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변호사 사무소에서 나오자 정유진은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을 뻔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 약혼남 사건은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강 씨 가문과 연관이 돼 있는 한 서울 그 어디에도 이 사건을 맡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미리 치른 선금까지 그대로 돌려주겠다며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유진을 깊은 심연으로 빠트렸다.유진과 약혼남 한빈은 대학교 시절부터 만나온 사이였다. 한빈의 사업을 옆에서 지지해주며 드디어 회사를 어느 정도 규모로 키워냈고 둘의 결혼도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시점에 누군가가 회사의 자금 운용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고 한빈은 검찰에 소환된 채 회사 역시 록다운 상태가 되었다.그들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행복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후 세력은 강 씨 가문이었다.서울에서 제일가는 재벌에 기침 한 번이면 서울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강 씨 가문이었다.유진은 차를 끌고 한빈을 만나러 구치소로 향했다. 며칠을 잠조차 제대로 못 잔 듯 퀭했고 수염마저 거뭇거뭇한 것이 전에 보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을 보자마자 한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때, 유진아? 변호사는 뭐라고 했어?”유진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변호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거짓말하지 마!” 한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강 씨 가문이 꾸민 일이야, 온 서울에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는 거 맞지?”한빈이 눈치챌 줄 몰랐던 유진은 어쩔 수 없이 답했다.“... 변호사가 선금을 모두 돌려줬어. 강 씨 가문을 건드리는 사건이라고…”한빈이 큰 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강 씨 가문이 일부러 그런 거야. 우리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의도적으로 날 함정이 빠트린 거지. 유진아 날 믿어줘, 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자금 세탁 같은 일을 하겠어?”유진이 답을 주기도 전에 한빈이 급하게 덧붙였다.“날 구할 방법이 하나 있어. 네 도
모든 사람이 강지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약혼자?” 강지찬은 잠시 생각하다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누구죠?”강지찬의 시선이 빤히 유진의 얼굴에 머물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한빈 씨요.”강지찬은 이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상위 포식자 같은 압박감에 유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은 그녀의 몇 마디 사정에 쉽게 먹잇감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정유진은 용기를 내 강지찬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제 예비 신랑을 놔주신다면 뭐든 할게요.”누군가가 피식 비웃었다.“혼자 드라마 찍네. 뭐든 하겠다니, 제까짓 게 대표님한테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그냥 꺼져버리지, 여기서 흥이나 깨고 있지 말고. 대표님이 구구절절 매달리는 여자를 제일 싫어하는 거 모르나 봐?”그때, 예상밖에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더는 마시고 싶지 않네요.”추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이 술들 다 마셔줘요.”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정유진 같은 여자는 일찌감치 내쫓았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 강지찬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유진이 테이블을 확인하자 역시나 손도 대지 않은 몇 병의 양주가 놓여있었다.이걸 다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위에 출혈이라도 생기겠지?하지만 7년 동안 사랑한 약혼자를 생각하며 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강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이 술을 다 마시면 그이는 봐주시는 건가요?”“그러죠.”모두의 경악한 눈빛 속에서 정유진은 술병을 움켜쥐고 들이붓기 시작했다.강지찬의 차디찬 눈빛이 언뜻 흔들렸다. 유진이 진짜로 마실 줄 생각지 못한듯했다.그 남자가 뭐라고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뛰어드는지, 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일까?쉬지 않고 들이붓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강지찬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잠에서 깨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유진은 갑자기 한 대 맞은 듯 그대로 멍해졌다.그녀의 시선이 벌거벗은 가슴팍과 마주쳤고 그대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충격에 휩싸였다.강지찬이었다.아려오는 몸이 어제 강지찬과 자버렸다고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강지찬은 그녀의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왔다.넓은 어깨에 좁은 골반, 모두가 말하는 이상적인 몸매였지만 지금 유진의 눈에는 등에 가득한 붉은 손자국밖에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손에 집히는 대로 샤워 타올을 집어 허리춤에 묶은 강지찬이 확 커튼을 열어젖히자 방이 환해지며 유진의 엉망이 된 몰골이 드러났다.“왜 그랬어요?” 유진은 멘탈을 잡지 못한 채 소리 질렀다. “쓰레기야 당신!”그냥 술만 마시면 된다고 했잖아!강지찬은 조롱의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했다.“한빈은 이미 집에 있을 거예요.”