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음파실에서 나온 정유진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조예원은 초음파 결과지를 받았지만 하나도 알아볼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이 시커먼 점이 아기야? 아기집이 생겼으면 벌써 이미 새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네?”정유진은 차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녀가 구슬피 말했다.“아기집이 생겼다는 건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대.”“좀 신기하긴 하네.”조예원이 말했다.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어차피 지울 아이였기에 더 말해 봐야 슬픔만 가중시킬 뿐이었다.이때, 초음파실 문이 열리고 소희가 나왔다.그녀는 비교적 박시한 면티를 입고 있었는데 아랫배가 부풀어 있었다.정유진을 발견한 소희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초음파 결과지에 닿았다.“여기서 뭐해?”조예원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소희를 흘기며 말했다.“당연히 검사하러 왔지. 설마 병원에 구경 왔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정유진의 손을 잡고 뒤돌아섰다.소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정유진, 너 설마 임신했어?”정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조예원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그냥 정기검진 받으러 온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비꼬는 듯한 시선으로 소희를 노려봤다.“배가 불룩 나온 걸 보니 임신한 모양이네? 그런데 한빈 그 자식이 책임지기 싫대? 어쩌나? 우린 둘 결혼식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인데 청첩장은 꼭 보낼 거지?”그 말에 소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그녀도 결혼이 하고 싶었다.하지만 한빈은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라며 재기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강지찬 쪽에서는 아직 그들을 놓아준다고 말한 적 없는데 이 도시에서 어떻게 재기가 가능할까?물론 소희도 비웃음을 듣고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걱정 마. 청첩장은 보낼 테니까.”그녀는 정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미안해, 유진아. 난 또 너도 임신한 줄 알았지.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나이도 어린데 지금 임신하면 곤란
조예원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역시 남자들은 다 개자식이야. 너한테 그렇게 집착하더니 뒤에서는 여배우를 만나고 있었어?”“그 여자 나 웹드라마에서 봤어. 화장 두텁게 하고 조명빨이더만. 너에 비하면 일반인 수준이야.”정유진은 용기를 내서 초음파 결과지를 들여다보았다.그녀의 덤덤한 모습에 조예원은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너는 화도 안 나?”“화날 게 뭐가 있어?”정유진이 담담히 말했다.“강지찬이랑 나는 고작 원나잇 한번 한 관계에 지나지 않아. 난 한 번도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날 좋아해서 따라다닌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날 저녁에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아봤거든. 강지찬이나 한빈이나 똑 같은 부류야.”말을 마친 그녀는 초음파 결과지를 들고 의사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각종 수치 모두 정상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정유진이 아이를 지우겠다고 하자 의사는 바로 수술 예약을 잡아주었다.차로 돌아오자 조예원의 잔소리 폭탄이 시작되었다.“엄마가 그러는데 수술한 뒤에 회복 기간을 가져야 한대. 일주일 동안 샤워도 하지 말고 3개월 안에는 무거운 거 들지 말라고 했어.”“일주일 뒤에 수술이라고 했지? 다행히 상록수 별장은 시공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일단은 키키한테 맡기고 너는 푹 쉬어.”“뭐 먹고 싶어? 그래도 입덧이 없어서 다행이다. 설마 딸은 아니겠지?”말을 마친 조예원은 바로 후회했다.괜한 말을 한 게 너무 미안했다.정유진이 말했다.“전에 꿈을 꾼 적 있는데 꿈에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애가 나한테 엄마라고 하더라.”순간 조예원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거 태몽 아니야? 설마 진짜 딸일까? 네 외모를 닮았으면 엄청 사랑스러울 것 같아!”신호등에 맞춰 차를 세운 조예원은 고개를 돌려 정유진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약해지면 안 돼. 애는 나중에 결혼하고 낳아도 되잖아.”정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소희의 말은 그녀에게 그 어떤 영향도
한빈은 그녀의 긴장한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녀와 오랜 시간 교제해온 사람으로서 한빈은 정유진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화려한 외모와는 다르게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자란 환경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사실 한빈은 진심으로 정유진이 좋았다. 예쁜 여자친구와 밖에 나가면 자신의 체면도 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하지만 외모와는 다르게 고집스럽고 단순한 성격 때문에 어쩌다 보니 자꾸 그녀를 속이게 되었다.그는 정유진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강지찬은 이 일을 모를 거라 확신했다.둘이 헤어진 걸까?그게 아니라면 임신한 사실을 강지찬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그는 인터넷에 떠도는 강지찬과 여배우의 사진을 보며 거의 확신했다.“유진아, 설마 너 강 대표 모르게 아이를 낳아서 키울 생각은 아니지?”한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유진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내 일에 관심도 갖지 말고 간섭하지도 마.”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한빈이 다급히 소리쳤다.“유진아, 잠깐만 끊지 말아봐! 내가 너 도와줄 수 있어!”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도움?정유진은 애초에 도움이 필요 없었다.저녁 회의를 마치고 그녀는 사무실에 남아 야근했다.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문단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남자 때문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한빈임을 알아본 정유진은 말도 걸지 않고 그를 지나치려 했다.한빈은 제딴에는 정장에 셔츠까지 갖춰 입고 그녀를 찾아왔다.그는 자신을 지나치는 정유진의 손을 붙잡았다.정유진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그의 손을 떨쳐내며 말했다.“내 몸에 손 대지 마!”한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최근 빠듯한 일정과 임신으로 인한 감정기복 때문에 그녀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한빈은 지금도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 캠퍼스 퀸이었던 정유진을 여자친구로 만
