들이야.”‘아이’란 바로 분홍색 치마를 입고 줄지어 선 인형들이었다.고개를 든 온유한이 한 번 훑어본 후 말했다.“알았어.”최의현이 소리쳤다.“안 돼. 지아야, 너무 편파적이야. 유한이가 아빠이면 나는 뭔데?”“음...”한참 생각하던 강지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운전기사가 되어줘.”물을 마시던 최의현은 ‘운전기사’라는 말에 입안의 물을 내뿜었다.“뭐라고? 운전기사? 지아야, 너무 한 거 아니야? 나는 왜 운전기사인데?”“나와 유한 오빠의 아기가 너무 많아서 차 한 대에 다 탈 수 없으니까 운전기사가 필요해.”최의현이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유한이 입을 달싹이며 말했다.“지아의 말이 맞아. 나중에 월급 두둑이 챙겨 줄게.”최의현은 코웃음을 쳤다.“꺼져. 진짜인 것 같잖아!”그러고는 강지찬을 향해 말했다.“이 자식 좀 봐, 네 매제가 되려고 해.”입을 달싹인 온유한은 최의현을 상대하지 않았다. 강지찬은 바짓가랑이를 들어 올린 뒤 자연스럽게 카펫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혹시라도 강지아와 온유한의 ‘아이’들을 건드릴까 봐 행동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온유한은 강지아가 수만 번 시집가는 꿈을 꾼 유일한 남자였다.헤어진 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잊을 수 없었다.좋아하는 감정이 습관이 되어 독약처럼 뼈와 피에 녹아들었기에 우연히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익숙한 뒷모습에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그러면서 펑펑 울고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면 그 사람의 이름만 불렀다.그렇게 갑자기, 또 그렇게 늘 언제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붐비는 거리에서 오픈 스포츠카가 한 대가 신호 위반을 세 번씩이나 연이어 하며 차량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차를 가득 메운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흩어졌다.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차주는 너무 놀라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누군가가 머리를 내밀고 멀리 가는 스포츠카를 향해 소리쳤다.“이봐, 지금 도망가는 거야, 아니면 결혼하러 가는 거야?”차가 검은색 승용차를 스치고 지나가자 깜짝 놀란 강지아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멈춰, 당장 멈춰!”강지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온유한을 때렸다.“멈추라고! 온유한!”하지만 온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거의 다 왔어. 지아야.”“대체 어디로 가는 건데?”“결혼하러.”강지아는 이 인간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저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라니!“세워! 안 한다고!”“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온유한은 차의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핸들을 꽉 잡고 앞을 뚫어지게 바라봤다.그들은 결혼하러 가는 것이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기에 반드시 운전에 집중해야 했다.신호 위반을 한 것 외에 다른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차가 멈춰서자 강지아는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다.온유한은 그녀를 차에서 안아 내렸다.“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온유한이 웃으며 말했다.“지아야, 여기가 어딘지 한 번 봐봐.”고개를 들어 구청에 도착한 것을 본 강지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온유한, 여기는 왜 온 건데! 결혼 안 한다고! 내 말 안 들려?”온유한은 계속 웃으며 말했다.“지아야,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주네.”강지아는 멘붕이 올 지경이었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서원준은 어떻게 하라고 그래?”무덤덤한 표정의 온유한은 서원준의 이름 자체를 무시해 버렸다.“지아야, 그거 알아? 네 오빠와 새언니도 여기서 혼인신고 했어. 예전에는 네 오빠가 왜 네 새언니에게 그렇게까지 미쳐있나 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강지아는 몸부림치며 한마디 비꼬았다.“그래서 우리 오빠에게서
“곧 결혼식 시작해, 조금 전의 일은 잊고 얼른 가자.”서원준은 마음속의 분노를 최대한 억눌렀다. 지금 그에게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오늘 결혼식은 반드시 예정대로 진행해야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다.강지아가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정말 신경 안 쓸 자신 있어?”서원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신경 안 써.”“조금 전에 나보고 결혼하자고 했어. 혼인 신고도 하자고 했고. 본인하고만 결혼해야 한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 아니야. 더 미친 짓을 저질러 네 체면을 구길지도 몰라. 서원준,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나와 결혼할 거야?”서원준은 하마터면 욕을 내뱉을 뻔했다.“온유한이 미쳤네! 본인이 뭔데 널 귀찮게 하는 건데? 네가 그 사람들에게 시달려 해외로 도망쳐 치료를 받을 때 온유한은 뭘 했는데? 빌어먹을 인간!”서원준이 강지아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아야, 너는 어떤데? 설마 온유한과 같이 가고 싶은 거야?”서원준이 너무 꽉 껴안아서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그녀는 또 병이 났다.이번에는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난 것 같았다.최신애의 말대로 멍청할 뿐만 아니라 미치기까지 했다.최신애는 그녀를 더욱 싫어하게 될 것이다.해외에 있을 때는 서원준이 자주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그녀의 마음을 달래곤 했고 그녀를 데리고 정신과에도 갔다.예전에 껄렁거리고 그녀를 바보라고 부르며 늘 의기양양하던 남자가 점점 더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강지아는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못되게 구는 게 두렵진 않지만 반대로 너무 잘해주면 두려웠다.이 빚을 갚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아니.”강지아의 말에 서원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어. 지아야. 난 너만 있으면 돼. 너를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어.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온유한은 절대 우리 결혼식을 망치지 못해. 결혼은 반드시 할 것이니까.”강지아를 달랜 뒤 서원준은 호텔 경호원을