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았다.강지찬은 그녀의 턱을 잡고는 물었다.“당신이 원한 건 다 해줬잖아요. 왜 울어요?”“전... 전 당신이랑...”강지찬이 사악하게 웃었다.“먼저 나랑 자겠다고 찾아왔는데, 들어주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죠?”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이불이 스르르 떨어지며 드러난 뽀얀 가슴팍에는 어젯밤 사랑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강지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떠났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의현이 나오는 지찬을 보고는 음흉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쯧쯧, 독특한 취향이 있었네. 그 많은 여자는 쳐다도 안 보더니 다른 남자 부인이 좋은 거야?”강지찬은 헛웃음을 쳤다. “다른 남자 부인?”“그럼 네 부인이겠냐?” 의현이 훈계를 시작했다.“유진 씨와의 스캔들이 이미 한빈 귀에 들어갔을 거야. 결혼 준비까지 하는 마당에 혼사는 엎어졌다고 봐야겠지.”강지찬이 대꾸하기도 전에 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유진은 두 귀를 의심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제일 화려한 결혼식을 약속하고 그녀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다던 사람이었다. 그 맹세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7년을 바쳐 사랑한 사람이었는데!유진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향한 한빈의 눈빛에서 혐오감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너랑 강지찬 사이의 일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빈의 엄마가 다리를 내려치며 곡소리를 했다.“아이고 망신이야. 넌 강지찬이랑 얼굴도 못 들 일을 저질러놓고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에 들어선 거니?”유진은 한 대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그게 아니라, 저는...”한빈 엄마의 육중한 몸이 그녀에게 덮쳐오더니 단번에 유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옷깃을 찢으려 했다.“변명할 생각 마. 내가 확인해야겠어.”유진은 어젯밤 이미 한바탕 당한 뒤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옷이 찢어지고 엉망진창이 된 백옥같이 뽀얀 피부가 드러났다.한빈의 엄마는 분노에 찬 채 소리 질렀다.“이 천한 년. 내 아들을 두고 바람을 피워?”손을 높게 쳐들며 한 대 칠 기세였다.유진은 이미 이마가 찢어진 상태라 얼굴까지 때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긴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 손으로 옷깃을 움켜쥐고 한빈의 엄마를 밀어내고는 그의 앞으로 달려가 말했다.“한빈아, 네가 가라고 했잖아. 난 널 살리기 위해 그랬어!”“그렇다고 몸까지 내주란 소리는 안 했잖아!” 한빈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질렀다.“나도 남자야! 내 약혼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외간 남자한테 안겨 나갔는데. 너랑 강지찬 사이의 일은 이미 모두가 알게 됐어. 정유진 네가 직접 말해 봐. 넌 내 감정에 미안하지도 않니?”유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를 구하기 위해 견뎌낸 치욕이었다. 약혼자가 되어서 마음 아파하지도, 부드럽게 위로해주지도 않은 채 오히려 그녀를 창피하다고 하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
최의현은 강지찬과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최 씨네 가문은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고 의현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 모두가 학술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그와 동시에 의현은 K그룹의 부대표이기도 했다.한빈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전에 K 그룹과 관계를 맺어볼까 싶어 의현을 공략해봤지만 하도 예측 못 할 성격에 몇 번의 시도에도 번번이 실패했다.소희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의현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앉으세요.”한빈은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의현 씨, 제 사건은 그쪽 변호사께서 이미 끝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의현은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당신들이랑 상관없어요. 저분 모시러 온 거니까.”유진은 자리에 멈칫했다.피범벅이 된 얼굴과 똑같이 핏자국이 진 원피스를 보며 의현은 속으로 스읍 들숨을 쉬었다.‘불쌍하기도 하지. 쯧쯧.’한빈이 가족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의현이 유진을 향해 모시겠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유진 아가씨, 갑시다. 강 대표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한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강지찬이 왜 정유진을 찾아온 거지? 설마 하룻밤 잤다고 못 잊은 거야?순간 자신의 여자를 뺏긴 호구가 된 기분이었다.‘강 대표님’이란 말에 유진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강지찬 이 쓰레기 같은 놈.지금 이 상황 모두 그 자식 때문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휘청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자 대문밖에 주차된 차에 역시나 강지찬이 앉아있었다.이 나쁜 남자는 빳빳이 다림질해 주름 한 점 없는 고급 셔츠를 입은 채 눈앞의 엉망이 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유진이 죽일 기세로 차 문을 열었다.지찬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이마에 머물더니 한심하다는 말투로 입을 뗐다.“약해 빠져서는.”난리를 피우려던 유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지찬이 말을 이었다. “먼저 병원부터 데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고마워한다고요?”