정유진은 한빈의 추한 본모습에 대해 이미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추악한 면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한빈, 넌 사람들이 다 너처럼 더럽고 졸렬하다고 생각하나 봐?”한빈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는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정유진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유진아, 우리 속 터놓고 얘기하는 게 어때? 나 진심이야. 생각해 봐. 너 강지찬 아이를 임신했잖아. 이게 뭐겠어? 네가 한번에 인생 역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정유진이 참지 못하고 냉소를 지었다.“한빈, 넌 소희 뱃속에 있는 네 아이나 걱정해. 그리고 대화 끝났으니까 비켜.”한빈은 그녀와 대화가 통하지 않자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정유진, 너 임신한 거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정유진이 순간 움찔했다.“한빈, 대체 원하는 게 뭐야?”한빈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봐. 널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네 약점에 대해서도 다 알아. 그런데 어찌 내가 널 사랑한 적 없다고 하겠어?”강지찬은 타다 만 담배를 비벼서 껐다.그의 각도에서 보면 한빈이 정유진에게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아마 한빈은 지금쯤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을 것이다.오늘 그는 홀로 차를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다.그는 운전대를 꽉 잡고 애써 치미는 분노를 삼켰다.정유진은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한빈은 분명 무슨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을 터였다.대체 이 인간은 뭘 원하는 걸까?강지찬 때문에 회사가 망한 거?그녀가 말이 없자 한빈은 점점 조바심이 났다.“유진아, 넌 어쩜 점점 더 예뻐지냐.”그의 목소리에서 유감이 묻어났다.정유진이 황당한 눈길로 바라보자 한빈이 한숨을 쉬며 계속해서 말했다.“나도 네 부모님 가지고 널 협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한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그는 계속해서 정유진의 이름을 불러댔다.화가 치밀대로 치민 정유진이 고함쳤다.“꺼져! 나에게서 떨어지라고!”그녀는 힘껏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온몸이 떨리고 다리에서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이대로 가다가는 한빈에게 끌려가고 말 것 같았다.그녀가 큰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한빈을 거칠게 떼어냈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한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정유진은 예고도 없이 나타난 강지찬을 보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강지찬은 분노에 찬 얼굴로 다가와서 한빈의 입술이 닿았던 그녀의 목덜미를 힘껏 닦았다.손길이 너무 거칠어서 피부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그는 그녀의 입술을 힘껏 노려보더니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버렸다.정유진이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당황한 사이, 입술에서 알싸한 통증이 전해졌다.그러나 그 느낌도 잠시 속에서 무언가가 역류하는 느낌이 올라왔다.그녀는 강지찬을 힘껏 밀치고 화단으로 달려가서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강지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키스 좀 했다고 바로 토하다니!내가 그렇게도 싫었던 걸까?바닥에 쓰러졌던 한빈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강지찬을 알아보고 생각을 굴렸다.강지찬이 왜 여기 나타난 거지?둘이 헤어진 거 아니었나?설마 미련이 남아서 다시 찾아온 걸까?강지찬은 그대로 다가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남자는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처럼 살기를 번뜩이며 말했다.“감히 내 여자한테 더러운 입술을 비벼대?”당황한 한빈이 다급히 말했다.“오해세요, 강 대표님. 유진이가 저를 불러서 온 거예요.”‘한빈 저 새끼가!’옆에서 위액을 게워내던 정유진은 그 말을 듣고 버럭 화가 치밀었지만 그들과 싸울 힘도 없었다.먹은 걸 모두 게워냈지만 울렁거리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정유진이 불러서 왔다고?”강지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유진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강지찬이 물었다.“나랑 입술 박치기 한번 했다고 그렇게 토할 일인가요?”정유진은 그가 오해했다는 걸 알면서도 해명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그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속은 계속 울렁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강지찬은 그녀의 무감각한 태도에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이처럼 그를 화나게 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화를 억누르며 다가가서 그녀에게 생수를 건넸다.아까 토하느라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냈으니 분명 목이 탈 것이다.강지찬은 음침한 얼굴로 계속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고마워요.”그녀가 생수병을 받으며 말했다.강지찬이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나한테는 그토록 매몰차게 대하더니 전 남자친구한테는 거절도 잘 못하던데요?”