강지아는 온유한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들을수록 익숙한 협박, 아마도 화령이 말썽꾸러기 아이를 혼내던 걸 엿들은 것 같다.“함부로 굴지 마. 우리는 이미 끝났어. 결혼할 리도 없어.”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에 땀이 차오른 강지아는 온유한을 노려보며 말했다.“더 이상 강요하지 마.”온유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자 강지아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향했다.온유한은 선이 선명한 입술로 그렇게 얇지 않은 편이었다. 오히려 강지찬 같은 입술이야말로 냉정하고 무정해 보였다.하지만 지금 온몸으로 풍기는 위험한 기운 때문에 강지아는 소름이 끼쳤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강지아는 등이 소파에 달라붙을 정도로 최대한 몸을 뒤로 젖혔다.심장은 격하게 뛰었고 손발은 점점 힘이 빠져갔다.서원준과 함께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널 가만히 내버려 두면? 다른 남자에게 가는 걸 지켜보라고? 그거야말로 날 죽이는 일이야.”말을 마친 온유한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이때 밖에서 서원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준비 다 됐어? 나 들어가도 돼?”서원준이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강지아는 온유한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지아야...”온유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좀 이따 서원준이 내 입술의 상처를 보면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래.”강지아는 어이가 없었다.“저리 가.”온유한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강지아의 입술을 살짝 닦았다.“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문밖에 있던 서원준이 문을 두드렸다.“지아야, 안에 있니? 문 열어줘, 지아야.”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서원준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강지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제야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든 서원준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갈 거야.”이
화령이 녀석을 데리고 나가자 신부 대기실에는 강지아만 남게 되었다.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자 강지아는 화령이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직감적으로 고개를 돌린 강지아는 문 앞에 온유한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이 사람은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이지?강지아를 본 온유한은 넋이 나간 듯했다.제일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입고 곧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지아야, 정말 예쁘네.”강지아는 엉겁결에 몸을 뒤로 젖혔다.“왜... 여기에 온 거야?”온유한이 너무 화려하게 꾸며 하객으로 온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온 것 같았다.그는 양복 가슴 주머니에 빨간 장미 한 송이까지 꽂았다.“네가 여기에 있으니까 온 것이지.”온유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강지아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처음부터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였기에 뒤로 갈 자리가 없었고 이내 소파에 그대로 넘어졌다.바로 그때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온유한이 두 팔로 그녀를 소파 위에 가두었다.“지아야, 서원준과 결혼하지 마. 분명 후회할 거야.”너무 가까이 다가온 온유한에 강지아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온몸을 떨었다.“내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강지아가 이를 악물었다.“저리 가!”하지만 그럴수록 온유한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아니, 상관이 있어.”온유한은 강지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너는 꼭 나와 결혼해야 해.”“미쳤어?”강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유한을 쳐다보자 온유한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지아야, 잊었어? 유한 오빠의 신부가 되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이 말을 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그녀가 아플 때였다.당시 온유한과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던 강지아는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는 아름다운 장면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가 되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신랑은 반드시 온유한이어야 한다고 했다.“기억났어?”
