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혁이는 네 사촌 동생이야. 피가 섞인 친척을 어떻게 아프리카로 보낼 수 있어?”최씨 집안 사람들이 떠나자 최신애는 아들을 원망했다.그러자 온유한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전에 경고했어요. 지아는 내 여자친구라고. 최금혁이 사촌 형인 나를 안중에 두지 않는데 내가 왜 최금혁을 신경 써야 하죠?”“그래도...”“어머니, 최금혁이 어머니 조카라고 해도 지아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예요! 최금혁이 지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내 말이 틀렸어요?”아들의 강경한 태도를 본 최신애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아직 우리 집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한낱 남 때문에 가족을 때려?”“다른 사람이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다른 사람을 건드리는 일 없어요.”“너!”이 일은 결국 최금혁이 먼저 잘못했다. 강지아를 골탕 먹이려던 최신애는 아들의 이런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더 이상 대화를 나누면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최신애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런 상황에서 아들과 다투는 것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속의 답답함을 잠시 누그러뜨렸다.“됐어요. 이 일은 금혁이가 잘못했어요. 이미 벌을 줬으니 일단은 넘어갈게요.”최신애가 한마디 했다.“그래도 최씨 가문은 우리 친척이야.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봐.”온유한이 말했다.“최씨 집안에 맏아들만 있어도 돼요.”최신애는 머뭇거리며 한마디 했다.“금혁이와 주유정...”온유한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 두 사람이 침대에 있었어요.”최신애는 화가 났다.“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주씨 가문에 이런 딸이 있는지 몰랐네. 그런데 무슨 체면으로 우리 앞에서 잘난 척한 거야?”온유한은 최신애를 바라봤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주유정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바로 그의 엄마 때문이라는...그러나 최신애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지찬이가 얘기했어요. 주씨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전에 주씨 가문과 하
주씨 저택을 나온 온유한은 온몸이 홀가분했다.비록 일의 발단이 최신애라고는 하지만 최신애는 결국 그의 어머니이다.강지아에게 이렇게 많은 일들이 생긴 것을 보면서 겉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 미안했다.온유한이 예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너무 가혹하게 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남에게 무자비할 수밖에 없었다.익숙한 디저트 가게 앞을 지나자 온유한이 차를 멈춰 세웠다.이 가게에는 강지아가 즐겨 먹는 망고 케이크가 있다.창문을 통해 보니 케이크가 하나 남았다. 온유한이 손을 내밀기 딱 1초 전, 가느다란 손이 그 케이크를 가리켰다.“저기요, 이 망고 케이크 포장해 주세요.”말을 마친 여자는 그제야 옆에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손을 거두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 그쪽도 필요한가요?”상대방이 확실히 자신보다 1초 빨랐기에 온유한은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드릴게요. 저는 다른 것을 고르면 되니까.”여자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옆에 절친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밀크티를 한 잔씩 들고 있었다.여자 옆에 섰던 절친이 여자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온유한에게도 들렸다.“너무 잘생겼다.”온유한은 돌아서서 다른 빵을 골랐고 계산할 때 또 그 두 여자아이를 만났다.온유한이 계산을 마치고 나왔을 떄 두 여자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아까 케이크를 샀던 여자가 그에게 케이크를 건네주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케이크, 드릴게요.”안경을 낀 온유한은 렌즈 뒤의 눈동자를 반짝였지만 이내 예의 바르게 사양했다.“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샀어요.”“좋아하는 것 같아서요.”그 여자의 말에 온유한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자리를 뜨려 했다.여자의 절친이 옆에서 밀자 그녀는 용기를 내고 말했다.“죄송합니다. 선생님, 혹시 카톡 친구 추가할 수 있을까요?”“아니요.”온유한은 바로 거절했다.“이미 여자친구가 있습니다.”온유한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서자 여자
