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정유진은 천천히 안정을 찾았다.“이상하네. 입덧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졸리고 피곤한 느낌도 없었고.”조예원이 말했다.정유진도 그게 무척 궁금했다.전에 한빈과 결혼까지 갈 뻔했지만 아이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그녀는 운명이 자신에게 큰 장난을 쳤다는 느낌이 들었다.조예원은 따뜻한 물을 받아 그녀에게 건넸다.“먹고 싶은 거 없어? 만두라도 데워줄까?”정유진은 입맛이 없어 고개만 저었다.조예원은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진아, 혹시 강 대표님한테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유진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말하면 안 돼!”너무 격한 반응에 오히려 조예원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아줌마한테는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정유진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니, 알리지 않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속을 썩이시는데 이건 나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야.”조예원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진료 볼 때 나랑 같이 가자.”정유진은 침대로 돌아가서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조예원이 인터넷으로 병원을 검색하며 말했다.“내일이랑 모레는 예약이 꽉 찾네. 3일 뒤나 돼야 예약이 가능할 것 같아.”정유진은 강지현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뒤로 좀 미루자. 일단 강지현 씨 의뢰건이 더 중요해.”조예원이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넌 지금 이 상황에서 일 얘기가 나와?”정유진은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어떡해? 생계는 계속 이어가야지.”조예원이 말했다.“어차피 이번에 강지찬이랑 크게 다퉜으니까 그쪽에서 계약 파기하겠다고 나오면 그러자고 해. 나도 이제 그 인간 비위 맞춰주는 거 싫어.”정유진의 얼굴이 암담하게 변했다.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그녀는 강지찬이나 한빈과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조예원을 따라 나갔다가 놓쳐버린 강지찬은 한바퀴 돌다가 다시 예담 스튜디오로 돌아왔다.“정유진 씨 아직도 안 돌
한편, 정유진은 침대에서 조예원과 키키가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었다.잠시 후, 조예원이 만두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강지찬이 앞으로 더는 너 귀찮게 하지 않을 거래.”정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조예원이 다가와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여기 계란찜도 있어.”정유진은 친구의 성의를 거절하기 미안해서 억지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부드럽고 촉촉한 계란찜은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정유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나도 우리 엄마아빠한테는 곱게 키운 딸인데 왜 그 자식들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그녀는 스스로를 아주 강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나이도 젊고 스스로 일어설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어렸을 때, 연애 한번 실패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이렇게 질질 끌려다닐 줄은 몰랐다.강지찬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는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 힘들었다.정유진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우리 부모님이 아시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몰라.”조예원은 하필 계란찜을 만들어서 친구를 울린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계란찜은 정유진이 엄마가 해준 반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울지 마. 아줌마한테는 비밀로 하면 되잖아.”조예원은 다가가서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중에 너 수술하면 우리 엄마를 불러서 널 돌봐주라고 할게. 넌 집에서 푹 쉬고 건강을 회복하는데만 신경 써.”한빈이 정유진을 그런 식으로 배신했을 때도 정유진은 울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한 새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지금, 정유진은 속절없이 무너졌다.조예원도 친구에게 이런 상처를 준 강지찬이 미웠다.“유진아, 겁낼 거 없어.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했다.“지식백과에 알아봤는데 요즘은 수술하는데 전혀 아프지 않대.”“진짜?”정유진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물었다.“진짜라니까? 이거 봐.”조금 안정을 찾은 뒤, 정유진은 그제야 시름 놓고
여자는 강지찬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한잔 따랐다.옆에서 흥을 돋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안나 씨, 우리 대표님은 원래 여색을 멀리하는 분이에요. 술집 출입도 한 달에 한번이면 많이 하는 거라고요.”“그래도 안나 씨가 직접 따라준 술인데 마시겠죠?”“안나 씨, 러브샷은 어때요?”강지찬은 얼굴이 싸늘하게 식은 채로 시끄럽게 떠드는 옆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그는 시종일관 안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최의현이 다가와서 그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안나는 조 대표가 요즘 띄워주고 있는 여배우야. 요즘 인기가 많다고 하더라고. 조 대표가 저 여자를 위해 영화 제작에 투자한다고 하던데 저 여자는 네 지갑에 더 흥미가 많은가 봐.”강지찬은 안나가 건넨 술잔은 쳐다보지도 않고 술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술잔을 들고 있던 안나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눈치도 없이 떠들었다.“역시 우리 강 대표님은 곁을 안 주시네요.”“대체 어떤 여자면 우리 강 대표님의 눈에 들 수 있을지 궁금해요.”강지찬은 주변 남자들의 소리를 무시하고는 술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오늘은 내가 다 살 테니 마음껏 마셔.”말을 마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바로 나가버렸다.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그는 당장이라도 그 오만한 여자를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다.“강 대표님!”안나가 뒤에서 쫓아왔다.“강 대표님, 잠깐만요!”그녀는 얼른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팔목을 잡았다.걸음을 멈춘 남자가 순식간에 손을 뻗어 그녀의 숨통을 움켜쥐었다.그리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그녀를 벽으로 패대기쳤다.강지찬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며 물었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안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물러서기엔 남자의 기백과 핸섬한 외모가 너무 유혹적이었다.신이 내린 이목구비와 강력한