강지아와 서원준의 결혼식 날, 날씨가 흐렸고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다.강지아에게 화장을 해주러 온 송민욱은 들어오자마자 불평했다.“강 대표, 정말 날은 기가 막히게 잡았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오면 어떻게 헤. 우리 예비 신부의 미모에 영향을 주잖아.”그러다가 강지아의 얼굴을 보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맙소사! 설마 어젯밤에 또 한숨도 못 잔 거야?”강지아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어이없는 듯 말했다.“어떡하죠?”송민욱이 하인에게 말했다.“저기 누구야, 계란을 몇 개 삶아서 아가씨 얼굴에 문질러줘. 시간이 얼마 없어서 나도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아.”강지아는 요 며칠 머리카락부터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관리했다. 피부가 희고 매끈해 손과 발 모두 뽀송뽀송했지만 잠을 못 자는 바람에 얼굴이 초췌했다.송민욱은 안달이 났다.“안 되겠어. 네 얼굴 화장 못 할 것 같아. 내 명성마저 나락 가게 생겼어.”겉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두 손으로 강지아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연구했다.“정말 화가 나. 이렇게 좋은 미모를 소중히 여기지 않다니! 너무해!”꼬박 세 시간이 지났고 강지아는 드디어 모든 스타일링을 완성했다.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 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늘 꿈꾸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었지만 마음은 전혀 들뜨지 않았다.강지찬과 정유진, 서원준이 계속하여 들어오는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서원준은 친척이 없기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 동료와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결혼식은 강씨 가문에서 주관하게 되었다.누군가 서원준에게 명문가에 시집가는 데 성공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서원준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강지아가 그녀와 함께하기로 선택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서원준은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마음대로 놀려, 난 상관없으니까.”서원준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다들 편히 있어. 난 신부 좀 보고 올게.”하지만 친구들이 가려는 서원준을 막았다.“보긴
강지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요? 무슨 뜻이에요?”“온유한이 지아 씨의 말만 듣는다는 뜻이에요.”임유희의 말에 강지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아를 조용히 바라보는 임유희는 애원하는 눈치였지만 슬픈 기색은 별로 없었다.“강지아 씨가 온유한에게 우리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부탁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빠와 오빠도 약속했어요. 이번 한 번만 봐주면 계속 태안 그룹과 협력하고 두 번 다시 배신하지 않겠다고요.”임유희도 이 말을 하는 자신이 우스운 모양이었다.용서해 주면 계속 협력하겠다고?역시 뻔뻔한 임씨 가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온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하니 말이다.욕심을 부리지 않고 임유희를 온유한에게 기필코 시집보내겠다고 애를 쓰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런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임유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우습죠? 엄마와 오빠가 가라고 강요를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온 거예요. 엄마가 이틀 동안 밥도 안 먹었거든요. 내가 지아 씨를 만나러 오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몰라요.”강지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난 임유희 씨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굳이 사람 목숨으로 날 설득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온유한을 찾으러 가는 일 절대 없을 테니까.”“괜찮아요.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요.”“그럼 왜...”“그냥 혹시나 해서 온 거예요.”임유희는 강지아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서원준과 같이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온유한, 그 사람은 너무 무서운 사람이에요.”임유희는 강지아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전에 쓸데없는 망상을 하면서 두 사람의 감정에 끼어든 일,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죄송해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강지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돌아섰다.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었고 지금 사과하는 것도 너무 늦었다.이틀 뒤 임유희가 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들은 말에 의하면 계속 공부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다고 했다. 아마 엉망진창이 된 임씨 가문