주유정은 떠나기 전 강지아를 만났다.두 사람은 주유정의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강지아는 화령과 매니저와 같이 갔다. 주유정 같은 미치광이가 마지막에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왔어?”주유정은 발소리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그녀도 방금 도착해서 작업실 벽에 있는 사진을 보고 있었다.그것들은 모두 그녀의 작품이었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들 모두 그녀의 손에서 탄생하여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인생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카키색 롱 니트 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뒷모습은 온화해 보였다.“무슨 일로 나를 찾은 것인데요?”강지아의 물음에 주유정은 그제야 뒤돌아섰다.눈은 마주친 두 사람, 한 사람은 여유로워 보였고 한 사람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강지아, 왜 그렇게 밉살스러운 거야?”주유정의 말에 화령이 두 팔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밉살스러운 게 누군데 그래요? 본인도 알잖아요? 다 자업자득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마세요.”“하...”주유정은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작업실을 둘러보더니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1년도 안 됐어... 야심 차게 돌아왔는데 이런 꼴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강지아, 그러니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그럼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요?”강지아가 되물었다.하지만 주유정도 그녀를 싸우기 위해 부른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진 거 인정할게.”주유정은 가슴을 펴며 말했다.“막강한 가문도, 나를 위해 나서줄 오빠도 없는데 어떡하겠어?”이건 확실히 강지아의 장점이다.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이런 집에서 태어난 것도 자신의 재능이고 안심하고 의지할 오빠가 있는 것도 장점이기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하다.“그런데 뭐?”주유정은 낄낄 웃었다.“네가 아무리 재벌가인 강씨 가문이라고 해도, 너의 오빠가 아무리 대단해도 최신애는 너를 좋아할 리가 없어. 넌 절대 유한 씨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네.”강지
“뭘 하려는 줄 알고 계속 긴장했는데 고작 독설을 퍼붓는 거였네요?”강지아의 매니저는 커피를 마시며 불만을 토로했다.이때 옆에 있던 화령이 한마디 했다.“그런데 말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아. 주유정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 아닐 것 같은데.”강지아는 온유한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 저녁에 약속이 있어? 없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화령이 웃으며 말했다.“왜? 온 선생님이 오늘 파업한대? 밥 안 해주겠대?”“집에 일이 있어서 가서 밥을 먹어야 한대.”세 사람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쇼핑을 실컷 한 뒤 저녁 먹으러 가니 시간이 딱 맞았다.퇴근 후, 온유한이 온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왠지 집안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집에 손님이 있었다.한 남자, 모두가 잘 아는 남자였다.백무영, 영화계의 황제, 연예계에서는 유명 배우로 연기력과 인품 모두 훌륭한 사람이다.여하튼 여러 가지 호평이 있어 입소문이 좋은 남자 연예인 중 한 명이다.백무영은 올해 오십 살이 다 되어가지만 몸매를 잘 관리하고 있어 40대 초반으로 보였다.온미정이 모처럼 잠자코 있었고 온유한이 집에 들어와도 아무도 그에게 그 사람을 소개하지 않았다.집에 갑자기 사람이 하나 늘어 온유한은 잠깐 멈칫했지만 반면 최신애는 매우 열정적으로 웃으며 말했다.“유한아, 빨리 와. 백 선생님을 알지? 우리가 선생님 작품을 자주 보잖아.”온유한은 백무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백무영이 온미정을 쳐다보며 한마디 더 했다.“유한이.”매우 친절한 호칭에 온유한은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최신애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유한아, 백 선생님이 가을이의 아빠야.”온유한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눈썹을 찡그렸다.이 사람이 바로 그의 고모를 오랫동안 힘들게 한 그 남자다.그런데 이 남자가 모두가 알고 있는 백무영일 줄은 몰랐다.온혁진도
백무영은 이번에 정말 청혼하러 왔다.게다가 상당히 정식적으로 했고 혼수 명세서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신혼집까지 마련해 놓았다.신혼집을 사놓은 것은 온미정도 몰랐다.최대한 마음을 다했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온미정을 홀대하지 않았다.그제야 온혁진의 안색이 좀 좋아졌다.가장 기뻐하는 것은 역시 최신애였다. 고모가 마치 며느리라도 된 것처럼 선물세트를 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아이고, 역시 여자 측이라 받는 게 많네요. 드레스마저 다 준비했어요. 무영 씨가 너무 꼼꼼해서 우리 온씨 가문에서 할 일이 없어요.”그러자 온혁진이 말했다.“그건 안 돼. 미정이는 내 유일한 동생이야. 해줘야 할 것들 하나도 빼놓아서는 안 돼. 미정이 혼수는 내가 진작부터 준비해 두었어.”최신애는 어이가 없었다.“왜 그렇게 말해요. 그냥 무영 씨가 꼼꼼하다고 칭찬하는 거잖아요? 우리 온씨 집안도 당연히 최대한 예의를 차려야죠. 새언니인 내가 언제 인색하게 굴었어요?”온미정이 드디어 시집을 간다고 하자 최신애는 고민이 말끔히 사라졌다.사실 온미정이라는 사람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일에 별로 트집을 잡지도 않고 통도 크다. 다만 성격이 너무 솔직해서 최신애와 잘 맞지 않았다.특히 온유한에 대해 온미정이 늘 온유한의 편을 들었기에 친엄마가 마치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온미정이 시집을 가면 앞으로 집안의 모든 일을 최신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생각만 해도 가슴이 후련하다.온미정이 곧 시집간다는 생각에 최신애는 그 어느 때보다 통이 크게 행동했다.“내가 처음 온씨 가문에 시집올 때, 미정 씨는 어린아이였죠. 내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우리가 비록 시누이 올케 사이지만 모녀나 다름없었어요. 집에 할머니가 미정 씨에게 남겨주신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 몇 년 사이 더 추가 했으니 나중에 혼수로 다 가져가면 될 것 같아요.”이 말을 들으니 온미정은 저도 모르게 최신애가