정유진이 덤덤히 말했다.“다른 일 없죠? 없으면 돌아가세요.”그녀는 지금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강지훈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 주제를 모르는 여자야! 내가 그렇게 귀찮았어? 아니면 남자친구랑 다시 잘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나타나서 방해한 건가?”정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울렸다.그녀는 허벅지를 꽉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왜 그래요?”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강지찬이 표정을 바꾸고 다가와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정유진은 격하게 그를 뿌리치며 소리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강지찬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여자의 눈빛에는 온갖 혐오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 모습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정유진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입술마저 파르르 떨리고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맞아요. 난 당신이 역겨워요. 당신도 역겹고 한빈도 역겨워요!”“한빈이랑 다시 잘해보려 했다고요? 당신 눈에는 내가 그런 여자로 보이나 봐요? 멍청하고 나약하고 줏대 없는 여자?”“강지찬 씨,
강지찬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왜 앞도 안 보고 걸어요? 대체 당신 머리에는 뭐가 들어찬 거야!”정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다쳤잖아요. 많이 아파요?”“죽을 정도는 아니네요.”강지찬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만약 그대로 멍하니 가다가 다쳤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뭐라고 욕해주고 싶지만 긴장해서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 여자가 언제 이렇게 나를 걱정해 준 적 있었나?과정이 어찌됐건 그 사실 하나로 기분이 좋았다.“병원부터 가요.”정유진은 핸드백에서 차키를 꺼냈다. 강지찬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조금 스친 것 가지고 병원은 무슨!”그는 자신의 말투가 매우 거칠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원래도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회사에서는 냉철한 대표님 이미지를 유지하느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정유진을 만날 때만 말이 많아졌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처럼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강지찬은 자신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예전이었다면 정유진이 욕설을 퍼붓고 돌아섰을 때 달려가서 귀뺨이라도 날렸을 것이다.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말투가 누그러졌다.“집에 의약품 상자 있죠? 소독하고 싸매기만 하면 돼요.”정유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의약품 상자는 당연히 구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 공사 현장에 자주 나가기 때문에 잔 상처가 많았다.하지만 강지찬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 가요.”“나 과다출혈로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강지찬이 고집을 부렸다.정유진은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강지찬이 손을 놓자 길쭉한 상처에서 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다.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사람이 왜 그렇게 양심이 없어요? 설마 내가 이 상태로 무슨 짓을 할까 봐 그래요?”정유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근처에 작은 진료소 있어요. 거기로 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디퓨저향이 풍겨왔다.정유진은 삶의 질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다.일 잘하고 똑똑한데다가 외모까지 겸비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에게 한번 빠졌던 남자는 절대 헤어나올 수 없었다.“신발 벗고 들어오시면 돼요.”강지찬은 그대로 소파로 다가가서 털썩 주저앉았다.정유진은 의약품 상자와 깨끗한 수건을 가져왔다.“일단 겉옷을 좀 벗어야 할 것 같은데요?”정유진은 필요한 것들을 테이블에 꺼내놓으며 말했다.강지찬은 단추를 풀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물었다.“여기 혼자 살아요?”정유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말은 부모님이랑 같이 안 살아요?”정유진이 답했다.“엄마는 원래 살던 집이 좋대요. 주변 이웃들이랑도 친하고.”강지찬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셔츠를 벗었다.팔뚝에 5cm정도의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이제 피는 흐르지 않지만 주변에 응고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일단 핏자국부터 닦아내야겠어요.”“별로 안 아프니까 마음대로 해요.”정유정은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항상 자기중심적이고 성격도 거친 이 남자에게 처음부터 호감이 없었다.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빤히 쳐다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정유진은 만약 자신이 당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다행히 그 시간에 강지찬이 나서줘서 다행이었다.소독약이 쓰렸는지 강지찬이 움찔하며 팔을 살짝 떨었다.정유진도 멈칫하며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응고된 핏자국을 닦아내자 깊게 찢어진 상처가 그대로 드러났다.“안 아프니까 하던 거 해요.”강지찬은 손으로 무릎을 짚고 앉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팔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상처를 닦아내니 또 피가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속전속결로 상처를 싸매야 했다.“조금만 참아요. 곧 끝낼게요.”정유진이 말했다.“아프면 소리 질러도 돼요.”강지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