차에 오른 강지찬이 명령했다.“집으로 가자.”하지만 안나가 입고 있던 붉은 드레스가 자꾸 떠올라서 치미는 짜증을 주체할 수 없었다.“아니다. 예담으로 가.”예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창문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대표님,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네요.”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강지찬이 눈을 떴다. 그냥 한번 와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정유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어제 더 이상 귀찮게 안 하겠다고 말해놓고 하루만에 다시 찾아오는 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불 켜진 창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너무 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부만 야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30분이 지나도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야근하는 것으로 보아 야근하는 사람이 정유정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상사가 말이 없자 장형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대표님, 안 들어가세요?”강지찬은 침묵으로 일관했다.또 몇 분이 지나고 드디어 예담 스튜디오의 전등이 꺼졌다.“대표님, 정유진 씨 나오시네요.”고개를 돌리자 문단속을 하는 정유진의 모습이 보였다.하얀색 원피스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가녀렸다.강지찬은 미동도 않고 여자가 자신의 차를 지나쳐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대표님, 정유진 씨 차를 안 가지고 나온 것 같네요.”정유진이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 앞에 멈춰섰을 때에야 강지찬은 차에서 내렸다.그는 멀리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더니 피곤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 보였다.고개를 들자 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추었다.그는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강지찬은 평소에 흡연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만 가끔 한 개비씩 꺼내서 피웠다.그만큼 그가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오늘은 술도 마셨고 말이 격해질 수도 있으니 일단
너무 진실해서 무시할 수 없는 꿈이었다.그녀는 꿈에서 한 어린 소녀를 만났다. 곱슬머리에 통통한 볼이 너무 사랑스러운 소녀였다.어린 소녀는 예쁜 공주 드레스를 입고 포동포동한 손을 그녀에게 뻗으며 달려오고 있었다.별을 닮은 아이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고 목소리마저 너무 앳되고 사랑스러웠다.“엄마, 안아줘.”정유진은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취해 얼른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자마자 소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눈을 뜨자 이미 아침이었다.그녀는 두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회사에 도착하자 그녀의 얼굴을 본 조예원이 화들짝 놀랐다.“너 어제 저녁에 술 마셨어? 왜 얼굴이 그렇게 퀭해? 설마 또 야근했어?”정유진은 말하고 싶지 않아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 꿈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갑갑했다.“아침은 먹었어? 뭐 먹을래? 내가 사줄게.”“입맛 없어.”“입맛 없어도 먹어야지. 몸 상태도 안 좋은데 끼니를 자꾸 거르면 어떡해?”조예원이 핸드폰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내가 나가서 죽이라도 좀 사올게. 아침은 무조건 먹어야 해.”정유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자리로 가서 노트북을 열고 검색창에 꿈 해몽을 검색했다.그리고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임산부가 소녀가 나오는 꿈을 꾸면 이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임산부가 소녀 꿈을 꾸면 산모가 딸 아이를 원한다는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정유진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이 아이가 딸일 수도 있다고?꿈에서 봤던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강지아가 떠올랐다.어쩐지 둘이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그녀는 오전 내내 정신이 딴데 팔려 잔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그래도 옆에 키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오늘 많이 덥네.”조예원이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말했다.“나 시공 현장에 나갔다가 한 부장 만났어.”정유진이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계약 파기건은 잘 얘기했어?”조예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아니, 아무 말 없