정유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의현은 눈길을 거두며 의문을 털어냈다.“유진 씨한테 일이 생길 거라고 어떻게 알았어? 말도 마,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아주 사람 하나 찢어 죽일 기세였다니까. 쯧쯧, 불쌍하기도 하지.”강지찬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유진이 떠난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의현은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명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우리가 일부러 그 한빈이라는 사람을 도발하면 정말 큰 건 하나 잡을 수 있을까?”한빈의 회사는 K그룹과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요 몇 년 간 공들여 운영한 덕에 어느 정도 이름은 있는 상태였다.강 씨 가문에게 찍힌 걸로도 모자라 강지찬이 자신의 약혼녀까지 범해버렸으니, 낯이란 낯은 다 깎였을 것이다.아마 강지찬이 죽도록 싫겠지.“진 씨가 그래도 수월하게 불어준 덕분이야. 재무 총괄이 장부를 위조했단 것쯤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뒤에서 봐주는 사람 없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조사해봤는데 작년에 와이프랑 아이를 다 해외에 내보냈대.”의현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냈다.“셋째 삼촌이 얼마 전까지도 한빈이란 사람이랑 가깝게 지내던데. 에이프릴 홀에서 꼬박 이틀을 함께 있다가 나오는 걸 누군가가 봤대. 아무리 봐도 뭔가 있지 않아?”“그냥 도발만 해서는 안 되지. 더는 발악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침묵을 지키던 지찬이 두 질문에 한꺼번에 대답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헛짓거리를 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나도 정말 궁금하네.”최의현은 갑자기 딴소리를 시작했다.“제일 불쌍한 건 유진 씨지.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 너랑 한빈 같은 쓰레기를 만나다니 말이야.”강지찬은 자신과 한빈을 동급으로 비교하는 의현이 못마땅했다. ‘어딜 비교하는 거지? 그래도 쓰레기라는 단어는 꽤 흥미로운데.’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차 돌려, 돌아갈 거야.”집 문 앞에 도착한 유진은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몸이 안 좋으신 엄마가 이런 유진의 모습을 보면 크게 놀라실 것이 뻔했다.정 씨 집안은 평범하기 그
유진은 결국 다른 방으로 바꾸지 못했다. 방 씨 아주머니 말로는 다른 남는 방이 없어서라고 했다.‘이 5층짜리 별장에 방이 없다고?’그래도 계속 살 곳이 아니니 일일이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도우미가 과일을 가져다주자 밖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젊은 여자애 같았다.‘강지찬에게 여자는 없다고 했는데, 왜 이 별장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거지?그래, 소문에선 그 나쁜 놈이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했는데, 소문을 믿어선 안 되지.’유진은 문 옆에 선 채로 밖을 내다보자 핑크색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베개를 들고 옆방으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뽀얗고 깜찍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오관이 스물도 채 안 돼 보이는 앳된 아이였다.“들어가겠다고요. 강지찬 침대에서 잘 거예요 꼭!”도련님이 자신의 안방에 다른 이가 들어오는 걸 싫어했기에 도우미들도 어찌할 줄 몰라 진땀을 뺐다.유진은 더는 구경할 마음이 없어 강지찬이 오늘 밤 그녀와 함께 프라임 홀로 가려 하는 이유를 고심했다.상식적으로 강지찬이 한빈을 풀어줬으니 둘 사이의 일은 이미 끝났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밤 지찬이 하려는 행동은 순전히 한빈의 체면을 깎아버리려는 일이었다.왜 이렇게 하려고 하는 걸까? 무슨 목적이 있는 거지?그냥 그녀 대신 복수를 해주려는 걸까?유진은 자신이 그 정도의 존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다섯 시가 되자 메이크업 팀이 도착했고 유진은 수많은 사람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거절할 틈도 없이 인형처럼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지찬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전히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이었다.꽤 격을 차리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넥타이도 없었고 옷깃의 단추를 두 개쯤 푼 채 탐스러운 속살을 살짝 내놓고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지만 절대 손목에 걸려있는 가치가 서울 중심의 호화주택쯤 되는 명품 시계를 자랑할 의도는 없었다.K그룹의 사람들은 강 대표님이 어떤 회의에 참석하든 이런 옷차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
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지아야, 뭐라고?”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농담 아니야. 유한 오빠, 우리 헤...”“안 돼!”온유한이 강지아의 말을 끊었다.“네가 서운한 것은 알아. 하지만 안 돼. 우리 돌아가서 혼인신고 하자. 나 결정했어. 우리 분가해서 살자. 응?”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믿지 않았다.최신애도, 온유한도, 그녀 자신도 믿지 않았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동하민은 얼른 밖으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벽에 기대어 있는 강지아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머리는 축축하고 화장을 지워 안색도 창백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 같았다.“지아야, 일단 옷부터 입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응?”온유한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온몸을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나 건드리지 마!”그녀도 이런 자신에게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온유한의 손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의사인 온유한은 직업 특성상 강지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지아야?”작은 소리로 강지아를 부르자 강지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더니 온유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유한 오빠, 나 방금... 