여자는 온유한을 본 순간 눈에서 빛이 나더니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온유한은 힐끗 쳐다본 뒤 백무영 옆에 걸터앉았다.눈을 깜박거리던 그 여자는 그제야 온유한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어색하게 웃었고 눈빛에는 서운함이 스쳤다.“유한아.”최신애는 웃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너에게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임유희라고 해. 대학교 선생님인데 프랑스어를 가르쳐.”말을 마친 최신애는 웃으며 임유희를 향해 말했다.“유희야, 이 사람이 바로 우리 유한이야. 병원에서 일해.”온유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 반응이 없자 임유희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어머니, 전에 온 선생님과 만난 적이 있어요.”최신애는 더욱 기뻤다.“이미 아는 사이였어?”“아는 사이는 아니고 전에 디저트 가게에서 만났어요. 하지만 온 선생님이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임유희가 서운해하자 최신애는 얼른 말했다.“신경 쓰지 마. 워낙 일이 바빠서 그래.”최정애는 원망하는 눈빛으로 온유한에게 여러 번 눈짓을 했다.“인사 안 하고 뭘 멍하니 있어?”말을 마친 최신애는 또 반갑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너희 두 사람 정말 인연인 것 같아. 이름마저 비슷해.”최신애는 임유희가 이미 며느리라도 된 것처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백무영까지 있는 자리에서 온유한은 정말 어머니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최신애는 오늘 집에 중요한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임유희를 부른 것이다.온유한은 최대한 화를 참으며 최신애를 바라보고 말했다.“어머니, 임유희 씨가 우리 집 친척이에요? 우리 집 친척들 중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온유한은 경고하는 눈빛으로 최신애를 바라봤다. 그저 자기 어머니가 여기서 멈추길 바랐다.최신애는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강지아에 비하면 임유희가 훨씬 더 좋다.혹시라도 주유정과 같은 민망한 상황이 생길까 봐 최신애는 사람을 시켜 임유희의 뒷조사를 했고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샅샅이 뒤
“거기 서!”겨우 뒤따라온 최신애는 당장이라도 온유한에게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듯했다.마당에 다른 사람도 없으니 온유한도 최신애가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어머니, 나 진짜 어머니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일, 어머니가 말한 대로이길 바랄게요.”그 말에 최신애는 가슴이 답답했다.“무슨 뜻이야? 설마 나와 싸우자는 거야? 유희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다 알아봤어. 같이 밥도 먹고 쇼핑도 해봤어. 이 엄마를 믿어. 이번에는 절대 틀림없어.”온유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어머니와 지아, 두 사람 중에 꼭 한 사람을 선택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요?”“너!”그 말에 최신애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네 엄마야, 열 달 동안 내 배 속에서 키우고 내 배 아파서 난 친엄마라고! 어떻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어?”그러자 온유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지아만 있으면 돼요. 아무리 좋은 여자가 있어도 나와는 상관없어요.”최신애는 화가 나서 가슴을 쳤다.“지금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아, 지아. 넌 지아밖에 몰라?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있니? 강지아는 10년 넘게 바보로 살았어. 그런 여자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어? 나와 네 아버지에게 자식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넌 어째서 조금도 책임감이 없니?”온유한은 어이가 없었다.“어머니, 우리는 병원을 하는 집안이에요. 지아가 건강한지 아닌지는 내가 더 잘 알아요. 게다가 지나간 일들을 나는 신경 안 써요.”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유희와 한 번 만나보는 것은 어때? 전에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어쩌면 지아를 그저 여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여동생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강지아와 함께 있을 때마다 온유한은 그녀를 간절히 원했다. 그 감정은 결코 남매의 정이 아니었다.“어머니, 다시 한번 정확히 얘기할게요. 나는 강지아만 있으면 돼요. 만약 계속 이렇게 하시면 그저 불효한 이 아