명성 빌딩에서 나온 강지아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차에 앉아 한창 쉬고 있을 때 온미정이 차를 마시자고 연락이 왔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미정은 이미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명성 빌딩에 갔다고?”온미정이 묻자 강지아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어떻게 아셨어요?”온미정이 말했다.“유한이가 알려줬어. 유한이가 명성 빌딩에 있어. 네가 놀랄까 봐 나더러 만나보라고 했어.”알고 보니 온유한은 집에 있었다.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괜찮아요.”강지아의 말에 온미정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청첩장은 잘 받았어. 꼭 갈게.”온미정은 강지아의 얼굴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시간이 정말 빠르네. 우리 지아가 시집갈 때가 다 되고 말이야. 우리가 가족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이니까.”강지아는 웃을 수 없었다.‘고마워요’라는 말도 목구멍에 걸려 한참 후에야 내뱉을 수 있었다.온미정이 강지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결혼식 준비 때문에 힘든 거야?”“조금요.”온미정의 말뜻을 강지아도 알아들었다.강지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온미정이 화제를 돌렸다.“너와 네 오빠 덕분에 온씨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강지아는 마음이 착잡했다.“별말씀을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온유한이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은 또다시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온미정도 이내 눈치를 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저녁에 서원준을 만났다.서원준은 그녀가 결혼 때문에 긴장해 할까 봐 밥을 먹은 뒤 영화까지 봤다.“오후에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던데. 형수님에게 물어 보니까 네가 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하더라고.”결혼 날짜가 확정된 이후로 서원준은 자연스럽게 강지찬과 정유진의 호칭을 불렀다. 강 대표님, 정 대표님 보다 훨씬 부드러웠다.서원준은 강지아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강지아는 서원준이 프러포즈 할 때 줬던 반지를 찾으러 명성 빌딩에 갔다.아래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고 작업자들 또한 외벽을 청소하거나 수리하고 있었다.“강지아 씨, 왜 이제야 돌아온 거예요?”돌아서 보니 하얀 티셔츠에 밀크티 한 잔을 든 낯익은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누구...”“저는 저기...”남자가 아침 식사 가게 위치를 가리켰다.“종업원이에요. 제 이름은 서준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강지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오늘 스타일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어요. 죄송해요.”“아니에요.”서준은 수다쟁이였다.“왜 혼자예요? 남자친구와는 같이 오지 않았나요?”“남자친구는 여기에 살지 않아요.”그러자 서준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아닌데... 남자친구가 계속 여기에 살았잖아요. 전에 해외에 간 후에도 여기 자주 와서 머물렀어요. 우리 가게에 와서 아침도 먹었어요. 강지아 씨가 우리 가게의 죽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 후로 강지아 씨가 여기에 올 때마다 매일 아침 밥을 사 갔어요.”그 말을 들은 강지아는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서원준이 이쪽에 산다고?그녀가 해외에 간 후에도 여기에 와서 아침을 먹었다고?“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요?”강지아가 웃으며 말했다.“제 남자친구는 여기에 살지 않아요. 의사도 아니고요.”서준은 밀크티를 마시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온유한 씨가 남자친구가 아니에요?”“네?”강지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누구라고요?”“온유한 씨요. 화재 당일 밤에 같이 있었잖아요. 그날 여기서 구조하느라 밤새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지금 여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강지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그럼 조금 전 여기에 살면서 매일 아침 식사를 사 간 사람이 온유한이라고요?”“네.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에요. 명성 빌딩에 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서준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지아 씨, 설마 남자친구가 온유한이 아니에요?”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