강지현은 예산안을 보고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않았다.그는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하고 계약금을 지불했다.상록수 별장의 시공 현장은 정유진이 직접 감독하기로 했다. 이런 호화 별장을 인테리어하는데 디자이너가 빠질 수 없었다.그녀가 직접 관리 감독한다는 얘기에 강지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힐끗 보고 말했다.“괜찮겠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정유진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기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저는 감독만 할 거고 일은 작업자들이 해야죠.”강지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우리 따로 얘기 좀 할래요?”정유진은 그를 사무실로 안내했다.그녀가 차를 내오려 하자 강지현이 그녀를 막아섰다.“차는 됐으니 이리 와서 앉아봐요.”사실 두 사람은 그리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없었다. 별장 인테리어를 그녀에게 맡긴 것 외에 유일한 공통 화제가 강지찬과 강지아였다.“저한테 따로 하실 말씀이 뭐예요?”정유진이 물었다.강지현도 뜸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정말 형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에요?”정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이랑 상관없는 일이에요.”강지현은 왜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한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겉보기에 참 나약해 보이지만 속은 강한 사람이었다.이런 여자는 사람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현이 말했다.“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에요?”정유진이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지워야겠죠.”좋아하는 남자도 아닌데 그의 아이를 낳아서 키울 생각은 없었다.“나한테는 내 인생이 더 중요해요. 처음부터 원했던 아이도 아니니 낳을 이유가 없죠.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이게 맞아요.”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서글펐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꿈에서 봤던 소녀가 또 떠올랐다.안아달라고 말하던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정유진은 원래 귀엽고 사랑스러운 개체에 약했다. 그래서 최근 밤에 고민도 많이 했고 많이 힘들었다.하지만 이성이 결국 감성을 이겼다.그녀는 이 아이를 낳아서 키울
초음파실에서 나온 정유진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조예원은 초음파 결과지를 받았지만 하나도 알아볼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이 시커먼 점이 아기야? 아기집이 생겼으면 벌써 이미 새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네?”정유진은 차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녀가 구슬피 말했다.“아기집이 생겼다는 건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대.”“좀 신기하긴 하네.”조예원이 말했다.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어차피 지울 아이였기에 더 말해 봐야 슬픔만 가중시킬 뿐이었다.이때, 초음파실 문이 열리고 소희가 나왔다.그녀는 비교적 박시한 면티를 입고 있었는데 아랫배가 부풀어 있었다.정유진을 발견한 소희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초음파 결과지에 닿았다.“여기서 뭐해?”조예원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소희를 흘기며 말했다.“당연히 검사하러 왔지. 설마 병원에 구경 왔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정유진의 손을 잡고 뒤돌아섰다.소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정유진, 너 설마 임신했어?”정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조예원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그냥 정기검진 받으러 온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비꼬는 듯한 시선으로 소희를 노려봤다.“배가 불룩 나온 걸 보니 임신한 모양이네? 그런데 한빈 그 자식이 책임지기 싫대? 어쩌나? 우린 둘 결혼식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인데 청첩장은 꼭 보낼 거지?”그 말에 소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그녀도 결혼이 하고 싶었다.하지만 한빈은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라며 재기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강지찬 쪽에서는 아직 그들을 놓아준다고 말한 적 없는데 이 도시에서 어떻게 재기가 가능할까?물론 소희도 비웃음을 듣고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걱정 마. 청첩장은 보낼 테니까.”그녀는 정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미안해, 유진아. 난 또 너도 임신한 줄 알았지.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나이도 어린데 지금 임신하면 곤란
조예원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역시 남자들은 다 개자식이야. 너한테 그렇게 집착하더니 뒤에서는 여배우를 만나고 있었어?”“그 여자 나 웹드라마에서 봤어. 화장 두텁게 하고 조명빨이더만. 너에 비하면 일반인 수준이야.”정유진은 용기를 내서 초음파 결과지를 들여다보았다.그녀의 덤덤한 모습에 조예원은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너는 화도 안 나?”“화날 게 뭐가 있어?”정유진이 담담히 말했다.“강지찬이랑 나는 고작 원나잇 한번 한 관계에 지나지 않아. 난 한 번도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날 좋아해서 따라다닌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날 저녁에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아봤거든. 강지찬이나 한빈이나 똑 같은 부류야.”말을 마친 그녀는 초음파 결과지를 들고 의사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각종 수치 모두 정상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정유진이 아이를 지우겠다고 하자 의사는 바로 수술 예약을 잡아주었다.차로 돌아오자 조예원의 잔소리 폭탄이 시작되었다.“엄마가 그러는데 수술한 뒤에 회복 기간을 가져야 한대. 일주일 동안 샤워도 하지 말고 3개월 안에는 무거운 거 들지 말라고 했어.”“일주일 뒤에 수술이라고 했지? 다행히 상록수 별장은 시공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일단은 키키한테 맡기고 너는 푹 쉬어.”“뭐 먹고 싶어? 그래도 입덧이 없어서 다행이다. 설마 딸은 아니겠지?”말을 마친 조예원은 바로 후회했다.괜한 말을 한 게 너무 미안했다.정유진이 말했다.“전에 꿈을 꾼 적 있는데 꿈에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애가 나한테 엄마라고 하더라.”순간 조예원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거 태몽 아니야? 설마 진짜 딸일까? 네 외모를 닮았으면 엄청 사랑스러울 것 같아!”신호등에 맞춰 차를 세운 조예원은 고개를 돌려 정유진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약해지면 안 돼. 애는 나중에 결혼하고 낳아도 되잖아.”정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소희의 말은 그녀에게 그 어떤 영향도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