“오늘 즐거웠어?”온유한이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물었다.“즐거웠어. 쓸데없는 것들 잔뜩 샀어.”뒷좌석에는 오늘 산 물건들이 들어있는 종이봉투가 십여 개 있었다.“참, 오빠 것도 샀어. 뭔지 맞춰봐.”“넥타이?”차의 시동을 건 온유한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면 벨트? 커프스? 옷? 축구화?”강지아는 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 듯했다.“커프스와 운동화는 맞혔어. 그리고 더 있어.”“더 있다고? 면도기? 향수?”말을 하던 온유한은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설마 수술할 메스를 산 것은 아니지?”“메스는 없는데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 나중에 어떤 선물을 줄지 생각나지 않을 때 참고할게.”“그래서 도대체 뭔데?”온유한이 궁금해하자 강지아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윙크하며 말했다.“속... 옷.”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내가 무슨 사이즈 입는지는 알고?”“그걸 모를 리가 없지. 우리 집 베란다에 널려 있잖아.”그때 마침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었고 온유한은 차를 세운 뒤 또다시 강지아의 목을 잡고 진하게 키스를 했다.밤이었지만 길에 차가 많았다.두 사람이 눈을 감은 채 뜨거운 키스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경적소리가 났다.강지아가 온유한을 밀치며 말했다.“얼른 운전해, 뒤에서 재촉하잖아.”온유한은 빙긋 웃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두 사람은 가는 길 내내 빨간 신호등마다 멈춰 서서 키스를 했다.집에 들어간 후 오늘 산 종이봉투가 바닥에 흩어져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온유한은 강지아를 안은 채 그렇게 두 사람은 현관에서 침실까지 키스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두 사람 모두 넓은 소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강지아는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얇은 니트를 입고 있었고 살짝 잡아당기니 옷이 바로 흘러내렸다.머리를 풀어헤친 요정 같은 그녀의 모습은 너무 매력적이었다.두 사람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고 그렇게 소파에 엉킨 채 끊임없이 키스를 했다.온유한의 안경을 벗긴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괜찮아?”강지아의 손을 잡은 화령은 그녀의 손이 차가운 것을 발견했다.“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뒤돌아서는 순간 때마침 쟁반 가득 술을 들고 오는 웨이터와 부딪혔다.와르르, 술잔이 그녀의 치마에 쏟아졌다.갑작스런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저도 모르게 고래를 돌린 온유한은 웨이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지아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가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강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치워요.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안 되니까.”“네,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화령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와서 강지아의 치마를 닦아줬다.“옷 갈아입으러 같이 가자.”“괜찮아. 나 혼자 가면 돼. 넌 여기 유리 파편들 깨끗이 치우는 것 좀 봐줘.”강지아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온유한은 그녀의 발목에 문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문신이 있던 자리는 피부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강지아는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치마를 준비해 놓았기에 갈아입을 수 있었다.술이 엎질러져 몸까지 끈적끈적해 샤워를 해야 했다.옷을 다 벗고 나서야 타투한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진수혁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나와 방수밴드를 찾았다.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동하민인 줄 알고 한마디 했다.“치마는 세탁이 안 될 것 같으니 매장에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냥 버려.”방 안의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서랍에서 방수밴드를 꺼내 들고 돌아선 순간 강지아는 소파에 앉은 사람이 동하민이 아니라 온유한인 것을 발견했다.강지아는 흠칫 놀랐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정신을 차린 강지아는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왜... 여기 있어?”“타투 지웠어?”강지아는 자신의 종아리를 한 번 본 뒤 말했다.“응, 지웠어.”온유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샤워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