뭐라고 했어?”“괜찮아.”강지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온유한은 이번에 그녀가 격한 반응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다.“우리 지아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야.”온유한의 목소리는 어린 지아를 달래듯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나 강지아는 그의 손을 밀치더니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난 괜찮으니까 오빠는...”강지아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임유희 씨나 찾으러 가.”그 말을 들은 온유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나와 임유희, 아무 사이 아닌 거 알잖아.”온유한은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그 사진들 다... 다...”온유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
강지아는 어른인 최신애가 이런 행동까지 할 줄 몰랐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얼굴은 오렌지 주스 범벅이 되었다.노란 오렌지 주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면서 온몸을 더럽혔다.10여 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지만 오늘만큼 초라한 적이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온유한의 엄마가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강지아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 앞에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 여자가 과연 엄마처럼 그녀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머릿속에 떠올린 장면들이 갑자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가정 교육이 부족하니 내가 네 엄마를 대신해서 가르쳐 주마!”컵을 테이블에 ‘탁’ 놓으며 한마디 외친 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했다.한편, 너무 큰 소란에 주위의 하객들이 잇달아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온유한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자 경은우가 그에게 귀띔했다.“저기 아주머니와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옷을 갈아입고 선캡을 썼기 때문에 경은우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온유한은 순식간에 안색이 나빠졌고 이내 쏜살같이 달려와 강지아를 품에 안았다.“또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온유한이 최신애에게 큰 소리로 묻자 최신애는 강지아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얘가 어른을 어떻게 대했는지 물어봐. 온유한, 난 네 엄마야. 그런데 나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하지만 온유한은 친엄마를 상대할 겨를이 없이 다급하게 강지아의 얼굴을 감쌌다.두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강지아였지만 그 모습이 더더욱 온유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온유한은 마음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차라리 강지아가 큰 소리로 최신애에게 대들고 싸우기를 바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에 대한 마음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휴지가 없는 온유한은 얼른 옷소매로 강지아 얼굴의 오렌지 주스를 닦
온미정의 결혼식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피로연 외에 해변에서 파티도 열었다.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젊은 남녀들이다.최의현은 언제 젊은 미녀를 꼬셨는지 두 사람은 아까부터 함께 술을 마셨다.강지아도 흰색 롱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머리에 선캡을 썼다.햇빛이 딱 좋아서 매우 포근하게 느껴졌다.온유한은 다른 쪽에서 하객들을 대응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들을 뚫고 수시로 눈을 마주쳤다.“온 선생님과 사이가 정말 좋네요.”임유희가 어느새 강지아 옆에 와서 한마디 했다.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임유희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강지아 씨, 왜 그렇게 쳐다봐요?” 임유희가 묻자 강지아가 바로 말했다.“임유희 씨도 유한 오빠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임유희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제가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죄송해요.”어떻게 보면 인정한 셈이다.강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심려를 끼치네요. 이 사람 마음속에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임유희 씨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네요. 주유정이라고 알아요? 임유희 씨는 주유정과 완전히 달라요. 나는 한 번도 주유정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왠지 신경이 쓰이네요.”강지아의 솔직한 한마디에 임유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임유희보다 어린 강지아였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지만 마음은 아주 섬세했다.“주유정 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임유희는 솔직히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거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지난번에 온 선생님이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한 후부터 온 선생님에 대한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강지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임유희 씨는 똑똑한 여자예요.”강지아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임유희는 왠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두세 살 어린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들켰다.역시 여자를 아는 건 여자뿐이다.임유희는 다른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